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주 안에서 스승된 자의 기도
본문
지난 15일이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주 안에서 선생님된 자들이 어떻게 기도하며 주의 백성들을 양육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것 중에 하나가 벤톤 이비가 말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사이다. 라는 말입니다.
곧 이 자리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스승입니다.
먼저 믿는 자는 나중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하는 스승이요, 부모는 자녀의 스승이요, 때로는 어린이가 우리의 스승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오늘 본문의 바울이 가졌던 주 안에서의 스승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 8절 말씀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여호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제 언제 자기에게 무슨 일이 나타날지 모르는 감옥 속에서 늘 자기를 사랑해주고 복음의 동역자가 되었던 빌립보 교우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사모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을 사모하되 단순한 인간적인 정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렇게 사모한다고 표현합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나의 심장'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라고 표현한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지 않고 나의 심장으로 사모하는 것으로 인해,
이기적인 욕심들이 드러나고, 반목과 질시와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라이트후트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맥박은 그리스도와 함께 뛰어야'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물질을 사모해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해야 그것이 정상적인 사모가 되는 것이고,
사람을 사모해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해야 그것이 정상적인 사모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 시인의 노래가운데 '내 님을 그리워 하며 울며 지내더니 산의 접동새와 나는 처지가 비슷합니다'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를 떠나간 사람을 사모하면서 그 사모하는 것이 슬피 우는 산의 접동새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동물같은 그리움, 짐승같은 사모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코 그러한 그리움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는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진실한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런 동물같은 사모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순한 인정 때문에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얼굴꺼풀처럼 얇은 웃음으로 사모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장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는 것은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7절에 기록된 것처럼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여'입니다.
그러기에 늘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심장에는 그리스도가 간직되었기에 비록 감옥 속에 갇혔을지라도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심장에 그리스도를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간직하고 있다면 어떤 상황 어떤 장소에서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성도들 위해 기도하는 바울의 기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선생된 자들로 늘 맡겨진 양떼들을 위해 기도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인간적인 정을 가지고 만일 바울 사도가 기도를 했더라면 그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기도하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선생된 자들 모두와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이제 우리들도 오늘 말씀을 살피면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기도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 사랑이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원문대로 본다면 사랑이 성장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더 커지고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사랑이 아닙니다.
만일 단순한 사랑만을 고집하다보면 맹목적인 감정에 치우치게 됩니다.
여러분, 단순한 사랑만 있으면 그것은 맹목적인 감정에 치우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참된 지식이 없는 사랑은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쉽게 속습니다.
자녀의 잘못은 눈에 잘 안 보이는 법입니다.
여기 지식이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신앙적인 지식, 성경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신령한 지식 안에서 사랑이 더욱 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식과 총명으로 통제를 받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란다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선생된 자들과 우리들이 늘 기도해야 할 중요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총명으로 늘 통제를 받는 사랑, 그 사랑이 풍성해져야 합니다.
술집에서 만난 사랑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지식은 사랑으로 포장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포장되지 않은 지식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정죄하는지 모릅니다.
그 지식은 단순히 무서운 흉기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사랑은 헛된 열심히 등장하게 됩니다.
굉장히 사랑을 베푼 것 같은데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크나큰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수고의 수고를 거듭하면서 돈을 벌어서 아들에게 갖다 줍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열심히 수고하는 줄도 모르고 베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그 어머니가 준 그 사랑 때문에 더 게을러지고 더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그 어머니가 베푼 사랑 때문에 철장 신세를 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 맹목적인 사랑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은 기도합니다.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하게 되'기를 말입니다.
