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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좋은 교사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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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군사, 좋은 일군, 선한 일군은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규정하는 최고의 기준이 됩니다. 좋은 교회라는 것은 좋은 일군이 많은 교회입니다. 조선시대의 전성기를 보면 세종 임금이 집현전을 만들어서 많은 인재들을 키웠습니다. 세종이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세종 혼자의 역할이 아닙니다. 세종 때의 수많은 인재들이 세종의 치적을 도와주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로마인의 이야기에도 보면 로마가 긴 역사 속에 두드러지는 대국으로 행세를 하고 모든 나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근거 가운데 하나가 아카데미를 많이 세우고 사람들을 키운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떤 조직이나 기관을 볼 때 좋은 인재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회사 가운데 IBM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회사는 사람을 만들어 키우는 전략이 있는데 한 사람이 그만 투자를 잘못해서 회사에 천만불의 손해를 끼치는 프로젝트가 되어서 실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원은 회장되는 톰 왓슨 앞에 와서 자신이 이런 손해를 끼쳤기 때문에 더 일할 면목이 없다고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그때 톰 왓슨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회사에 천만불 손해를 끼쳤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자네를 위해서 천만불을 투자한 것이라네. 그러니 사표를 거두고 일을 하게’라고 그 사람을 격려하고 사표를 반려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후에 IBM을 위해 헌신하여 일을 했다고 합니다. 톰 왓슨의 회사경영전략은 사람을 키워놓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교육은 결국 좋은 교사를 얼마나 만드느냐에 교회교육의 모든 관건이 매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근거해서 네 가지 조건 하에서 좋은 교사가 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경건훈련에 집중하기
 첫째로 좋은 교사는 경건훈련에 집중해야 됩니다. 본문 7-8절에 보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집중’이란 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훈련이라는 것은 집중력을 가지지 않으면 훈련되지 않습니다. 훈련은 집중력이 좌우합니다. ‘연습하라’는 말은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경건생활의 집중력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갖추는 것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훈련해야 됩니다.
 ‘버리고’라는 말은 결정적으로 버리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결정적으로 한번하고 끝내야지 자주 하면 안됩니다. 이번 주일에 버리고 매 주마다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연습은 계속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용서도 결정적으로 하기 바랍니다. 부모가 자식의 허물을 용서할 때도 한번 결정적으로 용서해 주고 끝내야 됩니다. 용서를 계속 해주는 인간관계는 이미 병든 것입니다. 용서는 한번만 해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용서가 성숙되도록 참아주고 돌봐주고 이해해주는 것은 계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건훈련을 할 때 경건훈련에 방해가 되는 나쁜 버릇들을 결정적으로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집중력은 계속 반복하는데서 일어납니다. 여기에 보면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 말이 바로 집중력을 가지는 마음을 말합니다. 옳은 일에 집중하고 있는 그 마음이 깨끗한 마음입니다. 더러운 마음은 이것 저것 생각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만 집중하는 것이 순수한 사랑입니다. 교사들은 경건훈련에 집중하는 대가가 지불되지 않고는 좋은 교사가 되지 않습니다. 교사들은 첫째로 경건훈련의 최고기본을 예배에 두시기 바랍니다.
유아부 부터 대학부까지 교사로 사역을 할 때 예배생활을 통해 은혜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주일학교 예배를 드리고 어른예배를 드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육기관을 섬기는 것으로 주일예배를 대체하면 안됩니다. 주일예배로 은혜를 받고 교육기관을 섬기는 기본 예배생활이 철저해야 합니다. 경건하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이 예배가 경건훈련의 기본입니다. 교사들은 예배생활이 흐트러지면 안됩니다. 예배를 참석하려면 시간 전에 참석하십시오. 준비된 예배, 마음을 쏟는 예배, 절도가 있는 예배, 무언가 은혜를 사모하는 예배생활을 기본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생활입니다. 기도생활이 따르지 않은 경건훈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정례적으로 실시하는 금요기도회나 새벽기도회에 경건훈련의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교회에 직책을 맡은 분이 기도훈련에 집중력이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가 하는 정례적인 기도회나 예배를 예사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갖추어져야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연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은혜받는 예배생활을 하십시오. 능력받는 기도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교사로서 사역을 하십시오.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기
두 번째 요건은 가르치는 것에 착념해야 됩니다. 교사는 가르칠 줄 알아야 되고 가르치는 일에 착념 해야 됩니다. 착념은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세 가지를 가지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가르친다는 것에 제일 중요한 요건은 무엇입니까 제일 중요한 요건은 권위입니다. 내가 교사라는 직분의 권위를 가지고 아이들 앞에 나서는 것입니다.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 교사는 가르칠 수 없습니다. 권위가 무너지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를 보고 권위에 대해서 12-13절에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하였습니다. 교사는 권위를 잃어버리면 가르칠 수 없습니다. 목사가 권위를 잃어버리면 설교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가르치는 직책은 권위를 갖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권위는 첫째로 도덕적인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나이를 초월할 수 있는 권위는 도덕성이 갖추어졌을 때 가능합니다. 교사가 도덕적으로 권위에 손상을 입으면 가르칠 수 없습니다.
 둘째는 본이 되는 모범적 권위입니다. 모범은 강렬한 하나의 권위입니다. 제가 계동에 있는 현대사옥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현대사옥 안에 들어가 보고 강렬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 건물이 온통 정주영씨 이미지 밖에 없었습니다. 방에도 복도에도 강당에도 정주영씨가 모델이었습니다. 그만큼 현대라는 거대한 조직체는 정주영이라는 모델을 앞세워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강렬한 모범적 권위입니다. 그분이 일생을 통하여 현대라는 회사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모범은 아무도 침범 못하는 권위인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지식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모범적 권위를 가지고 교회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렬한 지식이고 권위입니다.
