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출애굽운동과 3.1운동
본문
3. 1절입니다. 때가 때인만큼 그 의미가 그 어느때보다도 절실합니다. 지금 이 나라에 무엇보다도 제 2의
3. 1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거족적인 애국운동 그리고 민족정신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지금 이 나라는 엉망진창이라고 표현해도 좋겠습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되어지는게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 위정자들이 그러합니다. 제2의 이완영패거리 싸움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마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위해서 혈안이 되어 날뜁니다. 나라의 위기와 어려운 것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권력쟁취만을 위해서 이전투구,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국민 또한 그러합니다. 일부 특권층 상류층에 행태이기도 합니다마는 너무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의 사치와 수입품 경쟁으로 인해서 이달 외화수지가 14억불이나 적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나라 경제성장에 빨간 불이 켜져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할 말이 없습니다. 지난날 조국 근대화를 주도해 왔던 우리 한국교회 모습이 이제는 찾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나라 모든 부정과 부패의 중심부에 반드시 우리 크리스챤들이 끼어있다는 것이 비통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3. 1정신, 3. 1운동의 부활은 너무도 절실합니다.
지금부터 81년전 침략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그 때 우리 민족이 일으켰던 거족적인 독립운동, 국민운동, 정신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때 독립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본의 침략사를 조금 요약해 봅니다.
임진왜란때부터 시작된 일본의 침략근성, 드디어 1876년 한일 수호조약으로 노골화됩니다. 그후 1904년에 한일의정서 교환이라는 것을 통해서 더욱더 구체화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일본군의 작전편리를 위해서 토지와 인력을 징발 당했습니다. 그후 1년후인 1905년 그 원한의 을사보호조약을 우리가 어찌 잊겠습니까. 일본의 외무대신 이등박문이 우리의 국왕 고종황제를 위협하고 또 대신들을 매수해서 체결한 족약입니다. 우리나라를 보호해 준다는 명분아래 이 나라 외교의 행정 일체를 다 간섭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5년후인 1910년 소위 한일합병을 통해서 이 나라를 완전히 식민지화했습니다. 국토, 국권, 국어도 다 빼앗았습니다. 그밖에 모두 다 빼앗기는 망국의 설음을 우리는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후부터 우리 민족을 향한 일본의 만행은 너무도 잔혹했습니다. 무자비한 인권탄압이며, 곡물과 노동수탈 등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이 백성들 드디어 1919년 3월1일에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때마침 고종황제가 승하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계기로 해서 나라 잃은 이 백성은 거룩한 분노를 폭발합니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나가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본에 항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자비한 사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과 액구잗르이 희생되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 운동은 일본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독립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 독립운동의 정신과 열기가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계속 불타 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해에 망명정부를 세웠습니다. 독립군을 조직해서 끈질기게 일본에게 저항합니다. 그리고 온 세계와 유엔에 독립을 호소해서 마침내 1945년에 광복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민족이 3. 1운동 때 뿌렸던 애국의 씨앗이 맺은 아름다운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3. 1운동이야말로 위대한 민족의 대행진이었습니다. 거룩한 민족의 대 함성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민족은 3. 1운동을 통해서 이제껏 지지리도 못나빠진 부끄러운 민족성을 말끔히 씻어버린 것입니다. 위대한 자주민족으로 새롭게 세계사에 부상된 것입니다.
3. 1운동이야말로 이 나라 반만년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민족의 대정신 혁명이었습니다. 우리 한번 진솔하게 매우 진솔하게 우리 역사를 봅시다. 과연 어떤 역사겠습니까 편견없이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무엇하나 자랑할 것이 없는 역사였습니다. 이 나라 역대왕들, 오직 체제 유지를 위해서 혈안이 되어서 무지비한 살상만을 일삼아왔습니다. 인 라 엘리트 계층들, 소위 학자나 양반계층, 자기들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추잡한 권모술수, 당쟁만을 일삼아 왔습니다. 언제 그부늗ㄹ이 백성을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이 백성들 어떠했습니까 불의한 권력에 항거할 줄 몰랐습니다. 비열한 아첨만을 거듭해 온게 사실입니다. 텔레비전 사극을 보아도 그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이 나라 역사는 수치와 오욕의 역사였습니다. 후손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부끄러운 역사였습니다. 무슨 역사가 그토록 권모와 술수가 많습니까 분열과 분쟁이 많습니까. 보복과 살육으로 얼룩졌단 말입니까. 이런 역사를 우리 자녀들에게 어떻게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연애물이나 요사이 방영하는 왕과비 같은 사극은 안보지만 우리 자녀들에 볼까 두렵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야생마같이 거칠기만 한 그들에게 그 추하고 무지바한 꼴을 보여 주어서 어찌하자는 겁니까. 무슨 교육적인 효과가 있어요. 차라리 포르노영화를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런 부끄러운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지난날 우리 역사의 현주소였습니다.
