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피차 선생 되는 인생
본문
한(漢)나라 6대 황제인 경제(景帝 : 주전 157 141년)는 즉위하자 천하에 널리 어진 선비를 찾다가 산동(山東)에 사는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시인을 등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당시 90세의 고령이었음에도 직언을 잘하는 대쪽같은 선비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사이비 학자들은 원고생을 중상비방(中傷誹謗)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등용을 극력 반대했으나 한나라 황제인 경제(景帝)는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
당시 원고생과 함께 등용된 소장파 학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산동 사람으로 이름을 공손홍(公孫弘)이라고 했습니다. 공손홍은 원고생을 늙은이라고 깔보고 무시했지만 원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손홍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학문의 정도(正道)가 어지러워져서 속설(俗說)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사설(邪說)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데다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란 말을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曲學' 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이 있어서는 안 되네. " 원고생의 말이 끝나자 공손홍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절조를 굽히지 않는 고매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원고생과 같은 눈앞의 거물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공손홍은 당장 지난 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원고생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시작된 말이 곡학아세(曲學阿世)입니다.
여러분 혹시 아십니까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시편(詩篇) 같은 책이 무엇인지...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春秋)와 함께 오경(5經)의 하나인 시경(詩經)입니다. 시경의 시는 교묘한 비유를 사용하여 은연중에 풍자도 하고 경고도 합니다. 특히 춘추시대에는 복잡한 국제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데 이 시경이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전편의 뜻과는 아무 관계없이 형편에 알맞는 한 구절을 골라 쓰는 수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학자들은 시경에 보이는 작품들을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다소 우회적으로 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왜곡하여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어느 한 구절을 뚝 떼어 자기 식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단장취의(斷章取義)라고 합니다.
얼마 전, 이 曲學阿世와 斷章取義가 성(性) 대결을 했습니다. '배운 도둑이 더 무섭다'고 이 말을 몰랐던 우리가 그분들 때문에 알게 되었으니 거기에 보답하는 뜻에서라도 그분들부터 曲學阿世나 斷章取義하지 않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관계 사이에는 언제나 그 관계를 유지할 최소한의 지켜져야 할 선(線)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그 관계를 바르게 하는 어떤 선이 있습니다. 이 선을 무시하면 그 모든 관계가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은 차선을 지켜야 합니다. 그 선을 무시하면 다칩니다. 자동차만이 아니라 나라에도 국경선이 있습니다. 땅, 바다, 하늘에도... 이걸 무시하면 나라가 다칩니다. 그래서 선은 상식입니다. 이 상식을 깨뜨리는 개인과 국가는 더 이상 관계 형성에 동참할 수 없으며 모든 역사에서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산다는 것이 싸움이요 인생의 모든 것이 생존경쟁이라 할지라도, 그 힘이 사용될 때는 이 상식선만은 지켜져야 너도 나도 사는 법입니다. 힘이 있다고, 편리하다고 함부로 이 선을 넘나들면 결국은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나라 안팎으로 정말 살자고 이러는지 죽자고 이러는지 모를 만큼 몰상식한 짓들로 인하여 이 선이 무너지는 소리가 우리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상식선이 무너지면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최소한의 관계유지를 위한 이 선마저 무너진다면 무엇이 우리를 보호할 것인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럼에도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은 그가 선을 넘든 안 넘든 그들 각각이 하나의 본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본의 형태와 수준은 세상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삶의 본질적인 본은 성경 요한 3서 11절에서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 모든 역사에 기록된 인간의 삶은, 반드시 본받아야 할 선한 본과 절대로 본받아서는 안 될 악한 본, 곧 본질적으로는 이 두 가지가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해석이지만 각각의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해서 말한다면, 배우려는 마음을 지닌 자, 곧 '인생이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나는 과연 이대로 살아도 되는가'를 늘 자문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형태로든 접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선생일 수 있다는 말씀이며, 또한 그가 그 이치를 진정으로 깨달았다면 그는 그 자신 또한 남에게 선생이 될 수 있음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모든 인생들이 다른 인생을 향하여 서로 선생이 된다면, 그 선생들 역시 당연히 둘로 구분될 것입니다. '인생이란 저렇게 살아야 하는구나!'라고 하는 삶,
바른 삶이 진정 무엇인지를 타인에게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선생과 '저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구나!'하는 역설적인 깨우침을 제공해주는 부정적인 선생입니다. 예화 1965년 47세로 루마니아의 당 서기장직을 장악한 니콜라이 차우세스쿠는 먼저 국명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1974년부터는 대통령직을 겸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중요기관의 의장직을 독차지하면서 무려 24년 동안이나 일인독재 정치를 펼쳤습니다. 그 기간 동안 자신의 권력에 장애가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제거한 숫자가 무려 2만 명을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가히 가공스런 권력의 폭력이었습니다.
