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거짓 선생을 경계하라
본문
여러분은 교회의 생명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어떤사람은 목회자의 설교에 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사람은 선교사역에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사람은 사회봉사에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은 틀린말이 아닙니다. 다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닌 말임에 분명합니다. 실제로 목회자의 깔끔한 설교, 선교사역, 구제하는 일, 사회봉사등은 교회의 생명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선되고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올바른 진리'위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를 쓸 당시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내에 번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디도가 머물렀던 그레데에 있는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전체에 잘못된 가르침이 확산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가장 우선되고, 근본적인 문제를 이제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퍼지고 있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교훈함으로서 교회가 올바른 진리위에 굳게 서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초대교회 당시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위협하고, 성도들을 미혹함케 함으로서 교회의 생명을 뿌리채 흔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잘못된 가르침을 지도자들이 분별하지 못해 거기에 현혹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초대교회 당시에도 많은 지도자들이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하지 못해 그것을 받아 들여 교회가 곤경에 처하고, 심지어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종종 있은 듯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거짓된 가르침을 경계할 것을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잘 살펴봄으로서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바울은 그들에 관해 세가지 정도로 오늘 본문에서 정리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잘못된 교훈입니다. 먼저 10절을 보면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의 대부분이 할례당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할례당이 왜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할례는 구약시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되어져 행한 의식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최초로 이 할례의식을 거행하도록 명령을 하셨셨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언약에 대한 하나의 표시로서 이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시를 통해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식 자체가 그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생후 8일만에 할례의식을 행했을 때 이미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단지 이 의식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세례를 받는 것과 동일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세례의식 그 자체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의식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지도 못할뿐더러 세례 받았다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죄에 대해서 죽고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을 받아 새 생명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내 가슴에 일깨우기 위해서 받는 것입니다. 만약 할례의식이나 세례의식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조건이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할례당은 믿음과 더불어서 모세의 율법도 온전히 지켜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즉 할례가 구원을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니 선한행위가 한가지 더 첨가되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얼핏들으면 참 좋은 말인 듯 합니다. 구원받는데 있어서 우리의 선한행위가 첨가되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의 자존심을 조금은 지켜주는 말인 것같습니다. 전부 공짜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뭔가 조금의 대가를 치루고 받았다고 해야 자존심이 덜 상하고, 남들에게 말하기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원에 관한 것은 우리의 자존심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내 자존심을 내 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저 공짜로 주신다고 하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짜로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할례당은 공짜로 받는것에 대해 자존심을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도 준수해야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입니까 이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을 왜곡케 하는 말들입니까
천주교가 범하고 있는 중요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땅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으면 연옥에 간다고 합니다. 연옥이란 쉽게 말해서 천국과 지옥의 중간 처소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이런 곳이 있다고 주장한 적도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곧 바로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결정되어집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연옥이라는 중간단계에 머물다가 어떤사람은 천국에 가고 또 어떤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옥에 머물렀다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은 첫째 세례를 받아야 하고, 둘째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이 땅에 있는 가족들의 정성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연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누군가 하면 사제들입니다. 즉 신부들입니다. 신부들은 다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으로 직행을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의 정성이 모두어지면 연옥을 거쳐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세례나 이땅에서 있는 사람들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거 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첨가되어져야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엄청난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례당이 가르친 잘못된 교훈은 음식과 결혼에 관한 것입니다. 15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이 말이 무슨말인가하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의 내적인 경건보다는 할례를 받고, 또 어떤음식은 먹지않고, 또 금욕주의생활을 하는 것으로서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자기들처럼 행하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정죄를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음식을 먹고 안 먹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를 구별하게 되는 표준이 됩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금욕주의 생활을 하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의 조건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음식은 물론 가려서 먹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건강을 생각해서 건강에 유익한 음식은 먹고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우리의 구원과 관련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결혼을 금하거나 금욕주의 생활을 강요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안에서 이루는 가정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또 결혼을 했으면 남편이나 아내 모두 결혼생활에 의무를 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금욕주의 생활이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할례당은 이런 것을 구원과 연관시켜서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그리스도께 십자가를 통해 이룩해 놓으신 구원에 대한 완전함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외에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이나 방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그들의 잘못된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10절에 보면 "복종치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고질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권위에 대해 반항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일단 걸고 넘어지고 반항하는 것이 체질화 되어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헛된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말은 쓸데없는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걸고 논쟁을 벌이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 본질에 관한 문제는 말하지 않고 괜히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지고 대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그들은 속임수를 씁니다. 속임수는 우리를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속임수는 거짓된 인격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주위에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속입니다. 다른표현을 쓰면 자꾸 말을 바꿉니다. 오늘은 이말을 했다가 내일은 저말을 합니다.
