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본문
오늘 함께 읽었던 마태복음 28장 말씀을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이 말씀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거론할 때마다 가장 무게 있게 인용되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나 많이 들어서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땅 끝까지 전도를 하라’는 지리적인 의미 정도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좀 더 깊이 보게 되면, 여기에는 선교에 대한 엄청난 스케일이 숨어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본문에서 선교의 광대한 스케일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오늘 읽은 본문 중에 두 가지 말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모든 족속”이란 말이고, 다른 하나의 개념은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 ”는 말씀입니다.
‘족속’이란 말은 전도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 ’는 말은 전도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먼저 전도대상을 가리키는 “모든 족속”이란 말을 주의 깊게 보십시다.
족속이란 말은 영어로는 People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 말은 민족, 백성, 혹은 민중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정의에서 우리는 이미 전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개념과는 다른 점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하면 보통 전도의 대상을 개인으로 생각합니다.
전도학교와 같은 세미나 혹은 교육을 하면 개인전도훈련을 집중적으로 하고 거리에 나가서 개인을 붙들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하면서 전도 실습을 합니다.
이 처럼 전도를 한 개인을 구원하는 일로 생각해 왔습니다. 개인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이 개인전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으로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는 ‘족속’ 즉, 민족을, 그것도 “모든 민족”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개인이 전도의 대상이 아니라 민족이 전도의 대상입니다.
모든 족속, 모든 민족에게 전도하라는 이 말은 과연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기독교복음이 전파되는 당시의 세계상황을 배경으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는 로마제국이 로마군대를 동원하여 유대,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아프리카 북부에서 유럽까지 모든 소수민족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2차 대전 이전에 일본제국주의가 일본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집어 삼킴으로 부터 시작해서 만주,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평양 군도까지를 식민지로 삼던 상황과 꼭 같습니다.
로마제국은 당시 ‘로마가 이 땅위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소위 ‘팍스 로마나’ (Pax Romana)란 이념을 앞세우고 모든 족속들의 자주권, 재산권, 그리고 존엄성 등을 말살하고 로마제국의 속국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일본 역시 아시아전체가 함께 번영하자란 소위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이란 기치아래 아시아 모든 나라들의 자주권, 재산권, 그리고 존엄성을 말살하고 일본제국의 속국으로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치하에서 민족자주성도 빼앗기고, 재산도 빼앗기고, 존엄성도 빼앗기고, 역사도, 문화도, 말도 빼앗기고, 심지어 창시개명으로 이름까지 빼앗겼던 아픔을 생각해 보면, 당시 로마제국 하에 식민지화되어 가던 모든 족속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상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로마는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가치들을 전도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에 의해 전쟁이 미화되고, 폭력이 정당화되었습니다. 전쟁광이 영웅시 되었으며, 폭력이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인식되게 된 것입니다. 작은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더 큰 폭력을 정당화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배란 개념이 삶의 목표가 되고 힘이 곧, 정의가 되어버렸습니다.
빼앗는 것이 능력이요, 빼앗기는 것은 어리석음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로마제국은 전쟁, 폭력, 지배, 정복, 힘, 이런 것들이 미덕이라고 가르쳤고, 그 시대는 그러한 가치대로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전도된 로마제국의 가치관이 가르쳐지고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지상명령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 중요한 개념이 되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가르치라’는 전도의 내용에 대한 의미가 부각됩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가르침대로 살 것을 강요받고 있는 이 세대에게 다른 가르침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이 말씀을 당시 로마제국이 선전하던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염두에 두고 읽어보면 그 뜻이 더욱 선명해 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주는 평화를 말씀하셨을 때, 분명히 로마의 무력에 의한 평화를 염두에 두고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시면서 가르치신 것을 보면 로마 제국이 당시에 가르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가르침을 세상에 베푸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폭력과 억압’이 난무하는 로마제국 하에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평화와 사랑과 가르쳤던 것입니다.
‘강자의 지배 논리’가 난무하는 로마제국치하에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종처럼 섬기는 섬김의 도를 가르쳤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대립과 증오’로 가득찬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를 가르쳤습니다.
빼앗고 탈취하고 힘의 논리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끊임없이 나눔과 베풂이 진정한 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로마제국이 가르친 것과는 정반대되는 가르침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정복을 가르칠 때, 예수님은 해방과 자유를 가르쳤고
로마제국이 힘의 논리를 펼 때, 예수님은 사랑의 논리를 폈습니다.