그러나 기미년 3. 1운동만은 다릅니다. 이 나라 민족사에 가장 자랑스럽고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진실로 3. 1운동사로서 지난날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말끔히 씻어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세계 그 어떤 민족보다도 위대한 민족임을 세계 만방에 과시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3. 1운동 사상은 우리 후손들에게 길이길이 물려 주어야할 자랑스런 역사였습니다. 특별히 3. 1운동의 정신이 자랑스럽고 고귀했습니다. 자유와 평화, 정의와 양심의 정신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더 자랑스러운게 있습니다. 이 3. 1운동의 주역이 바로 우리 한국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민족 대행진에 우리 한국교회가 맨 선두에 섰다는 것입니다. 이 자랑스런 민족의 대정신 혁명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의 편견이나 독단이 아닙니다. 너무도 명백한 역사적인 실증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독립협회라는 단체가 결성되었습니다. 그 단체는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같은 크리스챤들에 의해서 결성된 것입니다. 1904년 3. 1운동때 독립선언문 작성자 33인 중에 그 절반이 바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또한
3. 1운동에 참가한 기관도, 학교도 절대다수가 기독교 기관과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3. 1운동 때 희생당한 희생자의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3. 1운동의 주역은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때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처럼 교세가 크지 않았습니다. 전 인류의 1%밖에 안되는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는 3. 1운동이라는 민족 대정신 혁명을 주도했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우리닌 이같은 자랑스러운 교회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자랑스러운 한국교회사를 지나간 과거로만 돌리고 말 것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역사를 계승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그 때 선배들처럼 투철한 애국심으로 이 민족의 정신혁명을 주도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시대의 명령입니다. 우리 신앙과 양심의 명령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나라 현실은 그 어느때보다도 절박하게 제2의 3. 1정신과 운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정신과 운동이 아니고서는 오늘 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번 3. 1절은 그 어느때보다도 감회가 깊은 것입니다.
그럼 좀더 생각해 봅시다. 오늘에 다시 일어날 3. 1정신과 운동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의 3. 1운동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운동과 비교될 수있습니다. 그 정신과 내용이 비슷합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출애굽운동은 정치적인 해방과 함께 영적인 해방 그리고 후속운동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운동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족장 야곱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 이주합니다. 거기서 강성한 민족을 이룹니다. 이를 두려워한 애굽왕이 이스라엘 민족 말살정책을 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양심과 자유와 인권을 박탈해서 철저하게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재로도 안주고 벽돌을 만들라는 고역을 시킵니다. 이스라엘 인구증가를 막기 위해서 신생아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신음소리, 통곡소리가 애굽천지를 뒤덮습니다. 이 평면의 세계에 누구도 그 소리를 들어주는 자 없었지만 하늘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내리라" 모세는 이 말씀을 듣고 애굽왕에게 갔습니다.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강퍅한 애굽왕, 모세의 요구를 선뜻 들어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전보다 더 억압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완력이 다할때까지 발악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민족의 구출운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세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애굽의 전역에 10가지 재앙을 내려서 애굽왕을 굴복시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마침내 출애굽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운동인데 우리의 3. 1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점이 많습니다. 물론 이 두 운동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 유사하고 상통하는 점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자유운동, 인권운동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애굽의 노예가 되어서 자유와 인권을 완전히 유린당한 이스라엘 백성들, 거기서 구원한 운동이 바로 출애굽 운동입니다.
우리의 3. 1운동도 그러합니다. 일본식민지의 통치아래 완전히 자유와 인권을 박탈당한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으킨 운동이 바로 3. 1운동입니다. 그러기에 독립선언문 첫머리에 분명히 밝혀집니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인과 자유인임을 엄숙히 선언하노라. 우리는 우리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발번을 위해서 독립임을 주장하는 밥니다. 우리가 생존권마저 빼앗긴 게 무릇 얼마이며 겨레의 존엄성이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인가. " 절절이 자유와 인권에 대한 언급이었습니다.
3. 1운동이야말로 자유 운동입니다. 그리고 인권운동이었습니다. 우리 선배들은 무척이나 자유를 사랑했고 인권을 중시한 자유인이었습니다. 돈보다, 명예보다 향락보다, 풍요보다 자유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그분들은 3. 1운동 때 자유 그것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일본이 얼마나 교활합니까. 한일합병 당시 우리 경제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산업은 영세합니다. 백성들은 기아에 허덕입니다. 국고는 바닥이 났습니다. 이 때 일본은 그것을 알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너희에게 먹을 것을 줄테니 자유를 내 놓아라.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지 자유가 밥 먹여주느냐. " 자유를 포기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완용같은 매국노는 그 말에 넘어가서 그들에게 나라를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자유와 인권만 빼앗긴게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 다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해 3. 1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맞습니다. 자유와 인권을 다 포기하면 인권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 다 포기해도 자유와 인권만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목숨걸고 최후까지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입니다.
