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자연을 회복하시는 하나님
본문
오늘날 그때 그때 터지는 정치, 사회, 경제 문제를 제외하고 지속적인 관심으로 떠오르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자연과 환경의 문제일 것입니다. 냉전 체제의 와해와 민주 정치의 발전으로 인해 사회, 정의, 평화, 경제 분배보다도 우선시하는 것이 환경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자연 환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일반 사회와 같이 그것은 생존권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 공간인 이 대자연을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이며 자연을 회복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1. 인간의 범죄와 자연의 황폐(창3:17)
1)자연의 황폐를 부르는 인간의 범죄
창세기 기자는 자연의 황폐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왔다고 우리에게 증거해 줍니다. 우리가 농사를 지을 때 밭을 갈아엎고 김을 매주며 거름을 주어야 하는 모든 일은 아담의 완죄적 범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을 때 많은 경우에 자연을 통하여 벌을 내리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사34:13;렘9:11). 오늘날에도 자연이 파괴되는 것은 인간이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 파괴의 범죄를 일삼기 때문입니다. 자연 파괴, 자연 황폐는 창세 이래로 인간의 범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연 황폐 현상에 무관심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회개와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며 범죄의 심각성을 알려 주는 것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2) 인간의 범죄로 고통하는 자연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니니"(롬8:22)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자연의 고통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얼마나 같이 아파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이가 아파 탄식하면 밤새 잠도 자지 못하고 간호하고 낫게 하기 위해 갖은 처방을 다합니다. 자연은 얼마나 큰 아픔 속에서도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는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만을 고대한다고 합니다(롬8:19). 이제 교회와 성도가 이 아픔에 동참할 때입니다. 자연이 끙끙 앓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급속한 처방을 내려야 합니다.
2. 죄의 용서와 자연의 회복(사35:7)
1) 사죄의 징조로 오는 자연의 회복
이스라엘 백성은 자연의 황폐를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징조로 받아들인 반면 자연의 회복, 즉 사막에 샘이 솟고 내를 이루며 먼지만 풀풀 날리던 황무지에 가화요초가 만발하게 되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의 회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사35:6,7;렘17:7,8). 여기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실 때 우리의 삶의 기반인 자연과 환경을 통해 벌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아름다운 자연을 회복하시며 자연 환경을 통해 축복을 회복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이 친히 아름답게 창조하신 대자연이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훼손되거나 황폐화되지 않고 늘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2) 구속받은 자들만을 위한 회복된 자연
성경은 천국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아름다운 자연에 비유하며 거기에는 오직 거룩한 사람, 깨끗한 사람, 즉 구속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다고 합니다(사35:8). 우매한 자나 사나운 자는 들어올 수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사람이 없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사람도 없습니다(마7:6). 그들은 그 소중한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온 재산을 팔아서라도 밭을 사고 진주를 삽니다. (마13:44-46). 이익도 없고 오히려 많은 돈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지만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기에 힘쓰는 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러한 자에게 우리가 거할 만한 회복된 아름다운 자연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곳에 거할 성도들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대자연도 보호해야 하겠습니다.
3. 자연과 최종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건설(롬8:21)
1) 아름다운 대자연의 건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아름다운 대자연의 건설로 묘사했습니다(사40:19,20). 사막과 모래 지대인 이스라엘 땅에서 물이 펑펑 솟아나고 들짐승들이 마음껏 물을 마시며 들에는 백화와 오곡백과로 가득한 것이 곧 천국이라는 사상이 투영된 더한 표현입니다. 환상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 밧모섬의 요한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가 흐르고 실과로 가득 찬 생명나무 열두 그루가 강 좌우에 있다고 증거했습니다(계22:1,2). 그의 예언은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것(사35:5-10)을 반영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이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자연이 잘 가꾸어지고 보존된 곳이 천국의 모형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자연을 잘 가꾸고 보존할 때 우리는 다가올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자연의 대화합
다음으로 이사야는 다가올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하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어린 사자와 육축 짐승이 어린이의 손에 이끌려 가며 사자가 소와 함께 풀을 뜯고 젖먹이 오린 아기가 독사굴에 손을 넣고 장난치는 매우 평화로우며 목가적인 풍경으로 그리고 있습니다(사11:6-9). 그리고 나의 성산에서는 해됨도 상함도 없으리라고 합니다. 이는 실로 복락원의 세계라고 해도 관언이 아닐 것입니다. 대자연 속에서 온 만물이 만족을 느끼며 화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이 땅에서 성도들이 이루어야 할 천국의 모습인 것입니다.