정반대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그 ‘가르침’은 윤리적인 가르침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스라엘의 전통 속에 내려오는 종교적인 가르침으로 오해해서도 안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는 이 말씀은 곧, 너희는 가서 로마제국 하에 식민지화된 모든 민족들에게 가서, 세상, 즉 로마가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내가 분부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평화는 로마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이 역사의 주권자는 로마의 시저가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28장의 이 지상명령은 단순히 개인전도를 위한 명령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명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문화를 바꾸는 혁명적 명령입니다. 세계가치구조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는 이 말씀은
결국 당시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억눌리고 이리저리 휘둘리던 모든 소수 민족들에게 가서 바벨론제국과 같은 로마제국의 압제와, 그가 가르치는 잘못된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해방시켜 그 모든 민족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여호와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가르쳐, 여호와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자유와 존엄성과 정의와 평화를 누리게 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바벨론 제국의 현현인 로마라는 한 제국만을 대상으로 선포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지상명령은 영구불변의 명령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는 또 다른 바벨론 제국의 현현이 있을 때 마다 상기해야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인 것입니다.
진리의 백성이 진리를 빼앗기고 거짓에 의해 살아가도록 강요받을 때도 이 선교의 명령은 여지없이 선포되고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의 치하에서 주권을 빼앗기고 억압당할 때도, 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1운동은 이러한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르는 훌륭한 본보기인 것입니다.
31운동은 기독교가 주도하여 벌인 운동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회의 전국적인 조직망 덕택에 삼엄한 일본의 경계를 벗어나 서로 연락하고 비밀이 누설되지 않고, 동시다발적인 거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3. 1운동이 다른 독립운동과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비폭력적인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도 예수님이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던 로마제국의 상황, 그리고 이 지상명령을 역사화해냈던 일본제국주의 하의
3. 1운동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 속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미국이 제국화하고 있지 않나 깊은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미국 안에서 많은 신학자, 목회자들이 미국은 지금 제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국의 제국화보다 더 우려되는 상황이 이 시대에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제국주의는 국가의 개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제국주의는 한 국가의 제국화가 아니라, 다국적 기업이라는 한 회사의 제국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자유무역화를 통해 기업이 국가의 제재를 벗어나 자본이라는 무기를 통해 세계를 장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제제국화에 비하면 한 국가의 군사력에 의한 제국화는 이제 순진하게 보여질 정도입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세계화라는 틀 속에 살아가지 않으면 않되는 상황에 와 있습니다. 그 옛날 로마가 힘이 정의라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오늘날 다국적 기업들은 자본이 곧, 정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막대한 경제적 폭력 앞에 모든 민족들은 더 이상 국민들을 보호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과거에는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방패의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개 국가가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은 이미 IMF라는 경제위기를 통해 그 실체를 뼈저리게 경험하였습니다.
지금 이 자본의 힘 앞에서는 어떤 민족도 그 자주성이나 존엄성을 운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경제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경제의 메시야성입니다.
지금은 재물을 신으로 섬기도록 강요하는 그런 가르침(discourse)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지금은 경제가 모든 삶의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경제의 논리로 돌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돈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 누가 있겠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 우리들의 건강은 이미 담보로 잡혀 있고, 가족간의 대화의 시간조차 갖기 힘들며, 우리의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들의 아이들도 하루 온 종일 보육원에 맡겨지고 있습니다.
친구는 물론이거니와 부부나 부모자식의 관계에도 경제논리가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어떤 친구를 사귀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배우자를 선택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고 있습니까 부모와 자식 형제 간에 재산 문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고, 싸우고, 심지어 죽이기 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경제가 살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었습니까
마태복음 6:24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로부터 새로운 해방이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아래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돈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강요하는 맘모니즘에 대항하여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지상명령을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포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무한 경쟁이 최고의 교리가 되어 가는 이 경제제국주의 시대에 우리는 베풀고 나누며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며,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먼저 생각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민족은 그동안 근 천년을 중국이라는 제국에 조공을 바치고, 일본이라는 제국에 의해 혹독한 식민통치를 당하고, 이데올로기의 공산제국에 의해 민족적 수난을 겪고 분단의 상황 속에서 있는 한 많은 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동안 제국주의의 폭력의 가르침을 따라 다른 민족을 오랫동안 지배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고통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3. 1운동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키워냈던 민족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와서 이 아름다운 민족의 정신을 경제제국주의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힘겹더라도 믿는 우리들이 먼저 일어나 세계 모든 족속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자유가 무엇인지, 평화가 무엇인지, 자주적 존엄성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흐름이 너무나도 크다고 하여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명령과 함께 한가지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아멘.