자유와 인권이란 여호와 하나님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빼앗는 자가 있다면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적이요, 우리의 적입니다. 대항해서 싸워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 없으면 아무리 배부르게 산다 할지라도 짐승의 삶이지 참된 인간의 삶은 아닙니다. 우리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으로 살아 남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잘 사는 선진국, 행복한 이상사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사는 사회가 아닙니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입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해도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는 사회는 절대로 행복한 이상사회는 될 수가 없습니다 . 국민소득이 높다고 해서 선진국이 아닙니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선진국입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사회는 반드시 경제적으로 풍요한 선진사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자유와 인권이 박탈된 사회는 반드시 경제적으로도 문제가 있습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을 보면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구에 선진국들을 보면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인권과 경제적인 풍요는 정확하게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와 인권 존중에 앞장서야 합니다.
3. 1운동 때 우리 선배들이 보여줬던 그 일을 오늘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펴나가야 합니다. 그 어떤 권력와 세력도 우리에게서 자유와 인권을 빼앗지 못하도록 우리는 지켜야 합니다.
다음으로 출애굽운동과 3. 1운동은 양심과 정의운동이라는 면에서 서로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원했던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양심의자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3. 1운동도 그러했습니다. 양심운동, 정의운동이었습니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억압된 정의와 양심을 되찾겠다는 몸부림, 그것은 3. 1운동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독립선언문을 보면은 양심이라는 말이 수 없이 반복됩니다.
"사람의 양심으로 이것을 드러내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요, 시대의 대세라. 우리는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도가 지술려 사는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노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가 되고 인륜 도덕이 우리의 무기가 되나니, 그 어떤 힘인들 꺽지 못하리라. 우리는 엄숙한 양심의 명령에 따라서 자기집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려 하노라.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함께 전진하노라.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3. 1운동은 다른 운동이 아닙니다. 양심운동, 정의운동입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 따라서 민족적 양심 운동을 일으켜 세우려는 아름다운 양심운동입니다. 진실로 우리의 선열들은 양심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절실한 운동입니까. 오늘 우리 민족에게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생각합시다. 과연 우리 민족, 그 누구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위정자들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기업인들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지식인들이 양심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정말 양심을 도적맞은 양심 부재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결코 인간 사회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왜 고귀한 것입니까 양심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하늘에 별이 빛나서 아름다운 것이고, 우리의 인간은 양심이라는 별이 빛나서 아름다운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양심은 마음의 눈이라, 인생의 등불이라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권했습니다. 너희는 믿음과 함께 착한 양심을 가지라 했습니다 . 맞습니다. 믿음고 양심은 한 수레에 두 바퀴입니다. 서로 분리될래야 분리될 수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양심따라 사는 것입니다. 양심은 영혼의 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양심의 귀에 대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양심에 들려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물론 그 양심은 살아있는 양심입니다. 인간은 양심의 소리를 들을 자유도 있고, 안들을 자유도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고 안 듣는 것은 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양심의 소리를 안 듣고 거부하는 것은 무서운 심판과 저주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아담이 양심의 소리를 거부하다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합니다. 헤롯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다가 벌레에 먹혀 죽습니다. 가룟유다가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다가 마침내 목메어 죽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고 귀히 여길 것은 양심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양심의 결단 속에서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서 행동해야 합니다. 내가 만약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천천의 원수들이 칼을 들고 에워싸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 그러나 내가 만약ㄱ에 양심에 부끄러움이 있다면 만만의 천사들이 나를 호위한다 할지라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
양심이란 뭡니까 양심은 참 묘한 것입니다. 그것 쓰지 않으면 녹이 쓸고 죽어 버리고 맙니다. 개구리를 솥에 넣고 그가 좋아하는 초여름 놋물과 같은 온도를 맞춰 놓습니다 . 그러다 솥뚜껑을 열면요 거기서 튀어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엎드려 있습니다. 서서히 불을 때서 온도를 높입니다. 그래도 뜨거움을 모르고 그대로 엎드려 있습니다. 드디어 물이 끓습니다. 그리고 몸이 익어버리고 맙니다. 그때에도 거기서 뛰쳐나올 생각도 않고 눈만 말똥거리다가 죽고 맙니다. 우리 양심이라는 것이 바로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다보면 그 양심이 점점 무디어 지고 맙니다 감각이 무디어져서 아무리 자극을 해도 반응을 않다가 죽고 맙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소리는 처음부터 민감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야 합니다. 한번 양심이 죽고 나면 그 어떤 자극에도 소용없습니다.
