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성도의 자녀교육
본문
가정의 달, 평화의 달을 보내면서 자녀교육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녀교육은 모든 어른들의 꿈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온 세계가 놀라워하는데 우리나라 국민총생산고(GNP)의 12%가 교육비에 투자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자녀교육에 대한 투자와 열의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나라의 미래가 이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자녀교육의 몇 가지 원리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자녀들을 여호와 하나님중심, 신앙중심의 예배적 인격으로 키워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교육열도 우리나라 부모들의 그것에 조금도 못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교육헌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녀교육에서 제일 먼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그 조상들의 여호와 하나님,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자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곧 생명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했습니다.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축복과 저주가 바로 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순종에 달렸다고 가르치쳤고 배웠습니다.
자녀교육에 대하여 아무리 많은 투자와 열성과 꿈이 있다 하더라도 인본주의와 자기찬양과 정욕중심으로 나가면 망하고 불행하고 저주받는다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녀교육의 제일원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들이 태어나면 제일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8일만에 할례를 그 몸에 베풀어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 속했다는 표를 살 속에 두어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항상 기억케 했습니다.
그리고 유아때부터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쉐마를 가르치고 기억하도록 해서 12살이 되면 율법의 아들이 되게 했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세상 끝까지라도 항상 그들의 교육적 전통인 성경, 교사, 회당도 따라다녔습니다.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이 시리아를 방문했을 때도 그곳에 있던 유대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세계역사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킨 유일한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자녀를 교육을 할 때, 제일 먼저 여호와 하나님중심, 신앙중심, 예배중심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교육이 살지만, 만약 이점에서 실패하면 모든 교육이 무너져 버립니다.
맹모삼천이란 말이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도 그의 백성을 세 가지 방면에서 성별하였습니다. 첫째, 지리적 성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소집단의 이스라엘 부족을 위하여 고센 땅을 선택하셨습니다. 적어도 이 민족이 강대한 집단으로 커질 때까지는 외부의 영향력을 받지 않고 자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강대국인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고센 땅은 주변 민족의 문화와 우상숭배와 관습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애굽의 보호 아래 어떤 집단의 침략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게다가 애굽인은 목축인을 가증히 여겨 접촉을 안합니다.
그러면서 애굽에서 나오는 농산물은 마음껏 먹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복된 곳입니까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쪽은 순수한 핏줄을 지키기 좋은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지만 북쪽은 외세가 각축하는 난장판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리적 환경이라는 것이 한 민족과 개인의 품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위하여 가장 좋은 신앙적 환경을 선택하고 조성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육시설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실력있는 교역자와 사명감 있는 교사가 요구됩니다. 우리 교회의 자랑은 교육을 담당하는 수준높은 6명의 목사님이 있고, 투철한 사명감에 불타는 200명의 교사와 봉사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꺼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교육부서에 맡기시기 바랍니다.
둘째, 민족간의 성별입니다. 종족간의 구분입니다. 에서는 성별의 가치를 의식하지 못하고 멋대로 결혼했기 때문에 리브가는 에서에게서 굉장한 역겨움을 느꼈습니다. 에서는 성별되지 못한 종족의 조상입니다. 에서의 운명에 관해서 오바댜 선지자가 예언합니다.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옵 1:18).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은 종족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이 전적으로 부당한 것은 아니지만 처음 믿음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불신자는 언제나 신자의 생활을 체크합니다. 젊은이들은 내가 사랑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신앙문제에 마찰이 일어날 때 얼마나 어려운 일이 생기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아버지는 주일날 교회 가자고 하고, 어머니는 낚시 가자고 할 때 그 사이에 태어난 어린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식사 시간에 기도를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어린 아이는 어른의 눈치나 보고 자라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유목민입니다. 가나안 족속은 농경민입니다. 바알 신은 농사의 신이고 풍년의 신입니다. 유목민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할 때 가나안 족속에게서 농사짓는 법을 배웁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이 강할 때는 아무것도 아닌데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이 약화되는 순간, 바알 신이 물밀 듯이 들어와서 여호와신앙을 정복해 버립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일부러 바알 신을 섬기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좋을 때는 끄떡 없지만, 신앙이 약해지면 점쟁이도 찾아가고 집에 찬 물도 떠나 놓습니다. 우상종교, 무당종교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엄격한 종족의 구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가 신앙이 강할 때는 뭐 불신자와 살아도 얼마든지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신앙이 약해지면 곧장 불신자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쉽사리 신앙을 떠났습니까 불신자와의 결혼은 틈만 생기면 왕창 무너집니다. 이렇게 논리를 전개해 나가면 처음부터 절대로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부를 고향 땅에서 취했고, 에스라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시켰던 것입니다.
