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훈도요 선생
본문
1. 물가에 어머니의 묘소를 쓴 개구리의 이야기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들이 어머니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는데 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에는 못된 행실이 어머니의 마음을 알지 못하게 하더니, 어머니 숨지고 난 다음에는 격한 감정이 어머니의 뜻을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세태를 두고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마 16:2~4
이 말씀은 내가 그 동안 너희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쳐 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일이 얼마나 많은데, 오직 땅의 것만을 찾는 너희들이 어떻게 하늘의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수준의 차이가 너무 크다보니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나마 너희가 이해하기 쉬운 표적을 하나 이야기해 준다면, 그건 요나의 표적뿐이다.
이런 의미가 바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나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줄 것이 없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문제는 마치 아들개구리가 어머니의 마음을 절대 헤아리지 못하는 것처럼,
이 세대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되어야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우매하고 연약에 싸여 있는 인간의 한계일 수도 있겠다.
2. 사람에게 주어진 구원의 길-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그렇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땅의 것만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여호와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2)
이것이 우리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제 더 이상 너희들과 나와의 사이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없다.
모든 사랑의 역경을 견디고 이겨냈으니, 나와 너희들 곧 우리들의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과의 동행이야말로,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는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살려주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요3:16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면서 내미는 그 손을 잡자.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뿌리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그 간절한 손을 잡아야만 한다.
그동안 우리는 왜 여호와 하나님을 거절하고, 부인했었던가. 어째서, 순종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욕심 때문이었지 않은가.
우리들의 불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 들리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세상의 소리가 내게는 더 달콤해 보이지 않았던가.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
라고 고백하고 있다.
3.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문제의 해결책이 있다.
우리의 질병은 여호와께로 돌아갈 때에 치유될 것이며, 우리의 삶의 문제 또한 여호와께로 돌아갈 때에 해결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그런데, 돌아가되 그냥 돌아가서는 안 된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인류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스스로가 죽음에 합당한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의미에서 짐승의 피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와야만 한다.
제가 죽어야 마땅하지만, 저 대신 이렇게 짐승의 생명일지라도 받아 주시고, 제게 용서의 은총을 허락하소서.
죽이고 살리는 권세가 주께 있사오매, 주여, 저를 긍휼히 여기사 구원하여 주소서.
이것이 피의 제사에 담긴 의미요,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마땅하다.
4. 할례의 진정한 의미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러한 자세(진실함)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어리석은 아들 개구리처럼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순종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받아 누리고, 그로 인하여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이르는 복된 신앙인으로 살 것을 바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다.
겉으로는 나를 걱정해 주고 위해 주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시어머니에게 얻어맞는 내 모습을 보면서 쾌재를 부를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는 행위는 그만큼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본문에서 네가 율법을 행하되 율법에 담겨 있는 의미까지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자부심과 더불어 종교적 우월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 앞으로 담대히 뛰쳐나갈 수 있게 했던 근본적인 힘도 어찌 할례도 행하지 않은 이방인이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오고자 하는 자는 할례를 행하고 3대 이상이 함께 생활을 한 경력이 있어야 정식으로 이스라엘의 한 종족이요 동포로 인정을 해 주었을 정도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바로 이 선민의식을 고취시켜 주는 것이 할례였다.
요즈음에는 건강과 청결의 목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할례를 행하고 있으나, 적어도 그 시절에는 할례는 특별한 몇몇 사람들만 행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 특별한 몇몇이 이스라엘백성들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할례는 이스라엘백성으로서의 출발점이며, 율법의 시작이다.
할례는 모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사항이었다.
결국, 오늘 본문 25절에서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다는 말은 쉽게 표현하면, 도루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엇인가 공을 들여서 일을 했지만, 전혀 쓸모없는 일이 되었을 때,
도루묵이다 혹은 말짱황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가.
네가 크게 수고를 하여 할례를 행하였으나,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다면,
할례를 행한 그 마음이나, 수고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반면에,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할지라도, 율법을 지키는 이방인이 있다면, 27절에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
라는 말이 있는데,
의문이라는 것은 글씨로 써진 책, 문서 즉, 율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너희들이
만약, 율법을 어긴다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지도 않고, 할례도 행하지 않은 이방인일지라도 율법을 지키는 입장에서 너희들을 판단한다 즉, 너희들보다 여호와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된다.
할례를 행했다고 해서 거룩해 지는 게 아니고, 율법을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게 아니고, 할례에 담긴 여호와 하나님의 뜻,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를 잘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깨닫는대로 실천하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본문 28,29을 합독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여호와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28~29
5. 무늬의 허점 - 우리의 경계대상
겉모양만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의로운 백성이 아니다.
