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적 스승이 되자
본문
우리의 인생 가운데 3가지 중요한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부모님과의 만남이요, 배우자와의 만남이요, 스승과의 만남입니다.
훌륭한 스승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이 여인의 인생 전반전은 너무나 어둡고 힘들고 불행했습니다.
너무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기였을 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습니다.
하나뿐인 동생도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안질이 악화되어 두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저주하며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인생을 반전시키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을 저주하며 절망 가운데 있는 그녀는 바아바라 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바아바라 신부는 그녀에게 주님의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여전히 너를 사랑하시고, 너를 향한 놀라운 계획이 있다는 것을 들려주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그녀의 가슴 속에 새겨지는 순간 절망의 어둠이 걷히고 새로운 소망의 햇살이 비쳐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과거의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삶의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녀는 보스톤에 있는 파킨스 맹학교에 들어갔습니다.
6년간의 노력 끝에 최우등생으로 졸업했습니다.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이 성공하였습니다.
새롭게 인생의 눈을 뜬 그녀는 바로 셜리번 선생님입니다.
어느 날 셜리번은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대상은 맹인이요 농아요 청각장애를 가진 헬렌 켈러입니다.
셜리번 무려 48년 동안 헬렌 켈러를 위해 모든 사랑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고통 받는 인류에게 소망의 등불이 된 위대한 헬렌 켈러를 길렀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탬풀 대학이 헬렌 켈러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그때 그녀를 양육한 위대한 셜리반에게도 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만약 셜리번 위대한 스승인 바아바라 신부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만약 헬렌 켈러가 위대한 스승인 셜리번의 양육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한 위대한 스승의 헌신과 사랑이 한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봅니다.
아니 인류 전체에게 소망을 주는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적 스승의 모습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서 스승은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의 선생님을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입니다.
성도들의 존경과 신임으로 임직을 한 중직자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어린이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구역을 이끌어 가는 구역장이요, 일대일 양육을 하는 양육자입니다.
가정에서는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는 스승입니다.
우리가 원튼 원치 않든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서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18절에 보면 “아들 디모데야” 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편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사랑하는 자녀를 대하듯 “아들 디모데야” 라고 말씀합니다.
딤전 1장 2절에서도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형식적인 관계가 아닌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영적 스승으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는 바로 아비의 마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려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돈이나 명예나 건강이 아니라 사랑의 목마름입니다.
사랑에 주린 자들이 쓰라린 가슴을 부등켜 안고 사랑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학교교육이든 가정교육이든 신앙교육이든 가장 중요한 본질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을 전하고, 좋은 환경을 제공해도 사랑이 없는 교육은 헛수고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가 있고, 스승이 있고, 영적 지도자들이 있지만 현실은 참 어둡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4:15)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자녀를 낳는 심정으로 제자를 양육했습니다.
교육의 위기는 바로 사랑의 부재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교육은 물 없는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아비의 심정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성경지식의 전달이 아닌 삶으로 가르치는 사랑의 교육입니다.
아비의 심정으로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사랑과 추억을 남겨야 합니다.
행복한 동화 2권에 보면 ‘물 한 컵의 용서’가 나옵니다.
배고픈 어린 학창시절, 개구쟁이 몇 명이 의기투합했습니다.
건빵과 우유가루를 보관한 학교 급식창고를 몰래 들어갔습니다.
건빵을 주머니에 가득 채우고, 우유가루 통에 머리를 박고 열심히 먹었습니다.
가루가 넘어가면서 기침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선생님이 기침 소리를 듣고 창고 문을 열었습니다.
개구쟁이들은 천근만근 무거운 가슴을 안고 교무실로 갑니다.
‘이제 우린 죽었다. 운동장을 건빵물고 뺑뺑이 돌겠구나’
그런데 벌벌 떨고 있는 개구쟁이들에게 말합니다.
‘야 이놈들아! 마른 가루 먹다 숨막히면 어쩔려구 그래’
하시면서 물 컵에 물을 따라 주셨습니다.
그 물을 마시면서 개구쟁이들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래, 나도 커서 저 선생님처럼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선생님이 되어야지’
이것이 바로 아비의 마음으로 사랑을 가르치는 교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알게 모르게 아비의 마음으로 가르쳐주신 스승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그 사랑의 빚진자로서 아비의 마음으로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을 지도하다 보면 지독히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열매를 거두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경험, 지식, 노력으로 하다보면 지치기 쉽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아비의 마음으로 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음의 두 예화를 잘 들어보십시오.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의 대부 김기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집이 몹시 가난해서 미술시간에 크레파스조차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매번 크레파스를 가져오지 않는 기환이에게 담임 선생님은 “도대체 이번이 몇 번째냐"고함을 쳤습니다.