그는 그와 의형제 관계를 맺었던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주석이 자신을 영접하던 주석궁의 엄청난 규모와 위용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그는 수도 부쿠레스티 언덕 위에 김일성 주석궁보다 더 큰 인민궁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단일건물 규모로는 유럽에서 최대 규모의 궁전이었습니다. 인민궁 옆에는 대로를 사이에 두고 부인 엘레나가 사용할 거대한 엘레나 궁을 따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궁전 앞으로 신시가지를 건설하였습니다. 그 공사를 위하여 주위 3Km 이내에 있던, 유적을 포함한 모든 건물을 다 허물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옛 로마제국의 황제가 자신을 위한 신전을 짓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실로 그는 루마니아의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당연한 듯이 즐겼습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그의 권좌는, 1989년 12월에 일어난 민중봉기로 말미암아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지지하기 위한 관제데모에 동원된 민중이 자신을 반대하는 데모대로 돌변하는 것을 현장에서 확인한 차우세스쿠는 아내 엘리나와 함께 황급히 헬리콥터를 타고 부쿠레스티를 빠져 나가려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지지자들이라고 여겼던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현장에서 즉결처형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이 71세, 그가 자신의 심혈과 온 국력을 기울여 건축하던 인민궁이 완공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총살당한 그의 시체는 전 세계에 사진으로 공개되어, 그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지역보안대장의 직함으로, 루마니아가 배출한 세계 올림픽 체조경기의 영웅 코마네치를 성적으로 유린하는 등, 제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 권력을 휘두르며 패륜아의 삶을 살았던 차우세스쿠의 아들 니꾸는 그로부터 몇 년 후, 불과 30대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생을 처절하게 마치고 말았답니다.
그의 가족 중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정신 차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말로가 그처럼 비참하지는 않았을텐데, 다들 똑같이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다가 가장 처절하게 망해버린 차우세스쿠 일가 역시, 절대로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이 시대의 부정적인 선생입니다.
본문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결코 추구해서는 안 될 삶이 무엇인지를 거울처럼 확연하게 비추어주는 또 하나의 부정적인 선생을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투옥된 베드로가 참수형을 당하기 전날 밤, 주님께서는 요새와도 같이 삼엄한 경비의 감옥으로부터 베드로를 구해 내셨습니다. 날이 새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헤롯 아그립바, 그는 철저히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적 계산으로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가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에 대해 그 자신도 우려를 했고 특히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주문이 빗발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사도 야고보를 처형했습니다. 야고보가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를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로마 사람들의 사고방식대로 정치적으로 필요하니까 죽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세상은 아무 소리 안 합니다. 오히려 주류인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대대적으로 환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베드로마저 죽이려고 했는데 본문 말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풀어나게 하셨습니다. 물론 또 다시 베드로를 잡아 가두어 처형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전시효과적 효력을 잃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그만 두어 버립니다. 그리고 대신 무고한 간수들을 죽이고 맙니다. 그는 '왜 이렇게 되었으며 과연 잘못이 어디에 있느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철저히 정치적이며, 철저히 전시효과적인 생각밖에는 없는 인물입니다.
