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스승이 있는 자의 축복
본문
자연만물의 모든 세계에는 나면서부터 생존과 가치를 위한 가르침과 배움이 있습니다.
자연속의 미물들도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생존을 위한 능력과 더불어 어미의 가르침과 그것을 배우는 새끼의 배움으로 인하여 그들은 존속과 번창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미물들과는 달리 인간들에게는 보다 더 탁월한 능력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교육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문화유산을 전달, 계승,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천 년 전의 삶이나 백 년 전의 삶이나 현재의 삶이 거의 유사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천 년 전의 삶과 백 년 전의 삶과 현재의 삶은 현격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발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전까지의 역사적 유산을 다 받아들여 그 위에 더한 발전을 이루어 왔기에 동물 같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발전적 진보를 이루어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교육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진행이 되어 왔습니다.
연구되고 발견, 발명된 모든 것이 교육을 통하여 전달되어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발을 딛고 나아가 더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교육이란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 나아가 인간이 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선생과, 배우는 학생과, 그리고 선생과 학생사이의 가르치는 도구와 과정, 즉 교육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선생이 있어야 학생을 가르칠 수 있고 교육과정의 선택도 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원하건 원치 않건 우리 삶에 여러 종류의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의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은 만남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태어나 부모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동역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능력 없이 태어난 우리들이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길을 배우게 되는 선생님들을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인생의 처음의 선생님은 대부분 부모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범위가 넓혀져 우리에게 학교가 되었건, 사회가 되었건, 교회가 되었건, 어떤 삶의 현장에서도 우리는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도 축복입니다. 친구를 잘 만나는 것도 축복이고 삶의 장면에서 업무의 동역자를 만나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 근본구조를 형성하는 기초단계,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발전의 단계에서 우리를 감동시키고 삶의 발전과 진보를 자극하는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축복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이만큼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큰 은혜와 그 은혜가 부모와 친구와 주변사람들과 우리를 가르쳐준 선생님을 통해서 삶의 기준과 판단능력을 키워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서 우리 성도님들이 살아오면서 정말 내게는 이와 같이 존경되고 또 뿐만 아니라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던 선생님이 계시다라고 생각하면-단 한분이라도 그런 분이 계신 분은 축복된 사람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내 마음에 선생님이라고 모시고 있는 분이 없다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매우 빈한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교회에서 스승의 주일로 지내게 됩니다. 교회 역시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성령의 역사하시는 방법자체가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믿음을 전수하고 은혜를 이루는 방법인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생님들을 향한 존경과 존중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에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존경과 존중을 받아야 하고 영적인 양식을 공급 받고 배움을 받아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학교선생님들이 존경과 존중을 받아야 하고, 학생들은 그 가르침을 또 따를 수 있어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스승이 있고 그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혼자 성경 읽고, 잘 분별하고, 잘 파악하고, 결정하고, 기도하고 모든 일을 잘 진행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위치까지 갈 수 있도록 누군가가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역자, 주일학교 교사, 간사, 구역장, 부부구역장 등 모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따라서 존중되어져야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전승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특별히 갈라디아서 6장 6절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관계가 이미 주어진 것이라면 그 관계가 서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관계일 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근거하여 몇 가지 좀 더 살펴봅니다.
첫 번째는 선생의 중요성, 스승의 중요성입니다.
누구든지 내가 내 마음속에 영향을 받고 지금도 그 교훈이 내 삶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선생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있거나 그리고 내 마음에 그 선생님을 본받아 인정하고 내가 감동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축복의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유대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왕에게 선생이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가르치고 그들이 판단을 할 때 도움을 주는 선생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자가 있을 때 그 왕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주의 은혜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가르치던 선지자, 제사장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나라가 강성해지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교만해지면 우상을 숭배하고, 결과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는 장면이 있게 됨을 보게 됩니다.
역대기하 24장을 보게 되면 일곱 살의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르는 요아스라는 인물을 보게 됩니다. 요아스는 역사 속에서 안타깝게도 그의 아버지가 요아스가 아직 어린 애기였을 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요아스의 조모, 즉 할머니는 자신의 아들들까지 다 죽이면서 자기가 정권을 차지하려고 획책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아스를 사랑하는 고모가 어린 요아스를 숨김으로 말미암아 일곱 세까지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대 제사장 여호야다를 중심으로 하여 요아스를 왕위에 봉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역대하 24장 15절을 보면 여호야다가 나이가 들어 130세에 죽게 됩니다. 여호야다가 세상에 있었을 때는 요아스가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고 합니다.
여호야다는 어린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고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라를 치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자연적으로 나이 많아 늙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요아스는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물론 요아스가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요아스는 유다왕 중에서도 비교적 선정을 베푼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가르치던 선생 여호야다가 없어지게 될 때 그는 또 다른 선생을 맞이하지 못하였습니다.
17절 이하를 보면 유다 반백들이 왕에게 와서 이런 저런 말로 고할 때 그는 그 람을 듣고 흔들리게 됩니다. 열조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김으로 이 죄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 예루살렘에 임하게 됩니다.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대로 행할 때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흥왕하였으나 그 말씀을 잃어버리고, 그 가르침을 잃어버리고, 죄악과 우상을 섬기고 여호와 하나님을 배격할 때 필연적인 고통이 따르게 됐던 것입니다. 바른 선생이 있는 것과 바른 선생이 없는 것은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역대하 26장 5절을 보게 되면 웃시야라는 왕이 있습니다. 웃시야에게도 그를 가르치는 스가랴라는 선생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 동안에 웃시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는 동안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역대하 26장 5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웃시야가 심히 강성하여 이름이 변방까지 퍼졌습니다. 선지자 스가랴의 말씀을 따라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스가랴가 세상을 떠납니다. 안타깝게 그가 세상에 없어지게 되자 웃시야는 비록 계속 강성하여졌지만 그 마음이 어느 덧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교만하여졌던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하여지니 악을 행하게 됩니다. 스가랴 선지자도 없고 다른 선생도 만나지 못하니 주 앞에 교만하게 되어 범죄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게 될 때 향단에 분향하는 제사장의 권위까지 찬탈하게 됩니다.
웃시야는 자기 손으로 향로를 가지고 향단에 분향하려고 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그에게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그 상태로 세상을 마치게 됩니다. 애굽 변방까지도 이름을 떨치던 나라의 왕이었다가 그가 문둥병으로 말미암아 유다는 다 사그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훌륭한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훌륭하게 되기 위한 당연한 일입니다. 바른 교육이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최고의 가치를 이루게 합니다. 가끔 성도들이 학년 초가 되면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 만나서 좋은 교훈을 받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의 문구를 제출하는 것을 봅니다. 참 지혜로운 분입니다. 학생들의 가슴에 영향을 미치고, 학생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학생들의 삶에 새로운 꿈과 비전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면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겠지요. 그것을 위해서 부모가 기도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연초가 되면 주일학교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을 봅니다.
"좋은 주일학교 선생님들을 만나 또 특별히 이 아이가 좋은 영적 영향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의 아들로 딸로 커지기를 소원합니다. " 하는 기도제목을 보고 마음의 기쁨과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우리 삶의 주변에서 좋은 따를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아이가 삶의 규범과 준법정신, 바른 정의감을 가지고 자라게 되는 것, 바로 주변에서 그를 가르쳤던 바른 사람들에 의해서 심어지는 것입니다.