할례를 행했다고 해서 율법을 다 지킨게 아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신앙인이 아니고, 신령에 있다 즉, 마음속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의 마음이 우러나와야 한다. 무늬만 가지고는 안된다.
털이 새카맣다고 해서 오골계라고 할 수는 없다. 고기와 뼈까지도 새카만 닭이야말로 진짜 오골계인 것처럼, 교회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신앙인이 아니다.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것과 읽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본문 29절 마지막에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여호와 하나님에게서니라
고 되어 있다.
이 말은 그야말로 벌로 들어서는 안될 말이다.
학교 동아리방에 현판이 하나 걸려 있는데, 누가 썼는지 낙관도 없이 굵은 서체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나무에 씌어 있는 글씨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역사 앞에
라는 글씨였다.
비록, 겉모양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하잘 것 없는 현판이지만, 우리는 동아리방을 옮길 때에도 그 현판을 아주 조심스럽게 정중하게 옮겼던 기억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역사 앞에...
우리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가.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여호와 하나님에게서니라.
우리의 열심히 누구를 향한 열심이며, 우리의 종교적 경건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경건인가.
6. 훈도요 선생-우리의 사명
오늘 설교의 제목을 훈도요 선생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롬 2:20
에서 따온 제목이다.
우리는 이제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
과연, 나는 스스로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할례는 어디에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은 내게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리석은 개구리는 비만 오면 개굴개굴,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직 나 홀로 신앙에 심취해서 여호와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나의 열심과 나의 생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는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할 사명을 간직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가 훈도요 선생이 되어야 마땅할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져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의 할례요, 의문과 율법을 넘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는 일이다.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군인이 다 같은 군인이 아니다. 이등병은 전투에 임할 때에 자기 목숨 하나만 지키면 되지만, 장교는 부대원들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 그만큼 책임도 크다. 그렇기에 일반 병이 6주 훈련으로 충분하다면, 장교는 4년 동안 훈련을 받아야 한다.
내 한 영혼 구원받아서 죽어서 천국가면 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신앙의 성숙이라는 훈련의 과정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직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어리석은 자요, 어린 아이와 같은 처지에 있다.
이들을 어찌하든지 교회로 인도하고, 구원에 합당한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한다면, 그러한 영적인 책임의식을 갖추고 있다면, 그런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교회의 중직도 맡을 수 있을 것이며, 맡겨진 책임을 따라 충성하고 헌신하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될 줄로 믿는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다. 부지런히 돈 벌어서 전세금 마련하고, 또 알뜰히 저축해서 15평 아파트 사고, 또 열심히 일해서 25평, 더 뼈 빠지게 일해서 50평 단독주택, 그러다 보니 자식들 결혼시켜야 할 일이 눈앞에 있는지라 또 다시 사람 노릇 제대로 못하면서 안 먹고 안 입고 허리띠를 졸라매서 자식들 결혼시키고 나니 남는 것은 무엇인가.
평생 일하고, 돈 번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더라.
과연,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도 참으로 부지런히 살았다고 칭찬하심직한 인생이겠는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내 평생 살아온 길 뒤를 돌아보니 걸음마다 자욱마다 다 죄 뿐입니다.
내가 너를 믿고 맡긴 사명, 너는 왜 잊어 버렸나.
7. 맺는 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의 할례를 요구하고 계신다.
무늬만 예수믿는 사람인양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배를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한 사람이어야 참다운 훈도요 선생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하신다.
여러분은 스스로의 영적인 수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가.
직분의 문제가 아니다. 직분으로 따진다면, 유대인이라는 것만큼 고귀하고 존경받을 만한 직분이 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도바울은 겉모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정짓고 있다.
도리어, 그럴 듯한 포장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있는 너희를 판단하지 않겠느냐.
네가 높아지겠느냐, 도리어 낮아지리라.
우리는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종으로 부름을 받은 사명자들이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거룩한 사역에 동참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소명에 합당하도록 우리는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지는 신앙의 훈련을 거부하지 말아야 할 때이다.
광야생활을 마칠 즈음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대표자들로 하여금 너희가 들어갈 땅의 그림을 그려오라고 한다.
우리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
고작 물가에 써 놓은 어머니의 무덤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그림이어서야 어찌 말이 되겠는가.
이 세상에 산재해 있는 어리석은 자에게 훈도가 되어야 한다.