따라서 희망이 없습니다. 때는 늦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둘러서 양심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3. 1운동은 양심운동입니다. 민족의 양심운동입니다. 사회 지도층의 양심운동입니다. 교회의 양심운동입니다. 때가 때인만큼 우리 모두 이 양심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또한 출애굽운동과 3. 1운동은 민족 대 단합운동이라는 데서 일치합니다. 보십시오. 갑작스럽게 모세가 출애굽을 선언합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 한 사람도 불복하지 않습니다. 백만이나 넘는 민족이 하나같이 출애굽의 대열에 섰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단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들에게 이같은 단결이 없었다면 출애굽의 역사는 절대 불가능했습니다. 애굽의 노예생활은 자자손손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진실로 출애굽의 성공은 바로 민족 대단합의 길이었습니다.
3. 1운동 때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철통같이 단결했습니다. 역사상 단 한번도 민족 단합이 없었던 우리나라, 분열과 분쟁만 일삼던 우리 민족이 그 때만은 기막히게 단결했습니다. 남,여, 상,하, 지방파당이 단결했습니다. 빈부귀천, 유,무식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로 얼싸안고 위로 격려하면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날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닙니다. 강요당해서도 아닙니다. 국가 위기 앞에서 민족적 양심의 발로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오직 나라 사랑, 구국의 일념에서 이루어진 성스러운 단결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나라에 다시 한 번 일어나야 할 절대절명의 정신 혁명이 아닙니까. 보시다시피 지금 이 나라는 사분오열 되었습니다. 위험수위를 훨씬 넘는 분열과 분쟁만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국민이 그러합니다. 정당과 정치인이 그러합니다 노사와 이익단체들이 그러합니다. 나라가 이토록 어려운데 나뉘어서 싸움질만 하고 있습니다. 위기를 대처할 능력을 이미 상실해 버렸습니다. 대동단결해도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까 말까인데 서로 나뉘어 싸움만 하고 있으니 무슨 소망이 있는 것입니까. 이유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3. 1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싸움을 그치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3. 1운동 때에 이 민족이 보여준 그 위대한 민족 대단합 운동이 다시 한 번 일어나야 합니다. 사소한 이권과 이기심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순수한 민족적인 양심으로 돌아가서 뭉쳐야 합니다. 정부와 국민이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정당과 정당이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노사와 이익단체들이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이보다 먼저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로 뭉쳐야 할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성령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분명한 역사의식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매국노는 다른 게 아니라 민족단결을 해치는 자입니다. 오늘의 사탄운동은 다른 게 아니라 일치를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3. 1운동과 출애굽 운동은 순수한 애국운동이라는 데서 일치합니다. 지도자 모세를 보십시오. 그 얼마나 애국자였습니까.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왕좌의 영화를 버리고 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즐거워했다 했습니다
3. 1운동 때 우리 민족도 그러했습니다 . 그 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독립운동을 그만두면 일본에게 아첨만 하고 적당적당히 살면 다 출세 성공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서 독립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때 애국운동, 오늘에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이보다 더 절실한 운동은 없습니다.
저는 통탄하면서 생각합니다. 오늘 이 나라 정치가들 중에 도산 안창호 선생같은 애국자가 몇 사람만 있었던들 이 나라 정치판이 이 지경이 될 수는 없으리라. 저마다 권력에 혈안이된 정치몰이배들만 있기 때문에 나라가 이 꼴 되고 말았습니다. 진실로 이 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애국심을 원하고 있습니다 . 이것없이 오늘의 위기는 극복되지 않습니다.
1945년 전쟁에 패한 일본이 우리 곁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온다. " 무슨 뜻입니까. 그 때도 그들은 재침의 야욕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재침은 무력적인 재침이 아니라 경제적인 침략임에 틀림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의 말은 적중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무역 자유화로 인해서 일본상품이 우리 시장에 홍수처럼 떠밀려 있습니다. 이렇게 나가면 언젠가 우리의 경제는 일본 경제에 예속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의 매국노는 일본상품을 사들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애국운동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국산품 애용하는 것 같은 것들입니다. 무절제한 과소비 자제하고 근검절약 하는 것도 대단한 애국입니다. 물론 외국상품도 적당히 사줘야 우리 상품도 외국에 팔수 있지요. 소비도 적당히 해줘야 생산도, 시장도,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절제한 과소비, 지나친 호화 사치품, 수입 경쟁은 매우 비 애국적인 행동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애국의 길이 어찌 그 뿐이겠습니까. 이것은 매우 지엽적인 것이고 보다 근원적이고 차원 높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도 애국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는 것도 애국입니다.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도 애국입니다 이나라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는 것도 애국입니다. 자원을 아끼고 환경을 보호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애국입니다 . 이 모든 일들 3. 1운동 때 그 애국정신으로 앞장서야 될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이기적이고 자기 지향적인 삶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웃과 사회를 생각하고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고 그리고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런 가치관으로서의 중생,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3. 1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거족적인 애국운동 그리고 민족정신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지금 이 나라는 엉망진창이라고 표현해도 좋겠습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되어지는게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 위정자들이 그러합니다. 제2의 이완영패거리 싸움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마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위해서 혈안이 되어 날뜁니다. 나라의 위기와 어려운 것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권력쟁취만을 위해서 이전투구,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국민 또한 그러합니다. 일부 특권층 상류층에 행태이기도 합니다마는 너무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의 사치와 수입품 경쟁으로 인해서 이달 외화수지가 14억불이나 적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나라 경제성장에 빨간 불이 켜져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할 말이 없습니다. 지난날 조국 근대화를 주도해 왔던 우리 한국교회 모습이 이제는 찾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나라 모든 부정과 부패의 중심부에 반드시 우리 크리스챤들이 끼어있다는 것이 비통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3. 1정신, 3. 1운동의 부활은 너무도 절실합니다.