집안 형편을 말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는 그에게 교사는 다시머리를 세게 쥐어박으며 말합니다.
"다음부터는 훔쳐서라도 준비물을 가져와. "
친구들 앞에서 창피함을 당한 그는 이때부터 무엇이든지 필요할 때마다 도적질과 강도질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7년 후에는 살인강도 죄로 사형을 언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꿔놓고 말았다. "는 말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의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교회에 말썽꾸러기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로 성격이 난폭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학교 교사가 그를 불쌍히 여기고 옷 한 벌을 선물했습니다.
며칠 후 이 소년은 옷을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교사는 그 후에도 두 차례나 옷을 다시 사주었습니다.
그 옷도 역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저 아이는 구제불능입니다. 더 이상 사랑을 쏟을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학교 교사는 이 소년에게 "네가 옷을 버리는 것은 용서한다. 그러나 교회 출석은 계속한다고 약속해다오. "라며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을 표시했습니다.
결국 이 말썽꾸러기 소년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누구인 줄 압니까
그 유명한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입니다.
그는 중국선교사로 헌신했으며, 영어로 중국어 사전을 집필했습니다.
가장 좋은 교사는 바로 아비의 심정으로 양육하는 자입니다.
지금 당장 변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분을 품지 마십시오.
끝까지 아비의 심정으로 참고 기다려보십시오.
주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베풀어 보십시오.
반드시 변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아비의 마음으로 양육함으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는 위대한 부모, 위대한 스승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18절 이하를 보십시오.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바울이 믿음의 아들에게 경계하며 지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언’입니다.
여기서 예언은 미래의 될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22장 18-1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
예언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거나 하는 자는 재앙을 받을 뿐 아니라 거룩한 성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찾으시는 교사는 바로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세상의 철학이나 사상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디모데 양육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복음으로 너를 낳았다” 고백합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복음의 능력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육의 교재는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말씀을 떠난 모든 교육은 정도를 벗어난 것입니다.
딤후3장 16-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진리의 말씀인 성경만이 모든 사람을 온전케 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자로 만들 수 있는 교과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육을 시키는 만큼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대학 진학을 위해 애쓰는 정성의 몇 퍼센트를 말씀교육, 신앙교육에 투자합니까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온전케 만든다는 것을 믿고 있는데 실제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받는 것을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각국 학생들이 모여서 번지 점프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조교가 영국학생에 말합니다.
‘영국 신사답게 멋지게 뛰어내려라’
그러자 영국 학생이 신사답게 뛰었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스 학생에게 말합니다.
‘예술적으로 뛰어내려라’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아닙니까
그래서 축구를 해도 아트 싸커, 예술적으로 공을 찹니다.
그 말을 들은 프랑스 학생이 예술적으로 뛰어내립니다.
드디어 한국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내립니다.
조교가 뭐라고 말한 줄 아세요
‘이번 번지 점프는 내신 성적에 반영된다. 알았지!’
한국 학생은 성적에 반영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친밀감을 배우고, 사랑을 배워야 할 교우관계가 라이벌이 되었습니다.
서로 눈치를 살피고, 시험 때만 되면 서먹서먹해집니다.
피디수첩에 ‘죽음의 삼각형’ 이란 동영상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요즘 여러분의 자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이 뭔줄 아십니까
내신, 수능, 논술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죽음의 트라이앵글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 영상의 마지막 자막이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분노와 피해의식은 모두 다 당신들이 키웠습니다. ’
공부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우리 아이들이 저런 분노의 감정을 가졌을까 돌이켜 보니 참으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물론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도 모르게 자녀들을 죽음의 트라이앵글로 몰아넣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함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니다.
단순한 학교의 성적보다는 생명의 말씀이 더 소중함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단순한 대학 진학보다 믿음의 비전을 키우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임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의 본을 보이는 부모,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말씀을 읽는 모습, 묵상하는 모습,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순간순간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스승이 될 때 우리 자녀들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로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 믿음과 선한양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19절 말씀에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서는 파선하였느니라. ”
우리들이 가르쳐야 할 중요한 내용은 믿음과 선한 양심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파선을 하고, 양심을 버린 자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이 바로 20절에 나오는 후메네오와 알렉산더입니다.
그들은 사단에 내어 주어 징계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진 자녀로, 선한 양심을 지닌 자로 양육해야 합니다.
아무리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으면 꽝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과 주어진 상황에 순종’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할 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가는 과정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며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일5:4입니다.