물론, 종족간 성별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 자체가 아닙니다. 세상에 빛이 되라, 등불이 되라는 말씀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산 위에 있는 등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목적 자체로 착각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요나 선지자입니다. 요나는 유대 민족만 구원받으면 되었지 니느웨가 망하는 데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대 민족의 가장 위대한 존재 목적은 선교적 사명인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포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 시대에 성별의 수단이 목적 자체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공격하기 위해 요나서가 기록된 것입니다.
셋째, 동족내의 성별입니다. 한 형제, 친족간의 성별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경우를 보세요. 갈대아 우르는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도시였기 때문에 생활이 복잡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활이 편해지고 번영을 누리면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약 이천리, 800 Km 이상 떨어진 하란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셈족이 하란에 쳐들어옴으로 다시 1500리, 600 Km 이상 떨어진 산악지대 브엘세바로 떠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런데 롯은 요단 들을 선택하고 마침내 소돔과 고모라로 들어갔습니다. 물질번영과 성적쾌락과 이방신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족간의 구별에서 아브라함 Line은 소위 생명에 대한 정열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에서 삶은 곧 축복이요 축복은 곧 생명입니다. 구원은 한 마디로 사는 것이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죄는 죽음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이런 사람들은 그 특수한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와서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해줍니다. 그러나 롯, 에서, 이스마엘은 축복을 받고 그 가문의 일원으로 살았지만 그 축복이 당대로 끝나버립니다. 어쩌면 당대에서도 다 소유하지 못하고 끝납니다. 아브라함 Line은 생명을 위한 전진의 축복을 다음 세대에 전달해 줌으로써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지만 롯 Line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기 당대에 영광스럽게 가졌던 축복들이 다 끝나버렸습니다.
생명을 위한 전진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을 구별했습니다. 유대와 이스라엘을 구별했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따라 영적 난장이와 거인을 구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린이는 하루 종일 넘어집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일으켜 세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실수보다 크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러 방면에서 구별시키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신앙이 곧 생명이라는 교육, 이것이 신앙을 위한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의 교육이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 데마다 제일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붙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중심, 신앙중심의 생활원리에 대한 시험은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 왕조와 유대 왕조의 역사는 곧 우상숭배와 여호와종교의 투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경배 대신에 어떤 것이 대치되고 있는지, 물질과 출세가 우상이 되고 있지는 않는지, 무엇이 목적과 수단인지를 예의 주시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살고, 예수 배반하면 죽는다. 신앙이 곧 생명이다” 이것이 자녀들의 일생을 관통하는 슬로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들의 자녀들을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문화적 사명을 수행하는 인격으로 키워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가 20세 이상이 되면 성인으로서 모든 사회적 책임을 담부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가정에서는 너무 과잉보호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가정은 이기적 집단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내 가정, 내 부모, 내 자녀가 더 안일하고 더 편하게 인생을 살게 할까”
성도는 이런 차원에 머물면 안됩니다. 성도의 자녀교육은 “어떻게 해야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이바지하는 인물이 될까” 언제나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특성은 믿으면 곧 복의 샘이 된다는 것입니다.