저도 아침에 아이가 학교 갈 때 제가 집에 있게 되면 꼭 신발신고 문 앞에서 머리위에 손을 얹고 매일 기도를 해 줍니다. 좋아할 때도 있지만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이 기도합니다.
"오늘 학교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 통해서 많은 좋은 것 배우고 은혜 받을 수 있게 하시옵소서. 학교 친구들과 재미있게 잘 놀고 즐거운 학교 생활되게 하시고 서로 간에 좋은 영향을 끼치게 하옵소서. "
간단히 30초나 1분정도 기도합니다. 만약에 학교에 가면 좋은 선생님의 좋은 영향을 받고 친구들과 어울릴 때 서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그 아이가 바른 아이로 자랄 수 있겠다 하는 좋은 생각이 듭니다.
저도 집에 오가면서 바로 저희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지나게 됩니다. 그 때마다 기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저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좋은 교훈을 줄 수 있는 바른 삶과 바른 생각과 바른 가르침이 있게 하옵소서. 또 뿐만 아니라 학생들끼리도 서로 보고 배울 수 있는 귀한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 하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죠. 우리 성도님들은 자녀들에게 믿음의 교육을 시킨다는 관점에서 있으면 굉장히 조심하셔야 될 일이 있어요. 자녀들이 있는데서 교회얘기를 하실 때 어떤 경우에도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주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이 있는데 "아휴, 오늘 목사님 설교하는데 하나도 은혜가 안 돼. " 혹은,
"우리 장로님들은 인격자인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야. " 아니면,
"우리 집사님들은 왜 하는 게 그래. "
이렇게 얘기해 버리면 이 아이에게는 그것이 머릿속에 인각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아! 은혜 없는 목사님, 형편없는 장로님, 정말 별것 아닌 집사님.
이 아이가 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아이가 바라보는 표상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 엉뚱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이들은 '목사는, 장로는, 집사님은 다 그런 분이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이 아이의 마음에 기쁨으로 좋은 표상을 심어주는 게 필요합니다.
'아! 교회 다니는 분은 참 훌륭하구나! 내가 저런 훌륭한 분의 가르침을 받고 나도 예수 믿으면 저렇게 되겠지!' 라는 마음을 심어줘야 돼요.
제가 우리 동역자들에게 그런 말씀을 했어요.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사모와 더불어서 담임목사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도 없고 또 교회는 부흥할 수도 없다. " 라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속에 은혜를 받기 위해서 설교할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마음속에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할 때 바로 그것이 은혜가 되고 그것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거죠. 우리 성도들이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우리 성도들이 서로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좋은 영향을 피차간에 끼칠 수 있겠습니까
내게 있어서 좋은 영향을 끼치는 영적인 선생님, 혹은 내 삶에 있어서, 배움의 과정에 있어서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는 좋은 선생님이 남아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적어도 영향을 끼치는 선생님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어떤 형태라도 내 가슴속에 있다면 정말 그것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좋은 선생님 만나서 이렇게 배우고 있고, 또 좋은 선생님 만나서 내가 그렇게 영향을 받았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분은 축복된 분입니다.
두 번째, 스승의 자리-선생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선생을 존경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며 우리 스스로를 위한 아주 중요한 결정입니다. 존경하고 존중하지 못하는데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내가 존중하고 존경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존경하고 존중하는 만큼 나는 감동받고 우리의 배움은 효과적일 겁니다.
선생을 욕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초석을 붕괴시키는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선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를 가르칠 자 없고, 가르칠 자 없다는 것은 그가 최고조에 이르렀고, 남은 것은 지금의 위치에서 추락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진보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죠
당신을 누가 가르치겠어 당신을 가르칠 자가 없어. 그 말은 당신은 끝이라는 얘기지요. 지금은 끝이니까 남은 것을 추락하는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도 교회에서 이러저러한 손님들을 뵙기도 하고 또 만나기도 하죠. 또 어떻게 초빙돼서 오는 목사님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참 신기한 걸 느껴요. 저는 목사니까요.
목사님 청빙할 때 보면 목회를 잘 한다, 못 한다 이런 얘기는 할 수가 없습니다. 기준이 어디 있는가 사람의 기준에서 볼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어쨌든 아주 열심히 하시고 또 좋은 결과들을 가지시고 하는 경우를 보면 뭐 일단 또 괜찮다라는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게 그런 분들을 보면 거의 연세가 높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려는 열정이 대단하신 거예요. 참 신기해요. 아무리 연세가 높으셔도 교회에 오시면 아무래도 제가 나이가 더 적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꼭 내가 오늘 좀 배울 것 없나 나 좀 가르쳐줘. 거의가 공통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참 너무너무 신기해요. 그리고 뭔가 자료라도 하나 챙겨 가실 것 없나 뭔가 볼 것 없나 뭔가 배울 것 없나 그렇게 찾으시는 거예요. 제가 그걸 보면서 느끼는 게 뭐냐면 모든 일 그냥 되는 일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내가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려고 생각하고, 또 내가 어떤 습득할 일이 있다면 습득하려고 생각하고, 또 열정을 가지고 있는 그런 모습을 봐요. 절대 그냥 되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그런 것을 보면서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 선생을 두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 무엇인가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것을 습득하려고 하는 분들을 보면 정말 그 마음의 뜨거운 열정과 진보에 대한 뜨거운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세상사는 날까지 진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스승을 욕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붕괴하는 겁니다.
스승이 존경받는 사회야말로 건강한 사회요, 진보하는 사회라고 생각할 수 있죠.
빌립보서 1장 8절을 보면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여호와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말합니다. 왜 이런 얘기 할까요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데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증거하느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바울에 대해서 그만큼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사도바울은 안타까운 자기 변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구차한 얘기를 하면서까지 사도바울이 왜 이런 권위를 확보해야 했을까요 권위가 확보돼야 그들에게 권위 있는 위치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수 있는 거죠.
갈라디아서 6장 6절을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고 있죠.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음의 기쁨을 나누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기쁨은 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맞나 틀리나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밤새도록 고민해서 아침에 결정한 생각은 거의 틀릴 확률이 높습니다.
여러분, 밤새도록 잠 못 자고 고민하죠 그래서 아침에 어떤 결정 내리죠 "에이 이렇게 했다. " 틀릴 확률이 거의 높아요. 왜 그런지 아시죠 밤새도록 고민하니 이렇게도 뒤집어보고 저렇게도 뒤집어보고 기진맥진해서 그 상태에서 결정하니 제대로 결정이 되겠습니까 좋은 결정하려면 푹 자고 아침에 좋은 컨디션에서 생각하고 결정하세요. 그게 훨씬 더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는 확률이 높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잘 하는 것은 최고의 컨디션에서 우 리가 자신 있어서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이것을 통해서 어떤 나쁜 결과가 나오더라도 나로서는 최선이다. 내가 다르게 했으면 더 나쁜 결과가 나올 거야. 그러니까 어떤 결과라도 나는 기쁨으로 수납할 수 있어. ’ 라는 자신감이 있을 때 결정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결정은 너무 중요해요. 한 번 결정하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그 결정 때문에 너무나 다른 후속적인 조치들이 있어야 돼요. 평생 한 번의 결정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정은 그만큼 중요한데 그 결정이라는 것은 편안한 상태에서 여유 있게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죠.
가르치는 모든 일도 마찬가지-편안한 심정으로 해야 해요.
제가 우리 성도님들한테 어차피 목사는 설교를 해야 되잖아요. 참 이게 마음에 적잖이 부담이 되죠.