아마 권력을 쥐게 되면 사람이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는가 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재판관이 생각하기를,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눅 18:4-5). "
여호와 하나님도, 사람도 안 두려운데 뭐가 번거롭고 뭐가 괴롭다는 말입니까 이 과부가 늘 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부르짖는 그 일로 인해 상부 기관에서 자신을 향한 감찰의 눈이 두렵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권력과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과부의 원한을 해결해 주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옳고 그름이나 왜 이럴까 하는 문제는 안 중에 없습니다. 다만 정치적이고 전시효과적인 사고일 뿐입니다.
그런 헤롯에 대하여 오늘의 본문 20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 지중해 북쪽 연안에 자리잡고 있던 두로와 시돈은 항구를 중심으로 발달한 무역 도시국가인지라, 어쩔 수 없이 식량을 전적으로 인근 이스라엘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두로와 시돈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된 헤롯은 이 지방에 대한 식량공급을 즉각 중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식량난에 봉착한 두로 시돈의 지도자들은, 헤롯 왕궁의 내실집사였던 블라스도를 매수하여 헤롯 왕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던 중 헤롯이 로마황제 글라우디오를 위한 축제에 참여하기 위하려 두로와 시돈에서 가까운 가이샤라에 갑니다. 이 정보는 블라스도를 통해 즉각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마침 이날 헤롯 왕이 의전에 따라 효유(일장연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두로와 시돈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헤롯에게 열광적인 환호를 보냅니다. 저건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라 외치면서 말입니다. 물론 그들은 헤롯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동원된 박수부대인 고로, 그들의 찬사 속에 진실이 담겨 있을 수가 없을 것이지만 헤롯은 자신을 신이라고 칭송하는 그들의 찬사와 환호를 당연한 듯 즐겼습니다.
박수부대를 민심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데, '이게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고 항상 그 권력으로 받는 찬사 속에 익숙해진 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아니, 그 자신이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여호와 하나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했습니다.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이 된 그를 주의 사자가 치매, 그는 충에 먹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역사서에 의하면, 헤롯은 이 날 은실로 짜여진 왕복을 입고 원형극장의 무대 위에 올라가자 그의 은빛 왕복은 태양 아래에서 황홀하게 빛났답니다. 이에 그의 연설이 시작되자 박수부대는 그를 향해 여호와 하나님이라 환호를 보내었고 헤롯은 지극히 만족해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헤롯은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고, 놀란 측근들이 황급히 그를 예루살렘의 왕궁으로 옮겼지만 평소에 정신 못 차리던 인간이 어떻게 그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겠습니까 그는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닷새만에 숨을 거두었고, 그가 죽기도 전에 이미 그의 몸은 썩어 벌레가 일고 있었답니다. 그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으로도 막상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벌레 하나를 막지 못합니다. 본문은 그걸 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치셨기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본문 24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 이 역설적인 대조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헤롯의 인생말로가 한낱 벌레의 며칠간의 식사로 끝난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한 것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던 헤롯의 인생이 그처럼 비참하게 끝난 것은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마침내 그 본때를 보이셨음을 제시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가끔 그러죠 '말씀대로 살아도 뭐가 이루어지기보다는 더 힘든 상황을 맞게 될 때가 많다'고... 그래서 낙심하고 좌절하며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제가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올바른 분별력 속에서 잠시 고난을 참고 끝까지 기도하면 틀림없이 말씀은 흥왕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말씀의 흥왕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목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본때를 보이시는 그 응답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피차에게 서로 선생이 되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오늘 이 시간에 한 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나는 정말 다른 사람에게 어떤 선생입니까 말씀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올바로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선생입니까 아니면 어떤 경우에든 나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가르치는 부정적인 선생입니까 - 나는 모든 일에 의와 불의를 생각합니까 아니면 적당히 정치적으로 전시효과만을 생각합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실수는 시작이 잘못된 것이고, 실패는 결론이 잘못된 것이다. 인생 황혼의 실수는 인생 전부의 실패다. " 그런고로 잠시 실수는 할지라도 실패는 하지 마십시오. 옆에서 누군가 말하면 자신을 돌아보고 곧 바꾸십시오. 오랜 세월을 바꾸지 않고 그렇게 살다보면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고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 됩니다. 그러면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다 옳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인생은 그렇게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시편 1장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
당시 원고생과 함께 등용된 소장파 학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산동 사람으로 이름을 공손홍(公孫弘)이라고 했습니다. 공손홍은 원고생을 늙은이라고 깔보고 무시했지만 원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손홍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학문의 정도(正道)가 어지러워져서 속설(俗說)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사설(邪說)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데다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란 말을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曲學' 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이 있어서는 안 되네. " 원고생의 말이 끝나자 공손홍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절조를 굽히지 않는 고매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원고생과 같은 눈앞의 거물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공손홍은 당장 지난 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원고생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시작된 말이 곡학아세(曲學阿世)입니다.