결론
여호와 하나님은 자연을 회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을 벌하실 때는 자연의 황폐를 통해 인간을 벌하시지만 축복하실 때는 자연을 회복하시고 촉복하십니다. 다가올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도 뚜렷이 대자연이 회복되고 낙원의 모습을 보존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우리의 삶의 기반이요 울타리인 대자연을 회복하시고 보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에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1. 인간의 범죄와 자연의 황폐(창3:17)
1)자연의 황폐를 부르는 인간의 범죄
창세기 기자는 자연의 황폐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왔다고 우리에게 증거해 줍니다. 우리가 농사를 지을 때 밭을 갈아엎고 김을 매주며 거름을 주어야 하는 모든 일은 아담의 완죄적 범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을 때 많은 경우에 자연을 통하여 벌을 내리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사34:13;렘9:11). 오늘날에도 자연이 파괴되는 것은 인간이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 파괴의 범죄를 일삼기 때문입니다. 자연 파괴, 자연 황폐는 창세 이래로 인간의 범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연 황폐 현상에 무관심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회개와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며 범죄의 심각성을 알려 주는 것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2) 인간의 범죄로 고통하는 자연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니니"(롬8:22)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자연의 고통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얼마나 같이 아파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이가 아파 탄식하면 밤새 잠도 자지 못하고 간호하고 낫게 하기 위해 갖은 처방을 다합니다. 자연은 얼마나 큰 아픔 속에서도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는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만을 고대한다고 합니다(롬8:19). 이제 교회와 성도가 이 아픔에 동참할 때입니다. 자연이 끙끙 앓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급속한 처방을 내려야 합니다.
2. 죄의 용서와 자연의 회복(사35:7)
1) 사죄의 징조로 오는 자연의 회복
이스라엘 백성은 자연의 황폐를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징조로 받아들인 반면 자연의 회복, 즉 사막에 샘이 솟고 내를 이루며 먼지만 풀풀 날리던 황무지에 가화요초가 만발하게 되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의 회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사35:6,7;렘17:7,8). 여기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실 때 우리의 삶의 기반인 자연과 환경을 통해 벌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아름다운 자연을 회복하시며 자연 환경을 통해 축복을 회복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이 친히 아름답게 창조하신 대자연이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훼손되거나 황폐화되지 않고 늘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2) 구속받은 자들만을 위한 회복된 자연
성경은 천국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아름다운 자연에 비유하며 거기에는 오직 거룩한 사람, 깨끗한 사람, 즉 구속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다고 합니다(사35:8). 우매한 자나 사나운 자는 들어올 수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사람이 없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사람도 없습니다(마7:6). 그들은 그 소중한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온 재산을 팔아서라도 밭을 사고 진주를 삽니다. (마13:44-46). 이익도 없고 오히려 많은 돈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지만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기에 힘쓰는 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러한 자에게 우리가 거할 만한 회복된 아름다운 자연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곳에 거할 성도들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대자연도 보호해야 하겠습니다.
3. 자연과 최종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건설(롬8:21)
1) 아름다운 대자연의 건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아름다운 대자연의 건설로 묘사했습니다(사40:19,20). 사막과 모래 지대인 이스라엘 땅에서 물이 펑펑 솟아나고 들짐승들이 마음껏 물을 마시며 들에는 백화와 오곡백과로 가득한 것이 곧 천국이라는 사상이 투영된 더한 표현입니다. 환상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 밧모섬의 요한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가 흐르고 실과로 가득 찬 생명나무 열두 그루가 강 좌우에 있다고 증거했습니다(계22:1,2). 그의 예언은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것(사35:5-10)을 반영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이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자연이 잘 가꾸어지고 보존된 곳이 천국의 모형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자연을 잘 가꾸고 보존할 때 우리는 다가올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자연의 대화합
다음으로 이사야는 다가올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하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어린 사자와 육축 짐승이 어린이의 손에 이끌려 가며 사자가 소와 함께 풀을 뜯고 젖먹이 오린 아기가 독사굴에 손을 넣고 장난치는 매우 평화로우며 목가적인 풍경으로 그리고 있습니다(사11:6-9). 그리고 나의 성산에서는 해됨도 상함도 없으리라고 합니다. 이는 실로 복락원의 세계라고 해도 관언이 아닐 것입니다. 대자연 속에서 온 만물이 만족을 느끼며 화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이 땅에서 성도들이 이루어야 할 천국의 모습인 것입니다.
결론
여호와 하나님은 자연을 회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을 벌하실 때는 자연의 황폐를 통해 인간을 벌하시지만 축복하실 때는 자연을 회복하시고 촉복하십니다. 다가올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도 뚜렷이 대자연이 회복되고 낙원의 모습을 보존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우리의 삶의 기반이요 울타리인 대자연을 회복하시고 보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에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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