그런데 설교를 하면서 제가 가장 먼저 가지는 생각이 뭐냐 하면,
첫째, 내가 마음 편하고 행복하고 또 기뻐야 되겠다라는 거죠.
제가 아무리 설교를 준비한들 그 설교가 제가 마음이 기쁘지 않고 편안하지 않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제가 쫓기고 있는 심정이 되면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겠습니까 내용도 제대로 구성되지 않으며 전달할 때도 제대로 전달이 안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늘 이런 얘기 드리잖아요. 늘 제가 우울하고, 늘 어둡고, 고통스럽고 하면 뭐라고 얘기하겠습니까
"여러분 인생은 고통스럽고 어려운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
여러분, 일주일 내내 고통스럽게 살다가 주일날 교회에 와서도 그런 얘기 들으면 위로받고 힘을 얻을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 자신이 기쁘고, 감사하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날마다 소망을 볼 수 있어야 되죠. 여러분 마음에서 전하지 않은 건 전달도 안돼요. 제가 정말 그렇다고 믿지 않고 전해야 되니까 전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전달이 되는데요, 제가 실제로 그렇게 느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요새 마음이 좀 편해진 게 있어요. 전에는 설교 한 번 하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설교 안하는 게 성도들 도와주는 거겠다는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요새는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다음에 잘하면 돼. '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좀 뻔뻔해진 것 같아요. 제가 좀 뻔뻔해진 것 같은데 또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저 우리 성도들을 믿기에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불안하고 초조해서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는 있지만 잘 할 수는 없어요. 편안한 마음가지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준다는 것은 그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시는 거죠.
여러분 정말 기뻐하는 마음, 모든 일을 편안한 상태에서 정말 아무 부담 없이 기쁨으로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어떤 일을 해 줄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거죠.
우리 마음에 다른 이들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겁니까
여러분, 이 가르침이라는 것 스승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영화 보신 적 있죠 전에 사막의 라이언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누가 나오냐면 숀 코네리라는 사람이 원주민 족장으로 나오고 진 헤크먼이라는 사람이 서구군의 점령군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여러분, 보셨어요 30년 전의 영화인데, 한 20년쯤 됐나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도 안보고, 공부도 안하고, 영화도 안보고, 그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다 보시라고 제가 얘기했는데요.
거기 보면 서구군대들-진 헤크먼의 군대가 아무래도 서구 군대니까 화력도 좋고 탁월하잖아요. 그런데 이 숀 코네리의 군사들을 당하지를 못해요. 워낙 전술에 뛰어난 사람이에요. 그리고 대단한 사람이죠.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 숀 코네리의 군대가 이기게 되죠. 그런데 이 숀 코네리가 평상시에는 뭘 하냐면 동네 골목에서 애들을 요만한 판때기 놓고 가르쳐요. 요만한 판때기 손바닥에 놓고 동네 애들에게 글씨 가르치고 숫자 가르치는 거예요. 제가 그 장면이 지금도 잊어버려지지 않는데요, 도대체 왜 그럴까 전쟁을 잘해서 나라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자라나는 후세들을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어떤 형태로든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들이 더 위대한 나라를 세우는 거죠.
저는 그런 생각하는데 우리나라가 6. 25동란 가운데서도 피난 가서도 거기서 천막에서 학교세우고 학생들 가르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일이에요.
정말 선생은 존중받아야 되고 존경받아야 합니다. 어디서든지 선생이 있어야 하고, 그 선생이 학생을 가르쳐야 하고, 그리고 그 가운데 배움과 가르침이라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며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에 향한 진보의 모습이 있는 거예요. 믿음의 사람들, 영적인 교육,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모든 교육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줄 수 있는데 그것은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세 번째,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한마음 한 뜻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점차적으로 이 세상의 일들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없어집니다.
요즘은 상호교호작용-서로를 돕고 마음을 합하여 각각의 부분을 감당함으로 그것이 조합되어 하나의 완성품을 이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새는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하지 않아요. 한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조합해서 어떤 작품을 이뤄내고 어떠한 일들을 완성해 나가는 거죠. 이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스승이 좋은 제자를 만들어요. 그러나 좋은 제자가 스승을 빛나게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도 역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도울 때 가능하죠.
고린도전서 4장 1절을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라고 말씀해요.
이글을 쓸 때 여러분 아시잖아요. 왜 이런 말을 했겠어요. 상태가 그렇지 않으니까 이렇게 가르치는 거죠. 많은 서신에서 너무나 많은 공격당함을 보고 사도 바울의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거죠. 정말 안타까운 것이 우리 삶의 현장이죠.
에베소서 6장 19절을 보면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즉,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나를 위해서 너희는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다오 라고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죠.
왜 갈라디아교회에 이런 구절을 보냈겠습니까 갈라디아 교인이 믿음의 기초교리조차 확립되지 않은 교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이와 같이 어린 성도들, 이와 같이 어린 교회, 이와 같이 어린모습들을 보면서 그들과 더불어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세워서 동역자 만들고 같이 합력하여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이와 같은 안타까운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은혜가운데 가르치나 배우나 한 마음이 되어 주의 역사를 이룰 수 있어야 해요.
역사 속에 일방적인 역사는 없습니다. 일방적인 가르침, 일방적인 배움은 없어요. 선생이 제자에게 배우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후배에게 많은 것을 배우는 선배들이 생겨나는 것이 인생의 진리입니다. 가르침과 배움의 위치는 언제나 고정되어있지 않습니다.
제가 저희 목사님들께 그런 말씀을 드려요. 제가 조금 더 지내왔으니까 삶을 분석하고 통찰하고 삶을 예견하는 능력은 아무래도 제가 좀 더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젊은 목사님들에게는 삶의 아이디어와 순발력이 더 있을 것이니까 우리가 그와 같은 것을 합해서 더 좋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얘기를 제가 자주 하고는 합니다. 정말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한 마음이 돼서 이와 같이 서로 교호하여 주의 역사를 이루는 거죠.
저는 저희 교회를 생각할 때 참 마음이 감사한데 제가 이 교회에서 17년 동안 있으면서 정말 감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 교인들이 대단히 신사적이에요. 교회가 이제까지 오면서 큰 무리가 없었던 것 같아요. 서로 간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아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기록을 하고 있냐면 베레아 사람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말씀을 받을 때 그러한가하여 묵상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의심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내가 어떻게 적용해서 살 것인가, 그 말씀의 깊이에 대해서 더욱 더 생각하는 거죠.
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보다 더 신사적이지 못한 뜻이었죠.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하도 핍박이 심해서 한 2주여 정도 복음을 전하고 쫓겨났어요. 그런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그냥 쫓겨낸 것만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가는 곳에 쫓아가서 돌멩이로 사도바울을 쳐서 죽이려고 했어요. 심지어는 어떤 성에서는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이 돌멩이로 쳐서 죽은 줄 알고 갖다버렸던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다시 살아나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랬는데, 베레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까 그 사람들은 너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 그 말씀이 어떤가 해서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을 지키고 싶어 한 겁니다. 그래서 '베레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보니까 저희 교회 교인들은 정말 신사적인 것 같아요. 자신의 위치를 잘 지키고, 또 뿐만 아니라 매우 신사적이에요.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어요. 저희 교인들 보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지나친 관심을 가진 분들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얘기를 들을 때 "그래 그래서, 한 번 해봐. 더 해봐. " 이런 사람 없는 것 같아요. 괜히 다른 사람 얘기하면 그냥 스쳐듣고 남의 말 가급적이면 안 하는 게 좋지. 뭐 이렇게 얘기들 하시는 거 같아요. 찔리는 사람도 있구요.