실례로 여호와의 증인같은 경우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짜를 말했다가 맞지 않으니까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공중에 재림해 계신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처음말을 바꾸었고, 구원받는 사람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진대로 14만 4천명밖에 없고 그 수는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더니 자신들의 숫자가 그 수를 넘어가자 다시 14만 4천명은 상징적인 숫자다라고 바꾸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말을 바꾸고 남을 속이는 것이 그들의 특징입니다. 또 그들은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일도 합니다. 11절을 보면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려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집'이란 가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말합니다. 그리고 '엎드러친다'란 말은 '전복시킨다' 혹은 '멸망시킨다'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믿음의 가정마저도 파괴시키는 것이 그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각종 이단들 때문에 조용했던 가정이 파괴되어져 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삶에 관해서
결론
을 내리기를 가증스럽고, 모든 선한일을 버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16절)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렇게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세 번째로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11절을 보면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더러운 이를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이들은 교회를 생각하고 성도를 생각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느 누구도 종교를 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입니다. 참된 감독, 참된 지도자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습니다. 오직 관심이 다른 이들에게 있으며, 믿음안에서 성장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목적은 믿음안에서 성장을 이루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간에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단의 경우 자신들의 집단에 가보면 교주는 여호와 하나님과 같습니다. 철저하게 신격화 되어 있고, 감히 쳐다볼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성도들은 가난한 월셋방에 사는데 교주는 호화스러운 별장에 기거하면서, 보통사람들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거들먹 거립니다.
그들의 돈에 대한 애착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거짓된 삶을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양심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부패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에 대한 강한 애착은 그 사람을 타락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러한 자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라고 말합니까 이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우리도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신을 해야하는 것일까요
먼저 11절을 보면 "저희의 입을 막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들의 입을 막을 수 있습니까 손수건으로 틀어막는다고 이들의 입을 막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입을 막으라는 말은 그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펼 수 있는 자릴 제공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가르치게 되면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참 그렇습니다.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이 설 자리가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간혹 남에게 배타적이지 않기 위해서 교회의 문을 이런 자들에게 열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그들이 가르치게 하고 판단은 우리가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르칠 자리를 넘겨주면 결국은 영향을 받게 되어 있고 그들의 영향력은 교회를 넘어트리고 말것입니다.
비건한 예로 우리나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신학이 70년대에 태동을 했습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고, 민중의 한으로서 신학을 말했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과 같이 억눌린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참된 신학이라고 했습니다. 그 시대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너도나도 할 것없이 받아들였고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적어도 민중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중신학이 우리 한국교회를 망쳤습니다. 그 영향을 받은 교회들이 교회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생명의 복음을 말하지 않고, 사회개혁만을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말하지 않고 민중의 의식이 부활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천국은 민중이 주인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보기에 선한 것을 쫓는 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얼마전 김수환 추기경이 어느 절에 가서 '그 절이 현대인들의 영혼의 안식처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그 답례로 송월주 총무원장이 꽃동네 마을에 가서 쌀을 전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종교란 저러해야 한다고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개신교는 독단적이고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냐고 말들을 합니다.
여러분!
이제 모레 화요일부터 사사기를 공부하게 될텐데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삶을 살았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에 있는 거민을 다 내쫓으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그들이 가나안의 우상숭배자들을 내 쫓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제말이 스님들을 다 내 쫓아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진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그들이 설자리를 제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그들의 설자리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주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좀더 적극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교회가 정말 참된 진리를 외친다면 거짓된 교훈을 말하는 자들의 입은 자연히 막아진다는 뜻입니다.
