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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자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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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가정의 달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나는 부모-자녀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전하려고 합습니다.
1. 자녀: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부모를 공경하라.
자식 된 입장에서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부모의 사랑을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의 마음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입장의 차이’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부모가 되었다는 것, 그래서 그 역할을 감당하는 동안, 더 큰 사랑을 하게 되고, 희생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수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다고 합니다. 정말 하늘과 바다가 높고 넓기는 해도, 부모의 사랑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옛날에나 하늘과 바다였지, 지금은 비행기로, 배로 하늘과 바다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마음을 제대로 다 헤아리는 자식은 없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조상 제사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부모를 몰라보는 종교다!” 그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기독교 핍박의 몇 가지 큰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기독교처럼 부모공경을 가르치는 종교가 없습니다. 부모는 살아 있을 때 공경하는 것입니다. 죽은 부모 제사하는 것은 쉽습니다. 마음 크게 쓸 일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부모를 모시는 것이 어렵습니다.
부모는 공경 받을 자격이 없어 보여도 공경해야 합니다. 아무리 못났어도 부모는 부모입니다. 부모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조건’이 달리지 않았습니다. 무조건입니다.
십계명 중 제5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 출애굽기 20:12.
십계명은 600여 가지 율법을 총정리 한 것입니다. 처음 네 가지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고, 나머지 여섯 가지는 사람에 대한 계명입니다. 여섯 가지 중 첫 번째가 부모 공경입니다. 이 제5계명이 오늘 에베소서 6장 본문 속에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모에 대한 사랑을 참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면서 “어차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으니 부모에게는 안 해도 된다. ”고 생각하는 것을 오히려 율법을 범했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하지만, 동시에 부모도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만 잘 해 드리고 부모를 무시하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모에게 잘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해야 합니다.
이 말은, 주님의 뜻 안에서 부모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합니다.
1. 부모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거나 순종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합니까
2. 부모 중에 한분은 영적이고, 다른 한쪽은 세속적일 때 어떻게 합니까
1. 부모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할 때, 괴롭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먼저 따르면서 그 제한된 범위 안에서 부모에게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부모도 결국 그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 뜻을 깨닫게 될 때, 자식이 한 것이 결국 진정한 공경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대부분이 “부모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2. 부모 가운데 한 분만 영적일 때, 역시 괴롭지만 영적인 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세속적인 분도 훗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모 두 분이 다 영적인 가정은 참 복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자녀들이 눈치 볼 일이 없습니다. 오늘 부모 된 우리는 이런 점에서 ‘영적 밸런스’를 맞출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영적 밸런스 없으면 자녀들을 ‘고민’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는 그 뜻이 “성 프란시스”입니다. 프란체스코라고도 발음합니다. 중세 기독교의 중요한 인물의 이름에서 땄습니다.
성 프란시스(Francisco d' Assisi, 1182-1226), 성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소도시 아시시(Assisi)에서 태어났습니다. 44세에 이 세상을 떠났으니까, 오래 살지는 못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사람이므로, 가톨릭 사람이라고 구분해 버릴 수 없습니다. 개신교회도 프란체스코의 영성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교회가 세속적 권력까지 장악했던 때였습니다. 겸손하고 깨끗한 가난, 즉 청빈을 실천하며 섬기는 생활을 살아갔던 프란체스코는 당시 교회의 흐름을 따른 것이 아니라,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삐에트로 베르나르도(Pietro Bernardone)는 부유한 포목상이었습니다. 어머니 삐까는 신앙이 깊고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프란시스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여행 중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으로 기르고 싶었습니다. 조용하고 신앙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그 이름 말고 “프랑스 사람”이라는 뜻으로 “프란체스코”로 불렀습니다. 여기저기 다녀본 중에 프랑스가 제일 살기 좋았던 모양입니다. 프랑스와 무역관계가 있었던 것도 이유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귀족 집안의 아들답게 사회적으로 훌륭하게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값비싼 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부잣집 자녀들과만 사귀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걱정하며 매일 기도했습니다.
1202년, 20세가 되던 해 군인으로 페루지(뻬루지아) 원정에 참전했습니다. 포로로 잡혀 1년 가량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그 생활의 후유증으로 중병에 걸려 어머니의 간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난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추격을 받아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흰 옷 입은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났습니다. 어머니에게 꿈 이야기를 하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눈물 흘리면서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그 일 후에 프란체스코는 달라졌습니다. (사람이 바뀌는 것은 이런 ‘계기’가 있습니다. ) 그의 나이 24세쯤 되었을 때부터 그는 더 이상 부유한 사람들 모임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유혹을 피해 아시시 근처의 동굴에서 기도하며 생활했습니다. 어느 날 동굴 속에서 기도하던 중에,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를 통회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우연히 나병 환자들을 만났는데, 본능적으로 피해가고 싶었지만 곧바로 말에서 내려와 그들을 포옹하고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변화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지켜보았습니다. 제대로 가야 할 길로 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프란체스코의 경우, 어머니의 기도가 응답되어 그의 삶이 예수님을 닮게 되었습니다.