아직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그들에게 선생이 되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율법의 초보의 수준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요,
무늬만 신앙인이요, 이 한 목숨 구원받고 천국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고 이 세상을 향하여 훈도요 선생으로 세워짐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한 해가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충만한 복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들이 어머니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는데 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에는 못된 행실이 어머니의 마음을 알지 못하게 하더니, 어머니 숨지고 난 다음에는 격한 감정이 어머니의 뜻을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세태를 두고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마 16:2~4
이 말씀은 내가 그 동안 너희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쳐 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일이 얼마나 많은데, 오직 땅의 것만을 찾는 너희들이 어떻게 하늘의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수준의 차이가 너무 크다보니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나마 너희가 이해하기 쉬운 표적을 하나 이야기해 준다면, 그건 요나의 표적뿐이다.
이런 의미가 바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나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줄 것이 없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문제는 마치 아들개구리가 어머니의 마음을 절대 헤아리지 못하는 것처럼,
이 세대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가 되어야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우매하고 연약에 싸여 있는 인간의 한계일 수도 있겠다.
2. 사람에게 주어진 구원의 길-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그렇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땅의 것만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여호와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2)
이것이 우리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제 더 이상 너희들과 나와의 사이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없다.
모든 사랑의 역경을 견디고 이겨냈으니, 나와 너희들 곧 우리들의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과의 동행이야말로,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는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살려주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요3:16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면서 내미는 그 손을 잡자.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뿌리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그 간절한 손을 잡아야만 한다.
그동안 우리는 왜 여호와 하나님을 거절하고, 부인했었던가. 어째서, 순종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욕심 때문이었지 않은가.
우리들의 불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 들리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세상의 소리가 내게는 더 달콤해 보이지 않았던가.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
라고 고백하고 있다.
3.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문제의 해결책이 있다.
우리의 질병은 여호와께로 돌아갈 때에 치유될 것이며, 우리의 삶의 문제 또한 여호와께로 돌아갈 때에 해결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그런데, 돌아가되 그냥 돌아가서는 안 된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인류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스스로가 죽음에 합당한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의미에서 짐승의 피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와야만 한다.
제가 죽어야 마땅하지만, 저 대신 이렇게 짐승의 생명일지라도 받아 주시고, 제게 용서의 은총을 허락하소서.
죽이고 살리는 권세가 주께 있사오매, 주여, 저를 긍휼히 여기사 구원하여 주소서.
이것이 피의 제사에 담긴 의미요,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마땅하다.
4. 할례의 진정한 의미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러한 자세(진실함)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어리석은 아들 개구리처럼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순종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받아 누리고, 그로 인하여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이르는 복된 신앙인으로 살 것을 바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다.
겉으로는 나를 걱정해 주고 위해 주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시어머니에게 얻어맞는 내 모습을 보면서 쾌재를 부를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는 행위는 그만큼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본문에서 네가 율법을 행하되 율법에 담겨 있는 의미까지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자부심과 더불어 종교적 우월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 앞으로 담대히 뛰쳐나갈 수 있게 했던 근본적인 힘도 어찌 할례도 행하지 않은 이방인이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오고자 하는 자는 할례를 행하고 3대 이상이 함께 생활을 한 경력이 있어야 정식으로 이스라엘의 한 종족이요 동포로 인정을 해 주었을 정도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바로 이 선민의식을 고취시켜 주는 것이 할례였다.
요즈음에는 건강과 청결의 목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할례를 행하고 있으나, 적어도 그 시절에는 할례는 특별한 몇몇 사람들만 행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 특별한 몇몇이 이스라엘백성들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할례는 이스라엘백성으로서의 출발점이며, 율법의 시작이다.
할례는 모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사항이었다.
결국, 오늘 본문 25절에서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다는 말은 쉽게 표현하면, 도루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엇인가 공을 들여서 일을 했지만, 전혀 쓸모없는 일이 되었을 때,
도루묵이다 혹은 말짱황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가.
네가 크게 수고를 하여 할례를 행하였으나,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다면,
할례를 행한 그 마음이나, 수고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반면에,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할지라도, 율법을 지키는 이방인이 있다면, 27절에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
라는 말이 있는데,
의문이라는 것은 글씨로 써진 책, 문서 즉, 율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너희들이
만약, 율법을 어긴다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지도 않고, 할례도 행하지 않은 이방인일지라도 율법을 지키는 입장에서 너희들을 판단한다 즉, 너희들보다 여호와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된다.
할례를 행했다고 해서 거룩해 지는 게 아니고, 율법을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게 아니고, 할례에 담긴 여호와 하나님의 뜻,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를 잘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깨닫는대로 실천하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본문 28,29을 합독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여호와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28~29
5. 무늬의 허점 - 우리의 경계대상
겉모양만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의로운 백성이 아니다.