또 13절을 보니까 "엄히 꾸짖으라"고 합니다. 여러분! 엄히 꾸짖어야 할 대상과 입을 막아야 할 대상은 사실 다릅니다. 13절을 보니까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엄히 꾸짖어야 할 대상은 거짓된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는 그레데 교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레데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엄격하다'란 말은 '칼로 베이듯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예리하게 꾸짖으라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잘못된 교리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내에 엉뚱한 교리를 퍼트리는 일이 있다면 그리고 반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잘라버릴 각오'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를 상실하면 교회는 모든 것을 상실합니다. 다른 부분에 관해서는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 치료되어질 수 있겠지만 진리는 교회의 생명이며 결단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믿는 것과 거짓을 믿는 것의 차이는 생명이냐 죽음이냐의 차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 거짓교훈을 경계하고 더욱 진리위에 굳게 서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이 말은 틀린말이 아닙니다. 다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닌 말임에 분명합니다. 실제로 목회자의 깔끔한 설교, 선교사역, 구제하는 일, 사회봉사등은 교회의 생명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선되고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올바른 진리'위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를 쓸 당시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내에 번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디도가 머물렀던 그레데에 있는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전체에 잘못된 가르침이 확산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가장 우선되고, 근본적인 문제를 이제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퍼지고 있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교훈함으로서 교회가 올바른 진리위에 굳게 서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초대교회 당시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위협하고, 성도들을 미혹함케 함으로서 교회의 생명을 뿌리채 흔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잘못된 가르침을 지도자들이 분별하지 못해 거기에 현혹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초대교회 당시에도 많은 지도자들이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하지 못해 그것을 받아 들여 교회가 곤경에 처하고, 심지어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종종 있은 듯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거짓된 가르침을 경계할 것을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잘 살펴봄으로서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바울은 그들에 관해 세가지 정도로 오늘 본문에서 정리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잘못된 교훈입니다. 먼저 10절을 보면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의 대부분이 할례당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할례당이 왜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할례는 구약시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되어져 행한 의식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최초로 이 할례의식을 거행하도록 명령을 하셨셨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언약에 대한 하나의 표시로서 이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시를 통해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식 자체가 그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생후 8일만에 할례의식을 행했을 때 이미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단지 이 의식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세례를 받는 것과 동일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세례의식 그 자체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의식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지도 못할뿐더러 세례 받았다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죄에 대해서 죽고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을 받아 새 생명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내 가슴에 일깨우기 위해서 받는 것입니다. 만약 할례의식이나 세례의식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조건이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할례당은 믿음과 더불어서 모세의 율법도 온전히 지켜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즉 할례가 구원을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니 선한행위가 한가지 더 첨가되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얼핏들으면 참 좋은 말인 듯 합니다. 구원받는데 있어서 우리의 선한행위가 첨가되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의 자존심을 조금은 지켜주는 말인 것같습니다. 전부 공짜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뭔가 조금의 대가를 치루고 받았다고 해야 자존심이 덜 상하고, 남들에게 말하기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원에 관한 것은 우리의 자존심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내 자존심을 내 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저 공짜로 주신다고 하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짜로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할례당은 공짜로 받는것에 대해 자존심을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도 준수해야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입니까 이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을 왜곡케 하는 말들입니까
천주교가 범하고 있는 중요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땅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으면 연옥에 간다고 합니다. 연옥이란 쉽게 말해서 천국과 지옥의 중간 처소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이런 곳이 있다고 주장한 적도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곧 바로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결정되어집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연옥이라는 중간단계에 머물다가 어떤사람은 천국에 가고 또 어떤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옥에 머물렀다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은 첫째 세례를 받아야 하고, 둘째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이 땅에 있는 가족들의 정성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연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누군가 하면 사제들입니다. 즉 신부들입니다. 신부들은 다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으로 직행을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의 정성이 모두어지면 연옥을 거쳐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세례나 이땅에서 있는 사람들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거 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첨가되어져야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엄청난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례당이 가르친 잘못된 교훈은 음식과 결혼에 관한 것입니다. 15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이 말이 무슨말인가하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의 내적인 경건보다는 할례를 받고, 또 어떤음식은 먹지않고, 또 금욕주의생활을 하는 것으로서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자기들처럼 행하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정죄를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음식을 먹고 안 먹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를 구별하게 되는 표준이 됩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금욕주의 생활을 하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의 조건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음식은 물론 가려서 먹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건강을 생각해서 건강에 유익한 음식은 먹고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우리의 구원과 관련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결혼을 금하거나 금욕주의 생활을 강요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안에서 이루는 가정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또 결혼을 했으면 남편이나 아내 모두 결혼생활에 의무를 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금욕주의 생활이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할례당은 이런 것을 구원과 연관시켜서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그리스도께 십자가를 통해 이룩해 놓으신 구원에 대한 완전함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외에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이나 방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그들의 잘못된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10절에 보면 "복종치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고질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권위에 대해 반항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일단 걸고 넘어지고 반항하는 것이 체질화 되어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헛된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말은 쓸데없는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걸고 논쟁을 벌이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 본질에 관한 문제는 말하지 않고 괜히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지고 대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그들은 속임수를 씁니다. 속임수는 우리를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속임수는 거짓된 인격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주위에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속입니다. 다른표현을 쓰면 자꾸 말을 바꿉니다. 오늘은 이말을 했다가 내일은 저말을 합니다.
