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선생들아 내가 어찌할꼬
본문
오늘은 전국 교회가 지키는 교사주일입니다.
누가 교사인가 신령한 의미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교사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름난 랍비, 곧 교사이셨습니다.
그가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지 않다고들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당부하셨는데 마28:19에 보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했고, 또 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부족하지만 교사들입니다. 그런데 교사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행5:42를 답합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던지 집에 있던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일이 교사의 임무요, 전도하는 일이 교사의 임무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요약하면 전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전도 때문이고,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것도 전도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유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은 예수님만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셨다고 전도했습니다.
그 때 성령이 강하게 임한지라 무리들이 어찌했습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했습니다.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위기를 만난 간수에게 철학을 강의하지 않고 과학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강론하고, 전파했습니다.
그 때도 역시 성령이 강하게 역사 하시므로 간수가 어찌했습니까 "선생들아 내가 어찌할꼬"하지 않았습니까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교사주일을 지키는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
교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또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할 수 있는 대로 후한 대접도 하고 훈장을 달아주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본문33절인데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했는데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또34절을 보면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했는데 얼마나 큰 대접이며 용기를 북돋워 준 일이었을까요
오늘날 교사된 우리 모두에게 그 동안 전도하노라고 최선을 다한 노고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위로를 주시고 또 각 급 주일학교에서 수고 많이 하신 일선 교사님들에게 예비 된 하늘나라의 상급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오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깊은 밤의 이적 사건입니다.
전도하다가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본문25절에 보면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했습니다.
전도는 듣도록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찬송을 하니까 죄수들이 들었습니다. 아마 찬송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 여기 죄수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간절히 기도했을 때 죄수들이 그 기도를 들었습니다.
아마 이 기도를 들은 죄수들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을는지도 모릅니다. 이 때입니다. 옥중에 갑작스러운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홀연히 큰 지진이 생기고,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고, 죄수들의 쇠고랑이 다 벗어졌습니다.
죄수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다 도망할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죄수들이 다 도망했다면 간수는 끝장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했습니다. 간수가 만난 위기입니다. 만일 자결했더라면 그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 순간입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그 때 간수가 어찌했습니까 29절을 보면 "등불을 달라"하더니 살펴보았을 때 죄수들 중에 한 사람도 도망한 사
람이 없었습니다. 간수는 도리어 놀랬고 감탄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서 그는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니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0절을 보면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고 구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이 전한 전도의 말이 무엇입니까 본문31절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왜 바울이 하고많은 말 가운데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했을까요
첫째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롬3:10을 기억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주홍같이 붉은 죄가 있고, 먹장같이 검은 죄가 있습니다. 신학교 졸업반 때 일인데 졸업반 전원이 서대문 형무소를 탐방했습니다. 저더러 짤막한 메시지를 전하라고 해서 전했는데 그 때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들 힘을 내십시오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허물 집니다. 죄인입니다. 여러분들의 허물은 발각되어서 여기 계시고 우리들의 허물은 아직 발각되지 않아 밖에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오면 모든 죄를 용서함 받습니다. 없었던 평화가 생기고 기쁨이 생겨납니다'이렇게 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바울은 성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죄인 가운데 괴수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주여 나를 떠나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했습니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인생은 아주 없습니다. 총리가 사표 낼 줄을 어찌 알았으며, 장관이 쇠고랑 차고 옥에 갇힐 줄 누가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인생은 다 죄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사자 보다 더 두려운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로부터입니까 인생이 저지른 죄로부터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당초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있는 다음부터서 죽음이 있게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죽음을 앓고 있습니다. 순간 죽어갑니다. 그래서 니체의 말인데 '죽음을 정복하기에는 벌써 늙었다'고 했고, 하이데거의 말인데 '순간 순간 죽어간다. 죽음의 존재자다'고 했습니다. 왜 경찰관이 저토록 고생해야 됩니까 죄 때문입니다. 왜 감옥을 지어야 합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고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매 년 130만 명이 죽어가고, 1분 동안에 24명, 하루 동안에 3만5천명
이 죽어간다는 통계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이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는 무지자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바리새인은 스스로 의롭다고 했습니다. 저마다 인생들이 바리새인을 닮은 것 같습니다. 자기만은 다 깨끗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티는 지적하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고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내가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의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한 사람도 이 자리에 앉을 수 없었을 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찬송이 무엇입니까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늘 즐거이 불러야 될 찬송일 것입니다.
