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가정교회여 부흥하라
본문
"손님! 집이 뭐지요"하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cf가 요즘 방송을 타고 있습니다.
저는 조금 갑작스럽지만 오늘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수성가족 여러분! 가정이 뭐지요"
흔히들 하는 말 가운데, '물질이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믿지만 돈으로 책을 살지라도 지혜는 살 수 없고,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고, 돈으로 좋은 침대는 살 수 있지만 달콤한 잠은 살 수 없습니다. '는 말이 있습니다.
분명,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면 모두 다 가정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가정은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사랑이고, 진리이며 섬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래면 박카스광고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일이 있습니다.
이른 새벽 환경미화원이 쓰레기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그 리어카 뒤에는 그 아들이 밀어주는 모습이 비추입니다.
아버지가 뒤돌아보며 말합니다.
"얘야, 힘들지 않니"
"뭘요, 아버지는 매일 하시는 일인걸요. "
이 장면에 등장한 아버지와 아들이 실제 부자지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그 가정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적시는 명장면이 되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당시 서울 강동구청 소속 환경미화원 박선치씨 이고, 아들은 대학생이 된 박상호군이었습니다.
박선치씨는 시장에서 의류 업을 하다가 사업에 실패하고, 겨우 환경미화원으로 취직이 되어, 어려운 가정 살림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 상호가 고2때 공부도 안하고 점점 반항심만 커지고 속을 썩여서, 이 아버지는 삼남매를 불러 앉히고 자녀들에게 하소연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구청공무원이라고만 하여서 그런줄 말 알고 있던 삼남매는, 아버지가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 자시들을 뒷바라지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놀랍니다.
그날 밤 온 식구가 끌어안고 울고 특히 큰 아들 상호가 다시 마음을 잡고 공부하여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생명의 양식은 교회에서도 넉넉히 먹을 수 있고 세끼 식사는 하숙집에서도 식당에서도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환경 미화원 부자간에 간직하고 있는 서로간의 존경과 사랑은 교회가 맛보게 하기 힘든 하숙집에선 느낄 수 없는 "가정만의 고유기능"인 것입니다.
행복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마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가정 안에서 찾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맞는 원리입니다.
목사의 삶에 가정의 행복이 충만하고 장로님의 삶에 가정의 행복이 묻어나고 온 성도의 삶에 가정 행복이 자리하고 있으면 그 교회는 천국 같은 교회, 가정교회를 이룰 수 있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분은 행복지수가 IQ나 EQ를 높여서가 아니고 HQ(Home Quotient 가정지수)가 높아야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부부가 함께 텃밭을 가꾸고 장보러 가고, 운동하고, 보모와 자녀가 함께 집안 대청소도 하고 산책도 하고 책 고르러 서점에 가면 HQ는 점점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말 한마디 진지하게 나눌 시간도 없이 살아간다고 하면 '가정지수'는 계속 하락하고 행복지수도 동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할'고 외치기 전에 오랜만에 엄마 무릎위에 머리베게 하고 귀를 파주라, '당신 요즘 예전 같지 않다고 사랑이 식었다'고 투정하기 전에 설거지 하는 아내를 안아주고 피곤하여 지쳐 잠들어 있는 남편얼굴이라도 쓰다듬어 주라 저는 오늘 너무나 잘 알려진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이 일어나 갈릴리 가나 혼인잔칫집에서 우리 시대의 가정이 되살아날 길을 찾아보길 원합니다.
이 잔칫집에서 생긴 문제는 "포도주" 즉 잔칫날 흥을 돋우고 그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술'이 "모자란지라" 모자라는 문제 급기야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이르기를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3)', 없는 문제였습니다.
가정을 이루는 의미 있는 날, 뭔가 중요한 것이 없거나 모자라게 된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현대 가정의 위기는 "결핍" 과 "부족"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정이 가정 되려면 '부부간의 사랑'과 '신뢰' '경제적 여건' '자손의 번성' '안정된 삶'등 기본적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 무엇하나라도 결핍 부족이 생기면 가정은 여지없이 휘청거리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가나 혼인 잔칫집에는 "술(포도주)"이 부족하였습니다.
즉 즐거움 거리가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이 가정에도 즐거움 거리가 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은 간혹 "술"을 성령과 비교하곤 하였습니다.