“대저 여호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믿음의 자녀로 키우면 세상을 이기는 위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자녀로 키우는 부모, 믿음을 가진 학생으로 키우는 영적 교사들이 되십시오.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진 자로 양육해야 합니다.
벧전3:16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선한 양심을 팔아버리면 그것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왜 많은 크리스쳔들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부끄러움을 당합니까
선한 양심을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경건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말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나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선한 양심을 가진 교사, 선한 양심을 가진 자녀로 양육하는 필요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비결입니다.
지난 15일은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스승의 날 교장 재량으로 휴교를 해야 할 만큼 이 나라의 학교교육은 무너져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참 교육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올바른 신앙교육의 회복입니다.
그 출발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 영적인 스승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적 스승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비록 열매가 없고, 때로는 힘들고 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신앙교육입니다.
그 신앙교육의 주체는 바로 교사들입니다.
교회 안에 많은 직분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힘든 것은 교사의 사명입니다.
교사는 한 개인과 교회의 미래와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두신 학부형들은 교회학교 교사를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런 엉뚱한 소망을 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우리 성지교회 학부형들이 스승의 날이 되면 교회학교 선생님들에게 촌지를 들고 와서 다른 아이들보다 내 아이 성경말씀 좀 더 잘 가르쳐 주세요’ 부탁하는 그런 날이 왔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스승의 날이 되면 그날은 교회학교 하루 쉬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당회에서 논의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가 대통령으로부터 장관직을 제의 받았습니다.
"당신의 탁월한 경영솜씨를 발휘해 체신부장관직을 맡아주시오. "
워너메이커는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나는 교회학교 교사라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장관을 맡아서 내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이것은 정말 큰 일 입니다. "
대통령은 교회학교 교사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에서 필리델피아 고향에 내려가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한번은 기자들이 워너메이커에게 "장관직이 교회학교 교사직만도 못하냐 "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교회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 동안 해야 할 본업입니다. 그러나 장관직은 한두 해 하다가 말 부업이지요. "
한 사람의 헌신된 교사가 한 개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위대한 지도자를 키울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님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헌신된 영적 스승을 찾고 계십니다.
아비의 마음으로 가르치는 스승,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스승, 믿음과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참된 스승을 찾고 계십니다.
바로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이 찾는 영적 스승이 되어 여러분이 맡고 있는 학생들 가운데 자녀들 가운데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일꾼들이 나올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훌륭한 스승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이 여인의 인생 전반전은 너무나 어둡고 힘들고 불행했습니다.
너무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기였을 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습니다.
하나뿐인 동생도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안질이 악화되어 두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저주하며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인생을 반전시키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을 저주하며 절망 가운데 있는 그녀는 바아바라 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바아바라 신부는 그녀에게 주님의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여전히 너를 사랑하시고, 너를 향한 놀라운 계획이 있다는 것을 들려주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그녀의 가슴 속에 새겨지는 순간 절망의 어둠이 걷히고 새로운 소망의 햇살이 비쳐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과거의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삶의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녀는 보스톤에 있는 파킨스 맹학교에 들어갔습니다.
6년간의 노력 끝에 최우등생으로 졸업했습니다.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이 성공하였습니다.
새롭게 인생의 눈을 뜬 그녀는 바로 셜리번 선생님입니다.
어느 날 셜리번은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대상은 맹인이요 농아요 청각장애를 가진 헬렌 켈러입니다.
셜리번 무려 48년 동안 헬렌 켈러를 위해 모든 사랑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고통 받는 인류에게 소망의 등불이 된 위대한 헬렌 켈러를 길렀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탬풀 대학이 헬렌 켈러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그때 그녀를 양육한 위대한 셜리반에게도 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만약 셜리번 위대한 스승인 바아바라 신부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만약 헬렌 켈러가 위대한 스승인 셜리번의 양육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한 위대한 스승의 헌신과 사랑이 한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봅니다.
아니 인류 전체에게 소망을 주는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적 스승의 모습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서 스승은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의 선생님을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입니다.
성도들의 존경과 신임으로 임직을 한 중직자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어린이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구역을 이끌어 가는 구역장이요, 일대일 양육을 하는 양육자입니다.
가정에서는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는 스승입니다.
우리가 원튼 원치 않든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서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18절에 보면 “아들 디모데야” 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편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사랑하는 자녀를 대하듯 “아들 디모데야” 라고 말씀합니다.
딤전 1장 2절에서도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형식적인 관계가 아닌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영적 스승으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는 바로 아비의 마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려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돈이나 명예나 건강이 아니라 사랑의 목마름입니다.
