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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밀알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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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3. 1절, 독립만세를 불렀던 날을 기념하는 예배로 드립니다. 사순절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 날입니다. 89년 전의 일을 되새기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요 의미가 있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과거에서 배울 수 없는 민족의 미래는 희미합니다. 아니면 과거에서 배우질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읍니다. 많은 분들이 인용하는 문구입니다.
삼일절에서 배우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미래의 비전이 약할 것입니다. 그래서 89년전
3. 1절을 우리가 과거 역사를 한번 되새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길을 오늘도 다시 태우고 싶습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 삼일절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이스라엘에서도 이스라엘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바빌론 북쪽의 앗수리아 식민지에 보냈다가 다시 해방시켜서 유대땅으로 복귀시킬 때, 이사야 선지자가 나와서 복귀할 때 광복의 기쁨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라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시합니다. 내가 잠시 너희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다시 불러들이겠다. 내 분노가 너무 북받혀 얼굴을 너희에게서 잠시 가렸으나 이제는 영원한 사랑으로 긍휼을 베풀겠노라고.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에 대한 확신은 어떻게 합니까. 비록 산들이 옮겨지고 언덕이 흔들려도 내 은총이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나는 약속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 하나가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전체 백성들에게 전해졌을 때 백성들은 만세를 불렀을 것입니다. 만세가 아멘입니다. 아멘.
3. 1절 독립 만세를 부르고, 민족의 독립을 소원했고, 종교를 초월하여 동네를 초월하여 구석구석에서 독립만세가 목이 쉬도록 외쳐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와 기도와 외침을 언제 들으셨습니까 언제 이루어 주셨습니까 1919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산술적 캘린더를 보면 정확하게 26년 반 만에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3. 1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속에는 아마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늦게 반응하리라고 생각을 안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내일 모레가 아닐까고. 그러나
3. 1운동 이후에 온 것은 흉악무도한 탄압, 문화정책이라는 이름하에 그 전의 헌병통치 시절 보다 더 심각한 내적 탄압까지 포함해서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일제 시절에 우리 민족이 너무나 강압에 견디기 힘들어서 수많은 반민족적 죄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은
3. 1운동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받은 압박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은 26년 반 만에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가정을 위하여 간구하셨는데,
자기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기도하셨는데 얼마 만에 답변 들으셨습니까 26년보다 빠르게 들으셨으면 감사하십시오. 때로는 26년 보다 훨씬 뒤에야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은사가 있고 대답이 있을 건데 그래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가 필요한 시점, 그 때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에 대해서 대답을 주십니다.
오늘 시점에 와서 우리는 왜 이렇게
3. 1운동의 그 때 그 음성을 다시 되새깁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하면서요. 이런 생각을 저는 많이 해 봤습니다.
3. 1운동 없이 8. 15 광복절을 맞았더라면 우리 민족과 우리의 마음은 어떻했을까 역사에 가정은 별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시죠. 내적으로 타오르는
3. 1운동에 우리 민족의 혈과 열과 정성이 담긴 독립의 소리가 없이 8. 15 연합군에 의해서, 소련과 미군에 의해서, 또는 일본의 패망에 따라서 우리 민족이 독립되었다면, 우리 내적인 열기도 외침도 없이 8. 15 광복절을 맞았었다면. 얼마나 허망할까요
3. 1절 이후 비록 26년 반이 흘러서야 비로써 얻은 광복이라 이름하는 위대한 민족의 희망은, 자유와 해방은 26년 반 전, 이미 1919년 3월 1일 씨앗이 내려졌습니다. 민족의 외침의 씨앗이 없었던들, 독립만세의 씨앗이 없었던들 거기서 씨앗이 썩고, 고난 받고 탄압받고 자라서 독립의 나무가 되어, 자유의 해방의 열매가 맺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저희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3. 1절이 없는 광복절, 그것은 하나의 허상일 것입니다.
