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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몽학(蒙學) 선생의 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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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요, 설교가인 아이런사이드(Ironside) 박사가 어느 날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청년이 손을 들며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법대로 합시다!” 그 의논하고 있던 사안이 매우 난처하고, 난감했던 것이었기에 모두들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의논하는 중에 튀어나온 발언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런사이드 박사는 ‘귀찮으니 그냥 법대로 하면 될 것 아니냐’는 듯이 말하는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보게, 젊은이, 자네는 법대로 하는 것을 원하는가 만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네를 법대로 다루셨다면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어야 합당할 것 같은가”
이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이미 법대로 처분 받은 이들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도 그렇고, 주님의 나라에서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모두 집행유예입니다. 법대로 했다면, 우리는 이미 끝장 난 인생들입니다. 절차와 규칙, 법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나 오로지 매사에 절차와 법만을 따지는 것은 사실상 우리의 목을 조이며,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잃는 행위입니다.
2.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우리는 법으로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법으로 살지만, 우리는 그 법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법을 뛰어넘어, 아니 그 법 정신을 가장 확실하게 구현하는 은혜로 사는 이들입니다.
법대로 살겠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바리새인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지키며 살겠다고 공언(公言)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기록된 율법, 모세 5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된 율법 외에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613개조의 구전 율법을 모조리 지키며 살겠다고 그리 달려왔습니다.
1조, 2조, 3조, … 하며 법 조항을 철저히 수행하기 위해 힘써 왔는데, 실제적인 역사를 보면, 그렇게 하면 할수록 드러난 그들의 삶은 이상하게도 율법의 정신에서 점점 멀어지는 기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조항을 철저히 지키는 것 같은데, 실지로 나타난 현상은 그건 형식적인 모습뿐이지, 그들의 마음은 부모 공경에서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안식일을 지켜라’하는 조항을 지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 같은데, 실제적으로 보면 안식일을 지키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와는 더욱 멀어졌습니다.
성지 순례 차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금요일 오후가 되자 많은 유대인들이 호텔로 찾아들었습니다. 왜 주말에 비싼 호텔로 찾아들까 했는데, 이유인즉, 안식일엔 일하지 말라 하여서 미리 집에서 음식 준비를 못한 이들이 주말에 굶을까봐 아예 호텔에 와서 먹고 마시며 그렇게 보낸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켜라 한 것이 고작 이렇게 살라고 그런 것일까요 주일을 지킨다는 것이 그저 예배 1시간 드리고 훌쩍 돌아가 제 마음대로 사는 것일까요
규칙, 법,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양심이 자유롭지 못하고 뭔가에 붙잡혀 들어가는 모습, 그래서 평생토록 율법을 준수하며 살았던 바리새인 출신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평생토록 율법을 따라 살았는데, 결국은 이런 탄식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3.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사람들의 삶이 시작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탄식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서 새로운 역사는 움트기 시작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24절에 보면 ‘초등교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전에 쓰던 개역성경에는 ‘몽학 선생’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등교사, 몽학 선생, 무슨 뜻일까요 이 단어는 ‘paidagogos’로 ‘아이의 인도자’란 뜻입니다. 고대 헬라 사회에 있었던, 6-10세의 아이들 가정교사로서 초등학문을 배워주고, 의복, 식사, 행동들을 돌보아주고 학교에 가게 되면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노예를 바로 ‘파이다고고스’로 불렀습니다.
좀 더 쉽게 우리 식으로 설명하면, 옛날 양반 집에서는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서당에 보내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 집 자녀가 동네 아이들이 밖에서 놀면 서당엘 가지 않고 같이 놀러 다니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양반 집에서 똑똑한 하인을 자녀에게 붙여 서당까지 함께 가도록 했는데 그 일을 하는 하인을 가리켜 몽학 선생이라 했습니다. 자녀에게는 ‘너를 서당까지 데려가는 이 분도 너의 스승이다’라고 가르쳤답니다.
그리고는 그 하인에게 서당에 가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아이를 마음껏 꾸중하고 훈계하고 때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하인은 비록 아이가 양반이요, 미래의 자기 상전이지만 만약 서당에 가려하지 않을 때에는 아이를 마음껏 때려도 되었습니다. 즉, 몽학 선생은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서당까지 가게 만드는 선생을 말합니다.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우리 인생들에게도 이런 몽학 선생이 있답니다. 무엇인가요 뭐가 우리에게 몽학 선생인가요 그게 율법입니다. 율법은 늘 우리를 다그칩니다. 율법은 우리를 늘 조입니다. 뭔가 양심적으로, 내면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합니다. 그것을 다 들어야 함을 우리도 압니다. 그것을 따라가야 함을 우리 자신도 압니다. 내 양심의 소리, 내 내면의 소리들을 듣고 이행해야 떳떳함을 압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완전히 따라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저되는 일이요, 벅찬 일입니다.
오늘도 몽학 선생에게 매질을 당하는 인생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양심의 매질, 내면의 세계에서의 매질, 영적으로 매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늘 어두운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남에게 말도 못하고 침체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를 몽학 선생 율법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렇게 괴로워함에도 우리를 향하여 선고합니다. ‘양 목사, 죄인, guilt!’ ‘김 장로, 유죄, guilt!’ ‘이 집사, 죄인, guilt!’,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4. 어쩌면 좋은가요 이토록 몽학 선생의 위세가 등등하여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우는데 우리는 어쩌면 좋은가요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길가에서 놀려 하지 말고 서당에 가면 몽학 선생이 할 일이 없어지듯이, 우리의 삶이 그 곳에, 그 분께로 나아가면 됩니다. 어디에
24절,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
이 문장에서 ‘믿음’이란 단어 앞에 원문 성경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그 믿음’이란 뜻으로, 어떤 구체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입니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뭘까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무조건의 막연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과거를 묻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믿음, 이 믿음이모든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려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하신다는 믿음. 내가 주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나는 온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자유케 하신다는 믿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죄인이며, 내 스스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고, 주 예수님의 도우심 속에 나는 살아갈 수 있다는 겸허함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 함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얻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도덕이 나를 건져주는 것 아닙니다. 윤리가 나를 구원해주는 게 아닙니다. 깨달음이 나를 구하여 주는 게 아닙니다. 구체적이고 엄청나신 희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 그것에 대한 믿음이 나를 건져주는 것입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반복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법으로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로 사는 이들입니다.
그 은혜로 사는 증거가 뭔지 아는가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십자가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믿음.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의 삶에 대하여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입니다! 습관을 따라하고, 자기 취향을 따라하는 것, 다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믿지 않고, 사명 주심도 믿지 않고 그제 제 하고파서 하는 열심, 봉사, ... 모두 죄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만한 믿음이 없다면 신자로선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즉 은혜로 사는 자들입니다. 여전히 법, 법 하며 몽학 선생 아래에서 쫓기듯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법 보다 은혜를 먼저 내세워 보십시오. 예수님의 정신이 살아날 것입니다. 가정에서 규칙보다 은혜를 먼저 앞세워보십시오. 예수님의 정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 계실 것입니다. 우리 이 교회에서 정말 은혜와 믿음을 먼저 앞세워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파워가 충만할 것입니다.
은혜를 구했더니 절차를 내세우는 교회, 몽학 선생의 위세에 눌려 있는 교회입니다. 믿음을 구했더니 규칙을 앞세우는 가정, 몽학 선생의 매질에 눌려 있는 가정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터전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위에, 그것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 위에 든든히 서가는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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