지금부터 81년전 침략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그 때 우리 민족이 일으켰던 거족적인 독립운동, 국민운동, 정신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때 독립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본의 침략사를 조금 요약해 봅니다.
임진왜란때부터 시작된 일본의 침략근성, 드디어 1876년 한일 수호조약으로 노골화됩니다. 그후 1904년에 한일의정서 교환이라는 것을 통해서 더욱더 구체화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일본군의 작전편리를 위해서 토지와 인력을 징발 당했습니다. 그후 1년후인 1905년 그 원한의 을사보호조약을 우리가 어찌 잊겠습니까. 일본의 외무대신 이등박문이 우리의 국왕 고종황제를 위협하고 또 대신들을 매수해서 체결한 족약입니다. 우리나라를 보호해 준다는 명분아래 이 나라 외교의 행정 일체를 다 간섭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5년후인 1910년 소위 한일합병을 통해서 이 나라를 완전히 식민지화했습니다. 국토, 국권, 국어도 다 빼앗았습니다. 그밖에 모두 다 빼앗기는 망국의 설음을 우리는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후부터 우리 민족을 향한 일본의 만행은 너무도 잔혹했습니다. 무자비한 인권탄압이며, 곡물과 노동수탈 등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이 백성들 드디어 1919년 3월1일에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때마침 고종황제가 승하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계기로 해서 나라 잃은 이 백성은 거룩한 분노를 폭발합니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나가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본에 항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자비한 사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과 액구잗르이 희생되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 운동은 일본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독립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 독립운동의 정신과 열기가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계속 불타 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해에 망명정부를 세웠습니다. 독립군을 조직해서 끈질기게 일본에게 저항합니다. 그리고 온 세계와 유엔에 독립을 호소해서 마침내 1945년에 광복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민족이 3. 1운동 때 뿌렸던 애국의 씨앗이 맺은 아름다운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3. 1운동이야말로 위대한 민족의 대행진이었습니다. 거룩한 민족의 대 함성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민족은 3. 1운동을 통해서 이제껏 지지리도 못나빠진 부끄러운 민족성을 말끔히 씻어버린 것입니다. 위대한 자주민족으로 새롭게 세계사에 부상된 것입니다.
3. 1운동이야말로 이 나라 반만년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민족의 대정신 혁명이었습니다. 우리 한번 진솔하게 매우 진솔하게 우리 역사를 봅시다. 과연 어떤 역사겠습니까 편견없이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무엇하나 자랑할 것이 없는 역사였습니다. 이 나라 역대왕들, 오직 체제 유지를 위해서 혈안이 되어서 무지비한 살상만을 일삼아왔습니다. 인 라 엘리트 계층들, 소위 학자나 양반계층, 자기들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추잡한 권모술수, 당쟁만을 일삼아 왔습니다. 언제 그부늗ㄹ이 백성을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이 백성들 어떠했습니까 불의한 권력에 항거할 줄 몰랐습니다. 비열한 아첨만을 거듭해 온게 사실입니다. 텔레비전 사극을 보아도 그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이 나라 역사는 수치와 오욕의 역사였습니다. 후손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부끄러운 역사였습니다. 무슨 역사가 그토록 권모와 술수가 많습니까 분열과 분쟁이 많습니까. 보복과 살육으로 얼룩졌단 말입니까. 이런 역사를 우리 자녀들에게 어떻게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연애물이나 요사이 방영하는 왕과비 같은 사극은 안보지만 우리 자녀들에 볼까 두렵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야생마같이 거칠기만 한 그들에게 그 추하고 무지바한 꼴을 보여 주어서 어찌하자는 겁니까. 무슨 교육적인 효과가 있어요. 차라리 포르노영화를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런 부끄러운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지난날 우리 역사의 현주소였습니다.