그리고 또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별로 큰 분란 같은 게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정말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큰 은혜 속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의 역사를 이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죠. 제가 이 교회 목사로서 굉장히 행복함을 느끼고 있는데 세 가지 입니다.
뭐냐 하면, 첫째는 제가 저희 성도들 굉장히 좋아해요. 목사치고 성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우리 성도들을 목사가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은 굉장히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래서 어디 안 가잖아요. 교회에만 있잖아요.
두 번째는 우리 교인들도 목사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아요. 비웃는 이들이여.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성도를 좋아하고 있고 또 성도가 목사를 좋아하고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세 번째는 성도끼리도 매우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주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고 성도들이 서로 같이 믿음가운데 신뢰하고.
저희 교회 성도들 보면 누가 무슨 봉사를 하고 있는지 잘 몰라요. 그런데 교회에서 모든 봉사는 다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저희 교회는 내가 봉사한다고 나대다가는 사람 취급도 못 받아요.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자기의 할 일을 그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겸손히,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 평가할 필요도 없고, 내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하면 비교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럼 거기에 대해서 말이 될 필요가 없죠.
제가 언젠가 응급실에 간 적이 있는데, 제가 아픈 것은 아니고 성도님이 아파서 제가 연락을 받고 간 적이 있습니다. 난감한 상황을 목격했어요. 119구조대에 사람이 들것에 실려 왔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해 있더라고요. 제가 119구조대에 대해서는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몇 번 사람들을 만나게 됐을 때 정말 성실하고 진실하고 아주 훌륭해요. 저희 교회에도 119구조대에 근무하시는 분 계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제가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 연말이나 명절 때 되면 119구조대에 별거 아니라도-양말이라도 한 켤레씩 교회이름으로 꼭 보냅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우리 수고하는 거 인정해주는 분이 계시구나! 하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해서요. 뭐 별거 위로될 것도 아니지만 그저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 제가 보내고는 하는데요, 정말 아주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고요, 아주 헌신적으로 열심히 봉사하시더라고요.
이제 그 분들이 들것을 들고 왔어요. 119구조대 차타고 왔겠죠! 그런데 이분이 거기 도착해서 내리게 되니까 그냥 막되게 구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싣고 온 119구조대원들에게 욕하고 발길로 차고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구해달라고 해서 이 사람들이 와서 자기를 데리고 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와서 행패를 부리는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너무 허탈한 가보죠.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갑시다. 가. " 그러고 그냥 나가는 거예요. 얼마나 한심하겠어요. 아니 기껏 급히 가서, 또 차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거기까지 데려다 줬더니 그 하는 행태가 그런 거죠. 이 사람이 아주 못되게 굴더라고요. 보니까. 그러면서 거기서 막 난동을 부리고 그러는 거예요. 그랬더니 병원에서 보안 요원들이 나와서 더 난동부리면 데려가려고 거기 딱 지키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 사람이 거기서 뭐 하다가 유리병도 깨고 그랬어요. 그래도 환자니까 치료해 줘야되겠지요. 거기에 있는 의사선생님이 그 사람 손에 붕대도 감으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제가 잊혀지지가 않아요. 뭐라고 얘기 하냐면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이게 뭡니까 여기가 병원이고 응급실 아닙니까 급하고 어려운 사람들만 오는 덴데 여기서 이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런데 제가요 그 말이 문득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병원에서도 응급실은 급한 사람들 오는 거겠죠. 어렵고 힘든 사람 오겠지요. 실려 오는 사람들이 오겠죠.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정말 모든 사람이 마음 다치고, 상처받고, 피곤하고, 힘들고, 어려워서 교회 와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송하고, 위로받고, 말씀가운데 소망을 가지고 정말 그 가운데 애달픈 마음 쉬어서 또 다시 힘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려고 하는 데가 교회지요. 만약에 교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치고, 다른 사람에게 이리저리 쓸리고 피곤하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안식을 얻는가 제가 그래서 정말 교회는 보호되어야 될 상태라고 생각하거든요. 다행이 저희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없어요.
그래서 이제까지 17년 동안 큰 어려움 없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지내왔다는 것이 참 감사해요. 이것이 그냥 된 것이 아니고 모두가 서로 배려하고 마음을 쓰고 또 기도하고 그와 같은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면에 있어서 정말 우리 성도님들께 감사해요. 저는 이 교회 목사로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 방에 남자성도님들이 찾아올 때도 간혹 많습니다. 남자성도님들이 찾아올 때는 대부분 어려울 때에요. 좋은 일 전하러 오신 기쁨의 때도 있지만 대부분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목사가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뭔지 압니까 티슈 통에서 티슈 꺼내서 드리는 거예요. 늘 오시면 눈물 흘리시니까 눈물을 닦으셔야 되잖아요. 제가 하는 일중의 하나로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정말 그와 같은 것을 볼 때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구나!
삶이라는 것은 이렇게 아픔과 고통이 있구나!
다른데서는 그러지 않으시겠지요. 목사 앞이니까 어린애 같은 심정이 돼서 그저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정말 복받쳐 오르는 것들이 있어서 그렇게 눈물도 흘리시고 정말 애타는 마음을 가지시겠지요.
옹달샘에서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고 새 힘 얻어 다시 세상을 향하여 나가는 것처럼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이 교회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들의 모임이죠.
저는 이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교회가 17년 됐는데요, 이 교회가 처음 설립될 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분명히 기도한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수많은 교회 중에 간판하나 더 다는 교회 되지 않게 하옵소서.
또 뿐만 아니라 이 교회가 존속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교회가 존립하는 분명한 뚜렷한 목표가 있고 역사와 사회 속에 기여하고 공헌하는 면이 있게 하옵소서. ”
이 교회라는 것은 성도들의 모임이거든요. 성도자체입니다. 성도자체가 개인적으로 역사와 사회에 기여하고 공헌하고 그 힘들이 합쳐져서 이 교회단위로 이루어지는 역사와 사회 속에 기여하고 공헌하는 게 있는 겁니다. 저희 교회가 일 년 일 년 지나왔다는 것은 그냥 지나온 게 아니에요. 일 년 일 년 시간이 가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목표,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원하시는 가치와 목표에 근접해 나가는 거예요. 그냥 또 일 년 지나고, 또 난 그냥 일 년 지난 게 아니라 이제 한 걸음 한 걸음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도달해 가는 거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 겁니다.
우리는 갈등하고 피곤해 할 필요가 없어요.
저는 이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참 감사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다 우군이에요. 아군이에요. 적군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모두 다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어야 될 사람뿐이에요. 교회는 그렇게 하이테크한 모임이 아니에요. 그저 순정한 마음 가지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감싸주고 격려하고 그야말로 힘을 얻고 가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것을 위해서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영적인 권위가 있어야 돼요. 배우는 난람은 진정한 아낌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가 합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귀함이 있어야 돼요. 저는 이 교회를 매우 기뻐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매우 기뻐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교회는 가르치는 자, 배우는 자가 진정한 기쁨과 사랑과 존경과 존중과 은혜의 관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 저희 교회 가르치는 모든 선생님들, 가르치면서도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배우는 이들이 꿈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에 어려움 겪는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사회 속에서도 정말 가르치는 사람이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이와 같은 사회를 만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자연속의 미물들도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생존을 위한 능력과 더불어 어미의 가르침과 그것을 배우는 새끼의 배움으로 인하여 그들은 존속과 번창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미물들과는 달리 인간들에게는 보다 더 탁월한 능력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교육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문화유산을 전달, 계승,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천 년 전의 삶이나 백 년 전의 삶이나 현재의 삶이 거의 유사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천 년 전의 삶과 백 년 전의 삶과 현재의 삶은 현격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발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전까지의 역사적 유산을 다 받아들여 그 위에 더한 발전을 이루어 왔기에 동물 같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발전적 진보를 이루어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교육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진행이 되어 왔습니다.