사랑에 주린 자들이 쓰라린 가슴을 부등켜 안고 사랑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학교교육이든 가정교육이든 신앙교육이든 가장 중요한 본질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을 전하고, 좋은 환경을 제공해도 사랑이 없는 교육은 헛수고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가 있고, 스승이 있고, 영적 지도자들이 있지만 현실은 참 어둡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4:15)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자녀를 낳는 심정으로 제자를 양육했습니다.
교육의 위기는 바로 사랑의 부재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교육은 물 없는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아비의 심정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성경지식의 전달이 아닌 삶으로 가르치는 사랑의 교육입니다.
아비의 심정으로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사랑과 추억을 남겨야 합니다.
행복한 동화 2권에 보면 ‘물 한 컵의 용서’가 나옵니다.
배고픈 어린 학창시절, 개구쟁이 몇 명이 의기투합했습니다.
건빵과 우유가루를 보관한 학교 급식창고를 몰래 들어갔습니다.
건빵을 주머니에 가득 채우고, 우유가루 통에 머리를 박고 열심히 먹었습니다.
가루가 넘어가면서 기침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선생님이 기침 소리를 듣고 창고 문을 열었습니다.
개구쟁이들은 천근만근 무거운 가슴을 안고 교무실로 갑니다.
‘이제 우린 죽었다. 운동장을 건빵물고 뺑뺑이 돌겠구나’
그런데 벌벌 떨고 있는 개구쟁이들에게 말합니다.
‘야 이놈들아! 마른 가루 먹다 숨막히면 어쩔려구 그래’
하시면서 물 컵에 물을 따라 주셨습니다.
그 물을 마시면서 개구쟁이들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래, 나도 커서 저 선생님처럼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선생님이 되어야지’
이것이 바로 아비의 마음으로 사랑을 가르치는 교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알게 모르게 아비의 마음으로 가르쳐주신 스승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그 사랑의 빚진자로서 아비의 마음으로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을 지도하다 보면 지독히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열매를 거두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경험, 지식, 노력으로 하다보면 지치기 쉽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아비의 마음으로 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음의 두 예화를 잘 들어보십시오.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의 대부 김기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집이 몹시 가난해서 미술시간에 크레파스조차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매번 크레파스를 가져오지 않는 기환이에게 담임 선생님은 “도대체 이번이 몇 번째냐"고함을 쳤습니다.
집안 형편을 말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는 그에게 교사는 다시머리를 세게 쥐어박으며 말합니다.
"다음부터는 훔쳐서라도 준비물을 가져와. "
친구들 앞에서 창피함을 당한 그는 이때부터 무엇이든지 필요할 때마다 도적질과 강도질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7년 후에는 살인강도 죄로 사형을 언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꿔놓고 말았다. "는 말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의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교회에 말썽꾸러기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로 성격이 난폭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학교 교사가 그를 불쌍히 여기고 옷 한 벌을 선물했습니다.
며칠 후 이 소년은 옷을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교사는 그 후에도 두 차례나 옷을 다시 사주었습니다.
그 옷도 역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저 아이는 구제불능입니다. 더 이상 사랑을 쏟을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학교 교사는 이 소년에게 "네가 옷을 버리는 것은 용서한다. 그러나 교회 출석은 계속한다고 약속해다오. "라며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을 표시했습니다.
결국 이 말썽꾸러기 소년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누구인 줄 압니까
그 유명한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입니다.
그는 중국선교사로 헌신했으며, 영어로 중국어 사전을 집필했습니다.
가장 좋은 교사는 바로 아비의 심정으로 양육하는 자입니다.
지금 당장 변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분을 품지 마십시오.
끝까지 아비의 심정으로 참고 기다려보십시오.
주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베풀어 보십시오.
반드시 변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아비의 마음으로 양육함으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는 위대한 부모, 위대한 스승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18절 이하를 보십시오.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바울이 믿음의 아들에게 경계하며 지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언’입니다.
여기서 예언은 미래의 될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22장 18-1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
예언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거나 하는 자는 재앙을 받을 뿐 아니라 거룩한 성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찾으시는 교사는 바로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세상의 철학이나 사상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디모데 양육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복음으로 너를 낳았다” 고백합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복음의 능력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육의 교재는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말씀을 떠난 모든 교육은 정도를 벗어난 것입니다.
딤후3장 16-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진리의 말씀인 성경만이 모든 사람을 온전케 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자로 만들 수 있는 교과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육을 시키는 만큼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대학 진학을 위해 애쓰는 정성의 몇 퍼센트를 말씀교육, 신앙교육에 투자합니까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온전케 만든다는 것을 믿고 있는데 실제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받는 것을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각국 학생들이 모여서 번지 점프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조교가 영국학생에 말합니다.