그러나 기미년 3. 1운동만은 다릅니다. 이 나라 민족사에 가장 자랑스럽고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진실로 3. 1운동사로서 지난날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말끔히 씻어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세계 그 어떤 민족보다도 위대한 민족임을 세계 만방에 과시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3. 1운동 사상은 우리 후손들에게 길이길이 물려 주어야할 자랑스런 역사였습니다. 특별히 3. 1운동의 정신이 자랑스럽고 고귀했습니다. 자유와 평화, 정의와 양심의 정신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더 자랑스러운게 있습니다. 이 3. 1운동의 주역이 바로 우리 한국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민족 대행진에 우리 한국교회가 맨 선두에 섰다는 것입니다. 이 자랑스런 민족의 대정신 혁명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의 편견이나 독단이 아닙니다. 너무도 명백한 역사적인 실증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독립협회라는 단체가 결성되었습니다. 그 단체는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같은 크리스챤들에 의해서 결성된 것입니다. 1904년 3. 1운동때 독립선언문 작성자 33인 중에 그 절반이 바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또한
3. 1운동에 참가한 기관도, 학교도 절대다수가 기독교 기관과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3. 1운동 때 희생당한 희생자의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3. 1운동의 주역은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때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처럼 교세가 크지 않았습니다. 전 인류의 1%밖에 안되는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는 3. 1운동이라는 민족 대정신 혁명을 주도했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우리닌 이같은 자랑스러운 교회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자랑스러운 한국교회사를 지나간 과거로만 돌리고 말 것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역사를 계승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그 때 선배들처럼 투철한 애국심으로 이 민족의 정신혁명을 주도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시대의 명령입니다. 우리 신앙과 양심의 명령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나라 현실은 그 어느때보다도 절박하게 제2의 3. 1정신과 운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정신과 운동이 아니고서는 오늘 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번 3. 1절은 그 어느때보다도 감회가 깊은 것입니다.
그럼 좀더 생각해 봅시다. 오늘에 다시 일어날 3. 1정신과 운동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의 3. 1운동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운동과 비교될 수있습니다. 그 정신과 내용이 비슷합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출애굽운동은 정치적인 해방과 함께 영적인 해방 그리고 후속운동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운동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족장 야곱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 이주합니다. 거기서 강성한 민족을 이룹니다. 이를 두려워한 애굽왕이 이스라엘 민족 말살정책을 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양심과 자유와 인권을 박탈해서 철저하게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재로도 안주고 벽돌을 만들라는 고역을 시킵니다. 이스라엘 인구증가를 막기 위해서 신생아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신음소리, 통곡소리가 애굽천지를 뒤덮습니다. 이 평면의 세계에 누구도 그 소리를 들어주는 자 없었지만 하늘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내리라" 모세는 이 말씀을 듣고 애굽왕에게 갔습니다.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강퍅한 애굽왕, 모세의 요구를 선뜻 들어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전보다 더 억압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완력이 다할때까지 발악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민족의 구출운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세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애굽의 전역에 10가지 재앙을 내려서 애굽왕을 굴복시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마침내 출애굽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운동인데 우리의 3. 1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점이 많습니다. 물론 이 두 운동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 유사하고 상통하는 점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자유운동, 인권운동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애굽의 노예가 되어서 자유와 인권을 완전히 유린당한 이스라엘 백성들, 거기서 구원한 운동이 바로 출애굽 운동입니다.
우리의 3. 1운동도 그러합니다. 일본식민지의 통치아래 완전히 자유와 인권을 박탈당한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으킨 운동이 바로 3. 1운동입니다. 그러기에 독립선언문 첫머리에 분명히 밝혀집니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인과 자유인임을 엄숙히 선언하노라. 우리는 우리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발번을 위해서 독립임을 주장하는 밥니다. 우리가 생존권마저 빼앗긴 게 무릇 얼마이며 겨레의 존엄성이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인가. " 절절이 자유와 인권에 대한 언급이었습니다.
3. 1운동이야말로 자유 운동입니다. 그리고 인권운동이었습니다. 우리 선배들은 무척이나 자유를 사랑했고 인권을 중시한 자유인이었습니다. 돈보다, 명예보다 향락보다, 풍요보다 자유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그분들은 3. 1운동 때 자유 그것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일본이 얼마나 교활합니까. 한일합병 당시 우리 경제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산업은 영세합니다. 백성들은 기아에 허덕입니다. 국고는 바닥이 났습니다. 이 때 일본은 그것을 알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너희에게 먹을 것을 줄테니 자유를 내 놓아라.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지 자유가 밥 먹여주느냐. " 자유를 포기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완용같은 매국노는 그 말에 넘어가서 그들에게 나라를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자유와 인권만 빼앗긴게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 다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해 3. 1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맞습니다. 자유와 인권을 다 포기하면 인권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 다 포기해도 자유와 인권만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목숨걸고 최후까지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입니다.