 셋째로 13절에 ‘가르치는’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영적인 권위를 말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이 우월한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치는 것이 수준이 있습니까 제가 성경공부를 가르칠 때 세상 사람들이 와서 들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기업체의 간부가 와도 들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사는 아이들 앞에 영적인 것을 주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도덕적 권위, 모범적 권위, 영적 권위가 가르치는 자산입니다. 이것을 갖추어야만 좋은 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계속 성장하기
세 번째는 성장해 가는 교사입니다. 좋은 교사는 다된 교사가 아닙니다. 되어 가는 교사입니다. 성장해 가는 교사라야 하는 것입니다. ‘성장하지 않는 교사는 교육의 재앙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사가 성장하지 않으면 그 교육은 이미 재앙을 만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16절에 보면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교사가 성장하는 것은 교육으로도 보완이 되어야 하겠지만 이것은 교사의 생명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사가 영적으로 살아있으면 그 교사는 영적으로 계속 자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의 생명력이 침체되어 버리면 그 교사는 성숙하지 못합니다. “진보를 나타내게 하라”는 것은 지식적으로 학력을 높여가라는 개념이 아니라 생명력의 성숙을 말합니다. 교사가 교사직을 수행하면 할수록 아이들을 사랑하는 열정이나 우리 안에서 생명력이 계속 살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흥미 있는 조사가 있었는데 53년도에 졸업을 한 학교동문들을 20년 후에 어떤 모습인지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3%는 미국사회에 상류층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0%가 중산층이 되고 60%가 서민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27%는 서민이하 빈민층에 가까운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학교를 동시에 졸업을 하고 사회진출을 했는데 20년 세월동안에 왜 어떤 동문은 상류층이 되고 어떤 동문은 중산층, 서민층이 되었는가를 조사했습니다. 심층적으로 조사한 결과 3%의 상류층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일기장이나 혹은 메모지에 미래에 대한 비전을 메모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의 중산층 사람들도 공통점이 있었는데 메모를 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들 앞에 언제나 자기 인생의 꿈을 말했던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성장해 간다는 것은 내 안에 성장하는 생명력이 있어야 되고 그 성장을 지향해 가는 목표가 있어야 됩니다. 금년에 내가 이러한 교사로서 헌신하겠다는 꿈을 그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진보를 나타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교사사역
네 번째는 하나되는 교사사역입니다. 좋은 교사는 혼자서 일을 잘하는 것도 뜻이 있지만 함께 하는 연합사역을 잘해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매우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4장 3-6절에 보면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여호와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7절, 12절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각 사람에게 각 은사와 각 직분에 대해서 말하면서 하나되라고 한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되는 것은 획일화가 아닙니다. 유니폼을 입는 것은 획일화(uniformity)가 아니라 통일성(unity)입니다. 너와 내가 똑같다는 것이 아니라 은사도 다르고 여건도 다르지만 다른 우리들이 주 안에서 통일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똑같이 키를 맞추는 획일화가 아니라 각각 다른데도 서로 함께 통일성을 이루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교의식이 아니라 창조의식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은사의 창조성을 가지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교사들을 보면 은사가 다양합니다. 다양한 것이 비교가 되면 안됩니다. 우리 가운데 1등은 항상 1등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깎아서 나하고 맞추어서 공동 1등을 만들면 안됩니다. 나보다 나은 1등으로 인정해주고 나는 2등으로 따라가면 서로가 빛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풍속화가의 대가로 김홍도와 그와 쌍벽을 이루는 신윤복이 있습니다. 김홍도의 그림은 언제나 서민취향으로 서민을 모델로 해서 그립니다. 그가 그린 ‘씨름’을 보면 씨름하는 장면 옆에 엿을 파는 아이가 있는데 양반이 부채사이로 엿장수를 곁눈질로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반은 상놈을 볼 때는 바로 안 본다는 것입니다. 기생을 보아도 양반 채면에 바로 볼 수 없어 곁눈질로 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그림 속에 당시의 사회상과 양반들의 잘못된 외식과 서민들의 애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윤복씨는 주로 기생을 그리면서 양반들이 기생을 놀리고 그 기생 앞에 양반이 채통을 잃는 모습을 그리는데 두 사람의 그림은 그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그러면서도 김홍도는 김홍도대로 신윤복은 신윤복대로 풍속화의 대가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림은 다릅니다. 모델도 다릅니다. 모든 것이 다르지만 그러면서도 이 두 사람은 그 당시의 사회상과 양반들의 비리를 풍자하고 서민들의 애환을 표출하는 통일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는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나처럼 되라’는 말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우리는 다르면서도 성령 안에서 통일이 될 수 있습니다. 획일화는 답답하지만 통일성은 매우 여유롭습니다. 연극무대 뒤의 소품이 모두 한 가지만 있다고 하면 연극이 되겠습니까 다양한 소품이 역할마다 쓰여지므로 통일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교사가 되는 조건에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디 교사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충성된 일군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조건이 갖추어져야 됩니다. 이제는 실속 없이 덤벼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좋은 교사의 내용을 가지고 교사로 사역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의 유익이 있습니다.
교사의 사역을 감당할 때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본인의 신앙성숙에 놀라운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교사직을 제대로 감당하는 사람은 교회의 어떤 직분을 맡아도 감당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교사는 그만큼 수준 높은 직분입니다. 이 네 가지 요건을 갖추려면 뼈를 깎는 노력이 따라야 됩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려야 이것이 가능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긴장함으로서 이 일은 가능해지고 성령께서 가능하게 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못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교사되기의 주체자는 성령이십니다. 내가 좋은 교사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은 교사가 되려고 헌신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좋은 교사로 되게 만드실 줄 믿습니다. 그 은혜 안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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