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TOP
DOWN

[31절] 영적 자폐증을 극복하라

본문

오늘은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90주년이 되는 뜻 깊은 주일입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 독립운동은 대한민국이 일본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과 자주민임을 온 세상에 선포한 역사적일 날입니다.
1905년 일본의 외무대신 이등박문이 이완용을 매수합니다. 그리고 국왕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을사보호조약을 맺습니다. 우리나라를 보호해 준다는 명분아래 외교와 모든 행정을 장악합니다. 마침내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이 나라를 완전히 식민지화했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빼앗기고, 주권도, 언어도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그 결과 이 민족은 엄청난 인권유린과 경제적 약탈, 그리고 종교적 탄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1919년 3월 1일, 오후2시, 33인의 민족대표는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부릅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여 자진 체포됩니다. 한편 파고다 공원에서는 5천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가두시위에 나섭니다. 이들의 시위행렬에 수만의 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서울 시내는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게 됩니다. 만세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들풀처럼 타오릅니다.
이에 총독부는 비무장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군중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고, 부상을 당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3. 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독립운동은 집회수가 1,542회, 참가인원 202만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검거자 5만 2,770명, 불탄 교회가 47개, 학교 2곳, 민가 715채가 불탔습니다. 비록 독립운동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의 기상을 온 세상에 선포했다는 점에서 큰 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위대한 민족의 대행진에 한국교회가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독립협회라는 단체가 결성됩니다. 그 단체는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같은 크리스챤들에 의해서 결성되었습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중에 16명이 기독교인입니다. 또한
3. 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곳이 바로 기독교인이요 기독교 학교입니다. 그 결과
3. 1운동 이후 기소된 6,417명의 피고인중 기독교이 1,561명으로 24. 3%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의 수가 22만 명이었는데 이는 전체 인국 중 1. 3%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3. 1 독립운동 90주년을 맞이한 이 시점에서 우리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1. 3%밖에 되지 않는 소수였지만 민족의 독립운동을 이끌어가는 산파역할을 했습니다. 민족정신의 지주가 되었고, 횃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 땅에 적어도 860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6만 여개의 교회가 있고, 10만 여명의 목회자가 있습니다. 장로님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요, 국회의원을 비롯한 국가 요직에 있는 기독교인이 약 60%나 됩니다.
한국 교회는 90년 전의 상황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덩치는 커졌지만 사회적인 영향력은 초라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취약성을 꼬집는 말 가운데 “신앙은 있으나 신앙생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 안의 생활과 교회 밖의 생활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죠.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삶속에서 예수님의 향기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랑을 외치지만 밖에서는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방법으로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피 값을 지불하시고 세우신 곳입니다. 교회는 암울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의 빛을 비추는 곳입니다. 슬픈 소식, 나쁜 소식, 절망적인 소식뿐인 곳에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입술에 복음의 기쁜 소식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이 사라지고 매너리즘에 빠진 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한국교회는 심하게 표현하면 ‘자폐증(autism)’에 걸려있다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자폐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신병의 하나, 주위에 관심이 없어지고, 말을 하지 않으며, 자기 세계에 틀어박히는 병”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해야 합니다. 세상과 단절되어 벽을 쌓고 있으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사랑의 열정을 잃어버린 교회는 자폐증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교회의 내에서 소모적인 일에 빠져있다면 그것 역시 자폐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갈 수 있을까요 지난 주 우리는 대그룹으로서의 감격적인 예배와 소그룹의 두 날개가 필요함을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을 통해서 영적 자폐증을 극복하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영적인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인생의 좋은 지혜를 알려주듯, 믿음의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목회를 할 것인가를 들려줍니다. 그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a good soldier of Christ Jesus) 가 되라는 것입니다. 개역개정 판에는 ‘병사’로 번역되었는데 개역한글판에서 썼던 ‘군사’ 라는 표현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기에 건강한 남자는 군 복무의 의무가 있습니다. 군인은 나라의 부름을 받으면 순응해야 합니다. 거부하면 감옥에 갑니다. 그리고 군에 입대하면 먼저 사회에서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지급하는 통일된 군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집에서 입던 옷을 되돌려 보냅니다.
군대 보낸 부모의 마음이 가장 찡할 때가 바로 아들이 보낸 옷을 받을 때라고 합니다. 머리 모양도 동일합니다. 군대 가기 전에는 자기 맘대로 염색도 하고, 멋도 부렸지만 입소하는 순간부터는 자유가 제한됩니다. 먹는 음식도 동일합니다. 입는 복장도 같습니다. 언어사용도 동일합니다. 개인의 개성이나 자유는 제한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강한 훈련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운동이 아닙니다. 강한 군사로 만들기 위한 훈련입니다. 정신통일을 위해 먼저 제식훈련을 합니다. 연병장에 모여 줄서는 훈련부터 시킵니다. 앞으로 나란히! 좌우 향 좌! 우향 우! 뒤로 돌아! 아니 초등학생도 아닌 적어도 대학생활을 하다 온 청년들에게 왜 이런 훈련을 시킬까요 정신통일, 하나 되게 만들기 위한 훈련과정입니다. 이것이 끝나면 총검술을 배우고, 다양한 훈련을 합니다.