우리가 이 명령을 따라 살다가 죽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체념하지도 맙시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인 동시에,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여 있는 그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는 확신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진리임을 확신한다면, 우리의 상황은 우리를 결코 꺼꾸러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있다면, 우리는 이미 승리자이며, 우리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3. 1절 기념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가치를 이 땅에 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도록 합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이 말씀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거론할 때마다 가장 무게 있게 인용되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나 많이 들어서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땅 끝까지 전도를 하라’는 지리적인 의미 정도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좀 더 깊이 보게 되면, 여기에는 선교에 대한 엄청난 스케일이 숨어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본문에서 선교의 광대한 스케일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오늘 읽은 본문 중에 두 가지 말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모든 족속”이란 말이고, 다른 하나의 개념은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 ”는 말씀입니다.
‘족속’이란 말은 전도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 ’는 말은 전도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먼저 전도대상을 가리키는 “모든 족속”이란 말을 주의 깊게 보십시다.
족속이란 말은 영어로는 People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 말은 민족, 백성, 혹은 민중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정의에서 우리는 이미 전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개념과는 다른 점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하면 보통 전도의 대상을 개인으로 생각합니다.
전도학교와 같은 세미나 혹은 교육을 하면 개인전도훈련을 집중적으로 하고 거리에 나가서 개인을 붙들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하면서 전도 실습을 합니다.
이 처럼 전도를 한 개인을 구원하는 일로 생각해 왔습니다. 개인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이 개인전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것으로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는 ‘족속’ 즉, 민족을, 그것도 “모든 민족”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개인이 전도의 대상이 아니라 민족이 전도의 대상입니다.
모든 족속, 모든 민족에게 전도하라는 이 말은 과연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기독교복음이 전파되는 당시의 세계상황을 배경으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는 로마제국이 로마군대를 동원하여 유대,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아프리카 북부에서 유럽까지 모든 소수민족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2차 대전 이전에 일본제국주의가 일본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집어 삼킴으로 부터 시작해서 만주,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평양 군도까지를 식민지로 삼던 상황과 꼭 같습니다.
로마제국은 당시 ‘로마가 이 땅위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소위 ‘팍스 로마나’ (Pax Romana)란 이념을 앞세우고 모든 족속들의 자주권, 재산권, 그리고 존엄성 등을 말살하고 로마제국의 속국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일본 역시 아시아전체가 함께 번영하자란 소위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이란 기치아래 아시아 모든 나라들의 자주권, 재산권, 그리고 존엄성을 말살하고 일본제국의 속국으로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치하에서 민족자주성도 빼앗기고, 재산도 빼앗기고, 존엄성도 빼앗기고, 역사도, 문화도, 말도 빼앗기고, 심지어 창시개명으로 이름까지 빼앗겼던 아픔을 생각해 보면, 당시 로마제국 하에 식민지화되어 가던 모든 족속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상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로마는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가치들을 전도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에 의해 전쟁이 미화되고, 폭력이 정당화되었습니다. 전쟁광이 영웅시 되었으며, 폭력이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인식되게 된 것입니다. 작은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더 큰 폭력을 정당화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배란 개념이 삶의 목표가 되고 힘이 곧, 정의가 되어버렸습니다.
빼앗는 것이 능력이요, 빼앗기는 것은 어리석음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로마제국은 전쟁, 폭력, 지배, 정복, 힘, 이런 것들이 미덕이라고 가르쳤고, 그 시대는 그러한 가치대로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전도된 로마제국의 가치관이 가르쳐지고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지상명령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 중요한 개념이 되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가르치라’는 전도의 내용에 대한 의미가 부각됩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가르침대로 살 것을 강요받고 있는 이 세대에게 다른 가르침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이 말씀을 당시 로마제국이 선전하던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염두에 두고 읽어보면 그 뜻이 더욱 선명해 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주는 평화를 말씀하셨을 때, 분명히 로마의 무력에 의한 평화를 염두에 두고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시면서 가르치신 것을 보면 로마 제국이 당시에 가르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가르침을 세상에 베푸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폭력과 억압’이 난무하는 로마제국 하에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평화와 사랑과 가르쳤던 것입니다.
‘강자의 지배 논리’가 난무하는 로마제국치하에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종처럼 섬기는 섬김의 도를 가르쳤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대립과 증오’로 가득찬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를 가르쳤습니다.
빼앗고 탈취하고 힘의 논리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끊임없이 나눔과 베풂이 진정한 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로마제국이 가르친 것과는 정반대되는 가르침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정복을 가르칠 때, 예수님은 해방과 자유를 가르쳤고
로마제국이 힘의 논리를 펼 때, 예수님은 사랑의 논리를 폈습니다.
