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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내일을 향해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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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사순절 세 번째 주일에 들어섰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기간이기도 하지만 예수 믿는 우리한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또는 우리 민족, 가정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의 말씀을 듣고 예수의 수난을 명상하면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수난 과정에 한번 풍덩 담겨서 예수의 수난이 우리한테 무얼 말하는지, 생각해 보시면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면 마침 수난절 중간에
3. 1운동이 있었습니다. 90년 전입니다.
3. 1운동에 기독교도 참석했고, 여러 종교, 민단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그걸 기념해서 우리 종교단체들이 어떻게
3. 1정신을 이어갈까, 이런 주제로 엊그제 금요일 아침에 기도회 겸 결단 모임을 가졌습니다. 거기서 느낀 두 가지만 여러분께 보고 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90년 전 일이긴 한데, 그때 서른세 분의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중에 기독교가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두 분이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아시는 사실입니다. 엊그제 스님께서 오셔서 발표하시는 중에 새로운 걸 알았습니다. 본래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각각 열한 분씩 33명의 선언을 하자고 결정을 하고 서명을 받는 중에 기독교 측에서 이의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따로 있다.
그러니 장로교 열한 사람, 감리교 열한 사람, 모두 해야겠다, 44명으로 하자. ”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안 된다는 의견이 모아져서 33명으로 다시 줄이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양보가 하도 없어서 할 수 없이 불교가 양보를 했다고 합니다. 스님의 말씀은 ‘자비의 심정’으로 양보를 해서 기독교가 많아지고 불교가 둘로 줄었다고 합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그럴 만도 하겠구나. 장로교와 감리교가 얼마나 싸움을 벌였으면,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생각했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천주교는 당시 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이 오셔서 서명하지 못한 이유를 다 설명하고 “미안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한국 천주교가 안 한 게 아니라 전 세계의 천주교가 교황청의 방침을 따라서 어느 나라 독립선언에도 참여를 못 하게 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히틀러 체재를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 나치 방해 운동은 독일 천주교에는 없었습니다. 교황청에 속한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의 학정이 이어지는데도 바티칸에서는 일언반구 얘기가 없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히틀러의 나치, 일본의 천황,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교황청은 잠잠했고, 모든 교회가 잠잠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신부님도 “미안합니다. 현실은 현실이고, 미안합니다. ” 하셨습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 기독교는 90년이 지난 오늘 이 땅에서 90년 전의 기상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이 땅의 빛으로 소금으로 그렇게 열심히 계속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왜 자꾸 교인수가 줄어든다고 이야기하는가 왜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실망하고 돌아서는가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반면에 90년 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한 천주교는 지금은 승승장구하고 교인도 증가하고 사회의 신망도 얻고 있습니다. 물론 한때의 결단과 한때의 봉사가 영구히 계속되는 경우는 인류 역사에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명, 결단, 민족, 가정, 모든 고난 속에 동참할 때 이 모든 결단은 일시적이고 상황적이기도 하지만 항상적인 연속성을 가지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한때 실수가 죽을 만한 실수는 아닙니다. 실수해도 회개하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이런 간구를 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
3. 1절 독립 운동을 일으켰던 그 아름답고 희생을 각오한 진실이 90년이 지난 오늘에도 다시 살아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3. 1절을 지키는 의미일 겁니다. 사실
3. 1절은 90년 이전의 역사로서, 세월이 지나고 오늘의 눈으로 90년 전의
3. 1운동을 바라봅니다.
그 이후를 산 우리들은 어쩔 수 없는 이 시대의 눈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3. 1절을 다시 회상한다고 해도
3. 1절 이전의 눈으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독립을 경험했고, 45년이 한참 지난 2009년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3. 1운동은 귀한 사건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오늘 2009년의 눈으로
3. 1절을 다시 보는데
3. 1절은 옛날 사건이 아닙니다.
3. 1절을 오늘 다시 되살려야 합니다.