실례로 여호와의 증인같은 경우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짜를 말했다가 맞지 않으니까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공중에 재림해 계신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처음말을 바꾸었고, 구원받는 사람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진대로 14만 4천명밖에 없고 그 수는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더니 자신들의 숫자가 그 수를 넘어가자 다시 14만 4천명은 상징적인 숫자다라고 바꾸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말을 바꾸고 남을 속이는 것이 그들의 특징입니다. 또 그들은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일도 합니다. 11절을 보면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려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집'이란 가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말합니다. 그리고 '엎드러친다'란 말은 '전복시킨다' 혹은 '멸망시킨다'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믿음의 가정마저도 파괴시키는 것이 그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각종 이단들 때문에 조용했던 가정이 파괴되어져 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삶에 관해서
결론
을 내리기를 가증스럽고, 모든 선한일을 버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16절)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렇게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세 번째로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11절을 보면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더러운 이를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이들은 교회를 생각하고 성도를 생각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느 누구도 종교를 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입니다. 참된 감독, 참된 지도자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습니다. 오직 관심이 다른 이들에게 있으며, 믿음안에서 성장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목적은 믿음안에서 성장을 이루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간에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단의 경우 자신들의 집단에 가보면 교주는 여호와 하나님과 같습니다. 철저하게 신격화 되어 있고, 감히 쳐다볼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성도들은 가난한 월셋방에 사는데 교주는 호화스러운 별장에 기거하면서, 보통사람들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거들먹 거립니다.
그들의 돈에 대한 애착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거짓된 삶을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양심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부패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에 대한 강한 애착은 그 사람을 타락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러한 자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라고 말합니까 이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우리도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신을 해야하는 것일까요
먼저 11절을 보면 "저희의 입을 막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들의 입을 막을 수 있습니까 손수건으로 틀어막는다고 이들의 입을 막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입을 막으라는 말은 그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펼 수 있는 자릴 제공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가르치게 되면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참 그렇습니다.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이 설 자리가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간혹 남에게 배타적이지 않기 위해서 교회의 문을 이런 자들에게 열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그들이 가르치게 하고 판단은 우리가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르칠 자리를 넘겨주면 결국은 영향을 받게 되어 있고 그들의 영향력은 교회를 넘어트리고 말것입니다.
비건한 예로 우리나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신학이 70년대에 태동을 했습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고, 민중의 한으로서 신학을 말했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과 같이 억눌린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참된 신학이라고 했습니다. 그 시대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너도나도 할 것없이 받아들였고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적어도 민중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중신학이 우리 한국교회를 망쳤습니다. 그 영향을 받은 교회들이 교회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생명의 복음을 말하지 않고, 사회개혁만을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말하지 않고 민중의 의식이 부활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천국은 민중이 주인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보기에 선한 것을 쫓는 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얼마전 김수환 추기경이 어느 절에 가서 '그 절이 현대인들의 영혼의 안식처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그 답례로 송월주 총무원장이 꽃동네 마을에 가서 쌀을 전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종교란 저러해야 한다고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개신교는 독단적이고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냐고 말들을 합니다.
여러분!
이제 모레 화요일부터 사사기를 공부하게 될텐데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삶을 살았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에 있는 거민을 다 내쫓으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그들이 가나안의 우상숭배자들을 내 쫓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제말이 스님들을 다 내 쫓아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진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그들이 설자리를 제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그들의 설자리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주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좀더 적극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교회가 정말 참된 진리를 외친다면 거짓된 교훈을 말하는 자들의 입은 자연히 막아진다는 뜻입니다.
또 13절을 보니까 "엄히 꾸짖으라"고 합니다. 여러분! 엄히 꾸짖어야 할 대상과 입을 막아야 할 대상은 사실 다릅니다. 13절을 보니까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엄히 꾸짖어야 할 대상은 거짓된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는 그레데 교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레데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엄격하다'란 말은 '칼로 베이듯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예리하게 꾸짖으라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잘못된 교리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내에 엉뚱한 교리를 퍼트리는 일이 있다면 그리고 반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잘라버릴 각오'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를 상실하면 교회는 모든 것을 상실합니다. 다른 부분에 관해서는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 치료되어질 수 있겠지만 진리는 교회의 생명이며 결단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믿는 것과 거짓을 믿는 것의 차이는 생명이냐 죽음이냐의 차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 거짓교훈을 경계하고 더욱 진리위에 굳게 서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