왜 부모가 회초리를 손에 들어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까
지식과 총명에 의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바울이라는 인간의 심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이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선생님들이 맡겨진 양들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풍성해지도록 기도하고 가르치며,
여러분들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2.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서 흠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10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선악의 분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선악을 분별하는 정도에 그치는 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단순히 '이것이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정도에 그치는 것처럼 어리석고 못난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이상으로 '이것이 지고의 선이냐'하는 것을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위 베스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누구와 혹은 어떻게 지내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내가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를 분별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베스트를 분별해서 택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집에서 TV만 보고 있다고 누가 그것을 죄라고 단정지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나의 최선, 지극히 선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시간, 모든 삶 속에서 이 지고의 선을 분별하는 기도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으로 끝나지를 않습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 위함입니다.
잠30:7-9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귀한 기도가 있습니다.
7절을 보면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종말론적인 소원의 기도입니다.
그 종말론적인 소원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8절을 보면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입니다.
그 첫째가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게 하여달라는 기도입니다.
위선자가 되지 않기를 진실을 놓치는 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진실하다는 말은 라틴어의 뜻이 왁스를 칠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라틴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는 것을 인격자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오면 사랑의 마스크를 써서 사랑이 넘실거리는 것 같고,
집에 가면 재빨리 무서운 시어머니의 마스크로 바꿔 쓸 줄 아는 사람을 인격자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잘 믿는 사람처럼 보이다가 집으로 가면 전혀 불신자로서의 마스크를 바꿔 쓸 줄 아는 사람을 인격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왁스를 칠하지 않은 사람, 분을 바르지 않은 사람이 곧 진실한 사람입니다.
교묘하게 자기의 삶과 행실을 숨기는 사람을 성경은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왁스칠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내어 보이며 사는 사람을 진실하다고 표현합니다.
여기 진실하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꾸밈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감추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실하되 흠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흠이 없다는 말은 남에게 거침돌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리하면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 최선의 것들을 늘 잘 분별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은근히 속이려는 위선자의 삶이 아니라, 분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되
다른 사람들의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시 우리 선생된 자들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분칠하고 사는 삶, 다른 사람의 거침돌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차선 혹은 차차선을 많이 택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전혀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위선들이 가득하고, 다른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교회와 주님의 나라의 부흥의 저해되는 삶이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이제 주안에서 선생된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백성된 양떼들의 삶에서 지극히 선한 것을 바로 분별하고, 진실해서 우리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흠이 없는 자들, 다른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자들이 되지 않는 삶이 이어지기를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3.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1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여기서 말하는 의는 곧 행동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행동의 열매를 말합니다.
우리 혼자 맺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는 열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관계된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다시 말해서 넓은 가슴을 가진 사람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양떼들이 가정생활에서 의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점검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양떼들이 교회생활에서 의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의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이것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조그마한 선행을 행했다고 그것을 의의 열매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가 풍성히 살아 계심으로, 곧 나의 심장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식됨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의의 열매입니다.
유명한 아씨씨의 성자라고 하는 프란시스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나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가서 그 나환자를 붙들고 기도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또 다른 한편 마음속에서 전염이 되면 어쩌나 더러운 걸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마음에 자꾸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합니다.
'주님 제가 나환자를 그냥 지나친 것이 뭐가 잘못입니까'
그러자 '왜 그냥 지나가느냐'
'더러워서 그렇습니다. '
그 때 프란시스가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나환자보다 나으냐 너는 그 나환자보다 더 더렵혀진 죄인이었는데 내가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했단다. '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는 그는 주님의 사랑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워서 그 나환자에게 가서 입을 맞추고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왜 우리에게 의의 열매가 행동으로 맺혀지지 않는가 하면 바로 주님으로 가득 차지 않아서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가슴을 가득 채워야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불평보다는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그리고 주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로 가득 차서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기를 기도합시다.
4. 마지막으로 바울의 기도의 종합이 나타납니다.
11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지식으로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의 열매를 맺는 최종적인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제 선생된 우리 모두가 오늘 바울의 기도를 본받아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온 교우들이 그리고 맡고 있는 주의 자녀들이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식과 총명이 있는 사랑으로 풍성해지기를 기도하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도록 그리고 진실하며 남의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그리스도로 충만해서 의의 열매가 행동으로 나타나도록 기도하며
최종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나의 남은 생애가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가는 모든 선생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것 중에 하나가 벤톤 이비가 말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사이다. 라는 말입니다.