3. 1절이 살아나왔습니다. 오늘 2009년의 눈으로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래서
3. 1절 정신이 오늘 눈으로 봐도 살아있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3. 1절에 시작했을 뿐, 완성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3. 1절에는 독립을 시작했을 뿐입니다. 시작된 것이 열매 맺는 것은 한참 뒤입니다.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열매를 맺은 것은 26년이 지난 1945년입니다. 누가 예상했습니까
3. 1절을 선언하던 사람들이 26년 뒤에는 독립이 온다고 누구하나 예측 못했습니다. 오늘 시점으로 되살려 놓고, 오늘
3. 1절 눈으로 45년을 봤더니 45년이 먼 미래가 아니라 독립이 자꾸 자꾸 우리한테 오는 것 같습니다. 멀리 있는 미래가 아니고 우리한테 오고 있는 미래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옛날 사건이 우리한테 중요하고 우리한테 의미가 있으려면 옛날 사건을 오늘의 눈으로 보고 살아 움직이게 되살려서 오늘도 열매 맺게 해야 합니다.
우리 언어에 ‘미래’란 말이 있습니다. 내일을 미래라고 합니다. 미래(未來)라는 한자를 다시 봤더니 얼마나 맛이 있고 재미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미래, 내일은 옵니다. 래(來), ‘올 래’자입니다. 미래는 오는 것이지 제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옵니다.
3. 1운동 했던 사람들에게 독립의 미래가 옵니다. 45년이 옵니다. 이렇게 믿었을 겁니다. 그런데 내일이란 미래는 오기는 오는데 완전히 와서 우리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잡히는 미래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직 안 왔다는 미(未)자를 쓰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안 옵니다.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성서적 미래의 의미와 똑같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옵니다. 우리의 미래 꿈인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왔습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 나라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입니다. 나는 미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오지만 그 나라는 한참 뒤에 완성되지만 그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오고 있습니다. 아직 ‘미(未)’ 자를 쓰는 미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미래, 우리가 한자로 쓰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 그 미래는 옵니다. 희망은 옵니다. 하늘나라는 옵니다. 완전히 내 손에 잡히지는 않습니다. 잡히면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입니다. 잡히지는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하여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미래”, 어떻습니까 이 미래를
3. 1절에도 주셨고, 1945년에도 주셨고, 지금도 주시고, 계속 약속된 미래는 우리한테 오고 있습니다. 완전히 우리가 잡지는 못하지만 우리한테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직은 우리가 우리 손에 잡히지 않은, 그 미래는 지금도 완성품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만들어 갈 때 과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미래와 현재를 바꾸어서 만들고 죄악된 세상을 의로운 세상으로 만들고, 불의한 세상을 정의로운 세상으로 만들고, 절망과 고통 속에 있는 세상을 희망찬 세상으로 만들려면 만들어가는 과정은 아픔입니다. 수난입니다. 좌절입니다. 절망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오면 좋은 것이다. 죽음도 없다더라. 이런 나라가 옵니다. 이 나라가 만들어지는 지금은, 미안하지만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허공에서 만들어 갈 수 있습니까 세상의 역사 속에서 삶 속에서 고통과 걱정과 근심 속에서 아름다운 미래가 만들어집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세요 희망을 오늘 만들어가는 사람은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고통 속에서 희망이 만들어집니다. 허공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 고통 속에서 만들어지는 희망, 희망 때문에 고통을 참아야 합니다. 그 고통이 죽음이라 하더라도 그 죽음을 참고 죽음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40일 동안 여호와 하나님 나라 희망을 만들어갑니다. 처음 출발부터 마지막까지 수난이라 이름하는 역사과정을 하나도 피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살아갑니다. 희망은 고통 속에서 만들어져 갑니다. 그래서 희망은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래입니다. 미래가 갑자기 오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허공이지 미래는 아닙니다.