통계로() 보면 어머니가 영적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교회에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많지 않아요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어머니를 택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잠간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 중에 하와가 먼저 시험에 들었습니다.
노아는 아내보다 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우열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이삭의 경우는 리브가가 영적으로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의 경우는 야곱이 아내들보다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의 아내는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의 경우, 그 아내 십보라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지만, 모세가 워낙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이기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입장: 자녀의 영적 성장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자존심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자존심으로 교육하고, 자존심으로 길러내면, 결국 자기 마음에 맞는 자녀가 되겠지만, 행복하지 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자녀여야 합니다. “자존심을 내려놓는 부모,” 그가 좋은 부모입니다.
부모에 대한 좋은 기억을 눈물과 함께 가지는 자녀는, 자존심을 스스로 깨뜨리고 자녀를 기른 부모의 경우입니다. 자존심을 끝까지 지킨 부모를 마음 깊이 기억하는 자녀는 없습니다.
어떤 가난한 가정 이야기입니다. 보리밥 도시락이 창피해서 먹지 않고 도로 가져와 어머니 앞에 던졌습니다. 어머니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땅바닥에 흩어진 밥을 손으로 모았습니다. 부엌에 쭈그려 앉아 물로 씻어내서, 손으로 떠먹었습니다. 딸이 그걸 훔쳐보았습니다. 일평생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마태복음 15:21-28 이야기. 어떤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딸이 귀신 들려서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그치지 않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죽하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 여자가 귀찮게 합니다. 보내 주시지요. ” 했을까요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 물론 이 말씀은 이 여자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여자가 예수님 앞에 와서 절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간구했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옳으냐 나는 그럴 수 없다!”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이방 여자인 그를 ‘개’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 여자의 딸까지 ‘개’로 포함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개 “그만 두시오!” 하고 돌아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달랐습니다. 자식을 살리려고 ‘개’와 동일시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들어 보십시오. “주여 옳으신 말씀입니다. 자녀가 더 중요하지요.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이 어머니는 딸을 고칠 수 있다면 자존심 따위는 땅바닥에 팽개쳐져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영적인 어머니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를 기를 수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성장을 원한다면, 부모는 물불을 가리지 말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는 자존심을 내려놓았습니다. 새벽예배에 나와 기도하는 성도들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대부분 자녀를 위한 뜨거운 눈물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해 주면서, 내 부모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2. 부모: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 것
모든 부모가 ‘자동적으로’ 부모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되어서 잘못도 많이 하고 실수도 많습니다. 부모 된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자녀들이 살아가면서 무서운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사탕 사 준다고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정작 가정 안에서 자녀들이 받는 엄청난 고통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대개 부모가 자녀들을 괴롭힙니다.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존재, 가장 파괴적인 존재는 따지고 보면 부모 자신인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신문에 나는 것은 대개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오죽하면 신문에 다 실리겠습니까 두 가지만 소개합니다.
1. 2006년 3월 19일자 Los Angeles Times 제1면 톱뉴스입니다. 스탭 기자 에드문드 샌더스(Edmund Sanders)가 쓴 타이틀은 이렇습니다: In Bad Times, Girls are an Asset: Child marriages rising with Kenya's drought. (위기의 때 여자들은 재산이다: 케냐의 가뭄에 늘어나는 어린이 결혼들. ) 이어지는 기사를 요약 발췌 소개합니다.
Soitanae Ole Kyologo는 그의 보물인 소들이 가뭄으로 죽어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50마리의 소떼 중에 겨우 두 마리만 살아남았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 급박해진 그는 부의 유일한 자원에 눈길을 돌렸다: 올해 여덟 살과 아홉 살 된 두 딸들이었다. 올해 47세인 Massai father는 두 딸들을 지역의 남자들과 결혼시키기로 했는데, 그가 대신 받을 것은 한 아이 당 세 마리의 소와 담요 몇 장과 현금 얼마였다.