둘째 속죄는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죄인이 의인 될 수 없느니라, 믿음 없이는 누구도 거듭날 수 없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한 사람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될 수 없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천하장사라도 천국에 갈 수 없느니라"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까 백 번을 물어야 합니다. 답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죄 때문입니다. 아니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나의 정욕, 물욕 이러한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찬송이 무엇일까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나의 간증처럼 불러야 될 찬송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네 죄를 담당시키셨느니라"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성경이 또 말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또 네 죄가 멀어졌느니라" 그래서 롬5:1이 우리에게 힘을 돋구어 줍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그런데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한 것
처럼 죄악된 인생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실 분으로 예수님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공자, 석가, 마호멧, 그리고 예수를 4대 성현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인간의 반열 속에 넣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찌 불교의 4월초팔일과 기독교의 12월15일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 죄가 있겠습니까 죄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속량 하실 수 있고 죄인 된 우리 모두는 그 예수님께 죄를 자백할 수 있고 또 그 죄를 용서받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요일1:9이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자백하면 끝납니다. 해결됩니다. 눅15장 탕자비유가 교훈하지 않습니까 그 탕자인데 '돌아오라, 돌아오라' 돌아왔더니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 주고, 그리고는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 입혀 주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겨 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배 풀어 주지 않았습니까 사랑의 회복입니다. 주께로 나아가 허물을 고백하면 다 이렇게 사랑을 받는 다는 말입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 주시는 주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회개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무슨 죄를 회개할까요 우리 맡은 작은 본분을 감당하지 못한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종종 자신에게 묻습니다. '목사이면 다 목사냐'가슴아플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목사가 목사노릇을 잘 해야 목사지'이것이 정답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장로이면 다 장로냐 장로노릇을 해야 장로지, 권사면 다 권사냐 권사노릇을 해야 권사지' 어떤 집사님이 주일성수 하지 않고 등산을 갔습니다. 기분 좋게 '야호'했더니 메아리가 똑 같이 '야호'산울림으로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짓궂게도 시험삼아 한 번 외쳤습니다. '네가 집사냐'그러니까 메아리가 '네가 집사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수 애양원에 가면 문둥병가족들만 있습니다. 믿음 좋은 양재평 장로님이 계신데 그를 만날 때마다 은혜를 받곤 합니다. 그의 간증이 생각나는데 마늘을 캐는 순간에 손 가락하나가 떨어져 나갔대요.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간증입니다. '손가락이 떨어 졌는 대도 전혀 아프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무감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왜 죄를 깨닫지 못합니까 왜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못합니까 어딘가가 심령의 한 부분이 고장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물진 인생들이 고백하지를 아니합니다. 그리고는 여호와 하나님은 모르리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눈을 만든 자가 어찌 보지 아니하시랴, 귀를 만든 자가 어찌 듣지 아니하시랴"고 했습니다. "네 죄가 문지방에 엎드렸느니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모래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안한척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 모래가 흘러가니까 시체가 까맣게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시체가 말합니다. '모세가 나를 죽였습니다'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숨길 허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어찌했습니까 안한 척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닭이 꼬끼오하고 울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대요. 닭 울음소리가 고발이었다는 말입니다. 허물진 인생은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외침이 무엇입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 고백하면 용서함 받고 용서함 받을 때만 희열, 감격이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어떤 기사가 어린아이를 치어 죽게 했습니다. 옥에 들어가 다 값을 치렀습니다. 그런 대도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훗날 기
쁨이 생겨났습니다. 그 부모가 목을 쓸어안고 '다 잊었노라, 용서하노라'했을 때에 기쁨이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나와서 용서함을 받게 될 때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우리 모두가 누려야 됩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울어도 못합니다. 힘써도 못합니다. 참아도 못합니다. ♬믿으면 하겠네♬속죄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세 번째 구원은 예수님만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25절입니다. "밤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가 도덕적 밤중시대요, 정치적 밤중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랑할 만한 애국자는 못되지만 가슴이 아플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밤중에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이 시간 저는 원합니다. 예배하는 성도들 주님의 은혜로 죄악의 쇠고랑이 벗어지고, 질병의 쇠고랑이 벗어지고,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 매인 것들이 다 벗어지는 축복이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기를 만난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요청을 했는데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구원의 방도를 알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처처에서 "선생들아 내가 어찌할꼬"절규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세상이기 때문이고 영혼들마다 목말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생명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문제는 생명문제입니다. 양장점 쇼 윈도우에 서 있는 마네킹을 보십시오. 철 따라 옷을 바꾸어 입습니다. 달마다 새 의상으로 단장합니다. 게다가 유명 메이커 의상이요, 이름난 디자이너가 만든 것들입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그 마네킹을 보면서 '오 행복한 여인이여'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네킹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의 생명을 보장합니까 누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합니까 예수님뿐이십니다. 행4:12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예수님을 누가 만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만날 수 있고,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만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나 같은 것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수가성
