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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가정, 아름다운 언약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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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어느 날 미국의 한 시민이 알제리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후 미국 정부는 군함을 보내 이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했습니다.
유해가 도착한 뉴욕항구에는 뉴욕시가 생긴 이래 최고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대통령을 비롯한 국무위원,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유해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유명한 정치인이나 연예인도 아니었고 저명한 학자도 유능한 경제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평범한 시민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저들의 마음과 발걸음을 이 곳에 오게 한 것일까요
그가 작사한 한곡의 노래 때문이었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긴 터널과도 같은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를 갖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내 집 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 뿐이리. ” 홈 홈 스윗트 홈의 작사자인 존 하워드 페인의 시신이 뉴욕 항에 입항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가정은 인간의 가장 그리운 고향입니다. 돌아가야 할 고향입니다. 힘을 주고 용기를 주며 쉼을 주는 안식처와 같습니다.
우리는 5월을 ‘사랑의 달’이며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어버이와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인간애를 나누는 사랑의 계절입니다. 교회력으로 보면 부활주일, 성령강림주일, 예수님 승천주일, 삼위일체 주일과 같이 예수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계절입니다. 사랑을 노래하며 마음을 열고 다가서서 하나가 되고 꽃들도 나무들도 사랑의 옷을 입고 기쁨을 선사하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5월엔 새 가정을 탄생시키는 결혼식이 가장 많다고 하지요. 남녀가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가정, 성숙하고 건강한 가정을 꾸리겠노라 힘찬 새 출발을 합니다.
성경은 가정의 기원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가르쳐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사역 가운데 가장 먼저 세우신 기관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몸과 마음의 평안과 쉼을 누릴 수 있는 곳이 가정이라면 교회는 영혼의 안식처요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처소입니다. 최초의 교회도 가정 교회였고, 교회는 가정에서 출발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루었던 가정은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였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가정 해체’입니다. 독신자가 늘고, 출생 인구가 줄고 있고, 외로움 속에 살아가는 독거노인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혼을 비롯한 ‘탈가정 문화’가 급속히 퍼지고 있습니다. 결혼문화에 있어서도 계약결혼, 위장결혼, 심지어 학생들의 동거 문화와 같은 풍속들이 유입되면서 급격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 만큼 가정에 대한 가치가 약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도 건강하고 나아가서는 사회도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가정이 병들면 교회도 병들고 사회도 병듭니다. 범죄심리학에 따르면, 가정의 상실, 부모로부터의 학대와 무관심, 가정 해체가 범죄의 중요한 심리적 요인으로 밝혀졌습니다. 탈선 청소년, 가출 청소년, 심지어는 가출 부모가 생기면서 심각한 후유증증과 더불어 사회적인 문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가정의 회복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가정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구약 말라기 2장 14절에서 선지자는 아내를 가리켜 말하길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세한 아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 언약입니다. Covenant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베리트’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자르다’ ‘가르다’란 의미로 짐승을 반으로 갈라놓고 마주 보도록 한 다음 고기 사이를 계약 당사자가 지나감으로서 맺어지는 약속을 뜻합니다. 여기서 언약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계약과 다릅니다. 계약은 쌍방간에 조건적이고 파기 가능한 관계를 말합니다. 상대방의 행위에 따라서 언제든지 파기 될 수 있는 조건적인 약속입니다.
그러나 가족관계, 결혼관계는 계약이 아니라 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약속의 증표인 언약과 같은 뜻입니다. 한 번의 언약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종종 언약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언약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입니다. 가족이 내게 화를 내고 손해를 끼쳤다 할지라도, 가족이 나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할지라도 언약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신의를 끝까지 지키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이 따르는 것입니다.
구약 본문을 보면, 당시에 언약의 파괴자들이 있었습니다. 즉 결혼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쉽게 가정을 저버렸습니다. 아내들을 버렸습니다. 유다 백성은 언약의 정신을 잃어 버렸습니다. 궤사를 행했습니다. 궤사란 배신행위를 말합니다. 유대 민족의 궤사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이방신의 딸들과 결혼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아내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배신 행위였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야훼께서 너희의 몸과 마음을 묶으실 때, 무엇을 바라셨겠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후손을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 변심하여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도록 하여라. ”(공동번역) 이것은 당시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정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공동체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가정은 사랑과 희생 그리고 책임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가꾸어 나가는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약만 체결했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책임 윤리’라고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들을 바르게 수행하고 감당해 내는 사명을 말합니다.