‘영국 신사답게 멋지게 뛰어내려라’
그러자 영국 학생이 신사답게 뛰었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스 학생에게 말합니다.
‘예술적으로 뛰어내려라’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아닙니까
그래서 축구를 해도 아트 싸커, 예술적으로 공을 찹니다.
그 말을 들은 프랑스 학생이 예술적으로 뛰어내립니다.
드디어 한국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내립니다.
조교가 뭐라고 말한 줄 아세요
‘이번 번지 점프는 내신 성적에 반영된다. 알았지!’
한국 학생은 성적에 반영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친밀감을 배우고, 사랑을 배워야 할 교우관계가 라이벌이 되었습니다.
서로 눈치를 살피고, 시험 때만 되면 서먹서먹해집니다.
피디수첩에 ‘죽음의 삼각형’ 이란 동영상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요즘 여러분의 자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이 뭔줄 아십니까
내신, 수능, 논술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죽음의 트라이앵글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 영상의 마지막 자막이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분노와 피해의식은 모두 다 당신들이 키웠습니다. ’
공부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우리 아이들이 저런 분노의 감정을 가졌을까 돌이켜 보니 참으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물론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도 모르게 자녀들을 죽음의 트라이앵글로 몰아넣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함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니다.
단순한 학교의 성적보다는 생명의 말씀이 더 소중함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단순한 대학 진학보다 믿음의 비전을 키우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임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의 본을 보이는 부모,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말씀을 읽는 모습, 묵상하는 모습,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순간순간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스승이 될 때 우리 자녀들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로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 믿음과 선한양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19절 말씀에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서는 파선하였느니라. ”
우리들이 가르쳐야 할 중요한 내용은 믿음과 선한 양심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파선을 하고, 양심을 버린 자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이 바로 20절에 나오는 후메네오와 알렉산더입니다.
그들은 사단에 내어 주어 징계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진 자녀로, 선한 양심을 지닌 자로 양육해야 합니다.
아무리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으면 꽝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과 주어진 상황에 순종’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할 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가는 과정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며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일5:4입니다.
“대저 여호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믿음의 자녀로 키우면 세상을 이기는 위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자녀로 키우는 부모, 믿음을 가진 학생으로 키우는 영적 교사들이 되십시오.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진 자로 양육해야 합니다.
벧전3:16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선한 양심을 팔아버리면 그것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왜 많은 크리스쳔들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부끄러움을 당합니까
선한 양심을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경건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말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나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선한 양심을 가진 교사, 선한 양심을 가진 자녀로 양육하는 필요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비결입니다.
지난 15일은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스승의 날 교장 재량으로 휴교를 해야 할 만큼 이 나라의 학교교육은 무너져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참 교육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올바른 신앙교육의 회복입니다.
그 출발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 영적인 스승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적 스승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비록 열매가 없고, 때로는 힘들고 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신앙교육입니다.
그 신앙교육의 주체는 바로 교사들입니다.
교회 안에 많은 직분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힘든 것은 교사의 사명입니다.
교사는 한 개인과 교회의 미래와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두신 학부형들은 교회학교 교사를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런 엉뚱한 소망을 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우리 성지교회 학부형들이 스승의 날이 되면 교회학교 선생님들에게 촌지를 들고 와서 다른 아이들보다 내 아이 성경말씀 좀 더 잘 가르쳐 주세요’ 부탁하는 그런 날이 왔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스승의 날이 되면 그날은 교회학교 하루 쉬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당회에서 논의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가 대통령으로부터 장관직을 제의 받았습니다.
"당신의 탁월한 경영솜씨를 발휘해 체신부장관직을 맡아주시오. "
워너메이커는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나는 교회학교 교사라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장관을 맡아서 내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이것은 정말 큰 일 입니다. "
대통령은 교회학교 교사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에서 필리델피아 고향에 내려가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한번은 기자들이 워너메이커에게 "장관직이 교회학교 교사직만도 못하냐 "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교회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 동안 해야 할 본업입니다. 그러나 장관직은 한두 해 하다가 말 부업이지요. "
한 사람의 헌신된 교사가 한 개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위대한 지도자를 키울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님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헌신된 영적 스승을 찾고 계십니다.
아비의 마음으로 가르치는 스승,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스승, 믿음과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참된 스승을 찾고 계십니다.
바로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이 찾는 영적 스승이 되어 여러분이 맡고 있는 학생들 가운데 자녀들 가운데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영향력 있는 일꾼들이 나올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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