정반대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그 ‘가르침’은 윤리적인 가르침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스라엘의 전통 속에 내려오는 종교적인 가르침으로 오해해서도 안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는 이 말씀은 곧, 너희는 가서 로마제국 하에 식민지화된 모든 민족들에게 가서, 세상, 즉 로마가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내가 분부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평화는 로마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이 역사의 주권자는 로마의 시저가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28장의 이 지상명령은 단순히 개인전도를 위한 명령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명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문화를 바꾸는 혁명적 명령입니다. 세계가치구조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는 이 말씀은
결국 당시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억눌리고 이리저리 휘둘리던 모든 소수 민족들에게 가서 바벨론제국과 같은 로마제국의 압제와, 그가 가르치는 잘못된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해방시켜 그 모든 민족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여호와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가르쳐, 여호와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자유와 존엄성과 정의와 평화를 누리게 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바벨론 제국의 현현인 로마라는 한 제국만을 대상으로 선포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지상명령은 영구불변의 명령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는 또 다른 바벨론 제국의 현현이 있을 때 마다 상기해야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인 것입니다.
진리의 백성이 진리를 빼앗기고 거짓에 의해 살아가도록 강요받을 때도 이 선교의 명령은 여지없이 선포되고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의 치하에서 주권을 빼앗기고 억압당할 때도, 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1운동은 이러한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르는 훌륭한 본보기인 것입니다.
31운동은 기독교가 주도하여 벌인 운동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회의 전국적인 조직망 덕택에 삼엄한 일본의 경계를 벗어나 서로 연락하고 비밀이 누설되지 않고, 동시다발적인 거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3. 1운동이 다른 독립운동과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비폭력적인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도 예수님이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던 로마제국의 상황, 그리고 이 지상명령을 역사화해냈던 일본제국주의 하의
3. 1운동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 속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미국이 제국화하고 있지 않나 깊은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미국 안에서 많은 신학자, 목회자들이 미국은 지금 제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국의 제국화보다 더 우려되는 상황이 이 시대에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제국주의는 국가의 개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제국주의는 한 국가의 제국화가 아니라, 다국적 기업이라는 한 회사의 제국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자유무역화를 통해 기업이 국가의 제재를 벗어나 자본이라는 무기를 통해 세계를 장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제제국화에 비하면 한 국가의 군사력에 의한 제국화는 이제 순진하게 보여질 정도입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세계화라는 틀 속에 살아가지 않으면 않되는 상황에 와 있습니다. 그 옛날 로마가 힘이 정의라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오늘날 다국적 기업들은 자본이 곧, 정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막대한 경제적 폭력 앞에 모든 민족들은 더 이상 국민들을 보호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과거에는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방패의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개 국가가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은 이미 IMF라는 경제위기를 통해 그 실체를 뼈저리게 경험하였습니다.
지금 이 자본의 힘 앞에서는 어떤 민족도 그 자주성이나 존엄성을 운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경제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경제의 메시야성입니다.
지금은 재물을 신으로 섬기도록 강요하는 그런 가르침(discourse)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지금은 경제가 모든 삶의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경제의 논리로 돌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돈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 누가 있겠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 우리들의 건강은 이미 담보로 잡혀 있고, 가족간의 대화의 시간조차 갖기 힘들며, 우리의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들의 아이들도 하루 온 종일 보육원에 맡겨지고 있습니다.
친구는 물론이거니와 부부나 부모자식의 관계에도 경제논리가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어떤 친구를 사귀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배우자를 선택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고 있습니까 부모와 자식 형제 간에 재산 문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고, 싸우고, 심지어 죽이기 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경제가 살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었습니까
마태복음 6:24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로부터 새로운 해방이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아래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돈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강요하는 맘모니즘에 대항하여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지상명령을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포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무한 경쟁이 최고의 교리가 되어 가는 이 경제제국주의 시대에 우리는 베풀고 나누며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며,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먼저 생각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민족은 그동안 근 천년을 중국이라는 제국에 조공을 바치고, 일본이라는 제국에 의해 혹독한 식민통치를 당하고, 이데올로기의 공산제국에 의해 민족적 수난을 겪고 분단의 상황 속에서 있는 한 많은 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동안 제국주의의 폭력의 가르침을 따라 다른 민족을 오랫동안 지배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고통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3. 1운동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키워냈던 민족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와서 이 아름다운 민족의 정신을 경제제국주의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힘겹더라도 믿는 우리들이 먼저 일어나 세계 모든 족속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자유가 무엇인지, 평화가 무엇인지, 자주적 존엄성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흐름이 너무나도 크다고 하여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명령과 함께 한가지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아멘.
우리가 이 명령을 따라 살다가 죽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체념하지도 맙시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인 동시에,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여 있는 그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는 확신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진리임을 확신한다면, 우리의 상황은 우리를 결코 꺼꾸러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있다면, 우리는 이미 승리자이며, 우리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3. 1절 기념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가치를 이 땅에 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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