우리가 독립을 하고 나서 여러 가지 잘한 일도 있고 못한 일도 있는데 저희 기독교 교회 입장에서 보면, 독립을 하고
3. 1절을 지키면서 한 가지 못한 게 있습니다. 저희들이 원했던 원치 않던 일제 강압시절에 잘못했던 일들, 우리의 죄책과 죄과를 공적으로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작년 9월, 기장 총회 때, 전 총회 이름으로 죄책 고백서 하나를 채택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그 요약본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신사참배와 부일 협력에 대한 죄책 고백 선언문 입니다. 저희 경동교회가 속한 총회가 채택을 했습니다.
이 선언문은 세 대목인데요, 첫째 대목은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합니다로 시작합니다. 일제 제국주의자들의 강압에 못 이겨 신앙의 정신과 양심을 지키지 못한 채, 신사참배에 가담한 죄를 회개합니다. 그것이 종교 행위가 아니라는 일제의 거짓 논리에 현혹되어 눈을 감았음을 회개합니다. 기독교 의식의 예배 시간에 묵도가 진행되면 그 다음에 동방요배를 했고, 황국 신민 서사를 낭독했고, 예배 시간에 예배를 더럽힌 죄를 회개합니다. 심지어 목사들까지 모인 회의에서 일본의 천조 대신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았는데 신도 세례를 목사들이 받아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용서하옵소서. 이런 고백입니다.
독일이 히틀러의 나치 치하에 있을 때, 나치를 추종하던 교회 거의 대부분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안수 선서할 때 이렇게 선서했습니다. 하일 히틀러 (Heil Hitler!). 히틀러 총독께 맹세하고 저는 이제 여호와 하나님과 총통 앞에서 이름으로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충성을 서약합니다, 하고 총통 앞에서 선서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옛날 정신이 없던 시절, 독일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우리나라도 일본의 "신도" 이름으로 목사가 다시 세례를 받을 정도로 저희들이 참 힘들게 산 시기였습니다. 회개합니다.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한 죄를 두 번째로 회개합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군국주의에 국방 헌금이다, 애국운동기금 연고다, 하여 여러 가지 구실로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을 도운 죄를 회개합니다. 군국주의 나팔수로 전락하여 우리의 젊은이들을 전지로 사지로 보낸 몰아낸 저희 죄를 회개합니다. 요약하면 그렇습니다.
마지막에는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이 죄인 줄 알면서도 이 죄를 회개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면서 용서를 비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분열로 삐졌습니다. 신사참배 했느니 말았느니 하면서 교회가 갈진 것입니다. 이런 죄책 고백 선언은 사실은 때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오늘
3. 1절 기념예배 때 이 죄책 선언을 공개적으로 알리기로 결의한 것 만으로도 죄스러움을 약간은 덜 수 있게 되었읍니다.
오늘 이 사실 앞에서 한 가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일본에 대해서 세계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분노의 위구심이 있읍니다. 일본은 참 부자고 경제대국이기는 하나 왜 죄책 고백을 안 할까, 아니면 왜 못 할까 늘 가슴에 와닿는 우리의 분노이기도 합니다.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게되는데, 독일은 히틀러 나치 때의 모든 죄과를 공개적으로 죄책 선언을 했는데 일본은 참 안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국민사이에서도 의견이 조금은 엇갈리는 것 같습니다. 죄책 선언을 받자. 그거 없이는 한일교류를 하지 말자. 이런 입장이 있구요. 그와는 조그은 다른 입장이 있읍니다. 근자에 들어서 여러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그런 이야기도 나오고는 했읍니다만, 최근에 이명박 대통령도 잘못했다는 죄책고백을 안 받겠다, 요구하지 않겠다, 그렇게 선언합니다.
저는 죄책고백을 우리가 하면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가장 용감한 사람이 죄책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용감한 사람만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책고백을 일본 제국주의한테 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죄책고백을 우리 자신들에게 했고, 우리를 도우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했고, 우리 선조들 앞에서 했고, 우리 후손들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이렇게 말입니다.