여러분 혹시 아십니까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시편(詩篇) 같은 책이 무엇인지...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春秋)와 함께 오경(5經)의 하나인 시경(詩經)입니다. 시경의 시는 교묘한 비유를 사용하여 은연중에 풍자도 하고 경고도 합니다. 특히 춘추시대에는 복잡한 국제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데 이 시경이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전편의 뜻과는 아무 관계없이 형편에 알맞는 한 구절을 골라 쓰는 수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학자들은 시경에 보이는 작품들을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다소 우회적으로 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왜곡하여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어느 한 구절을 뚝 떼어 자기 식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단장취의(斷章取義)라고 합니다.
얼마 전, 이 曲學阿世와 斷章取義가 성(性) 대결을 했습니다. '배운 도둑이 더 무섭다'고 이 말을 몰랐던 우리가 그분들 때문에 알게 되었으니 거기에 보답하는 뜻에서라도 그분들부터 曲學阿世나 斷章取義하지 않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관계 사이에는 언제나 그 관계를 유지할 최소한의 지켜져야 할 선(線)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그 관계를 바르게 하는 어떤 선이 있습니다. 이 선을 무시하면 그 모든 관계가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은 차선을 지켜야 합니다. 그 선을 무시하면 다칩니다. 자동차만이 아니라 나라에도 국경선이 있습니다. 땅, 바다, 하늘에도... 이걸 무시하면 나라가 다칩니다. 그래서 선은 상식입니다. 이 상식을 깨뜨리는 개인과 국가는 더 이상 관계 형성에 동참할 수 없으며 모든 역사에서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산다는 것이 싸움이요 인생의 모든 것이 생존경쟁이라 할지라도, 그 힘이 사용될 때는 이 상식선만은 지켜져야 너도 나도 사는 법입니다. 힘이 있다고, 편리하다고 함부로 이 선을 넘나들면 결국은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나라 안팎으로 정말 살자고 이러는지 죽자고 이러는지 모를 만큼 몰상식한 짓들로 인하여 이 선이 무너지는 소리가 우리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상식선이 무너지면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최소한의 관계유지를 위한 이 선마저 무너진다면 무엇이 우리를 보호할 것인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럼에도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은 그가 선을 넘든 안 넘든 그들 각각이 하나의 본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본의 형태와 수준은 세상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삶의 본질적인 본은 성경 요한 3서 11절에서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 모든 역사에 기록된 인간의 삶은, 반드시 본받아야 할 선한 본과 절대로 본받아서는 안 될 악한 본, 곧 본질적으로는 이 두 가지가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해석이지만 각각의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해서 말한다면, 배우려는 마음을 지닌 자, 곧 '인생이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나는 과연 이대로 살아도 되는가'를 늘 자문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형태로든 접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선생일 수 있다는 말씀이며, 또한 그가 그 이치를 진정으로 깨달았다면 그는 그 자신 또한 남에게 선생이 될 수 있음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모든 인생들이 다른 인생을 향하여 서로 선생이 된다면, 그 선생들 역시 당연히 둘로 구분될 것입니다. '인생이란 저렇게 살아야 하는구나!'라고 하는 삶,
바른 삶이 진정 무엇인지를 타인에게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선생과 '저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구나!'하는 역설적인 깨우침을 제공해주는 부정적인 선생입니다. 예화 1965년 47세로 루마니아의 당 서기장직을 장악한 니콜라이 차우세스쿠는 먼저 국명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1974년부터는 대통령직을 겸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중요기관의 의장직을 독차지하면서 무려 24년 동안이나 일인독재 정치를 펼쳤습니다. 그 기간 동안 자신의 권력에 장애가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제거한 숫자가 무려 2만 명을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가히 가공스런 권력의 폭력이었습니다.