곧 이 자리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스승입니다.
먼저 믿는 자는 나중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하는 스승이요, 부모는 자녀의 스승이요, 때로는 어린이가 우리의 스승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오늘 본문의 바울이 가졌던 주 안에서의 스승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 8절 말씀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여호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제 언제 자기에게 무슨 일이 나타날지 모르는 감옥 속에서 늘 자기를 사랑해주고 복음의 동역자가 되었던 빌립보 교우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사모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을 사모하되 단순한 인간적인 정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렇게 사모한다고 표현합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나의 심장'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라고 표현한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지 않고 나의 심장으로 사모하는 것으로 인해,
이기적인 욕심들이 드러나고, 반목과 질시와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라이트후트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맥박은 그리스도와 함께 뛰어야'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물질을 사모해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해야 그것이 정상적인 사모가 되는 것이고,
사람을 사모해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해야 그것이 정상적인 사모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 시인의 노래가운데 '내 님을 그리워 하며 울며 지내더니 산의 접동새와 나는 처지가 비슷합니다'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를 떠나간 사람을 사모하면서 그 사모하는 것이 슬피 우는 산의 접동새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동물같은 그리움, 짐승같은 사모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코 그러한 그리움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는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 진실한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런 동물같은 사모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순한 인정 때문에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얼굴꺼풀처럼 얇은 웃음으로 사모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장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는 것은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7절에 기록된 것처럼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여'입니다.
그러기에 늘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심장에는 그리스도가 간직되었기에 비록 감옥 속에 갇혔을지라도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심장에 그리스도를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간직하고 있다면 어떤 상황 어떤 장소에서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성도들 위해 기도하는 바울의 기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선생된 자들로 늘 맡겨진 양떼들을 위해 기도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인간적인 정을 가지고 만일 바울 사도가 기도를 했더라면 그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기도하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선생된 자들 모두와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이제 우리들도 오늘 말씀을 살피면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기도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 사랑이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원문대로 본다면 사랑이 성장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더 커지고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사랑이 아닙니다.
만일 단순한 사랑만을 고집하다보면 맹목적인 감정에 치우치게 됩니다.
여러분, 단순한 사랑만 있으면 그것은 맹목적인 감정에 치우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참된 지식이 없는 사랑은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쉽게 속습니다.
자녀의 잘못은 눈에 잘 안 보이는 법입니다.
여기 지식이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신앙적인 지식, 성경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신령한 지식 안에서 사랑이 더욱 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식과 총명으로 통제를 받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란다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선생된 자들과 우리들이 늘 기도해야 할 중요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총명으로 늘 통제를 받는 사랑, 그 사랑이 풍성해져야 합니다.
술집에서 만난 사랑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지식은 사랑으로 포장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포장되지 않은 지식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정죄하는지 모릅니다.
그 지식은 단순히 무서운 흉기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사랑은 헛된 열심히 등장하게 됩니다.
굉장히 사랑을 베푼 것 같은데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크나큰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수고의 수고를 거듭하면서 돈을 벌어서 아들에게 갖다 줍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열심히 수고하는 줄도 모르고 베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그 어머니가 준 그 사랑 때문에 더 게을러지고 더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그 어머니가 베푼 사랑 때문에 철장 신세를 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 맹목적인 사랑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은 기도합니다.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하게 되'기를 말입니다.
왜 부모가 회초리를 손에 들어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까
지식과 총명에 의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바울이라는 인간의 심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이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선생님들이 맡겨진 양들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풍성해지도록 기도하고 가르치며,
여러분들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2.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서 흠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10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선악의 분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선악을 분별하는 정도에 그치는 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단순히 '이것이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정도에 그치는 것처럼 어리석고 못난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이상으로 '이것이 지고의 선이냐'하는 것을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위 베스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누구와 혹은 어떻게 지내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내가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를 분별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베스트를 분별해서 택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집에서 TV만 보고 있다고 누가 그것을 죄라고 단정지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나의 최선, 지극히 선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시간, 모든 삶 속에서 이 지고의 선을 분별하는 기도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으로 끝나지를 않습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 위함입니다.