약속은 의무를 지우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I will bless you, so that you will be a blessing”(창 12:2). 이런 방향에서 볼 때 자녀들의 교육은 엄격해야 합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으로 훈련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시대적 책임을 지고, 문화적 사명을 다하는 보람된 사회인으로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중심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신앙공동체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집사는 복음전도의 사명에 죽고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집사가 되려면, 괴로우나 즐거우나 슬프나 기쁘나 기분을 초월해서 3년 이상 사도화 훈련을 받고, 환란 중에서도 변함없이 5년 이상 충성한 경험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책임성 있는 인격은 일하는 데서 시험됩니다. “그에게 돈을 주어보라 그의 인격을 알 수 있을 것이다”고 했는데 돈이 인격의 시금석인 것보다 일은 더 분명한 인격의 시험대가 됩니다. 달란트의 비유가 말씀한 그대로 작은 일에 충성하는 데서 선한 인격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국가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일하는 데서 보람과 가치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군대에 가는 것, 집사가 되는 것, 교사가 되는 것, 찬양대원이 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그곳에서 다시 섬김의 자리에 배정될 것입니다(마 25:21, 23, 막 9:41, 10:30, 고전 3:8, 히 10:35). 그러므로 기뻐하며 파티하며 일해야 합니다. 자기가 맡은 사명을 끝까지 수행함으로 우리는 교회와 사회, 국가 발전과 천국 건설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녀들을 인격적인 대화를 통하여 인화협동하는 인격으로 키워야 합니다. 엡 6:4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노엽게 한다는 것은 이성없이 무리한 요구와 질책으로 인격적 상처를 주어 낙심케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정당한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인격적 요구와 존엄을 행사하는 경험을 통하여 자녀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우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큰 두통 중 하나는 저열한 인격을 가지고 남의 인격을 쉽게 무시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의 Terror행위입니다. 기독교 교육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 인격이 귀한 것처럼 남의 인격도 존중하는 가운데 상호신뢰하는 인화협동적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교회중심, 말씀중심의 생활원리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회성을 갖춘 건강한 인격은 자신을 사랑으로 내어줄 줄 알고,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형의 사람을 도무지 수용하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도무지 까다로와서 접근하기가 겁이 납니다. 모두가 사회성의 결여에서, 자아란 이름의 우상숭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만함, 열등감, 지나친 소유욕, 이런 것들이 배타적인 인간성을 만듦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수용하고, 감화시키고, 교육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찬 61장에서 찬송합니다. “사람마다 주 은혜로 이기도록 하시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자중자애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소금을 가지고 녹아지고, 빛을 가지고 뿌려주는 그런 인간관계를 통하여 복음의 능력이 구체적인 환경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괴테가 말했습니다. “자기의 독특성을 깨뜨리라 그리하면 너는 아름다운 운명을 누릴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합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 6:11-13). 우리 교회 주일학교의 교육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을 가르쳐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사랑하며 섬기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도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한다. 자기의 존재 의의와 특수한 사명을 감당하여 자기 자리에서 맡은 일에 충성하게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을 육성하여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겸비케 한다”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예배자로 키우고, 둘째로, 책임감을 가지고 교회와 국가를 위하여 일하는 인격으로 키우고, 셋째로, 사회성을 가지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신앙실천적인 사람으로 키우기 위하여 노력합시다. 열심히 기도하며 가르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저녀들에게 삶의 모범이 됩시다.
오늘 아침에는 자녀교육의 몇 가지 원리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자녀들을 여호와 하나님중심, 신앙중심의 예배적 인격으로 키워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교육열도 우리나라 부모들의 그것에 조금도 못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교육헌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녀교육에서 제일 먼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그 조상들의 여호와 하나님,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자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곧 생명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했습니다.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축복과 저주가 바로 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순종에 달렸다고 가르치쳤고 배웠습니다.
자녀교육에 대하여 아무리 많은 투자와 열성과 꿈이 있다 하더라도 인본주의와 자기찬양과 정욕중심으로 나가면 망하고 불행하고 저주받는다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녀교육의 제일원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들이 태어나면 제일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8일만에 할례를 그 몸에 베풀어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 속했다는 표를 살 속에 두어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항상 기억케 했습니다.
그리고 유아때부터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쉐마를 가르치고 기억하도록 해서 12살이 되면 율법의 아들이 되게 했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세상 끝까지라도 항상 그들의 교육적 전통인 성경, 교사, 회당도 따라다녔습니다.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이 시리아를 방문했을 때도 그곳에 있던 유대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세계역사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킨 유일한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자녀를 교육을 할 때, 제일 먼저 여호와 하나님중심, 신앙중심, 예배중심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교육이 살지만, 만약 이점에서 실패하면 모든 교육이 무너져 버립니다.
맹모삼천이란 말이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도 그의 백성을 세 가지 방면에서 성별하였습니다. 첫째, 지리적 성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소집단의 이스라엘 부족을 위하여 고센 땅을 선택하셨습니다. 적어도 이 민족이 강대한 집단으로 커질 때까지는 외부의 영향력을 받지 않고 자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강대국인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고센 땅은 주변 민족의 문화와 우상숭배와 관습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애굽의 보호 아래 어떤 집단의 침략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게다가 애굽인은 목축인을 가증히 여겨 접촉을 안합니다.