그는 그와 의형제 관계를 맺었던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주석이 자신을 영접하던 주석궁의 엄청난 규모와 위용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그는 수도 부쿠레스티 언덕 위에 김일성 주석궁보다 더 큰 인민궁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단일건물 규모로는 유럽에서 최대 규모의 궁전이었습니다. 인민궁 옆에는 대로를 사이에 두고 부인 엘레나가 사용할 거대한 엘레나 궁을 따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궁전 앞으로 신시가지를 건설하였습니다. 그 공사를 위하여 주위 3Km 이내에 있던, 유적을 포함한 모든 건물을 다 허물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옛 로마제국의 황제가 자신을 위한 신전을 짓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실로 그는 루마니아의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당연한 듯이 즐겼습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그의 권좌는, 1989년 12월에 일어난 민중봉기로 말미암아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지지하기 위한 관제데모에 동원된 민중이 자신을 반대하는 데모대로 돌변하는 것을 현장에서 확인한 차우세스쿠는 아내 엘리나와 함께 황급히 헬리콥터를 타고 부쿠레스티를 빠져 나가려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지지자들이라고 여겼던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현장에서 즉결처형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이 71세, 그가 자신의 심혈과 온 국력을 기울여 건축하던 인민궁이 완공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총살당한 그의 시체는 전 세계에 사진으로 공개되어, 그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지역보안대장의 직함으로, 루마니아가 배출한 세계 올림픽 체조경기의 영웅 코마네치를 성적으로 유린하는 등, 제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 권력을 휘두르며 패륜아의 삶을 살았던 차우세스쿠의 아들 니꾸는 그로부터 몇 년 후, 불과 30대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생을 처절하게 마치고 말았답니다.
그의 가족 중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정신 차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말로가 그처럼 비참하지는 않았을텐데, 다들 똑같이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다가 가장 처절하게 망해버린 차우세스쿠 일가 역시, 절대로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이 시대의 부정적인 선생입니다.
본문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결코 추구해서는 안 될 삶이 무엇인지를 거울처럼 확연하게 비추어주는 또 하나의 부정적인 선생을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투옥된 베드로가 참수형을 당하기 전날 밤, 주님께서는 요새와도 같이 삼엄한 경비의 감옥으로부터 베드로를 구해 내셨습니다. 날이 새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헤롯 아그립바, 그는 철저히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적 계산으로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가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에 대해 그 자신도 우려를 했고 특히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주문이 빗발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사도 야고보를 처형했습니다. 야고보가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를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로마 사람들의 사고방식대로 정치적으로 필요하니까 죽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세상은 아무 소리 안 합니다. 오히려 주류인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대대적으로 환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베드로마저 죽이려고 했는데 본문 말씀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풀어나게 하셨습니다. 물론 또 다시 베드로를 잡아 가두어 처형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전시효과적 효력을 잃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에 그만 두어 버립니다. 그리고 대신 무고한 간수들을 죽이고 맙니다. 그는 '왜 이렇게 되었으며 과연 잘못이 어디에 있느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철저히 정치적이며, 철저히 전시효과적인 생각밖에는 없는 인물입니다.
아마 권력을 쥐게 되면 사람이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는가 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재판관이 생각하기를,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눅 18:4-5). "
여호와 하나님도, 사람도 안 두려운데 뭐가 번거롭고 뭐가 괴롭다는 말입니까 이 과부가 늘 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부르짖는 그 일로 인해 상부 기관에서 자신을 향한 감찰의 눈이 두렵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권력과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과부의 원한을 해결해 주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옳고 그름이나 왜 이럴까 하는 문제는 안 중에 없습니다. 다만 정치적이고 전시효과적인 사고일 뿐입니다.