우리의 죄책고백 사실을 오늘 일본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일본 보고 너희 잘못을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사과해라, 하는 요구보다 우리는 신사참배 한 죄를 회개합니다, 하는 그 말 자체가 일본에 대해서 엄청난 저항입니다. 사실은 죄책고백을 요구하는 용기보다 우리 스스로 잘못을 고백하는 용기가 훨씬 더 큰 저항이요, 반대요, 더 힘찬 목소리입니다. 죄책고백은 우리가 자신있게 알아서 하는 것이지 강요를 받아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왜요 우리는
3. 1운동의 함성을 통해서 8. 15의 광복을 얻어 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3. 1절 없는 광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읍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는 부활 생각해 본 일이 있으십니까 죽지도 않고 고난당한 일도 없는 그리스도라 이름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부활하여 생명을 주었다고 우리한테 나타났다면. 믿을 수 있습니까
확신이 갑니까 갑자기 나타난 부활 생명의 역사가 믿어집니까 부활생명 하나가 탄생하기 위해서, 부활 생명이 꽃피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노력을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기울이셨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부활을 잉태하기 위한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았더라면 부활이 없었을텐데, 골고다 언덕의 죽어간 예수가 땅에 떨어져 죽었더니 거기서 부활의 나무가 자라고 부활의 나무에서 생명이라 이름하는 열매가 열렸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그것은 허공입니다.
3. 1절이 없는 광복, 민족자주와는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십자가는
3. 1절과 같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십자가 고난의 사건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기 보다도 그 사건 속에서, 고난의 역사속에서 위로가, 생명이,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고난이기에 위대합니다. 고난을 즐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은 부활을 잉태하고, 위로를 잉태하고, 생명을 잉태하는 그릇이요, 과정이요, 터전이요, 그래서 고난은 비켜가지 말고 고난 속에서 인내하고 연단하고 희망의 씨앗을 뿌리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뭐냐하면, 비참하게 죽어 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의 이야기가 아니고요, 이렇게 보면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을 반역한 우리의 세속과 우리의 욕심에 대한 위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세계에 대한 저항입니다. 저항의 목소리는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사람들을 다 멸망시키십시오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사람들이 무지해서 모릅니다. 어떡합니까 용서해 주십시오. 이러한 소리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저항입니다. 십자가에서 용서를 바라는 예수의 말은 위대한 저항의 시입니다. 저항의 찬양입니다. 세상이 너무도 무지합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이요 호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으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부활하신 분의 아버지 임을 아십시오. 믿고 싶으시면 여호와 하나님은 밀알이 되어 땅 속에 들어가 썩고 죽었음을 감사하십시오. 그런 여호와 하나님을 다른 곳에서 본일이 있으십니까 그런 여호와 하나님이 감사하시면 오늘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그 분의 아들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로 하고 썩기로 합시다. 그곳에서 생명의 나무, 건강한 자유의 나무, 희망의 나무, 거기서 무한대의 열매를 맺도록 하십시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안 죽으면 그대로 있답니다. 무효는 아닙니다. 땅 속에 들어가 썩고 죽으면 뿌리를 내리고, 줄기로 자라나 급기야 많은 열매를 맺는 답니다. 그냥 밀알이 아니고 생명이 있는 밀알은 그렇게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3. 1절 기념 주일, 우리는 민족의 고난의 현장, 우리 한분 한분의 고난의 현장, 함께 사는 가족의 고난의 현장, 그 현장 속에서 밀알이 맺는 위대한 희망의 나무, 한번 결단해 보십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민족의 희망이 싹텄고, 저의 희망이 싹텄고, 우리의 미래가 싹텄고, 비전이 있다는 사실을 한번 깨달아 보십시다. 수난은, 사순절은, 수난절은 희망의 산실입니다. 이 희망의 산실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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