연구되고 발견, 발명된 모든 것이 교육을 통하여 전달되어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발을 딛고 나아가 더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교육이란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 나아가 인간이 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선생과, 배우는 학생과, 그리고 선생과 학생사이의 가르치는 도구와 과정, 즉 교육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선생이 있어야 학생을 가르칠 수 있고 교육과정의 선택도 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원하건 원치 않건 우리 삶에 여러 종류의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의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은 만남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태어나 부모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동역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능력 없이 태어난 우리들이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길을 배우게 되는 선생님들을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인생의 처음의 선생님은 대부분 부모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범위가 넓혀져 우리에게 학교가 되었건, 사회가 되었건, 교회가 되었건, 어떤 삶의 현장에서도 우리는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도 축복입니다. 친구를 잘 만나는 것도 축복이고 삶의 장면에서 업무의 동역자를 만나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 근본구조를 형성하는 기초단계,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발전의 단계에서 우리를 감동시키고 삶의 발전과 진보를 자극하는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축복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이만큼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큰 은혜와 그 은혜가 부모와 친구와 주변사람들과 우리를 가르쳐준 선생님을 통해서 삶의 기준과 판단능력을 키워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서 우리 성도님들이 살아오면서 정말 내게는 이와 같이 존경되고 또 뿐만 아니라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던 선생님이 계시다라고 생각하면-단 한분이라도 그런 분이 계신 분은 축복된 사람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내 마음에 선생님이라고 모시고 있는 분이 없다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매우 빈한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교회에서 스승의 주일로 지내게 됩니다. 교회 역시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성령의 역사하시는 방법자체가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믿음을 전수하고 은혜를 이루는 방법인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생님들을 향한 존경과 존중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에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존경과 존중을 받아야 하고 영적인 양식을 공급 받고 배움을 받아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학교선생님들이 존경과 존중을 받아야 하고, 학생들은 그 가르침을 또 따를 수 있어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스승이 있고 그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혼자 성경 읽고, 잘 분별하고, 잘 파악하고, 결정하고, 기도하고 모든 일을 잘 진행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위치까지 갈 수 있도록 누군가가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역자, 주일학교 교사, 간사, 구역장, 부부구역장 등 모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따라서 존중되어져야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전승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특별히 갈라디아서 6장 6절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관계가 이미 주어진 것이라면 그 관계가 서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관계일 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근거하여 몇 가지 좀 더 살펴봅니다.
첫 번째는 선생의 중요성, 스승의 중요성입니다.
누구든지 내가 내 마음속에 영향을 받고 지금도 그 교훈이 내 삶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선생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있거나 그리고 내 마음에 그 선생님을 본받아 인정하고 내가 감동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축복의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유대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왕에게 선생이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가르치고 그들이 판단을 할 때 도움을 주는 선생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자가 있을 때 그 왕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주의 은혜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가르치던 선지자, 제사장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나라가 강성해지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교만해지면 우상을 숭배하고, 결과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는 장면이 있게 됨을 보게 됩니다.
역대기하 24장을 보게 되면 일곱 살의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르는 요아스라는 인물을 보게 됩니다. 요아스는 역사 속에서 안타깝게도 그의 아버지가 요아스가 아직 어린 애기였을 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요아스의 조모, 즉 할머니는 자신의 아들들까지 다 죽이면서 자기가 정권을 차지하려고 획책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아스를 사랑하는 고모가 어린 요아스를 숨김으로 말미암아 일곱 세까지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대 제사장 여호야다를 중심으로 하여 요아스를 왕위에 봉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역대하 24장 15절을 보면 여호야다가 나이가 들어 130세에 죽게 됩니다. 여호야다가 세상에 있었을 때는 요아스가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고 합니다.
여호야다는 어린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고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라를 치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자연적으로 나이 많아 늙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요아스는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물론 요아스가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요아스는 유다왕 중에서도 비교적 선정을 베푼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가르치던 선생 여호야다가 없어지게 될 때 그는 또 다른 선생을 맞이하지 못하였습니다.
17절 이하를 보면 유다 반백들이 왕에게 와서 이런 저런 말로 고할 때 그는 그 람을 듣고 흔들리게 됩니다. 열조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김으로 이 죄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 예루살렘에 임하게 됩니다.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대로 행할 때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흥왕하였으나 그 말씀을 잃어버리고, 그 가르침을 잃어버리고, 죄악과 우상을 섬기고 여호와 하나님을 배격할 때 필연적인 고통이 따르게 됐던 것입니다. 바른 선생이 있는 것과 바른 선생이 없는 것은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역대하 26장 5절을 보게 되면 웃시야라는 왕이 있습니다. 웃시야에게도 그를 가르치는 스가랴라는 선생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 동안에 웃시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는 동안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역대하 26장 5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웃시야가 심히 강성하여 이름이 변방까지 퍼졌습니다. 선지자 스가랴의 말씀을 따라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스가랴가 세상을 떠납니다. 안타깝게 그가 세상에 없어지게 되자 웃시야는 비록 계속 강성하여졌지만 그 마음이 어느 덧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교만하여졌던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하여지니 악을 행하게 됩니다. 스가랴 선지자도 없고 다른 선생도 만나지 못하니 주 앞에 교만하게 되어 범죄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게 될 때 향단에 분향하는 제사장의 권위까지 찬탈하게 됩니다.
웃시야는 자기 손으로 향로를 가지고 향단에 분향하려고 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그에게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그 상태로 세상을 마치게 됩니다. 애굽 변방까지도 이름을 떨치던 나라의 왕이었다가 그가 문둥병으로 말미암아 유다는 다 사그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훌륭한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훌륭하게 되기 위한 당연한 일입니다. 바른 교육이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며 최고의 가치를 이루게 합니다. 가끔 성도들이 학년 초가 되면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 만나서 좋은 교훈을 받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의 문구를 제출하는 것을 봅니다. 참 지혜로운 분입니다. 학생들의 가슴에 영향을 미치고, 학생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학생들의 삶에 새로운 꿈과 비전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면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겠지요. 그것을 위해서 부모가 기도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연초가 되면 주일학교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을 봅니다.
"좋은 주일학교 선생님들을 만나 또 특별히 이 아이가 좋은 영적 영향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의 아들로 딸로 커지기를 소원합니다. " 하는 기도제목을 보고 마음의 기쁨과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우리 삶의 주변에서 좋은 따를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아이가 삶의 규범과 준법정신, 바른 정의감을 가지고 자라게 되는 것, 바로 주변에서 그를 가르쳤던 바른 사람들에 의해서 심어지는 것입니다.
저도 아침에 아이가 학교 갈 때 제가 집에 있게 되면 꼭 신발신고 문 앞에서 머리위에 손을 얹고 매일 기도를 해 줍니다. 좋아할 때도 있지만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이 기도합니다.