군인은 자기 생활에 매이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 생활이 없습니다. 상명하복의 구조 속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면 국가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줍니다. 요즘은 월급도 많이 줍니다. 왜 이런 엄청난 세금을 들여서 군인을 훈련할까요 군인으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바로 분단된 조국을 지키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세계 분쟁지역에서 평화로운 나라를 재건하는데 돕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영적인 갓난아이로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군사로 거듭나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진군하여 적을 제압하고,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강한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성령의 검, 말씀으로 무장하여 단번에 제압하는 영적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자폐증을 극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로 변화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영적 자폐증을 극복하고, 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강한 군사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강인한 훈련의 결과로 만들어 집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는 비결 역시 훈련입니다. 교육과 훈련은 다릅니다. 교육은 모르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교육을 받으면 지식이 늘어납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많은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신학생 수준의 성경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지식이 많으면 번뇌가 많다는 지혜자의 고백처럼 지식은 머리는 커지게 하지만 가슴이 차가워집니다. 머리로 계산은 하고, 판단은 하는데 가슴의 열정으로 움직이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연대 대학원 재학 시 김중기 박사님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양재동에서 새사람 선교회를 만들어서 매주 모여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기독교 윤리학자로서 매주 만나서 교육을 시키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절망에 빠졌다고 합니다.
거의 10년 동안 매번 모임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여했던 분이 있는데 그분의 삶을 보니 도대체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더랍니다. 옛 사람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따졌답니다. ‘여호와 하나님! 제가 혼신을 다해 10년 동안 교육을 시켰는데 왜 저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까 제 체면이 뭡니까’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큰 책망을 하셨답니다.
‘네가 교육을 잘 시켜서 사람이 변화되는 줄 아느냐 변화될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다. ’ 성령의 음성을 듣고 회개했답니다. 그 후부터 내가 잘 가르쳐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 마음을 감동시켜야 변화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기가 변했더니 그토록 돌처럼 변하지 않던 그 분이 변화되더랍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교육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은 이론 위에 삶의 경험을 나눕니다. 삶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합니다. 그리고 같은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달려가게 합니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게 합니다.
마침내 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성경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내면화시키고, 삶속에 적용하는 실제적인 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교육이 아니라 제자훈련이란 용어를 씁니다. 훈련만이 강한 영적 군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강한 군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훈련의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비록 훈련의 과정이 힘들고 어려워도 참여해야 합니다. 제가 군대있을 때야 특공부대 안에 있지만 훈련받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PX와 두부공장에 근무하는 방위병들입니다. 그들은 특공부대 안에서 같이 생활은 하지만 매일 과자나 팔고, 두부만 만듭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PX 병들이 부대 내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매일 심부름이나 하고, 시원찮다고 기압 받고, 매를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늬는 특공병이지만 훈련받지 않은 자이기에 부대 안에서 창피를 당합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지만 훈련받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 창피를 당합니다. 기쁜 소식을 듣고 살면서도 전하지 못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피하고 도망 다닙니다. 더 이상 우리는 영적인 패잔병의 모습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제는 이 지역을 살리고, 민족을 구원하는 강한 영적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그 비결은 훈련입니다.
 첫째는, 순종의 훈련입니다.
군인의 첫 번째 덕목은 순종, 아니 복종입니다. 군인은 지휘관이 명령하면 절대적인 순종이 요구됩니다. 만약 불응하면 사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강한 영적 군사가 되려면 먼저 말씀 앞에 순종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순종함으로 예비하신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사울 왕을 떠올립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다보니 인간적인 욕심이 생깁니다. 어차피 살진 소나 양이나 염소를 불살라 없애느니 잡아다가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전쟁이 끝난 후 사울은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승전비를 세웁니다. 그때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책망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삼상15:22-23)
사울의 순종은 선택적 순종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기초로 한 이기적인 순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은 100%의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순종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결국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화려한 등극을 했지만 한순간의 불순종으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의 태도는 첫째도 순종이요 둘째도 순종이요 셋째도 순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는 미워하십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명하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와 국가의 지도자들에게도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 이유는 리더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권사든, 구역장이든 교사든 이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영적 권위입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택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영적 리더십들에 대하여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야합니다. 완벽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적인 탁월함이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워주신 영적 권위요 질서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합니다.
왜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리더들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순종함으로 누리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일에 대해서 서로 거스르고, 대항하게 되면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서로를 향한 원망과 불평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마음의 평강을 잃어버립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 자유함이 사라집니다.