신약 골로새서 3장 18-21절은 가정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기 위한 가족 구성원의 본분과 책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8절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종이라는 단어는 ‘휫포’와 ‘탓소’의 합성어로서 ‘아래’와 ‘둔다’라는 뜻을 합하여 자신을 타인의 밑에 두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아내로서 남편에 대한 순종은 여호와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는데서 오는 자발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강압적인 순종이 아니라 자원해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은 에베소서 5:24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5:22-23에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구약시대의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 사회상을 살펴보면, 여성은 남편의 소유물이었고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물로 취급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새 사람을 입은 성도의 가정생활은 남편과 아내의 본분이 바르게 나타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피차간에 서로에 대한 신뢰와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기꺼이 그에게 복종하듯 서로를 사랑하며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품성과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19절에서는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주께서 값없이 자기 백성을 사랑한 것처럼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남편에게 주어진 권위는 희생적인 사랑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 사고로 왜곡된 권위의식을 지적하고 있는 말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인격적인 면에서나 존재론적인 면에서 동등한 존재입니다. 상호 보완적이며 동반자적인 관계입니다. 가족은 고달픈 세상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격려하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서로 피차간에 주께 하듯 복종하고 전적으로 신뢰하고 아무런 대가없이 희생하며 사랑하는 공동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가족은 언제나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동행하며 인생의 힘든 산봉우리를 넘고, 파도를 헤치며 사는 공동체입니다. 인생의 고락을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아브라함도 가족들과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낯선 땅을 향하여 순례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삭도 가족과 더불어 고달픈 이민의 길을 떠났습니다. 야곱의 가족들도 애굽을 향해서 허기진 배를 안고 함께 떠났습니다.
21절에서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본분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라고 해서 비이성적이고 부당한 요구로 자녀를 격노케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식은 물건이나 소유물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존경과 순종을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권위자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인 자녀를 주 안에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올바로 키워야 할 의무를 부여받은 대리자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무리하게 다그치지 말고 주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녀들을 양육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20절에서는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신뢰하면서 순종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부모님들의 희생적인 사랑과 노고을 감사하면서 노후의 삶을 잘 감당해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 윤리적 삶이 따르는 것입니다. 2050년이 되면 우리나라가 노령화 사회가 된다고 정부에서 발표했습니다. 전 국민의 25%가 노년 계층으로 확산되면서 노령화에 따른 치료, 생활의 문제가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될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노령화의 따른 진료혜택, 사회복지 등에 국민적인 관심과 정부적인 입안 사항으로 구체적인 제도와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국민들의 참여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건강한 가정인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얼마 전 산악인 박영석씨가 북극점 정복의 신화를 이룬 감동적인 이야기가 뉴스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8천 미터급 히말라야 14개의 봉우리를 완등하고 지구 3극점을 정복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를 괴롭힌 것은 북극의 악천후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북극점을 밟았습니다. ”
세상이라는 험준한 산봉우리를 넘어가노라면 부딪쳐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고, 복잡다단한 가정사가 계속됩니다. 하나의 어려움을 지나치고나면 또 다른 어려움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병고, 실직, 자녀 문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우리네 인생은 많은 도전을 받고 삽니다. 성도들이 넘어야 할 산봉우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 숫한 어려움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가정을 통해서 극복해 나갈 때, 우리는 비로서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에 성공한 사람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들입니다. 실패한 사람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사람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서 가정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이 흔들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가정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문제의 원인을 다른 것에서 찾지 마십시오.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지 못한데서 가정의 위기가 옵니다. 내가 기도하지 못한데서 부부갈등이 옵니다. 내가 아내와 남편을 용서하지 못한데서 가정의 문제가 옵니다. 자녀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보지 못하고 내 소유로 여기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주신 언약의 가정을 포기하고 떠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내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주신 언약 아래서 자신을 정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극복하지 않으면 가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프랑소아 밀레의 만종을 꼽을 수 있습니다. 끝없이 넓은 벌판에서 하루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무렵,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집니다. 하루의 일손을 거두고 조용히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와 함께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주신 아름다운 가정, 건강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가정은 파기할 수 없는 언약의 공동체임을 깨닫고 어떤 어려움도 함께 지고 가는 성도들이 되셔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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