"오늘 학교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 통해서 많은 좋은 것 배우고 은혜 받을 수 있게 하시옵소서. 학교 친구들과 재미있게 잘 놀고 즐거운 학교 생활되게 하시고 서로 간에 좋은 영향을 끼치게 하옵소서. "
간단히 30초나 1분정도 기도합니다. 만약에 학교에 가면 좋은 선생님의 좋은 영향을 받고 친구들과 어울릴 때 서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그 아이가 바른 아이로 자랄 수 있겠다 하는 좋은 생각이 듭니다.
저도 집에 오가면서 바로 저희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지나게 됩니다. 그 때마다 기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저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좋은 교훈을 줄 수 있는 바른 삶과 바른 생각과 바른 가르침이 있게 하옵소서. 또 뿐만 아니라 학생들끼리도 서로 보고 배울 수 있는 귀한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 하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죠. 우리 성도님들은 자녀들에게 믿음의 교육을 시킨다는 관점에서 있으면 굉장히 조심하셔야 될 일이 있어요. 자녀들이 있는데서 교회얘기를 하실 때 어떤 경우에도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주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이 있는데 "아휴, 오늘 목사님 설교하는데 하나도 은혜가 안 돼. " 혹은,
"우리 장로님들은 인격자인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야. " 아니면,
"우리 집사님들은 왜 하는 게 그래. "
이렇게 얘기해 버리면 이 아이에게는 그것이 머릿속에 인각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아! 은혜 없는 목사님, 형편없는 장로님, 정말 별것 아닌 집사님.
이 아이가 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아이가 바라보는 표상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 엉뚱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이들은 '목사는, 장로는, 집사님은 다 그런 분이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이 아이의 마음에 기쁨으로 좋은 표상을 심어주는 게 필요합니다.
'아! 교회 다니는 분은 참 훌륭하구나! 내가 저런 훌륭한 분의 가르침을 받고 나도 예수 믿으면 저렇게 되겠지!' 라는 마음을 심어줘야 돼요.
제가 우리 동역자들에게 그런 말씀을 했어요.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사모와 더불어서 담임목사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은혜를 받을 수도 없고 또 교회는 부흥할 수도 없다. " 라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속에 은혜를 받기 위해서 설교할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마음속에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할 때 바로 그것이 은혜가 되고 그것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거죠. 우리 성도들이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우리 성도들이 서로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좋은 영향을 피차간에 끼칠 수 있겠습니까
내게 있어서 좋은 영향을 끼치는 영적인 선생님, 혹은 내 삶에 있어서, 배움의 과정에 있어서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는 좋은 선생님이 남아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적어도 영향을 끼치는 선생님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어떤 형태라도 내 가슴속에 있다면 정말 그것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좋은 선생님 만나서 이렇게 배우고 있고, 또 좋은 선생님 만나서 내가 그렇게 영향을 받았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분은 축복된 분입니다.
두 번째, 스승의 자리-선생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선생을 존경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며 우리 스스로를 위한 아주 중요한 결정입니다. 존경하고 존중하지 못하는데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내가 존중하고 존경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존경하고 존중하는 만큼 나는 감동받고 우리의 배움은 효과적일 겁니다.
선생을 욕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초석을 붕괴시키는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선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를 가르칠 자 없고, 가르칠 자 없다는 것은 그가 최고조에 이르렀고, 남은 것은 지금의 위치에서 추락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진보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죠
당신을 누가 가르치겠어 당신을 가르칠 자가 없어. 그 말은 당신은 끝이라는 얘기지요. 지금은 끝이니까 남은 것을 추락하는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도 교회에서 이러저러한 손님들을 뵙기도 하고 또 만나기도 하죠. 또 어떻게 초빙돼서 오는 목사님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참 신기한 걸 느껴요. 저는 목사니까요.
목사님 청빙할 때 보면 목회를 잘 한다, 못 한다 이런 얘기는 할 수가 없습니다. 기준이 어디 있는가 사람의 기준에서 볼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어쨌든 아주 열심히 하시고 또 좋은 결과들을 가지시고 하는 경우를 보면 뭐 일단 또 괜찮다라는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게 그런 분들을 보면 거의 연세가 높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려는 열정이 대단하신 거예요. 참 신기해요. 아무리 연세가 높으셔도 교회에 오시면 아무래도 제가 나이가 더 적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꼭 내가 오늘 좀 배울 것 없나 나 좀 가르쳐줘. 거의가 공통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참 너무너무 신기해요. 그리고 뭔가 자료라도 하나 챙겨 가실 것 없나 뭔가 볼 것 없나 뭔가 배울 것 없나 그렇게 찾으시는 거예요. 제가 그걸 보면서 느끼는 게 뭐냐면 모든 일 그냥 되는 일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내가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려고 생각하고, 또 내가 어떤 습득할 일이 있다면 습득하려고 생각하고, 또 열정을 가지고 있는 그런 모습을 봐요. 절대 그냥 되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그런 것을 보면서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 선생을 두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 무엇인가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것을 습득하려고 하는 분들을 보면 정말 그 마음의 뜨거운 열정과 진보에 대한 뜨거운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세상사는 날까지 진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스승을 욕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붕괴하는 겁니다.
스승이 존경받는 사회야말로 건강한 사회요, 진보하는 사회라고 생각할 수 있죠.
빌립보서 1장 8절을 보면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여호와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말합니다. 왜 이런 얘기 할까요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데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증거하느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바울에 대해서 그만큼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사도바울은 안타까운 자기 변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구차한 얘기를 하면서까지 사도바울이 왜 이런 권위를 확보해야 했을까요 권위가 확보돼야 그들에게 권위 있는 위치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수 있는 거죠.
갈라디아서 6장 6절을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고 있죠.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음의 기쁨을 나누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기쁨은 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맞나 틀리나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밤새도록 고민해서 아침에 결정한 생각은 거의 틀릴 확률이 높습니다.
여러분, 밤새도록 잠 못 자고 고민하죠 그래서 아침에 어떤 결정 내리죠 "에이 이렇게 했다. " 틀릴 확률이 거의 높아요. 왜 그런지 아시죠 밤새도록 고민하니 이렇게도 뒤집어보고 저렇게도 뒤집어보고 기진맥진해서 그 상태에서 결정하니 제대로 결정이 되겠습니까 좋은 결정하려면 푹 자고 아침에 좋은 컨디션에서 생각하고 결정하세요. 그게 훨씬 더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는 확률이 높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잘 하는 것은 최고의 컨디션에서 우 리가 자신 있어서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이것을 통해서 어떤 나쁜 결과가 나오더라도 나로서는 최선이다. 내가 다르게 했으면 더 나쁜 결과가 나올 거야. 그러니까 어떤 결과라도 나는 기쁨으로 수납할 수 있어. ’ 라는 자신감이 있을 때 결정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결정은 너무 중요해요. 한 번 결정하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그 결정 때문에 너무나 다른 후속적인 조치들이 있어야 돼요. 평생 한 번의 결정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정은 그만큼 중요한데 그 결정이라는 것은 편안한 상태에서 여유 있게 결정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죠.
가르치는 모든 일도 마찬가지-편안한 심정으로 해야 해요.
제가 우리 성도님들한테 어차피 목사는 설교를 해야 되잖아요. 참 이게 마음에 적잖이 부담이 되죠.
