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TOP
DOWN

[교사] 스승을 따르는 제자

본문

교권존중과 교원의 사기진작·지위향상을 위하여 지정된 기념일. 매년 5월 15일이다. 1963년 5월 26일에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JRC)가 5월 26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여 사은행사(謝恩行事)를 한 것이 시초이며 65년부터는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로 변경되었다. 73년 정부의 서정쇄신정책에 따라 폐지되었으나 82년에 부활되었다. 이 날은 교육공로자에게 정부가 포상을 하며 각급학교 동창회 사회단체 등이 사은행사를 한다. 옛 스승을 찾아뵙는다든지 병중에 있거나 생활이 어려운 스승을 위문하며 각 학교에서는 스승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여러 가지 행사를 갖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어떤 행사는 없어도 스승의 날을 맞아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를 성경으로 조명하면서 피차 은혜 받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오늘날 학교는 많으나 교육은 부재요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적다는 말을 듣습니다. 특히 제자들의 스승에 대한 패륜은 극에 달했습니다.
지난 4월 달에 학교교장이 목매어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논난이 있었습니다만 전교조 때문에 자살했다느니 하는 사회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문제는 학원이 선후배 관계 상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대변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이상적인 사제 관계를 배우게 됩니다. 스승 엘리야와 제자 엘리사의 아름다운 사제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본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서 엘리사에 대한 기록은 너무나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에 대해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선생인 엘이야와 제자인 엘리사에 관계속에서 선생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은혜를 가늠하고자 합니다.
1 제자는 선생과 일체가 되어야 한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습니다. ①임금 ②스승 ③부모는 일체라는 것입니다. 조상들은 이같이 하나로 생각하고 삶을 실천한 사건입니다.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라고 하는 말은 공동체라고 하는 말이다.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임을 말합니다.
엘리사는 선생인 엘리야를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왜 이다지 자신의 선생인 엘리야를 따르는 것일까 자존심 상하리만치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따라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한마디로 말하면 선생과 제자는 간격이 없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 동안을 주님과 함께 동거동락(同居同樂) 하였다. 한 치에 간격도 두지 않고 선생과 제자는 간격이 없이 함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을 집에서 다니도록 하지 않고 함께 숙식을 같이한 사건을 볼 수 있다. 제자와 선생은 하나요 공동체요 나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말이다.
예수님은 한때 많은 사람이 따르는 가운데 산상 보훈으로 교훈하시기를
마 8:18-22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주님이 가는 곳에 제자가 있어야 함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개의치 않고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빈틈이 없이 하나 되어 함께 하는 것이 선생과 제자 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과 선생과 제자와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은 주님이 가는 곳에는 항상 함께 하여야 하며 하나가 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함께 하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이나 아니면 선생들은 이제 헤어져 함께 지낼 수 없는 처지임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생이 굶고 어려움을 당하는데 제자가 도움과 위로로 함께 해야 함을 의미한다.
엘리사의 교훈
①길갈 ②벧엘, ③여리고, ④요단 이 네 곳에서 엘리사는 선지 생도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마지막까지 자기 스승 없이는 그 어느 곳에도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라고 거ㅗ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스승이 가는 곳에 제자가 있고 스승이 머무는 곳에 자기도 머무르는 제자의 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까닭은 스승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그와의 거룩한 교제 거룩한 대화를 통해 좀 더 많은 영향을 받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려움을 당할 때 고난을 나누는 제자가 되고 싶어서이다.
스코틀랜드 에딘브라 교회 묘지에 개 묘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 개 무덤 옆에는 충견비가 세워져 있고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으로 개 한 마리를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그 주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사람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 개는 주인의 묘 곁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사람들이 먹을 것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그 개는 그 후 14년 동안 주인의 무덤 곁에서 지키다 죽었습니다. " 그 개는 죽는 날까지 주인의 사랑을 생각하고 그 무덤을 지키다 죽었습니다.
`개도 이렇게 주인을 따르고 주인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무덤 곁을 떠나기를 싫어했는데 우리는 과연 최고의 스승인 주님 따르는 일에 이 개만도 못한 자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교훈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개와 주인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개도 주인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을 본다면 제자 된 우리들은 우리 선생이신 주님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교훈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같은 자세를 가지고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 아름다운 사회요 행복한 사회이다.
2 제자는 선생을 열심히 따라야 한다.
제자와 스승은 하나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생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따른다는 이야기는 “제자는 선생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엘리사의 경우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강으로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처지에서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인지는 그 이유를 모르지만 제자는 선생을 따르는 것은 당연시 하는 교훈을 줍니다.
자존심을 구겨가면서 엘리야를 따르는 엘리사는 고생이 예견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고난과 핍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제자로서 스승을 따르는 가운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집 떠나가면 고생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어찌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이 없을 수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따르는 엘리사의 모습은 제자는 선생을 따르는 교훈을 남겨줍니다.
