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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자연을 보호해야 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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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생태학적 시편으로 불리우는 시104편은 자연 세계의 창조자인 여호와 하나님의 활동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라는 23절의 말씀은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자연 보호와 보전의 사역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자연 속에서 땅을 일구며 열심히 살아가는 농부의 모습이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밤늦도록 일하는 정원사의 모습입니다. 농부가 땅을 떠나 살 수 없고 정원을 떠나서는 존재 의의와 가치를 상실하듯 성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을 가꾸고 보호하는 일에서 벗어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1. 감사함으로 보호하자(마10:29)
 1) 자연을 돌보시는 여호와 하나님
 시편 104편은 여호와 하나님을 대자연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작고 미미한 자연 생물에 이르기까지 그 돌봄에 직접 관여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시편 기자만의 독특한 시각이 아니라 성경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연 보호를 정부나 유력한 몇몇의 환경 단체만의 특별한 임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지극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성도를 길러내는 것조차도 거대한 자연을 길러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로 말할 정도입니다(고전3:6,7). 여호와 하나님은 실로 우리와 우리가 살아 활동하는 대자연을 날마다 돌보시고 길러 주시는 고마우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2) 자연의 수혜자인 인간
 인간은 이러한 대자연의 수혜자입니다. 그래서 세네카는 '자연은 인간에게 소요되는 바를 제공해 준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먹을 것과 입을 것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자연으로부터 제공받고 있습니다. 양식을 제공받고 호흡할 수 있는 산소를 제공받습니다. 그렇지만 한번 자연은 인간의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황폐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 옵니다. 삼림을 훼손했을 때 인간은 홍수의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바다를 오염시켰을 때, 병든 생선을 먹게 됩니다.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감사함으로 보호해야 하겠습니다.

2. 사명으로 보호하자(창1:26)
 1) 여호와 하나님의 본래적 명령인 자연 보호
 인간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내리신 명령은 땅을 다스리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는 것입니다(창1:28). 하지만 이 명령을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신학자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황폐화를 막고 식량 수급을 위해 땅을 경작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명령이 인간에게 최우선으로 내려졌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이 점을 결코 간과하거나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범죄 후에 땅이 더욱 황폐화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우리의 관심은 증폭되고 집중되어야 합니다.
 2) 성도에게 위임된 자연 보호
 사실 정부나 사회 환경 단체의 캠페인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자연 보호가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이요 인간에게 위임된 사명이라는 사실은 새롭고 놀랍습니다. 이 놀라움에 접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로 임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에 대한 관점을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명을 인식한 관점에서 배워야 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1:13). 그렇습니다. 알지 못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용서가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철저한 죄인 의식과 반성이 있어야 하고 오히려 사명자로 부름을 받았음에 대한 강렬한 사명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전에는 자연 보호를 훼방하고 자연을 핍박했다면 이제는 정반대로 자연 보호의 일꾼이 되고 그것을 위해 핍박받는 확고한 자세를 가진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사랑으로 보호하자(눅13:7-9)
 1) 과원지기의 지극한 사랑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는 주인의 명령에 대해 한 해만 더 참아주면 땅을 파고 거름을 주어 어떻게 해서든 열매를 맺게 하겠다는 관원지기의 적극적인 변명을 볼 수 있습니다. 요근래에 그토록 많은 비행 청소년이 양산되는 것은 예전처럼 물질의 빈곤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먹을 것 입을 것만 잘 받쳐 주면 아이는 잘 자랄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된 부모님의 애정 결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이나 사람이나 그 돌붐에는 물질적 자양분의 공급 못지 않게 애정의 공급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초신자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는 일에도 반드시 이러한 모성(母性)과 같은 애정이 필요합니다(요15:2). 그것이 농부의 마음이요 자연을 기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2) 자연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조그마한 새 한 마리도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기르신다고 했습니다(마6:26).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여호와 하나님이 입히시고 기르신다고 했습니다(마6:30). 우리가 한 때의 사냥감으로 즐기는 것조차도 여호와 하나님은 이처럼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관점은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시고 돌보시는 대자연 속에 사는 것은 그 어떤 미미한 존재도 우리의 심심풀이 사냥감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극한 돌보심과 사랑 가운데 자라가는 '천국 경원'의 화초요 새입니다. 우리는 따스한 손길로 이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결론

 전체적으로 사악한 사단의 지배에 있는 인간은 자연을 보호하도록 지음 받은 본래의 사명을 망각한 채 지금도 곳곳에서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일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제 성도는 새로운 자각으로 자연을 바라보면서 감사함과 뜨거운 사명 의식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것들을 지키고 돌보아야 합니다. 자연에게 전에 지은 죄를 용서받는 심정으로 더 정성껏 이 일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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