그런데 설교를 하면서 제가 가장 먼저 가지는 생각이 뭐냐 하면,
첫째, 내가 마음 편하고 행복하고 또 기뻐야 되겠다라는 거죠.
제가 아무리 설교를 준비한들 그 설교가 제가 마음이 기쁘지 않고 편안하지 않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제가 쫓기고 있는 심정이 되면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겠습니까 내용도 제대로 구성되지 않으며 전달할 때도 제대로 전달이 안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늘 이런 얘기 드리잖아요. 늘 제가 우울하고, 늘 어둡고, 고통스럽고 하면 뭐라고 얘기하겠습니까
"여러분 인생은 고통스럽고 어려운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
여러분, 일주일 내내 고통스럽게 살다가 주일날 교회에 와서도 그런 얘기 들으면 위로받고 힘을 얻을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 자신이 기쁘고, 감사하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날마다 소망을 볼 수 있어야 되죠. 여러분 마음에서 전하지 않은 건 전달도 안돼요. 제가 정말 그렇다고 믿지 않고 전해야 되니까 전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전달이 되는데요, 제가 실제로 그렇게 느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요새 마음이 좀 편해진 게 있어요. 전에는 설교 한 번 하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설교 안하는 게 성도들 도와주는 거겠다는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요새는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다음에 잘하면 돼. '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좀 뻔뻔해진 것 같아요. 제가 좀 뻔뻔해진 것 같은데 또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저 우리 성도들을 믿기에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불안하고 초조해서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는 있지만 잘 할 수는 없어요. 편안한 마음가지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준다는 것은 그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시는 거죠.
여러분 정말 기뻐하는 마음, 모든 일을 편안한 상태에서 정말 아무 부담 없이 기쁨으로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어떤 일을 해 줄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거죠.
우리 마음에 다른 이들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겁니까
여러분, 이 가르침이라는 것 스승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영화 보신 적 있죠 전에 사막의 라이언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누가 나오냐면 숀 코네리라는 사람이 원주민 족장으로 나오고 진 헤크먼이라는 사람이 서구군의 점령군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여러분, 보셨어요 30년 전의 영화인데, 한 20년쯤 됐나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도 안보고, 공부도 안하고, 영화도 안보고, 그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다 보시라고 제가 얘기했는데요.
거기 보면 서구군대들-진 헤크먼의 군대가 아무래도 서구 군대니까 화력도 좋고 탁월하잖아요. 그런데 이 숀 코네리의 군사들을 당하지를 못해요. 워낙 전술에 뛰어난 사람이에요. 그리고 대단한 사람이죠.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 숀 코네리의 군대가 이기게 되죠. 그런데 이 숀 코네리가 평상시에는 뭘 하냐면 동네 골목에서 애들을 요만한 판때기 놓고 가르쳐요. 요만한 판때기 손바닥에 놓고 동네 애들에게 글씨 가르치고 숫자 가르치는 거예요. 제가 그 장면이 지금도 잊어버려지지 않는데요, 도대체 왜 그럴까 전쟁을 잘해서 나라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자라나는 후세들을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어떤 형태로든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들이 더 위대한 나라를 세우는 거죠.
저는 그런 생각하는데 우리나라가 6. 25동란 가운데서도 피난 가서도 거기서 천막에서 학교세우고 학생들 가르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일이에요.
정말 선생은 존중받아야 되고 존경받아야 합니다. 어디서든지 선생이 있어야 하고, 그 선생이 학생을 가르쳐야 하고, 그리고 그 가운데 배움과 가르침이라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며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에 향한 진보의 모습이 있는 거예요. 믿음의 사람들, 영적인 교육,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모든 교육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줄 수 있는데 그것은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세 번째,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한마음 한 뜻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점차적으로 이 세상의 일들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없어집니다.
요즘은 상호교호작용-서로를 돕고 마음을 합하여 각각의 부분을 감당함으로 그것이 조합되어 하나의 완성품을 이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새는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하지 않아요. 한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조합해서 어떤 작품을 이뤄내고 어떠한 일들을 완성해 나가는 거죠. 이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스승이 좋은 제자를 만들어요. 그러나 좋은 제자가 스승을 빛나게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도 역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도울 때 가능하죠.
고린도전서 4장 1절을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라고 말씀해요.
이글을 쓸 때 여러분 아시잖아요. 왜 이런 말을 했겠어요. 상태가 그렇지 않으니까 이렇게 가르치는 거죠. 많은 서신에서 너무나 많은 공격당함을 보고 사도 바울의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거죠. 정말 안타까운 것이 우리 삶의 현장이죠.
에베소서 6장 19절을 보면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즉,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나를 위해서 너희는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다오 라고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죠.
왜 갈라디아교회에 이런 구절을 보냈겠습니까 갈라디아 교인이 믿음의 기초교리조차 확립되지 않은 교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이와 같이 어린 성도들, 이와 같이 어린 교회, 이와 같이 어린모습들을 보면서 그들과 더불어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세워서 동역자 만들고 같이 합력하여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이와 같은 안타까운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은혜가운데 가르치나 배우나 한 마음이 되어 주의 역사를 이룰 수 있어야 해요.
역사 속에 일방적인 역사는 없습니다. 일방적인 가르침, 일방적인 배움은 없어요. 선생이 제자에게 배우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후배에게 많은 것을 배우는 선배들이 생겨나는 것이 인생의 진리입니다. 가르침과 배움의 위치는 언제나 고정되어있지 않습니다.
제가 저희 목사님들께 그런 말씀을 드려요. 제가 조금 더 지내왔으니까 삶을 분석하고 통찰하고 삶을 예견하는 능력은 아무래도 제가 좀 더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젊은 목사님들에게는 삶의 아이디어와 순발력이 더 있을 것이니까 우리가 그와 같은 것을 합해서 더 좋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얘기를 제가 자주 하고는 합니다. 정말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한 마음이 돼서 이와 같이 서로 교호하여 주의 역사를 이루는 거죠.
저는 저희 교회를 생각할 때 참 마음이 감사한데 제가 이 교회에서 17년 동안 있으면서 정말 감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 교인들이 대단히 신사적이에요. 교회가 이제까지 오면서 큰 무리가 없었던 것 같아요. 서로 간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아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기록을 하고 있냐면 베레아 사람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말씀을 받을 때 그러한가하여 묵상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의심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내가 어떻게 적용해서 살 것인가, 그 말씀의 깊이에 대해서 더욱 더 생각하는 거죠.
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보다 더 신사적이지 못한 뜻이었죠.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하도 핍박이 심해서 한 2주여 정도 복음을 전하고 쫓겨났어요. 그런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그냥 쫓겨낸 것만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가는 곳에 쫓아가서 돌멩이로 사도바울을 쳐서 죽이려고 했어요. 심지어는 어떤 성에서는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이 돌멩이로 쳐서 죽은 줄 알고 갖다버렸던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다시 살아나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랬는데, 베레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까 그 사람들은 너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 그 말씀이 어떤가 해서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을 지키고 싶어 한 겁니다. 그래서 '베레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보니까 저희 교회 교인들은 정말 신사적인 것 같아요. 자신의 위치를 잘 지키고, 또 뿐만 아니라 매우 신사적이에요.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어요. 저희 교인들 보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지나친 관심을 가진 분들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얘기를 들을 때 "그래 그래서, 한 번 해봐. 더 해봐. " 이런 사람 없는 것 같아요. 괜히 다른 사람 얘기하면 그냥 스쳐듣고 남의 말 가급적이면 안 하는 게 좋지. 뭐 이렇게 얘기들 하시는 거 같아요. 찔리는 사람도 있구요.