사사기 9장에는 아비멜렉이 간교한 계략으로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일을 비판하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거기 나무들이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에게 각각 '우리 왕이 되라'고 청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포도나무가 말하길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왕이 되겠다고 나서겠느냐"며 거절합니다.
포도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새 술"로 상징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성령 충만을 받은 오순절 사건의 주인공들을 보고 사람들이 '저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며 성령 충만을 술 취함과 연계 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마시는 알코올로서의 술은 육체를 이성을 마비시키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의 술은 우리 영혼에 '즐거움'을 주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 '즐거움의 부족'은 위기를 부릅니다.
사랑의 기쁨이 고갈된 가정, 서로 감사가 식어진 가정 찬양도 즐거움도 사라진 가정은 얼마나 척박한 가정이겠습니까
완연한 사막을 맛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 없는 가정 예수 없는 교회는 사막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결핍과 부족의 가정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처럼 오늘 우리 가정에 다시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그 분은 우리 가정에 다시 '성령의 결핍, 사랑의 고갈'의 문제를 능히 해결하실 것입니다.
포도주가 다 떨어진 잔칫집처럼, 우리 가정도 더 이상의 기쁨거리가 찾아지지 아니할 만큼 불안함, 허전함,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면 다시금 우리 예수님을 모셔 들여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기만하면 기쁨회복, 찬양회복, 감사회복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타난 이적의 핵심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입니다.
2장 9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이 알더라'
이 포도주는 처음부터 잘 익은 포도를 수확하여 큰 통에 넣고 발로 밟아 터트려 밀폐된 통에 넣어두어 잘 숙성된 그런 보통 포도주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맹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무가치한 것을 가치 있게 하시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시고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하시고 맛없는 것, 무미건조한 것도 맛있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듯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그 분량이상 그 가치이상의 결과를 안겨주셨습니다.
삼손의 손에 들린 것은 나귀턱뼈도 그 어느 장수의 무기 이상의 능력을, 어린다윗의 손에 들린 물맷돌도 골리앗의 체격과 무기를 무색케하는 능력을 나타내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모세의 손에는 단지 지팡이가 하나 들려있었을 뿐인데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샘물이 터져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불학무식한 갈릴리 어부들도 주님만나니 대사도의 반열에 오르질 않았습니까
맹물신앙, 맹물가정이 포도주신앙, 포도주 가정되는 일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을 여러분 가정에 모시면 이적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마음속 빈민이 환희로 바뀌고 가정의 불화가 평화로 바뀌고, 육욕을 따라서 살던 인생이 성화의 길로 들어서게 될 줄 믿습니다.
맹물로 포도주 만드신 예수님이 오늘 여러분 가정과 우리 수성교회에 오시면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2장 10절 말씀도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는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 하더라'
여러분! 이 말속에는 유대인들의 잔치문화 속에서 자리 잡은 '눈속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는 좋은 것을 주고 취하여 분별이 없을 때에는 안 좋은 것을 주어서 사람들을 기만하고 효과는 극대화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얄팍한 눈속임 전통은 그저 애교로 넘어가 주고, 알고도 속아주는게 전통이었다면 오늘 가나혼인집에서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주께서 이 결혼에 손을 대셔서 이 일이 가능하여졌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달콤한 시간'은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은 그리 오래가지를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보다 못하면 못했지 처음보다 나은 경우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무엇이든 이해가 되고, 용납이 되던 시절이 지나고 나면, 무엇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시절이 옵니다.
항상 상대방을 중심으로 생각하던 시절이 지나면, 항상 자기중심으로만 말하고 생각하는 시절이 도래합니다.
이것은 예수 없는 가정, 예수님 없는 사회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모신 가정은 처음 사랑도 아름답고 귀하지만, 나중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집니다.
사랑이 변질되는 게 아니고, 식어지는 게 아니고, 사랑이 성숙되는 것입니다.
머리가 흰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산책하는 모습을 젊은 부부가 지나가다 뒤돌아봅니다.
젊은 아내가 젊은 남편에게 말합니다.
"참 보기 좋다. 그렇지"
인생에 무슨 우여곡절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주님으로 인하여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그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가정이 마지막 보루입니다.