자유와 인권이란 여호와 하나님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빼앗는 자가 있다면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적이요, 우리의 적입니다. 대항해서 싸워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 없으면 아무리 배부르게 산다 할지라도 짐승의 삶이지 참된 인간의 삶은 아닙니다. 우리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으로 살아 남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잘 사는 선진국, 행복한 이상사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사는 사회가 아닙니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입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해도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는 사회는 절대로 행복한 이상사회는 될 수가 없습니다 . 국민소득이 높다고 해서 선진국이 아닙니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선진국입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사회는 반드시 경제적으로 풍요한 선진사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자유와 인권이 박탈된 사회는 반드시 경제적으로도 문제가 있습니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을 보면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구에 선진국들을 보면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인권과 경제적인 풍요는 정확하게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와 인권 존중에 앞장서야 합니다.
3. 1운동 때 우리 선배들이 보여줬던 그 일을 오늘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펴나가야 합니다. 그 어떤 권력와 세력도 우리에게서 자유와 인권을 빼앗지 못하도록 우리는 지켜야 합니다.
다음으로 출애굽운동과 3. 1운동은 양심과 정의운동이라는 면에서 서로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원했던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양심의자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3. 1운동도 그러했습니다. 양심운동, 정의운동이었습니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억압된 정의와 양심을 되찾겠다는 몸부림, 그것은 3. 1운동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독립선언문을 보면은 양심이라는 말이 수 없이 반복됩니다.
"사람의 양심으로 이것을 드러내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요, 시대의 대세라. 우리는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도가 지술려 사는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노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가 되고 인륜 도덕이 우리의 무기가 되나니, 그 어떤 힘인들 꺽지 못하리라. 우리는 엄숙한 양심의 명령에 따라서 자기집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려 하노라.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함께 전진하노라.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3. 1운동은 다른 운동이 아닙니다. 양심운동, 정의운동입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 따라서 민족적 양심 운동을 일으켜 세우려는 아름다운 양심운동입니다. 진실로 우리의 선열들은 양심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절실한 운동입니까. 오늘 우리 민족에게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생각합시다. 과연 우리 민족, 그 누구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위정자들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기업인들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지식인들이 양심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정말 양심을 도적맞은 양심 부재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결코 인간 사회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왜 고귀한 것입니까 양심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하늘에 별이 빛나서 아름다운 것이고, 우리의 인간은 양심이라는 별이 빛나서 아름다운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양심은 마음의 눈이라, 인생의 등불이라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권했습니다. 너희는 믿음과 함께 착한 양심을 가지라 했습니다 . 맞습니다. 믿음고 양심은 한 수레에 두 바퀴입니다. 서로 분리될래야 분리될 수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양심따라 사는 것입니다. 양심은 영혼의 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양심의 귀에 대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양심에 들려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물론 그 양심은 살아있는 양심입니다. 인간은 양심의 소리를 들을 자유도 있고, 안들을 자유도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고 안 듣는 것은 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양심의 소리를 안 듣고 거부하는 것은 무서운 심판과 저주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아담이 양심의 소리를 거부하다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합니다. 헤롯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다가 벌레에 먹혀 죽습니다. 가룟유다가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다가 마침내 목메어 죽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고 귀히 여길 것은 양심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양심의 결단 속에서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서 행동해야 합니다. 내가 만약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천천의 원수들이 칼을 들고 에워싸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 그러나 내가 만약ㄱ에 양심에 부끄러움이 있다면 만만의 천사들이 나를 호위한다 할지라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
양심이란 뭡니까 양심은 참 묘한 것입니다. 그것 쓰지 않으면 녹이 쓸고 죽어 버리고 맙니다. 개구리를 솥에 넣고 그가 좋아하는 초여름 놋물과 같은 온도를 맞춰 놓습니다 . 그러다 솥뚜껑을 열면요 거기서 튀어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엎드려 있습니다. 서서히 불을 때서 온도를 높입니다. 그래도 뜨거움을 모르고 그대로 엎드려 있습니다. 드디어 물이 끓습니다. 그리고 몸이 익어버리고 맙니다. 그때에도 거기서 뛰쳐나올 생각도 않고 눈만 말똥거리다가 죽고 맙니다. 우리 양심이라는 것이 바로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다보면 그 양심이 점점 무디어 지고 맙니다 감각이 무디어져서 아무리 자극을 해도 반응을 않다가 죽고 맙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소리는 처음부터 민감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소리에도 민감해야 합니다. 한번 양심이 죽고 나면 그 어떤 자극에도 소용없습니다.