그리고 또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별로 큰 분란 같은 게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정말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큰 은혜 속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의 역사를 이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죠. 제가 이 교회 목사로서 굉장히 행복함을 느끼고 있는데 세 가지 입니다.
뭐냐 하면, 첫째는 제가 저희 성도들 굉장히 좋아해요. 목사치고 성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우리 성도들을 목사가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은 굉장히 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래서 어디 안 가잖아요. 교회에만 있잖아요.
두 번째는 우리 교인들도 목사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아요. 비웃는 이들이여.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성도를 좋아하고 있고 또 성도가 목사를 좋아하고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세 번째는 성도끼리도 매우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주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고 성도들이 서로 같이 믿음가운데 신뢰하고.
저희 교회 성도들 보면 누가 무슨 봉사를 하고 있는지 잘 몰라요. 그런데 교회에서 모든 봉사는 다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저희 교회는 내가 봉사한다고 나대다가는 사람 취급도 못 받아요.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자기의 할 일을 그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겸손히,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 평가할 필요도 없고, 내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하면 비교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럼 거기에 대해서 말이 될 필요가 없죠.
제가 언젠가 응급실에 간 적이 있는데, 제가 아픈 것은 아니고 성도님이 아파서 제가 연락을 받고 간 적이 있습니다. 난감한 상황을 목격했어요. 119구조대에 사람이 들것에 실려 왔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해 있더라고요. 제가 119구조대에 대해서는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몇 번 사람들을 만나게 됐을 때 정말 성실하고 진실하고 아주 훌륭해요. 저희 교회에도 119구조대에 근무하시는 분 계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제가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 연말이나 명절 때 되면 119구조대에 별거 아니라도-양말이라도 한 켤레씩 교회이름으로 꼭 보냅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우리 수고하는 거 인정해주는 분이 계시구나! 하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해서요. 뭐 별거 위로될 것도 아니지만 그저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 제가 보내고는 하는데요, 정말 아주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고요, 아주 헌신적으로 열심히 봉사하시더라고요.
이제 그 분들이 들것을 들고 왔어요. 119구조대 차타고 왔겠죠! 그런데 이분이 거기 도착해서 내리게 되니까 그냥 막되게 구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싣고 온 119구조대원들에게 욕하고 발길로 차고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구해달라고 해서 이 사람들이 와서 자기를 데리고 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와서 행패를 부리는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너무 허탈한 가보죠.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갑시다. 가. " 그러고 그냥 나가는 거예요. 얼마나 한심하겠어요. 아니 기껏 급히 가서, 또 차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거기까지 데려다 줬더니 그 하는 행태가 그런 거죠. 이 사람이 아주 못되게 굴더라고요. 보니까. 그러면서 거기서 막 난동을 부리고 그러는 거예요. 그랬더니 병원에서 보안 요원들이 나와서 더 난동부리면 데려가려고 거기 딱 지키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 사람이 거기서 뭐 하다가 유리병도 깨고 그랬어요. 그래도 환자니까 치료해 줘야되겠지요. 거기에 있는 의사선생님이 그 사람 손에 붕대도 감으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제가 잊혀지지가 않아요. 뭐라고 얘기 하냐면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이게 뭡니까 여기가 병원이고 응급실 아닙니까 급하고 어려운 사람들만 오는 덴데 여기서 이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런데 제가요 그 말이 문득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병원에서도 응급실은 급한 사람들 오는 거겠죠. 어렵고 힘든 사람 오겠지요. 실려 오는 사람들이 오겠죠.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정말 모든 사람이 마음 다치고, 상처받고, 피곤하고, 힘들고, 어려워서 교회 와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송하고, 위로받고, 말씀가운데 소망을 가지고 정말 그 가운데 애달픈 마음 쉬어서 또 다시 힘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려고 하는 데가 교회지요. 만약에 교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치고, 다른 사람에게 이리저리 쓸리고 피곤하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안식을 얻는가 제가 그래서 정말 교회는 보호되어야 될 상태라고 생각하거든요. 다행이 저희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없어요.
그래서 이제까지 17년 동안 큰 어려움 없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지내왔다는 것이 참 감사해요. 이것이 그냥 된 것이 아니고 모두가 서로 배려하고 마음을 쓰고 또 기도하고 그와 같은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면에 있어서 정말 우리 성도님들께 감사해요. 저는 이 교회 목사로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 방에 남자성도님들이 찾아올 때도 간혹 많습니다. 남자성도님들이 찾아올 때는 대부분 어려울 때에요. 좋은 일 전하러 오신 기쁨의 때도 있지만 대부분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목사가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뭔지 압니까 티슈 통에서 티슈 꺼내서 드리는 거예요. 늘 오시면 눈물 흘리시니까 눈물을 닦으셔야 되잖아요. 제가 하는 일중의 하나로 매우 중요한 일이에요.
정말 그와 같은 것을 볼 때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구나!
삶이라는 것은 이렇게 아픔과 고통이 있구나!
다른데서는 그러지 않으시겠지요. 목사 앞이니까 어린애 같은 심정이 돼서 그저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정말 복받쳐 오르는 것들이 있어서 그렇게 눈물도 흘리시고 정말 애타는 마음을 가지시겠지요.
옹달샘에서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고 새 힘 얻어 다시 세상을 향하여 나가는 것처럼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이 교회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들의 모임이죠.
저는 이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교회가 17년 됐는데요, 이 교회가 처음 설립될 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분명히 기도한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수많은 교회 중에 간판하나 더 다는 교회 되지 않게 하옵소서.
또 뿐만 아니라 이 교회가 존속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교회가 존립하는 분명한 뚜렷한 목표가 있고 역사와 사회 속에 기여하고 공헌하는 면이 있게 하옵소서. ”
이 교회라는 것은 성도들의 모임이거든요. 성도자체입니다. 성도자체가 개인적으로 역사와 사회에 기여하고 공헌하고 그 힘들이 합쳐져서 이 교회단위로 이루어지는 역사와 사회 속에 기여하고 공헌하는 게 있는 겁니다. 저희 교회가 일 년 일 년 지나왔다는 것은 그냥 지나온 게 아니에요. 일 년 일 년 시간이 가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목표,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원하시는 가치와 목표에 근접해 나가는 거예요. 그냥 또 일 년 지나고, 또 난 그냥 일 년 지난 게 아니라 이제 한 걸음 한 걸음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도달해 가는 거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는 겁니다.
우리는 갈등하고 피곤해 할 필요가 없어요.
저는 이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참 감사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다 우군이에요. 아군이에요. 적군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모두 다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어야 될 사람뿐이에요. 교회는 그렇게 하이테크한 모임이 아니에요. 그저 순정한 마음 가지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감싸주고 격려하고 그야말로 힘을 얻고 가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것을 위해서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영적인 권위가 있어야 돼요. 배우는 난람은 진정한 아낌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가 합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귀함이 있어야 돼요. 저는 이 교회를 매우 기뻐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매우 기뻐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교회는 가르치는 자, 배우는 자가 진정한 기쁨과 사랑과 존경과 존중과 은혜의 관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 저희 교회 가르치는 모든 선생님들, 가르치면서도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배우는 이들이 꿈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에 어려움 겪는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사회 속에서도 정말 가르치는 사람이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이와 같은 사회를 만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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