할례를 행했다고 해서 율법을 다 지킨게 아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신앙인이 아니고, 신령에 있다 즉, 마음속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의 마음이 우러나와야 한다. 무늬만 가지고는 안된다.
털이 새카맣다고 해서 오골계라고 할 수는 없다. 고기와 뼈까지도 새카만 닭이야말로 진짜 오골계인 것처럼, 교회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신앙인이 아니다.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것과 읽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본문 29절 마지막에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여호와 하나님에게서니라
고 되어 있다.
이 말은 그야말로 벌로 들어서는 안될 말이다.
학교 동아리방에 현판이 하나 걸려 있는데, 누가 썼는지 낙관도 없이 굵은 서체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나무에 씌어 있는 글씨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역사 앞에
라는 글씨였다.
비록, 겉모양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하잘 것 없는 현판이지만, 우리는 동아리방을 옮길 때에도 그 현판을 아주 조심스럽게 정중하게 옮겼던 기억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역사 앞에...
우리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가.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여호와 하나님에게서니라.
우리의 열심히 누구를 향한 열심이며, 우리의 종교적 경건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경건인가.
6. 훈도요 선생-우리의 사명
오늘 설교의 제목을 훈도요 선생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롬 2:20
에서 따온 제목이다.
우리는 이제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
과연, 나는 스스로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할례는 어디에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은 내게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리석은 개구리는 비만 오면 개굴개굴,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직 나 홀로 신앙에 심취해서 여호와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나의 열심과 나의 생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는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할 사명을 간직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가 훈도요 선생이 되어야 마땅할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져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의 할례요, 의문과 율법을 넘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는 일이다.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군인이 다 같은 군인이 아니다. 이등병은 전투에 임할 때에 자기 목숨 하나만 지키면 되지만, 장교는 부대원들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 그만큼 책임도 크다. 그렇기에 일반 병이 6주 훈련으로 충분하다면, 장교는 4년 동안 훈련을 받아야 한다.
내 한 영혼 구원받아서 죽어서 천국가면 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신앙의 성숙이라는 훈련의 과정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직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어리석은 자요, 어린 아이와 같은 처지에 있다.
이들을 어찌하든지 교회로 인도하고, 구원에 합당한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한다면, 그러한 영적인 책임의식을 갖추고 있다면, 그런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교회의 중직도 맡을 수 있을 것이며, 맡겨진 책임을 따라 충성하고 헌신하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될 줄로 믿는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다. 부지런히 돈 벌어서 전세금 마련하고, 또 알뜰히 저축해서 15평 아파트 사고, 또 열심히 일해서 25평, 더 뼈 빠지게 일해서 50평 단독주택, 그러다 보니 자식들 결혼시켜야 할 일이 눈앞에 있는지라 또 다시 사람 노릇 제대로 못하면서 안 먹고 안 입고 허리띠를 졸라매서 자식들 결혼시키고 나니 남는 것은 무엇인가.
평생 일하고, 돈 번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더라.
과연,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도 참으로 부지런히 살았다고 칭찬하심직한 인생이겠는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내 평생 살아온 길 뒤를 돌아보니 걸음마다 자욱마다 다 죄 뿐입니다.
내가 너를 믿고 맡긴 사명, 너는 왜 잊어 버렸나.
7. 맺는 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의 할례를 요구하고 계신다.
무늬만 예수믿는 사람인양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배를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한 사람이어야 참다운 훈도요 선생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하신다.
여러분은 스스로의 영적인 수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가.
직분의 문제가 아니다. 직분으로 따진다면, 유대인이라는 것만큼 고귀하고 존경받을 만한 직분이 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도바울은 겉모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정짓고 있다.
도리어, 그럴 듯한 포장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있는 너희를 판단하지 않겠느냐.
네가 높아지겠느냐, 도리어 낮아지리라.
우리는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종으로 부름을 받은 사명자들이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거룩한 사역에 동참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소명에 합당하도록 우리는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지는 신앙의 훈련을 거부하지 말아야 할 때이다.
광야생활을 마칠 즈음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대표자들로 하여금 너희가 들어갈 땅의 그림을 그려오라고 한다.
우리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
고작 물가에 써 놓은 어머니의 무덤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그림이어서야 어찌 말이 되겠는가.
이 세상에 산재해 있는 어리석은 자에게 훈도가 되어야 한다.
아직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그들에게 선생이 되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율법의 초보의 수준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요,
무늬만 신앙인이요, 이 한 목숨 구원받고 천국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고 이 세상을 향하여 훈도요 선생으로 세워짐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한 해가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충만한 복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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