예수님 떠난 가정은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 다 잃어도 예수님 모신 가정은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교회가 영적으로 부흥되시길 축원합니다.
저는 조금 갑작스럽지만 오늘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수성가족 여러분! 가정이 뭐지요"
흔히들 하는 말 가운데, '물질이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믿지만 돈으로 책을 살지라도 지혜는 살 수 없고,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고, 돈으로 좋은 침대는 살 수 있지만 달콤한 잠은 살 수 없습니다. '는 말이 있습니다.
분명,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면 모두 다 가정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가정은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사랑이고, 진리이며 섬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래면 박카스광고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일이 있습니다.
이른 새벽 환경미화원이 쓰레기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그 리어카 뒤에는 그 아들이 밀어주는 모습이 비추입니다.
아버지가 뒤돌아보며 말합니다.
"얘야, 힘들지 않니"
"뭘요, 아버지는 매일 하시는 일인걸요. "
이 장면에 등장한 아버지와 아들이 실제 부자지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그 가정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적시는 명장면이 되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당시 서울 강동구청 소속 환경미화원 박선치씨 이고, 아들은 대학생이 된 박상호군이었습니다.
박선치씨는 시장에서 의류 업을 하다가 사업에 실패하고, 겨우 환경미화원으로 취직이 되어, 어려운 가정 살림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 상호가 고2때 공부도 안하고 점점 반항심만 커지고 속을 썩여서, 이 아버지는 삼남매를 불러 앉히고 자녀들에게 하소연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구청공무원이라고만 하여서 그런줄 말 알고 있던 삼남매는, 아버지가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 자시들을 뒷바라지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놀랍니다.
그날 밤 온 식구가 끌어안고 울고 특히 큰 아들 상호가 다시 마음을 잡고 공부하여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생명의 양식은 교회에서도 넉넉히 먹을 수 있고 세끼 식사는 하숙집에서도 식당에서도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환경 미화원 부자간에 간직하고 있는 서로간의 존경과 사랑은 교회가 맛보게 하기 힘든 하숙집에선 느낄 수 없는 "가정만의 고유기능"인 것입니다.
행복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마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가정 안에서 찾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맞는 원리입니다.
목사의 삶에 가정의 행복이 충만하고 장로님의 삶에 가정의 행복이 묻어나고 온 성도의 삶에 가정 행복이 자리하고 있으면 그 교회는 천국 같은 교회, 가정교회를 이룰 수 있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분은 행복지수가 IQ나 EQ를 높여서가 아니고 HQ(Home Quotient 가정지수)가 높아야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부부가 함께 텃밭을 가꾸고 장보러 가고, 운동하고, 보모와 자녀가 함께 집안 대청소도 하고 산책도 하고 책 고르러 서점에 가면 HQ는 점점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말 한마디 진지하게 나눌 시간도 없이 살아간다고 하면 '가정지수'는 계속 하락하고 행복지수도 동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할'고 외치기 전에 오랜만에 엄마 무릎위에 머리베게 하고 귀를 파주라, '당신 요즘 예전 같지 않다고 사랑이 식었다'고 투정하기 전에 설거지 하는 아내를 안아주고 피곤하여 지쳐 잠들어 있는 남편얼굴이라도 쓰다듬어 주라 저는 오늘 너무나 잘 알려진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이 일어나 갈릴리 가나 혼인잔칫집에서 우리 시대의 가정이 되살아날 길을 찾아보길 원합니다.
이 잔칫집에서 생긴 문제는 "포도주" 즉 잔칫날 흥을 돋우고 그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술'이 "모자란지라" 모자라는 문제 급기야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이르기를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3)', 없는 문제였습니다.
가정을 이루는 의미 있는 날, 뭔가 중요한 것이 없거나 모자라게 된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현대 가정의 위기는 "결핍" 과 "부족"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정이 가정 되려면 '부부간의 사랑'과 '신뢰' '경제적 여건' '자손의 번성' '안정된 삶'등 기본적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 무엇하나라도 결핍 부족이 생기면 가정은 여지없이 휘청거리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가나 혼인 잔칫집에는 "술(포도주)"이 부족하였습니다.
즉 즐거움 거리가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이 가정에도 즐거움 거리가 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은 간혹 "술"을 성령과 비교하곤 하였습니다.