3. 1절 이야기를 다시 드립니다만, 일본에서는 당시 침략을 했기 때문에 일본교회도 침략 전선을 따랐습니다. 일본의 모든 분들은 도덕도 윤리도 신앙도 없이 침략에 동의해 줬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나온 책 하나를 다시 봤는데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받기 다섯 달 전, 76세 된 목사님이 동경에 계셨습니다. 이름은 아사미 센사쿠, 이 목사님이 교회에서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나는 일본을 사랑합니다. 진실로 일본 쪽이고 싶습니다. 일본을 여러분이 진정 사랑하신다면 전쟁 중단을 선포하게 해야 합니다. 기독교적 속죄와 구원의 도리에서 보면 일본의 침략은 죄악입니다. 죄악의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시면 전쟁을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본 사랑입니다.
아마 일본에 제국주의 분위기가 한참 고조에 달했을 때, 동경 한복판에서 아무리 노인이시지만 이런 설교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고 당장 체포당했습니다. 북해도에 있는 지하 감방 속에 감금되었는데 영하 16도나 되는 지하 감옥에서 고생스럽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5개월 뒤에 천황 항복이 되었답니다.
그분도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됐다는 기록이 남겨있습니다. 아하, 일본에도 이런 분이 계시구나, 다시 한 번 깨달은 내용입니다. 무서운 이야기, 아주 심각한 이야기,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작은 설교 하나가 일본의 기독교 양심을 그대로 지켜주었다는 생각에 감사를 드립니다.
수천 년 전 예레미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백성 유다가 곧 바빌론한테 망한다고 선포를 했습니다. 망한다. 망하지 않으려면 우리 민족이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왕권, 왕실에서 핍박이 심했습니다. 비록 예언자지만 듣기 싫은 소리를 자꾸 하니까요.
예레미야는 미래를 말했을 뿐입니다. 미래, 곧 망한다. 회개 없이는 망한다. 회개하면 망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다. 그 미래가 온다. 그 말을 들은 왕족은 싫어했고 심지어 성전에 가서 이야기하면 성전에 모인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 싫어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레미야가 그 얘기를 했더니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 이름하여 바스훌이라 이름하는 성전 제사장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앞에 있는 감옥에 투옥시키고 지하에서 꼼짝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미래의 축복을 이야기했는데 그게 싫다고 왕족이 나를 핍박하고 제사장이 핍박하고, 나는 어디에 가라는 겁니까 어떡하라는 겁니까 내 가까운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에워쌉니다.
오늘 그 얘기가 예레미야의 이야기입니다. 수천 년이 지난 다음에 예수라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들한테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가난한 자 복이 있다고 했고, 병자도 고쳐주었고, 미래를 이야기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이런 방식으로 온다. 구원이 온다, 믿으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본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예수는 갈릴리 땅에서도 마음 놓고 갈 데가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도 갈 데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에 와서 죽으려고 예루살렘으로 오는 도중에 사마리아라는 동네에 들릅니다. 지금 사마리아를 넘어서 오면서 사마리아에서 하룻밤 유하려고 하는데 제자들이 갔더니 유할 방을 주지 않는다고 보고를 합니다. 얼마나 그때 보고가 심각했는지 오늘 말씀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 사마리아가 우리 누울 방도 안 주는데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해서 불 태워버릴까요 얼마나 속이 탔으면 불덩이를 내려서 이 집을 태워주세요, 그랬겠습니까 아마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우리를 질시하는 민족이므로 보기도 싫다. 예수 너도 유대 족속이 아니냐, 싫다. 방 한 칸 내주고 싶지 않다.