잠30:7-9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귀한 기도가 있습니다.
7절을 보면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종말론적인 소원의 기도입니다.
그 종말론적인 소원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8절을 보면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입니다.
그 첫째가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게 하여달라는 기도입니다.
위선자가 되지 않기를 진실을 놓치는 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진실하다는 말은 라틴어의 뜻이 왁스를 칠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라틴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는 것을 인격자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오면 사랑의 마스크를 써서 사랑이 넘실거리는 것 같고,
집에 가면 재빨리 무서운 시어머니의 마스크로 바꿔 쓸 줄 아는 사람을 인격자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잘 믿는 사람처럼 보이다가 집으로 가면 전혀 불신자로서의 마스크를 바꿔 쓸 줄 아는 사람을 인격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왁스를 칠하지 않은 사람, 분을 바르지 않은 사람이 곧 진실한 사람입니다.
교묘하게 자기의 삶과 행실을 숨기는 사람을 성경은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왁스칠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내어 보이며 사는 사람을 진실하다고 표현합니다.
여기 진실하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꾸밈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감추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실하되 흠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흠이 없다는 말은 남에게 거침돌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리하면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 최선의 것들을 늘 잘 분별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은근히 속이려는 위선자의 삶이 아니라, 분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되
다른 사람들의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시 우리 선생된 자들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분칠하고 사는 삶, 다른 사람의 거침돌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차선 혹은 차차선을 많이 택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전혀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위선들이 가득하고, 다른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교회와 주님의 나라의 부흥의 저해되는 삶이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이제 주안에서 선생된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백성된 양떼들의 삶에서 지극히 선한 것을 바로 분별하고, 진실해서 우리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흠이 없는 자들, 다른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자들이 되지 않는 삶이 이어지기를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3.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1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여기서 말하는 의는 곧 행동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행동의 열매를 말합니다.
우리 혼자 맺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는 열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관계된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다시 말해서 넓은 가슴을 가진 사람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양떼들이 가정생활에서 의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점검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르치는 양떼들이 교회생활에서 의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의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이것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조그마한 선행을 행했다고 그것을 의의 열매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가 풍성히 살아 계심으로, 곧 나의 심장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식됨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의의 열매입니다.
유명한 아씨씨의 성자라고 하는 프란시스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나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가서 그 나환자를 붙들고 기도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또 다른 한편 마음속에서 전염이 되면 어쩌나 더러운 걸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마음에 자꾸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합니다.
'주님 제가 나환자를 그냥 지나친 것이 뭐가 잘못입니까'
그러자 '왜 그냥 지나가느냐'
'더러워서 그렇습니다. '
그 때 프란시스가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나환자보다 나으냐 너는 그 나환자보다 더 더렵혀진 죄인이었는데 내가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했단다. '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는 그는 주님의 사랑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워서 그 나환자에게 가서 입을 맞추고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왜 우리에게 의의 열매가 행동으로 맺혀지지 않는가 하면 바로 주님으로 가득 차지 않아서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가슴을 가득 채워야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불평보다는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그리고 주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로 가득 차서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기를 기도합시다.
4. 마지막으로 바울의 기도의 종합이 나타납니다.
11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지식으로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의 열매를 맺는 최종적인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제 선생된 우리 모두가 오늘 바울의 기도를 본받아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온 교우들이 그리고 맡고 있는 주의 자녀들이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식과 총명이 있는 사랑으로 풍성해지기를 기도하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도록 그리고 진실하며 남의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그리스도로 충만해서 의의 열매가 행동으로 나타나도록 기도하며
최종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나의 남은 생애가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가는 모든 선생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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