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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가정의 권위를 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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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가족을 사랑하십니까', '가정을 사랑하십니까', '아내를(혹은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어라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예, 물론 이지요.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 사랑하지요'
하지만 진정 사랑의 깊은 의미를 알고 사랑하지 못하고 단지 함께하는 사람이기에 사랑해야만 한다는 아니 '살아한다'고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그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사랑이라는 말은 'LOVE'하다 뿐이지만 헬라어에서의 사랑이라는 말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에로스'인데 이것은 남녀 간의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사랑, 성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사랑을 말할 때 이 에로스라는 말은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두 번째 '필레오'인데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애정과 관심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스승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든지 부모님을 향하여 사랑한다고 말하든지, 형제간 사랑, 친구간 우정 등에 사랑을 말하고자 할 때 필레오를 말합니다. 필레오 사랑은 신약성경에 약간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물론 '아가페' 사랑인데 성경에는 거의 대부분 사랑을 말할 때 이 아가페 사랑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아가페 사랑은 '희생적 사랑'입니다.
이 베푸시는 사랑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나타내며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의 사랑이 바로 이 아가페 사랑이고, 로마서 5장 5절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고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아가페사랑 이고, 고린도전서 13장 13절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로 시작하는 그 사랑장의 사람들이 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에서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하였을 때의 사랑도 바로 이 사랑 아가페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 아내를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하였을 때 이 사랑은 "희생을 각오한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하였고, 23절에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하였으며 24절에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한 번 더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이미지가 떠오르는가하면 남편은 아내위에 군림하는 왕이고 아내는 남편의 명령에 복종하는'종'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여러분 남자는 가정과 아내의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 군주, 황제가 되라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분명 성경은 가정에서의 가장의 권위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권위는 '예수님을 본받은 거룩한 권위, 영적인 권위'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서 출발하는가.
그것은 "자기희생의 사랑, 즉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고 자기희생에 뿌리박은 거룩하고 신령한 권위인데 우리 남편 되고 아버지 된 사람의 권위가 군림하는 권위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아가페사랑에 근거한 영적권위가 진정한 가장의 권위가 되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남편으로 아버지로 인정받고 존경받으려면 아내와 자녀에게 "복종"만을 강요하는 군주적인 자세를 버리고 자발적 희생과 사랑을 통하여 신령한 권위를 확보하여야 한다는 얘깁니다.
돌아보면 지난 시대의 우리의 아버지들은 정말 가정의 왕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곧 법이었고 가족들은 그 결정에 무조건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막강한 권위주의사고에 사로잡힌 가장들은 도덕적, 사회적 질서를 무시하고 자기하고픈 대로 다하고 살며 가족들을 희생시켰습니다.
즉 아가페사랑 자기희생의 사랑으로 가장권을 발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무서운 아버지, 독재자 아버지, 무책임하고 큰소리만 치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아가페사랑'에 근거한 영적권위가 가장의 진정한 권위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세워지고 지켜져야만 가정의 질서가 바로서고 건강한 가정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남자로 하여금 가정을 부양하는 책임을 지우셨습니다.
요즘 맞벌이 부부가 많지만 가족부양의 책임을 부부가 나눠지기 시작하면서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는 사랑'을 감당하여야할 남자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게 되고 가장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경제권을 분담하게 된 아내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가정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지금의 특수한 처지와 환경이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가정의 모습을 말씀드려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가장으로 하여금 가족부양의 책임을 지도록, 아내와 자녀를 위하여 밖에 나가서 만드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크게 보아서 가정의 가정된 본질을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은 가족부양을 하며 자기희생의 사랑을 경험하여야 하고 그것이 권위가 되어야 합니다.
헌데 가장이 무능하거나 게으르거나 무책임하면 어쩔 수 없이 가정을 지키고 자녀 곁에 있어주어야 할 아내가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남편과 아버지의 희생 아가페적 사랑이 경험되지 못하게 되고 그 가정은 영적권위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보이지 않는 위기가 시작되게 됩니다.
성경이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저 아끼고 돌봐주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희생에 기초한 사랑을 주고 영적권위를 확보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이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군에서 행군을 하는데 인솔하는 장교가 행군내내 휴식시간에 앉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자신도 다리도 아프고 힘이 들 텐데 왜 앉아 쉬는 모습을 안 보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장교정신”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힘들어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가정이 통솔이 안 됩니다.
가정을 이끌고 나가기위해선 “나 한사람 정신력을 발휘해서 중심을 잡고 이끌고 가야 우리가정이 산다. ”고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가장 약한 모습, 흐트러진 모습, 불안해하는 모습, 자기생각밖에 안하는 모습은 가정을 위기로 몰아갑니다.
그러므로 가장은 가정의 절대적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영성 자녀의 영성도 결국 가장이 책임을 져야 그것이 건강한 가정입니다.
오늘 남편 된 아들이 마음속에 품어야 할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아내를 축복하기 위하여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아내와 자녀들 우리가정의 행복을 보존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희생하여야합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그의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 가족들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여야합니다. ”
그러면 '가장된 책임‘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가족들 위에 군림하는 것일까요
매사에 일방적인 경쟁과 통보를 통하여 하는 것일까요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통하여 일까요
아닙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위하여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언성이 높아질 일들이 왜 안 생기겠습니까
서로 자기는 잘못이 없고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니까 언성이 높아집니다.
예전 권위주의적 가장에게는 자기희생 자기포기란 없었습니다.
고압적인 자세로 큰소리를 치거나 힘으로 누르거나 겁을 주는 것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자기만 옳다고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이때 가족들은 숨죽이고 있었지만 결코 가장의 권위를 인정한 게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피해와 희생을 막기 위하여 견뎠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힘으로 큰소리로 가족들을 숨죽이게 한 그 사람은 자기가 이긴 줄 착각 합니다. 자신에게 온 식구가 굴복할 줄 알고, 권위가 선 줄 압니다.
여기 있는 남편들 아버지들 중 진정 아내와 아이들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 본 분들이 있습니까
말로든 글로든 그런 적이 있습니까
이제는 아가페의 사랑을 주시기 바랍니다.
가정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좀 희생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군림하는 황제가 되려고 하고 자신이 왕이라고 착각에 빠져 살지 마시고 진정 가정의 영적리더가 되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한 것 같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합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아내의 잘못이 더 크고 자녀들에게 문제가 많기에 큰소리가 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죄인일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릴 위하여 항상 자신을 낮추시고 희생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아가페적 사랑이며 가정을 돌보고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들 중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는 구절을 들이댈 자격이 있는 남편은 오직 이런 남편뿐입니다.
즉 “이미 나는 내 아내를 위하여 나의 모든 권위를 포기한 사람”이라고 자신에게 말 할 수 있는 사람뿐입니다.
저는 이번에 요르단 방문의 마지막 코스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느보산”정상 이곳이 높은 산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나안땅이 해발 400m 되는 저 지대인지라 마치 산꼭대기에 선 것처럼 가나안땅을 바라보며 모세는 거기서 죽어갔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세의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모세는 거기선 죽어갔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세의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권위였습니다.
그는 성품이 온유한 사람인지라 스스로 권위를 세울 줄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도전하는 자들을 꺾으시며 모세의 권위를 세워주셨습니다.
어느 날 모세가 스스로 분 내어 자기 권위를 세우고자 흥분하였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진노하여 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없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권위 가장의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십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은 가장들에게 아내와 자녀를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품을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영적 권위를 세우셨습니다.
가장의 권위는 겸손과 인자함과 기다려주는 마음과 희생하는 마음에 세워집니다.
아내와 가족들을 사랑하고 가장의 권위를 회복하시길 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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