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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스승의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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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에 사람 “인”자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서로 맡기고 의지하는 존재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맡기고 살아야 할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맡기고 살기위해 생긴 것이 종교이며, 맡기고 싶은 마음이 신앙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돈을 맡기기 위해 은행을 만들고, 건강을 맡기기 위해 병원을 만들고, 교육을 맡기기 위해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로와 서로를 맡기기 위해 가정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맡기고 싶어 하는 존재”, “의지하고 싶어 하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생은 믿고 맡길 수 있는 것보다는 맡기기 어려운 것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상경은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라”, 벧전 5:7“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버리라”, 시55:22“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그리고 오늘 본문도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맡기라”는 것은 내어 던져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미련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쓰레기봉투를 사용한 뒤로 쓰레기가 3분의 2로 줄었다고 합니다. 알뜰하게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생쓰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갖고 있어야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아깝다고 미련을 가지고 버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롯의 아내를 기억하십시오!
스승의 본은 말과 교훈보다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부모의 본은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여 줘야 합니까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삶의 그 의연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맡기고 살면 어떻게 될까요
 첫째)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서로 속이기도하며 또 속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속마음은 물론이고, 생각까지 다 아십니다. “심령까지 감찰하신다”고 했습니다..
 금번 부흥회 때 강사님께서 헌금기도하실 때 성경말씀을 개인마다 주시는 것을 보고, 담임자로서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칫하면 점치는 것처럼, 혹은 전혀 엉뚱한 말씀이 나올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사정을 담임목사처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담임목사도 미쳐 모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서 몇 분에게 주시는 말씀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과연 여호와 하나님은 “심령을 감찰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두 번 째 드리기에 또 확인했습니다. 결국 비슷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깨달은 바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쳐 담임목사가 알지 못하는 고민하는 비밀이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사님은 “오르락 내리락”을 알기위해 1년 여 동안 기도하고 깨달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들 나귀(제멋대로)보다 매인 나귀를 쓰신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거입니다..
 요셉의 걱정: 그러나 창 48:19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십니다. 맡기는 생활에도 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도자가 흔들리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여호와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6:1“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9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여행도 해 보면 여행 안내자가 미숙하면 여러 가지로 힘들고 골탕(쓸데없는 쇼핑 부추기기)을 먹습니다. 여러 가이드르 만나면서 나는 어떤 가이드인가 생각해 볼 때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만난 가이드의 해박한 역사지식 등 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어떨 때는 근엄하게, 어떨 때는 마치 유치부 교사처럼 자상하고 유모러스했습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하는 공부는 그만 두시고 교회사나 조직신학을 공부하십시오”
어떤 것을 계획하고 시작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으나 그 일을 완성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계1:8“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19:30“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석가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마호멭도, 징기스칸도, 나폴레옹도, 그 어떤 영웅도 “다 이루었다”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다 이루었다한들 무엇을 이루겠습니까 주님은 “어리석은 자여!” 하실 것입니다..
 요셉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꿈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다윗도 세 번이나 기름 부어 가시면서 그 제국의 대업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점진적인 구원)
실패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실패와 좌절가운데 있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실패의 여러 가지 원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것입니다..
 마땅히 사람이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맡길 것은 맡기고 유연하고, 또 초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4년 만에 창립된 것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만약 제가 지도자, 스승으로서의 본을 보이지 못하고 싸움과 물리적인 투쟁, 혹은 어떤 비류들이 자주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쓰도록 유도했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한심하다고 웃으셨거나 우리는 대사를 망쳤고 또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좀 더 의연하고, 여유있게 신앙생활을 합시다. 아니, 기왕이면 이 땅에서부터 왕처럼 사는 영적인 스승의 본을 , 부모의 본을 보이면서 삽시다.
끝으로)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케 하시느니라”했습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원수와도 화목케 되는 그 주체가 되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보내 주신 여호와 하나님.
그러니까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맡기고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할 때, 사람과도 화목케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원수 맺고 사는 사람치고 마음이 편한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원수는 아니더라도 말을 하지 않고 등만 돌리고 살아도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여호와 하나님과 등지고 사는 삶은 상상하기도 싫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니, 즉 성령을 자꾸 근심하게 하니, 보이는 인간관계에도 시험이 오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합니까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인간적 정서와 시도와 접근을 자꾸 일삼기 때문입니다..
 지난 출애급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 맡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두려워 했습니까 맡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여호와 하나님 중심보다 인간의 정서가 우선이다보니 큰 낭패를 겪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시16:8)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맡기지 않으면 시험의 바다에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나 맡기면 주님께서 화목의 손을 내어 미시고 삶이 평안해집니다..
 시므이의 저주에 대한 다윗의 반응:삼하 16:10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다윗은 그의 저주와 욕설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훗날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여 자신의 왕국을 회복하였으나 시므이는 연금명령을 거부하여 결국 솔로몬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합니다. 끝까지 반골이고 자기위주로 살다가 사망의 덫에 걸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승의 본, 부모의 본, 지도자의 본은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 일에만 성실하고 의연하고 여유있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본이 되는 좋은 스승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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