사사기 9장에는 아비멜렉이 간교한 계략으로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일을 비판하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거기 나무들이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에게 각각 '우리 왕이 되라'고 청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포도나무가 말하길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왕이 되겠다고 나서겠느냐"며 거절합니다.
포도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새 술"로 상징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성령 충만을 받은 오순절 사건의 주인공들을 보고 사람들이 '저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며 성령 충만을 술 취함과 연계 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마시는 알코올로서의 술은 육체를 이성을 마비시키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성령의 술은 우리 영혼에 '즐거움'을 주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가정에 '즐거움의 부족'은 위기를 부릅니다.
사랑의 기쁨이 고갈된 가정, 서로 감사가 식어진 가정 찬양도 즐거움도 사라진 가정은 얼마나 척박한 가정이겠습니까
완연한 사막을 맛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 없는 가정 예수 없는 교회는 사막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결핍과 부족의 가정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처럼 오늘 우리 가정에 다시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그 분은 우리 가정에 다시 '성령의 결핍, 사랑의 고갈'의 문제를 능히 해결하실 것입니다.
포도주가 다 떨어진 잔칫집처럼, 우리 가정도 더 이상의 기쁨거리가 찾아지지 아니할 만큼 불안함, 허전함,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면 다시금 우리 예수님을 모셔 들여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기만하면 기쁨회복, 찬양회복, 감사회복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타난 이적의 핵심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입니다.
2장 9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이 알더라'
이 포도주는 처음부터 잘 익은 포도를 수확하여 큰 통에 넣고 발로 밟아 터트려 밀폐된 통에 넣어두어 잘 숙성된 그런 보통 포도주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맹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무가치한 것을 가치 있게 하시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시고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하시고 맛없는 것, 무미건조한 것도 맛있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듯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그 분량이상 그 가치이상의 결과를 안겨주셨습니다.
삼손의 손에 들린 것은 나귀턱뼈도 그 어느 장수의 무기 이상의 능력을, 어린다윗의 손에 들린 물맷돌도 골리앗의 체격과 무기를 무색케하는 능력을 나타내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모세의 손에는 단지 지팡이가 하나 들려있었을 뿐인데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샘물이 터져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불학무식한 갈릴리 어부들도 주님만나니 대사도의 반열에 오르질 않았습니까
맹물신앙, 맹물가정이 포도주신앙, 포도주 가정되는 일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을 여러분 가정에 모시면 이적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마음속 빈민이 환희로 바뀌고 가정의 불화가 평화로 바뀌고, 육욕을 따라서 살던 인생이 성화의 길로 들어서게 될 줄 믿습니다.
맹물로 포도주 만드신 예수님이 오늘 여러분 가정과 우리 수성교회에 오시면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2장 10절 말씀도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는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 하더라'
여러분! 이 말속에는 유대인들의 잔치문화 속에서 자리 잡은 '눈속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는 좋은 것을 주고 취하여 분별이 없을 때에는 안 좋은 것을 주어서 사람들을 기만하고 효과는 극대화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얄팍한 눈속임 전통은 그저 애교로 넘어가 주고, 알고도 속아주는게 전통이었다면 오늘 가나혼인집에서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주께서 이 결혼에 손을 대셔서 이 일이 가능하여졌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달콤한 시간'은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은 그리 오래가지를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보다 못하면 못했지 처음보다 나은 경우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무엇이든 이해가 되고, 용납이 되던 시절이 지나고 나면, 무엇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시절이 옵니다.
항상 상대방을 중심으로 생각하던 시절이 지나면, 항상 자기중심으로만 말하고 생각하는 시절이 도래합니다.
이것은 예수 없는 가정, 예수님 없는 사회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모신 가정은 처음 사랑도 아름답고 귀하지만, 나중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집니다.
사랑이 변질되는 게 아니고, 식어지는 게 아니고, 사랑이 성숙되는 것입니다.
머리가 흰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산책하는 모습을 젊은 부부가 지나가다 뒤돌아봅니다.
젊은 아내가 젊은 남편에게 말합니다.
"참 보기 좋다. 그렇지"
인생에 무슨 우여곡절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주님으로 인하여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그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가정이 마지막 보루입니다.
예수님 떠난 가정은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 다 잃어도 예수님 모신 가정은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교회가 영적으로 부흥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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