그런 헤롯에 대하여 오늘의 본문 20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 지중해 북쪽 연안에 자리잡고 있던 두로와 시돈은 항구를 중심으로 발달한 무역 도시국가인지라, 어쩔 수 없이 식량을 전적으로 인근 이스라엘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두로와 시돈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된 헤롯은 이 지방에 대한 식량공급을 즉각 중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식량난에 봉착한 두로 시돈의 지도자들은, 헤롯 왕궁의 내실집사였던 블라스도를 매수하여 헤롯 왕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던 중 헤롯이 로마황제 글라우디오를 위한 축제에 참여하기 위하려 두로와 시돈에서 가까운 가이샤라에 갑니다. 이 정보는 블라스도를 통해 즉각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마침 이날 헤롯 왕이 의전에 따라 효유(일장연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두로와 시돈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헤롯에게 열광적인 환호를 보냅니다. 저건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라 외치면서 말입니다. 물론 그들은 헤롯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동원된 박수부대인 고로, 그들의 찬사 속에 진실이 담겨 있을 수가 없을 것이지만 헤롯은 자신을 신이라고 칭송하는 그들의 찬사와 환호를 당연한 듯 즐겼습니다.
박수부대를 민심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데, '이게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고 항상 그 권력으로 받는 찬사 속에 익숙해진 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아니, 그 자신이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여호와 하나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했습니다.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이 된 그를 주의 사자가 치매, 그는 충에 먹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역사서에 의하면, 헤롯은 이 날 은실로 짜여진 왕복을 입고 원형극장의 무대 위에 올라가자 그의 은빛 왕복은 태양 아래에서 황홀하게 빛났답니다. 이에 그의 연설이 시작되자 박수부대는 그를 향해 여호와 하나님이라 환호를 보내었고 헤롯은 지극히 만족해하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헤롯은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고, 놀란 측근들이 황급히 그를 예루살렘의 왕궁으로 옮겼지만 평소에 정신 못 차리던 인간이 어떻게 그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겠습니까 그는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닷새만에 숨을 거두었고, 그가 죽기도 전에 이미 그의 몸은 썩어 벌레가 일고 있었답니다. 그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으로도 막상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벌레 하나를 막지 못합니다. 본문은 그걸 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치셨기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본문 24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 이 역설적인 대조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헤롯의 인생말로가 한낱 벌레의 며칠간의 식사로 끝난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한 것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던 헤롯의 인생이 그처럼 비참하게 끝난 것은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마침내 그 본때를 보이셨음을 제시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가끔 그러죠 '말씀대로 살아도 뭐가 이루어지기보다는 더 힘든 상황을 맞게 될 때가 많다'고... 그래서 낙심하고 좌절하며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제가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올바른 분별력 속에서 잠시 고난을 참고 끝까지 기도하면 틀림없이 말씀은 흥왕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말씀의 흥왕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목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본때를 보이시는 그 응답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피차에게 서로 선생이 되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오늘 이 시간에 한 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나는 정말 다른 사람에게 어떤 선생입니까 말씀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올바로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선생입니까 아니면 어떤 경우에든 나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가르치는 부정적인 선생입니까 - 나는 모든 일에 의와 불의를 생각합니까 아니면 적당히 정치적으로 전시효과만을 생각합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실수는 시작이 잘못된 것이고, 실패는 결론이 잘못된 것이다. 인생 황혼의 실수는 인생 전부의 실패다. " 그런고로 잠시 실수는 할지라도 실패는 하지 마십시오. 옆에서 누군가 말하면 자신을 돌아보고 곧 바꾸십시오. 오랜 세월을 바꾸지 않고 그렇게 살다보면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고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 됩니다. 그러면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다 옳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인생은 그렇게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시편 1장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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