그러면서 애굽에서 나오는 농산물은 마음껏 먹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복된 곳입니까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쪽은 순수한 핏줄을 지키기 좋은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지만 북쪽은 외세가 각축하는 난장판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리적 환경이라는 것이 한 민족과 개인의 품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위하여 가장 좋은 신앙적 환경을 선택하고 조성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육시설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실력있는 교역자와 사명감 있는 교사가 요구됩니다. 우리 교회의 자랑은 교육을 담당하는 수준높은 6명의 목사님이 있고, 투철한 사명감에 불타는 200명의 교사와 봉사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꺼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교육부서에 맡기시기 바랍니다.
둘째, 민족간의 성별입니다. 종족간의 구분입니다. 에서는 성별의 가치를 의식하지 못하고 멋대로 결혼했기 때문에 리브가는 에서에게서 굉장한 역겨움을 느꼈습니다. 에서는 성별되지 못한 종족의 조상입니다. 에서의 운명에 관해서 오바댜 선지자가 예언합니다.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옵 1:18).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은 종족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이 전적으로 부당한 것은 아니지만 처음 믿음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불신자는 언제나 신자의 생활을 체크합니다. 젊은이들은 내가 사랑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신앙문제에 마찰이 일어날 때 얼마나 어려운 일이 생기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아버지는 주일날 교회 가자고 하고, 어머니는 낚시 가자고 할 때 그 사이에 태어난 어린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식사 시간에 기도를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어린 아이는 어른의 눈치나 보고 자라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유목민입니다. 가나안 족속은 농경민입니다. 바알 신은 농사의 신이고 풍년의 신입니다. 유목민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할 때 가나안 족속에게서 농사짓는 법을 배웁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이 강할 때는 아무것도 아닌데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이 약화되는 순간, 바알 신이 물밀 듯이 들어와서 여호와신앙을 정복해 버립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일부러 바알 신을 섬기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좋을 때는 끄떡 없지만, 신앙이 약해지면 점쟁이도 찾아가고 집에 찬 물도 떠나 놓습니다. 우상종교, 무당종교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엄격한 종족의 구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가 신앙이 강할 때는 뭐 불신자와 살아도 얼마든지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신앙이 약해지면 곧장 불신자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쉽사리 신앙을 떠났습니까 불신자와의 결혼은 틈만 생기면 왕창 무너집니다. 이렇게 논리를 전개해 나가면 처음부터 절대로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부를 고향 땅에서 취했고, 에스라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시켰던 것입니다.
물론, 종족간 성별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 자체가 아닙니다. 세상에 빛이 되라, 등불이 되라는 말씀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산 위에 있는 등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목적 자체로 착각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요나 선지자입니다. 요나는 유대 민족만 구원받으면 되었지 니느웨가 망하는 데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대 민족의 가장 위대한 존재 목적은 선교적 사명인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포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 시대에 성별의 수단이 목적 자체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공격하기 위해 요나서가 기록된 것입니다.
셋째, 동족내의 성별입니다. 한 형제, 친족간의 성별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경우를 보세요. 갈대아 우르는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도시였기 때문에 생활이 복잡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활이 편해지고 번영을 누리면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약 이천리, 800 Km 이상 떨어진 하란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셈족이 하란에 쳐들어옴으로 다시 1500리, 600 Km 이상 떨어진 산악지대 브엘세바로 떠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런데 롯은 요단 들을 선택하고 마침내 소돔과 고모라로 들어갔습니다. 물질번영과 성적쾌락과 이방신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족간의 구별에서 아브라함 Line은 소위 생명에 대한 정열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에서 삶은 곧 축복이요 축복은 곧 생명입니다. 구원은 한 마디로 사는 것이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죄는 죽음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이런 사람들은 그 특수한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와서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해줍니다. 그러나 롯, 에서, 이스마엘은 축복을 받고 그 가문의 일원으로 살았지만 그 축복이 당대로 끝나버립니다. 어쩌면 당대에서도 다 소유하지 못하고 끝납니다. 아브라함 Line은 생명을 위한 전진의 축복을 다음 세대에 전달해 줌으로써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지만 롯 Line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기 당대에 영광스럽게 가졌던 축복들이 다 끝나버렸습니다.