여인,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격이 있어서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소경, 귀머거리도 마음을 열면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은 공짜입니다. 직업이 무엇이냐, 신분이 무엇이냐, 나이가 몇 살이냐, 학벌이 어느 정도냐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연쇄 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그 영향 때문에 내 가족이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내 친구가 내 친척이 연달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간수를 보십시오 "선생들아 내가 어찌할꼬"했다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더니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가족적으로 누린 것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본문34절입니다. "크게 기뻐하더라"가족적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가족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러한 기쁨이 생겨납니다. 엄청난 축복을 누립니다. 변화를 받고 이적을 만납니다. 어느 국회의원의 고백입니다. 당선이 되니까 기쁨이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수 백 통의 전화가 오고, 수 십 개의 화분이 날아오고, 전보가 날아오고, 지체없이 방문객이 들락날락하고 그런데 다음 선거에 낙선되었습니다. 그 때는 허전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그 비애, 배신감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방문객이 없고, 화분하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조건적인 기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14:1인데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얼마나 고마우신 분이십니까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우리의 찬송입니다. 일본 또우미 회사 발키노 회장이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일본은 물론 세계의 경제인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가 돈이 없어서 쓰러졌습니까 그가 지정병원이 없고 주치의가 없어서 쓰러졌습니까 이 이야기는 발키노 회장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우리 주변에서도 간암으로 위장 암으로 죽은 사람들이 하나, 둘, 셋 참 많았습니다. 인생의 날은 베틀의 북 보다도 빠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를 너희가 알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교사 된 성도들이여!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급하게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입니다. 전도해야합니다. 전도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지옥 갈 인생이 천국 갑니다. 전도하면 내 믿음이 성장하고 교회가 부흥합니다. 전도하면 가족이 축복을 누립니다.
누가 교사인가 신령한 의미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교사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름난 랍비, 곧 교사이셨습니다.
그가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지 않다고들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당부하셨는데 마28:19에 보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했고, 또 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부족하지만 교사들입니다. 그런데 교사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행5:42를 답합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던지 집에 있던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일이 교사의 임무요, 전도하는 일이 교사의 임무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요약하면 전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전도 때문이고, 우리를 택하여 세우신 것도 전도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유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은 예수님만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셨다고 전도했습니다.
그 때 성령이 강하게 임한지라 무리들이 어찌했습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했습니다.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위기를 만난 간수에게 철학을 강의하지 않고 과학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강론하고, 전파했습니다.
그 때도 역시 성령이 강하게 역사 하시므로 간수가 어찌했습니까 "선생들아 내가 어찌할꼬"하지 않았습니까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교사주일을 지키는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
교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또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할 수 있는 대로 후한 대접도 하고 훈장을 달아주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본문33절인데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했는데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또34절을 보면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했는데 얼마나 큰 대접이며 용기를 북돋워 준 일이었을까요
오늘날 교사된 우리 모두에게 그 동안 전도하노라고 최선을 다한 노고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위로를 주시고 또 각 급 주일학교에서 수고 많이 하신 일선 교사님들에게 예비 된 하늘나라의 상급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오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깊은 밤의 이적 사건입니다.
전도하다가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본문25절에 보면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했습니다.
전도는 듣도록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찬송을 하니까 죄수들이 들었습니다. 아마 찬송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 여기 죄수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간절히 기도했을 때 죄수들이 그 기도를 들었습니다.
아마 이 기도를 들은 죄수들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을는지도 모릅니다. 이 때입니다. 옥중에 갑작스러운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홀연히 큰 지진이 생기고,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고, 죄수들의 쇠고랑이 다 벗어졌습니다.