말없이 사마리아를 지나서 오는 예수의 말입니다. 갈릴리에 가도 그렇고 사마리아에 가도 그렇고, 이제 조금 있으면 예루살렘에 가서 죽어야 할 텐데, 창에 찔려야 할 텐데, 침 뱉음을 당해야 할 텐데, 예수님은 미래에 당할 일들을 다 아시지 않습니까 갈릴리, 사마리아, 예루살렘, 이 세 가지 경험을 인간 실존적으로 아는 예수가 이런 독백을 합니다. 오늘 말씀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복음자리가 있다는데 나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세상의 인간들아, 그렇게 미래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으냐 나한테 먹을 것도 주지 않느냐 그 예수께서 오늘 우리한테 오셔서 회개 안 하면 이 땅이 망한다. 이렇게 착취만 하면 자연은 망한다. 이렇게 권세만 부리면 타락한다. 도덕도 없고 윤리도 없고, 예수가 오시는데 서울에 왔더니, 워싱턴에 갔더니 전 세계를 갔더니,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 나는 지금 머리 둘 곳이 없다. 성전에 갔더니 성전에서 쫓아내더라. 2000년 전 이야기 같습니까 지금도 통용되는 이야기 같습니까 제가 성전이라면,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정말 성전이라면, 예수님 말씀 들을 자리 하나 마련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오시는데 제자들이 묻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조건이 있습니다.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오게 해주시지요.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하게 하고 너는 와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라. ” 무슨 이야기입니까
죽은 자, 죽은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건 당연하지요. 장례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데 그것은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뇨 죽은 자가 어떻게 죽은 자를 장사합니까 미래에서 주어지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 아무리 예수지만 그런 선포를 어떻게 합니까 성서학자들이 이 대목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도대체가 무슨 말이냐 저도 어렵습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보면서 큰 틀에서 예수님은 무얼 하려고 하셨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미래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 눈에서 모든 세상사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마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장례는 영으로 죽은 자들도 치르고 산 자도 치르고, 장례는 인간의 죽음을 치르는 예식이다. 나는 장례 치르러 오지 않았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러 왔다.
이 말을 바꾸면, 사랑하는 제자들아, 아버지 장례를 치러주어라. 거기 머물지 말고 장례식 때 또 생명이 있다고, 죽음을 뚫고 생명의 빛이 있다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장례식 때 설교하고 와라.
모든 인간의 수난 속에 울고 와서 눈물 닦지 말고 수난을 꿰뚫는 빛이 있다고 설교하여라. 연고 없는 자가 죽은 장례식을 화려하게 해주는 것이 유대교 의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는 죽음을 선포하러 온 게 아니라 죽음은 죽음대로 받되 죽음을 뚫고 생명이 있다. 이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 선포다. 예수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생명은 죽음에서도 만들어지고 고난에서 희망이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온 목적은 죽음 자체를 가지고 끌어안고 씨름하는 세계가 아니고 죽음을 받고 고난을 받고 죽음을 꿰뚫는 희망의 선포를 하여라. 그 희망이 오늘 오고 있다.
또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예수님, 저희가 따라는 가겠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가족한테 작별인사는 하고 오겠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말라는 것은 속담인데 희랍철학에서 나오는 속담입니다.
이 속담을 만든 사람이 BC 8세기의 헤로도토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쟁기를 갈면서 뒤를 돌아보면 밭 갈지 못하지 않느냐.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일단 미래를 향해서 가는데, 가는 길을 막지 말고 돌아보지 마라.
소돔 고모라가 망할 때, 롯의 아내가 뒤에 있는 과거가 너무 좋아서 소금 기둥이 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는, 과거를 없애기보다 과거 현재에 매몰된 거기에서 정죄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미래는 아직 잡히지 않았으므로 계속해서 온다는 겁니다. 꿰뚫고 온다. 우리를 향해서 온다.
그 미래를 향해서 열어라. 우리는 존재합니다. 우리는 살아 있고 우리의 실존이 있습니다. 이것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실존 속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궁극적 실체가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죽음 이후에 있는 또 다른 생명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인간의 삶을 우리의 경험으로만 살지 말고, 경험을 초월할 수 있는 삶을 삽시다. 경험을 꿰뚫는 생명도 사십시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도 오고 있기 때문에 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면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는 미래의 희망을 잡을 수 없지만 잡히지 않지만 오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믿으십니까
죽었다 살아나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한테 하시는 말씀입니다. 미래는 온다. 희망이 온다. 고난 속에서 희망을 만들라. 죽음 속에서 생명을 만들라. 우리가 못 만들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만들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생명 신앙 고백입니다. 오늘 이 길을 한번 가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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