따라서 희망이 없습니다. 때는 늦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둘러서 양심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3. 1운동은 양심운동입니다. 민족의 양심운동입니다. 사회 지도층의 양심운동입니다. 교회의 양심운동입니다. 때가 때인만큼 우리 모두 이 양심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또한 출애굽운동과 3. 1운동은 민족 대 단합운동이라는 데서 일치합니다. 보십시오. 갑작스럽게 모세가 출애굽을 선언합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 한 사람도 불복하지 않습니다. 백만이나 넘는 민족이 하나같이 출애굽의 대열에 섰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단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들에게 이같은 단결이 없었다면 출애굽의 역사는 절대 불가능했습니다. 애굽의 노예생활은 자자손손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진실로 출애굽의 성공은 바로 민족 대단합의 길이었습니다.
3. 1운동 때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철통같이 단결했습니다. 역사상 단 한번도 민족 단합이 없었던 우리나라, 분열과 분쟁만 일삼던 우리 민족이 그 때만은 기막히게 단결했습니다. 남,여, 상,하, 지방파당이 단결했습니다. 빈부귀천, 유,무식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로 얼싸안고 위로 격려하면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날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닙니다. 강요당해서도 아닙니다. 국가 위기 앞에서 민족적 양심의 발로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오직 나라 사랑, 구국의 일념에서 이루어진 성스러운 단결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나라에 다시 한 번 일어나야 할 절대절명의 정신 혁명이 아닙니까. 보시다시피 지금 이 나라는 사분오열 되었습니다. 위험수위를 훨씬 넘는 분열과 분쟁만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국민이 그러합니다. 정당과 정치인이 그러합니다 노사와 이익단체들이 그러합니다. 나라가 이토록 어려운데 나뉘어서 싸움질만 하고 있습니다. 위기를 대처할 능력을 이미 상실해 버렸습니다. 대동단결해도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까 말까인데 서로 나뉘어 싸움만 하고 있으니 무슨 소망이 있는 것입니까. 이유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3. 1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싸움을 그치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3. 1운동 때에 이 민족이 보여준 그 위대한 민족 대단합 운동이 다시 한 번 일어나야 합니다. 사소한 이권과 이기심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순수한 민족적인 양심으로 돌아가서 뭉쳐야 합니다. 정부와 국민이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정당과 정당이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노사와 이익단체들이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이보다 먼저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로 뭉쳐야 할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성령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분명한 역사의식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매국노는 다른 게 아니라 민족단결을 해치는 자입니다. 오늘의 사탄운동은 다른 게 아니라 일치를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3. 1운동과 출애굽 운동은 순수한 애국운동이라는 데서 일치합니다. 지도자 모세를 보십시오. 그 얼마나 애국자였습니까.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왕좌의 영화를 버리고 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즐거워했다 했습니다
3. 1운동 때 우리 민족도 그러했습니다 . 그 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독립운동을 그만두면 일본에게 아첨만 하고 적당적당히 살면 다 출세 성공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서 독립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때 애국운동, 오늘에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이보다 더 절실한 운동은 없습니다.
저는 통탄하면서 생각합니다. 오늘 이 나라 정치가들 중에 도산 안창호 선생같은 애국자가 몇 사람만 있었던들 이 나라 정치판이 이 지경이 될 수는 없으리라. 저마다 권력에 혈안이된 정치몰이배들만 있기 때문에 나라가 이 꼴 되고 말았습니다. 진실로 이 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애국심을 원하고 있습니다 . 이것없이 오늘의 위기는 극복되지 않습니다.
1945년 전쟁에 패한 일본이 우리 곁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온다. " 무슨 뜻입니까. 그 때도 그들은 재침의 야욕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재침은 무력적인 재침이 아니라 경제적인 침략임에 틀림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의 말은 적중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무역 자유화로 인해서 일본상품이 우리 시장에 홍수처럼 떠밀려 있습니다. 이렇게 나가면 언젠가 우리의 경제는 일본 경제에 예속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의 매국노는 일본상품을 사들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애국운동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국산품 애용하는 것 같은 것들입니다. 무절제한 과소비 자제하고 근검절약 하는 것도 대단한 애국입니다. 물론 외국상품도 적당히 사줘야 우리 상품도 외국에 팔수 있지요. 소비도 적당히 해줘야 생산도, 시장도,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절제한 과소비, 지나친 호화 사치품, 수입 경쟁은 매우 비 애국적인 행동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애국의 길이 어찌 그 뿐이겠습니까. 이것은 매우 지엽적인 것이고 보다 근원적이고 차원 높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도 애국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는 것도 애국입니다.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도 애국입니다 이나라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는 것도 애국입니다. 자원을 아끼고 환경을 보호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애국입니다 . 이 모든 일들 3. 1운동 때 그 애국정신으로 앞장서야 될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이기적이고 자기 지향적인 삶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웃과 사회를 생각하고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고 그리고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런 가치관으로서의 중생,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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