죄수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다 도망할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죄수들이 다 도망했다면 간수는 끝장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했습니다. 간수가 만난 위기입니다. 만일 자결했더라면 그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 순간입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그 때 간수가 어찌했습니까 29절을 보면 "등불을 달라"하더니 살펴보았을 때 죄수들 중에 한 사람도 도망한 사
람이 없었습니다. 간수는 도리어 놀랬고 감탄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서 그는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니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0절을 보면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고 구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이 전한 전도의 말이 무엇입니까 본문31절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왜 바울이 하고많은 말 가운데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했을까요
첫째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롬3:10을 기억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주홍같이 붉은 죄가 있고, 먹장같이 검은 죄가 있습니다. 신학교 졸업반 때 일인데 졸업반 전원이 서대문 형무소를 탐방했습니다. 저더러 짤막한 메시지를 전하라고 해서 전했는데 그 때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들 힘을 내십시오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허물 집니다. 죄인입니다. 여러분들의 허물은 발각되어서 여기 계시고 우리들의 허물은 아직 발각되지 않아 밖에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오면 모든 죄를 용서함 받습니다. 없었던 평화가 생기고 기쁨이 생겨납니다'이렇게 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바울은 성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죄인 가운데 괴수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주여 나를 떠나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했습니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인생은 아주 없습니다. 총리가 사표 낼 줄을 어찌 알았으며, 장관이 쇠고랑 차고 옥에 갇힐 줄 누가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인생은 다 죄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사자 보다 더 두려운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로부터입니까 인생이 저지른 죄로부터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당초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있는 다음부터서 죽음이 있게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죽음을 앓고 있습니다. 순간 죽어갑니다. 그래서 니체의 말인데 '죽음을 정복하기에는 벌써 늙었다'고 했고, 하이데거의 말인데 '순간 순간 죽어간다. 죽음의 존재자다'고 했습니다. 왜 경찰관이 저토록 고생해야 됩니까 죄 때문입니다. 왜 감옥을 지어야 합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고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매 년 130만 명이 죽어가고, 1분 동안에 24명, 하루 동안에 3만5천명
이 죽어간다는 통계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이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는 무지자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바리새인은 스스로 의롭다고 했습니다. 저마다 인생들이 바리새인을 닮은 것 같습니다. 자기만은 다 깨끗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티는 지적하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고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내가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의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한 사람도 이 자리에 앉을 수 없었을 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찬송이 무엇입니까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늘 즐거이 불러야 될 찬송일 것입니다.
둘째 속죄는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죄인이 의인 될 수 없느니라, 믿음 없이는 누구도 거듭날 수 없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한 사람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될 수 없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천하장사라도 천국에 갈 수 없느니라"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까 백 번을 물어야 합니다. 답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죄 때문입니다. 아니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나의 정욕, 물욕 이러한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찬송이 무엇일까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나의 간증처럼 불러야 될 찬송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네 죄를 담당시키셨느니라"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성경이 또 말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또 네 죄가 멀어졌느니라" 그래서 롬5:1이 우리에게 힘을 돋구어 줍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그런데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한 것
처럼 죄악된 인생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실 분으로 예수님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공자, 석가, 마호멧, 그리고 예수를 4대 성현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인간의 반열 속에 넣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찌 불교의 4월초팔일과 기독교의 12월15일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 죄가 있겠습니까 죄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속량 하실 수 있고 죄인 된 우리 모두는 그 예수님께 죄를 자백할 수 있고 또 그 죄를 용서받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요일1:9이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자백하면 끝납니다. 해결됩니다. 눅15장 탕자비유가 교훈하지 않습니까 그 탕자인데 '돌아오라, 돌아오라' 돌아왔더니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 주고, 그리고는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 입혀 주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겨 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배 풀어 주지 않았습니까 사랑의 회복입니다. 주께로 나아가 허물을 고백하면 다 이렇게 사랑을 받는 다는 말입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 주시는 주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회개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무슨 죄를 회개할까요 우리 맡은 작은 본분을 감당하지 못한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종종 자신에게 묻습니다. '목사이면 다 목사냐'가슴아플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목사가 목사노릇을 잘 해야 목사지'이것이 정답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장로이면 다 장로냐 장로노릇을 해야 장로지, 권사면 다 권사냐 권사노릇을 해야 권사지' 어떤 집사님이 주일성수 하지 않고 등산을 갔습니다. 기분 좋게 '야호'했더니 메아리가 똑 같이 '야호'산울림으로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짓궂게도 시험삼아 한 번 외쳤습니다. '네가 집사냐'그러니까 메아리가 '네가 집사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수 애양원에 가면 문둥병가족들만 있습니다. 