생명을 위한 전진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을 구별했습니다. 유대와 이스라엘을 구별했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따라 영적 난장이와 거인을 구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린이는 하루 종일 넘어집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일으켜 세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실수보다 크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러 방면에서 구별시키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신앙이 곧 생명이라는 교육, 이것이 신앙을 위한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의 교육이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 데마다 제일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붙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중심, 신앙중심의 생활원리에 대한 시험은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 왕조와 유대 왕조의 역사는 곧 우상숭배와 여호와종교의 투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경배 대신에 어떤 것이 대치되고 있는지, 물질과 출세가 우상이 되고 있지는 않는지, 무엇이 목적과 수단인지를 예의 주시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살고, 예수 배반하면 죽는다. 신앙이 곧 생명이다” 이것이 자녀들의 일생을 관통하는 슬로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들의 자녀들을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문화적 사명을 수행하는 인격으로 키워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가 20세 이상이 되면 성인으로서 모든 사회적 책임을 담부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가정에서는 너무 과잉보호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가정은 이기적 집단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내 가정, 내 부모, 내 자녀가 더 안일하고 더 편하게 인생을 살게 할까”
성도는 이런 차원에 머물면 안됩니다. 성도의 자녀교육은 “어떻게 해야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이바지하는 인물이 될까” 언제나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특성은 믿으면 곧 복의 샘이 된다는 것입니다.
약속은 의무를 지우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I will bless you, so that you will be a blessing”(창 12:2). 이런 방향에서 볼 때 자녀들의 교육은 엄격해야 합니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으로 훈련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시대적 책임을 지고, 문화적 사명을 다하는 보람된 사회인으로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중심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신앙공동체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집사는 복음전도의 사명에 죽고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집사가 되려면, 괴로우나 즐거우나 슬프나 기쁘나 기분을 초월해서 3년 이상 사도화 훈련을 받고, 환란 중에서도 변함없이 5년 이상 충성한 경험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책임성 있는 인격은 일하는 데서 시험됩니다. “그에게 돈을 주어보라 그의 인격을 알 수 있을 것이다”고 했는데 돈이 인격의 시금석인 것보다 일은 더 분명한 인격의 시험대가 됩니다. 달란트의 비유가 말씀한 그대로 작은 일에 충성하는 데서 선한 인격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국가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일하는 데서 보람과 가치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군대에 가는 것, 집사가 되는 것, 교사가 되는 것, 찬양대원이 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그곳에서 다시 섬김의 자리에 배정될 것입니다(마 25:21, 23, 막 9:41, 10:30, 고전 3:8, 히 10:35). 그러므로 기뻐하며 파티하며 일해야 합니다. 자기가 맡은 사명을 끝까지 수행함으로 우리는 교회와 사회, 국가 발전과 천국 건설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녀들을 인격적인 대화를 통하여 인화협동하는 인격으로 키워야 합니다. 엡 6:4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노엽게 한다는 것은 이성없이 무리한 요구와 질책으로 인격적 상처를 주어 낙심케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정당한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인격적 요구와 존엄을 행사하는 경험을 통하여 자녀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우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큰 두통 중 하나는 저열한 인격을 가지고 남의 인격을 쉽게 무시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의 Terror행위입니다. 기독교 교육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 인격이 귀한 것처럼 남의 인격도 존중하는 가운데 상호신뢰하는 인화협동적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교회중심, 말씀중심의 생활원리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회성을 갖춘 건강한 인격은 자신을 사랑으로 내어줄 줄 알고,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형의 사람을 도무지 수용하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도무지 까다로와서 접근하기가 겁이 납니다. 모두가 사회성의 결여에서, 자아란 이름의 우상숭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만함, 열등감, 지나친 소유욕, 이런 것들이 배타적인 인간성을 만듦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수용하고, 감화시키고, 교육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찬 61장에서 찬송합니다. “사람마다 주 은혜로 이기도록 하시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자중자애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소금을 가지고 녹아지고, 빛을 가지고 뿌려주는 그런 인간관계를 통하여 복음의 능력이 구체적인 환경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괴테가 말했습니다. “자기의 독특성을 깨뜨리라 그리하면 너는 아름다운 운명을 누릴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합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 6:11-13). 우리 교회 주일학교의 교육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을 가르쳐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사랑하며 섬기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도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한다. 자기의 존재 의의와 특수한 사명을 감당하여 자기 자리에서 맡은 일에 충성하게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을 육성하여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겸비케 한다”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예배자로 키우고, 둘째로, 책임감을 가지고 교회와 국가를 위하여 일하는 인격으로 키우고, 셋째로, 사회성을 가지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신앙실천적인 사람으로 키우기 위하여 노력합시다. 열심히 기도하며 가르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저녀들에게 삶의 모범이 됩시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