이것은 동부 아프리카를 강타한 가뭄으로 생겨난 슬픈 이야기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수백만 명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케냐에 있는 어떤 어린이 보호기관은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어린이들 수가 크게 늘고 있다고 했다. 대개는 잃어버린 가축으로 인한 재산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특히 Massai족에서 많이 발생한다고 했다. 이 남부 케냐 시골 지역의 아버지들이 그들의 딸들의 미래를 bridal dowries를 보고 팔아넘기고 있는데, 그런 아버지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홉 살 난 Timpian Soitanae가 말했다: “가뭄 때문에 저의 아버지는 제가 더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 “아버지는 나를 어디 보내 버리려고 해요. ”
그 여자 아이들의 genital excision, a precursor to marriage 3일 전에 경찰은 이들을 격리시켰다. Timpian과 그녀의 동생 Suya는 결혼이나 소년이라는 몇 개의 단어를 듣자 낄낄거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Suya가 말했다: “저는 결혼하기에 너무 어려요. ” 겨우 인형 사이즈의 손가락으로 당황스런 웃음을 가리며 웃었다.
Soitance는 시내에서 야간경비로 매달 70불을 번다. 그러나 그의 주 수입은 소들이다. 우유, 고기, 그리고 피까지 얻는다. 그는 말한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소는 전부입니다. ” Masai 문화에서 한 남자의 자존심과 아이덴티티는 몇 마리의 소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조기결혼과 여성할례(genital excision)를 금지하는 법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위들은 널리 시행되고 있다. 특히 마사이(Masai)족 같은 부족에게서 많이 발생한다. 유목 생활하는 그들을 법으로 통제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어린이 보호기관은 작년 가을의 가뭄으로 어린아이 결혼이 엄청나게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작년 12월의 가뭄으로 케냐, 에디오피아, 소말리아, 그리고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 적어도 6백만 명이 위기 중이다. 이번 4월 우기 때도 충분한 비가 예상되지 않는다. 비상식량이 긴급하게 공급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생명은 보장할 수 없다.
Kajiado에 있는 African Inland Church Girls Rescue Center 책임자 Nangurai는 “어린 소녀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고 했다. “아버지들은 딸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만큼 성장하기 전에 결혼시켜 버리려고 한다. ” Nangurai와 정부 관련기관 종사자들은 지난 달 얼마나 많은 조기결혼이 이뤄졌는지 정확한 통계를 내기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올해 아홉 살 난 Naipei Melita는 아버지가 자기를 60대 남자와 결혼시키려 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도망쳤다. 3년 전, 오히려 덜 심각한 가뭄 때, 그녀의 언니가 열 살의 나이로 소 다섯 마리와 얼마간의 권리를 받고 시집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다른 언니는 그 같은 운명을 피해 가출해 버렸다.
Los Angeles Times는 이 기사에 Sunday Preview 판의 거의 한 페이지를 할애했습니다.
2. 세 자녀를 바다에 던진 사람이 그제 신문에 났습니다. 얼굴을 보니 평범하게 생겼던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정신이 정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셨습니다. 아비들, 여기는 어미들도 포함됩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 깊이 새겨야 합니다.
앞서 예로 든 두 가지 극단적 상황이 아니라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아이들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쯤은 눈감아줄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유교 관습에 젖은 한국 사람들은 아이들의 감정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주지 않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노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쪼끄만 게 무슨 자존심이 있어”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아이들이 부모에 대하여 원망하는 마음이나 분노를 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부모 된 입장에서, 우리는 먼저 자녀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아이들에게 너무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아이들 가슴 속에 피멍이 든 상처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3. 부모-자녀의 화해
말라기 4장은 구약성경의 마지막입니다. 엘리야가 와서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들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즉 화해가 되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주로 그 땅을 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아버지들”은 “부모들”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부모들과 자녀들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화해해야 합니다.
항상 자녀만 “잘못했습니다!” 하고 용서를 빌게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모가 그런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이치를 따져 보아도, 하루라도 더 산 부모가 먼저 잘못을 깨닫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녀에게 ‘아빠가 잘못했다!’ ‘엄마의 실수야. 용서해 다오. ’ 이런 말을 하지 못하는 부모는 정상이 아닙니다.
세대 간의 화해.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끝내 “여호와 하나님과의 화해”로 이어집니다. “아버지들”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의 권위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부모건 자녀건, 오늘 여기 앉아서 예배드리는 우리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부모라면, 자녀들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분노하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잘못했다면 용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부모 되시기 바랍니다. 자녀의 영적인 필요를 깊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 가운데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아버지,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자녀라면,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여, 우리 부모님께 잘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물질이 없어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분명히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마음이 먼저입니다. 물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어 주실 것입니다.
금문인 여러분의 가정에는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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