이권을 바라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명예를 바라고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기대 속에서 따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는 선생을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금 드라마에서 보면 제자가 선생과 결혼
학생과 선생이 결혼하는 것 그리 나무랄 일만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생각하면 제자 된 신앙인들은 선생이신 주님을 따름에 결혼하듯이 주님과 영적으로 결혼하는 성도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이 왕이 되어 야심찬 조각이 이루어지면 주님과 함께 우정승 좌정승을 꿈꾸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있었다. 제자로서 선생을 따르는 바람직한 태도는 아닙니다.
당시 대중들
예수님 당시 따르는 모든 대중들의 모습을 보면
1) 호기심에서 따르는 사람들도 있다. 수많은 기적 행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이다.
2) 올무를 놓기 위해서 따르는 바라새인들도 있다.
3) 예수님에게 혜택을 받기 위해서 따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엘리사 같은 제자는 그 같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것을 기대하고 따르지 않았다. 그럼으로 신앙인들은 항상 이해관계를 초월하고 세상적인 것을 초월하여 주님을 따르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엘리사는 엘리야을 따르는 근본적인 목적은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기 위해서 이다. 신령하고 영적인 것을 구하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3 제자는 선생을 뒤를 이어야 한다.
스승 엘리야는 제자 엘리사에게 마지막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9절)"라고 했습니다.
제자인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에게 재물도 영예도 구하지 않았고 어떤 곤경에서의 해방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무엇보다도 스승 엘리야의 영, 즉 정신을 구했습니다.
이 말은 당신이 행한 일을 하기에 내 힘으로서는 벅찬 일입니다. 그럼으로 영감을 주어 나로 하여금 당신의 뒤를 이어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하는 이야기이다.
여기 영감은 일반적으로 그의 높은 정신으로도 해석합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스승을 대신할 예언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하던 일을 계승하고 그 생도들을 살펴보고 엘리야가 접했던 그 고난과 그 타락한 세대들과 대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선생인 엘리야의 하는 일들을 계승하기 위한 제자의 길을 걷겠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바른 제자정신이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정신을 갖지 않는다면 그 시대에 맞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선생을 대신하여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요 스승과 제자에게 걸 맞는 말씀이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가 떠날 것을 알고 그의 혼 즉 정신을 원했습니다. `내가 당신의 존재를 가질 수 없다면 당신의 정신이라도 가져야 되겠습니다. ' 고 하는 요구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스승이요 훌륭한 제자입니까
엘리사에게 있어서 스승 엘리야가 떠난 자리를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 것인가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영혼을 소유한다면 선생이 떠나고 없어도 그가 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생이 하던 일을 계승하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선생의 정신을 본 받아서 그가 하던 일을 계승하는 것이 제자가 할 일입니다.
화가의 지망생
위대한 화가에게서 그가 그린 그림을 모방하기 위해 연구하는 사람은 결코 미술 세계에 높은 수준에 오를 수 없다고 합니다. 작품으로부터 작가의 가슴속에 있는 정신과 영감을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이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다.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림만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작가의 정신과 높은 영감을 알고 감상한다면 진정으로 그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엘리사로서는 약간 지나친 소원인 것 같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엘리사의 소원대로 과연 갑절의 영감을 엘리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계승자로 선택한 선생입니다.
엘리사의 행적
1) 엘리야로부터 받은 겉옷을 취해서 요단강을 치므로 물이 갈라지게 하였습니다.
2) 2:19-를 보십시오!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물이 좋지 않아서 소금 한 그릇을 물 근원에 뿌림으로 물을 정화시키는 기적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3) 2:23-4절에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가는데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조롱.. 저주…암콤 둘.. 42명을 찢음
4) 3장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연합해서 모압과 싸울 때
개천을 파게하고 그 개천이 물이 흐르게 하여 모압을 물리치게 했다.
5) 4장을 보십시오! 선지생도중의 한 여인이 채주에게 두 아들을 종으로 빼앗기게 될 때 기름 한 병으로 채무를 변상하게 하였다.
6) 4장에서 엘리사는 수넴 여인 아들을 낳게도 하였고 죽었을 경우 살리기도 하였다.
7) 4:38-41절에서는 선지생도들이 흉년 중에 야등 덩굴을 솥에 넣고 끓이다가 사망의 독이 있다고 외치자 솥에 가루를 던짐으로 위험에서 구하였습니다.
8) 4:42-4
4.. 보리떡 20과 채소 한 자루로 100명이 먹고 남는 기적
9) 5장을 보십시오! 수리아 장군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10) 6장을 보십시오! 물에 빠진 도끼를 건져내어 주었습니다.
11) 6장에 보시면 거룩한 간첩행위를 하였는데…수리아 사람이 아무리 전쟁 준비를 치밀하게 하여도 이스라엘 왕에게 다 아뢰어 승리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엘리사는 과연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아 귀한 일을 많이 한 선지자가 되어졌습니다. 이 같은 일을 감당하는 것은 스승인 엘리야 정신을 받아 행한 기적들입니다.
맺는 말
조상들은 임금님과 스승과 부모님의 그림자라도 밟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제자가 선생에 대한 도덕이요 윤리입니다.
오늘에 만연된 잘못된 제자
1) 오늘날 스승의 멱살을 잡고 두들겨 패서 병원에 입원시키는 일을 보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입니다.
2) 제자가 선생의 머리를 삭발시키는 일
3) 제자가 선생의 고급 승용차 올라서서 망가뜨리는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4) 총장실에 불을 지르고 기물을 태우고 하는 등의 화면을 접할 때 이 나라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폭력으로 폭거로서 가정으로 대항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아무리 부모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말로 타이릅니다. 아무리 선생이 악할지라도 제자들에게 잘못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스승을 잘 모시지 못하는 나라는 설 수 없습니다.
엘리사는 선생에 대한 예수
1) 아버지로서 예우하였다.
엘리사는 스승에 대해서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이렇게 스승을 부를 수 있어야 이 역사, 이 나라가 소망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것은 갈라질 수 없는 사제지간의 애정이요 의리입니다.
2) 병거와 마병으로 생각하였다.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3) 버려진 옷을 주었다.
이는 선생의 일을 계승할 것을 보여준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 스승주일을 맞아 사랑하는 옛 스승을 찾아뵙는 것도 바람직하고 영적으로 교회에서 가르친 선생 된 자를 찾아뵙는 것도 나무랄 일은 아닌 것으로 알아 은혜를 보답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은 진정한 스승은 우리 구주 예수님입니다. 이 분에게 한번 다시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