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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

본문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바른 신앙을 교란하는 자들을 유대의 교사들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율법 관습과 전통을 강조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혼돈되게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끼고 그들을 멀리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자들이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고 하늘에 속한 자신과 자신의 동역들을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本論
1.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17)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고전11:1). 뿐만 아니라 17절 뒷부분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암시합니다 (2:25,29).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뿐 아니라 신실한 동역자들을 본받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를 위해 헌신하려는 생애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얻고 발견되기 위해 세상의 자랑하던 이전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었고 그 안에서 주어질 여호와 하나님의 상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범사에 양심을 따라 행하는 자였습니다 (행23:1). 오늘날 자기 양 떼를 향해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자신의 신앙, 자신의 윤리적 삶을 모방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참된 목자일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원수들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18-19)
바울이 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모범과 반대로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개탄입니다. 그들은 3:2부터 바울이 유대인들을 대적자들로 염두에 두었음을 생각할 때 본문의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는 유대인들을 주고 한 말 같습니다. 로마서9:1-5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에 대해 표현하는 슬픔과 일치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구원을 먼저 얻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므로 구원을 얻지 못하고 못하는 것을 생각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율법에 의해 저주받은 죽음이라고 하고 (신21:23),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자는 교훈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조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허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일 수 밖에 없습니다 (19절). 그들은 믿지 않는 자에게 가해질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그들의 윤리적 가치관을 지적합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19절). '저희의 신은 배'라는 말은 그들의 율법적 범주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들은 정결법 특히 뱃 속에 무엇이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가 우상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는 말은 할례를 두고 한 말입니다 (3:2). 부끄러움의 헬라어 아이스퀴네(αισχυνη)는 사람의 벌거벗음이나 사람의 은밀한 곳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들의 할례는 남자 아이의 8일만에 성기의 표피를 돌칼로 베는 의식입니다. 당시 헬라인들의 운동경기는 옷을 벗고 했고, 로마 문화 자체가 목욕문화였으며 노동하는 종들을 거의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남성들의 할례한 모습은 놀림거리가 되었고 정욕적인 사람들로 멸시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헬라 문화에 동화된 자들은 수술하여 할례 자국을 없애려 하기도 했습니다. 할레 문제 때문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꺼려 했기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논쟁을 통해 이방인이 그리스도교에 들어올 때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동의를 얻어냅니다 (행15장). 유대인들은 그 부끄러운 것을 자랑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민이라고 자랑하고 그것을 행해야 구원 얻는다고 합니다. 바울을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는 말은 뒤에 나오는 20절의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는 말의 반대 개념입니다. 그들은 종말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 삶을 목표로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지 않는 자는 먹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육욕을 채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말세에 사람들이 온통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만족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디모데후서3:1-5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3. 하늘에 있는 시민권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20-21)
빌립보시(市)는 마게도냐에 속한 지역입니다.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입니다. BC356년 마게도냐(마케도니아)왕 빌립2세(Philip∥,BC359-336)가 이웃하고 있는 야만인들의 나라 드라케에서 나라를 빼앗아 새 도시를 건설하면서 그 곳 이름을 자기 이름을 본따 '빌립보'라고 칭했습니다. BC168년에 로마에 의해 정령당해 로마에 편입되었습니다. BC42년 로마에 내전이 일어났는데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승리를 하게 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을 종식하고 황제가 되어 빌립보에 안토니우스의 해산된 군대와 퇴역한 자기 군대를 정착시킵니다. 그래서 빌립보 시민은 이탈리아 본토 로마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시작합니다. 빌립보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고 로마 시민으로서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곧 빌립보는 로마에서 떨어져 야만세계에 있으면서도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그림에 하늘나라와 기독교인들의 관계를 대입시키고 있습니다. 빌립보시가 로마에서 떨어져 야만 세계에 있으면서도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권위와 혜택을 누리며 로마의 일부인 것에 자부를 갖고 사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하늘을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속적이고 마귀적인 세상 문화와 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법과 가치관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시민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생각을 가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복종케 하실 분입니다 (고전15:27-28). 그의 재림 때에는 만물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4:16-17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여호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의 약한 몸도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5:42-44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도 하늘에 시민권이 있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는 당연히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 피나는 싸움을 합니다. 그 싸움을 해 본 사람은 피곤합니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 속에 도저히 뿌리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님이 오셔서 만물을 굴복시키고 우리 몸을 굴복시킬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을 고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롬7:15-25).
結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배로 신(神)을 삼고 부끄러운 것을 영광삼고 땅의 일만 생각하며 삽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들의 인생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되는 삶입니다. 저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를 닮아 가려 합니다. 그래서 그의 영광에 참여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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