믿음 좋은 양재평 장로님이 계신데 그를 만날 때마다 은혜를 받곤 합니다. 그의 간증이 생각나는데 마늘을 캐는 순간에 손 가락하나가 떨어져 나갔대요.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간증입니다. '손가락이 떨어 졌는 대도 전혀 아프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무감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왜 죄를 깨닫지 못합니까 왜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못합니까 어딘가가 심령의 한 부분이 고장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물진 인생들이 고백하지를 아니합니다. 그리고는 여호와 하나님은 모르리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눈을 만든 자가 어찌 보지 아니하시랴, 귀를 만든 자가 어찌 듣지 아니하시랴"고 했습니다. "네 죄가 문지방에 엎드렸느니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모래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안한척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 모래가 흘러가니까 시체가 까맣게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시체가 말합니다. '모세가 나를 죽였습니다'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숨길 허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어찌했습니까 안한 척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닭이 꼬끼오하고 울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대요. 닭 울음소리가 고발이었다는 말입니다. 허물진 인생은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외침이 무엇입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 고백하면 용서함 받고 용서함 받을 때만 희열, 감격이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어떤 기사가 어린아이를 치어 죽게 했습니다. 옥에 들어가 다 값을 치렀습니다. 그런 대도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훗날 기
쁨이 생겨났습니다. 그 부모가 목을 쓸어안고 '다 잊었노라, 용서하노라'했을 때에 기쁨이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나와서 용서함을 받게 될 때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우리 모두가 누려야 됩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울어도 못합니다. 힘써도 못합니다. 참아도 못합니다. ♬믿으면 하겠네♬속죄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세 번째 구원은 예수님만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25절입니다. "밤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가 도덕적 밤중시대요, 정치적 밤중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랑할 만한 애국자는 못되지만 가슴이 아플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밤중에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이 시간 저는 원합니다. 예배하는 성도들 주님의 은혜로 죄악의 쇠고랑이 벗어지고, 질병의 쇠고랑이 벗어지고,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 매인 것들이 다 벗어지는 축복이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기를 만난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요청을 했는데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구원의 방도를 알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처처에서 "선생들아 내가 어찌할꼬"절규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세상이기 때문이고 영혼들마다 목말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생명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문제는 생명문제입니다. 양장점 쇼 윈도우에 서 있는 마네킹을 보십시오. 철 따라 옷을 바꾸어 입습니다. 달마다 새 의상으로 단장합니다. 게다가 유명 메이커 의상이요, 이름난 디자이너가 만든 것들입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그 마네킹을 보면서 '오 행복한 여인이여'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네킹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의 생명을 보장합니까 누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합니까 예수님뿐이십니다. 행4:12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예수님을 누가 만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만날 수 있고,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만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나 같은 것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수가성
여인,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격이 있어서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소경, 귀머거리도 마음을 열면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은 공짜입니다. 직업이 무엇이냐, 신분이 무엇이냐, 나이가 몇 살이냐, 학벌이 어느 정도냐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연쇄 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그 영향 때문에 내 가족이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내 친구가 내 친척이 연달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간수를 보십시오 "선생들아 내가 어찌할꼬"했다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더니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가족적으로 누린 것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본문34절입니다. "크게 기뻐하더라"가족적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가족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러한 기쁨이 생겨납니다. 엄청난 축복을 누립니다. 변화를 받고 이적을 만납니다. 어느 국회의원의 고백입니다. 당선이 되니까 기쁨이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수 백 통의 전화가 오고, 수 십 개의 화분이 날아오고, 전보가 날아오고, 지체없이 방문객이 들락날락하고 그런데 다음 선거에 낙선되었습니다. 그 때는 허전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그 비애, 배신감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방문객이 없고, 화분하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조건적인 기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14:1인데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얼마나 고마우신 분이십니까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우리의 찬송입니다. 일본 또우미 회사 발키노 회장이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일본은 물론 세계의 경제인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가 돈이 없어서 쓰러졌습니까 그가 지정병원이 없고 주치의가 없어서 쓰러졌습니까 이 이야기는 발키노 회장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우리 주변에서도 간암으로 위장 암으로 죽은 사람들이 하나, 둘, 셋 참 많았습니다. 인생의 날은 베틀의 북 보다도 빠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를 너희가 알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교사 된 성도들이여!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급하게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입니다. 전도해야합니다. 전도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지옥 갈 인생이 천국 갑니다. 전도하면 내 믿음이 성장하고 교회가 부흥합니다. 전도하면 가족이 축복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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