좀 부족하고 실수가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권위이기에 함께 협력하고,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 진정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 속에 더 발전적인 대안이 나오고, 더 창조적인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존 비비어의 “순종” 이란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적인 리더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바로 리더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영적 리더들에 대한 순종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종이요, 영적 리더들에 대한 불순종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요 반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리더들의 권위를 존종하고, 순종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보다도 먼저 순종의 태도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보이라는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형식이요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근심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영적인 리더십과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둘째는, 절제의 훈련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적 군사가 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절제입니다. 절제는 내적으로는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능력입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자되는 마음속을 알지 못합니다. 내 마음을 내가 모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말씀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4:23) 우리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날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야 못 박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다스리실 때 기쁨이 넘치고 평강이 넘칩니다.
외적으로 절제는 다가오는 고난을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고난의 파도가 밀려올 때 마음이 약해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지금까지 쌓았던 것이 모래성처럼 무너집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 앞에서 끝까지 절제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자신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무리들을 향해 끝까지 절제하십니다. 예수님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줍니다. 그런 점에서 절제는 고난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3절에서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명합니다. 그는 고난 없는 영광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고난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유언처럼 쓴 가장 사적이고, 가장 마지막에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네가 앞으로 사역하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까지 받았던 어떤 고난과 역경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좋은 군사가 되려면 어떤 고난도 뚫고 나갈 수 있는 강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성수 잘 하면 좋은 교인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교묘한 방법으로 교회를 공격하고, 성도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강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처럼 다양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알파코스나 말씀훈련, 앞으로 진행될 제자대학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영적으로 승리하는 군사가 되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자신을 절제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신을 이기고, 고난을 이기는 비결을 날마다 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는 영적군사의 모습니다.
 셋째는, 충성의 훈련입니다.
4절에 보면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 말씀합니다. 군인은 자기생활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군인은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다르게 말하면 충성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로마제국을 위해서, 그리고 황제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정신으로 여겼습니다. 제국을 위해서, 황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부름 받은 종들입니다.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충성입니다. 충성은 '신실함, 믿음‘ 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면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충성은 royalty(충성); faithfulness;(믿음/신실함) devotion(헌신); fidelity(성실)로 표현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왕인 다윗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용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을 점령한 블레셋 군대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고향 베들레헴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삼하23:15) 누구보고 떠오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고향이 그리워서 혼자 중얼거린 것뿐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세 용사가 이 말을 듣고는 블레셋 군사들과 충돌하면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의 물을 떠가지고 옵니다. 그것은 물이 아닌 생명입니다. 목숨을 걸고 떠 온 물입니다. 다윗은 도저히 그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용사들의 피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여호와께 부어드렸습니다.
세 용사들이 왜 막강한 블레셋 군대 사이를 뚫고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 우물물을 길어왔을까요 다윗 왕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왕인 다윗이 그 물을 마시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기쁨을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내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들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의 목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내 뜻, 내 소원 성취가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어 복을 받고, 덕 보며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14:8)”
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그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온갖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온갖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된 군사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에게 어떤 군사들입니까 "좋은 군사"라는 말에는 좋지 않은 군사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포함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군사입니까 제 고향을 가노라면 논산에서 강경을 지나갈 때 황산벌이 있습니다.
660년 백제의 의자왕 시대 계백장군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백제를 지키기 위하여 오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5만 명의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과 맞서서 4차례나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으로 마침내 패하고 말았습니다. 계백장군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칭송을 받는 것은 그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그의 조국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마음을 혹 약화시키지나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전쟁에 나가기 전에 그의 손으로 아내와 자식 목을 베었습니다. 윤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계백장군은 쓰러져가는 왕국, 일시적인 왕국 백제를 위해서도 목숨 걸고 충성했습니다. 그는 모시고 있던 의자왕의 의자나 타며, 삼 천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있는 됨됨이가 대단하지 못하였는데도 충성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부름 받은 자로서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충성하는 헌신된 한 명의 군사를 찾고 계십니다. 그 한명의 강한 영적 군사가 영적 자폐증에 걸린 교회를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영적 자폐증에 신음하는 공동체를 치유하고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3.1절 9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한번
1. 3%의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민족을 일깨우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 리더였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우리교회가, 한국교회가 영적 자폐증에 걸려서 허우적거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속히 영적 자폐증에서 치유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나를 넘어서 교회를, 지역을 민족을 새롭게 정화하고, 회복하는 영적 군사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제는 영적 군사로서 세상을 정복하고, 열방을 구원하는 건강한 성도, 건강한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 비결은 바로 강한 훈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군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순종의 훈련, 절제의 훈련, 충성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 강한 영적 군사가 되는 비결입니다. 우리 모두 총사령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주님과 함께 날마다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멋진 주의 군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