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당신에겐 스승이 있습니까?
본문
지난 15일은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많은 학교가 그 날 하루 방학을 했는데, 그 이유를 알고 저의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선생님들이 학부형들의 촌지를 받지 못하도록 하기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촌지로 인한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없지만,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이렇게까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고, 신뢰가 무너졌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TV나 신문지상을 통해 광주의 어느 고등학교 학생들이 집단으로 선생님을 구타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이런 현실의 풍조가 참으로 염려됩니다.
옛날에는 스승은 아버지와 같다고 했으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않는다고 했습니다. 물론 선생님들 가운데 지탄을 받는 분도 있지만 그러나 더 많은 선생님들이 묵묵히 사도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나 그 가정, 그 사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는데 그가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그의 모든 배움은 정지되는 것입니다. 나는 다 알기 때문에 배울 필요가 없고, 따라서 선생님이 필요없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너무 교만하거나 부패해서 선생님을 배척하는 그 사람, 그 집단은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가정에서 선생님을 어떻게 대접하느냐를 보면 그 가정의 장래를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을 돈 몇푼주고 월급주는 분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왕립초등학교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여왕이 가면 모든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무릎을 끓고 절을 해야 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여왕에게 인사를 한 뒤 여왕께 요청을 했습니다. ‘여왕폐하께서 이제 교실에 들어가실터인데 제가 모자를 쓰고 앞장서서 들어가겠습니다. 여왕폐하는 저의 뒤를 따라 오십시오. 왜냐하면 저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존귀한 분인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여왕폐하보다 더 높으신 분이란 것을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이 높은 모자를 쓰고 앞장서서 걷고, 그 뒤를 여왕이 따라 갔습니다.
여왕의 이러한 자세는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알아서 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육을 하는 선생님들은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그 교육철학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어떤 선생님을 만나 교사로서 가장 보람된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니까 제자들이 스승의 날이나 특별한 날에 찾아와서 감사하다는 말을 할 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슴 아픈것은 이와같은 스승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짓밟지만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선생님 자신들도 문교정책이나 사회인식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인간성을 상실하고, 가장 기본적인 이것이 무너지니까 사회가 뿌리채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말씀을 보면서 성경이 보여주는 훌륭한 스승과 제자의 상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성경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종자, 수종자, 시종이라고합니다(출24:13, 33:11, 수1:1). 한마디로 즉 종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제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표보면
①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갈 때, 회막에 있을 때, 심지어 전쟁터에서도 함께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스승인 모세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②명령에 복종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에 따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선봉장이 됩니다(출17:9~10). 목숨을 담보로하는 전쟁터에까지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따랐습니다.
③스승의 사역을 계승했습니다.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안수했습니다(신34:9). 그결과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히 임하고 백성들이 모세의 명령에 따라 여호수아에게 순종했습니다. 안수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것을 너에게 전달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함께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사역을 계승하는 것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인 것입니다.
둘째,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입니다.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를 순종하며 따르는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릅니다. 엘리사가 처음 부름받는 장면을 보면, 12겨리의 소가 밭을 가는 엄청난 부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12번째 겨리의 소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엘리사를 향해 엘리야 선지자는 옷을 던졌습니다. 엘리사는 부름에 순종하여 소를 잡아 나누어 주고, 기구를 불사르고, 기꺼이 선지자를 따랐습니다(왕상19;19~21). 그 모든 부를 다 버리고 기꺼이 엘리야의 종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사의 모습을 보십시오. 길갈에서 벧엘, 그리고 여리고 또 요단,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왔습니다(왕하 2장). 선생님을 그림자처럼 따르고 수행하는 엘리사의 모습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는 엘리사만 선지자와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강을 건넌 후 엘리야는 비로소 지신의 속 마음을 얘기합니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그때 엘리사는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선생님보다 내가 두배나 위대해 지기를 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레위기를 통해 구약의 상속법을 보면 장자에게는 유산을 두배를 물려주는 법이 있습니다. 즉 엘리사의 요구는 스승인 엘리야의 사역을 영적인 장자로서 계승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가시면 누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갰습니까 제가 기꺼이 선생님의 일을 감당하고 고난을 받겠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겠다는 담대한 엘리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엘리야를 부르는 호칭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왕하2:12). 스승인 엘리야 선지자에게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전에 열왕기하 2장 3절을 보면 ‘선지자의 생도들’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선지자의 아들들’이란 말입니다. 즉 어느 선생님의 제자는 그 선생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말씀합니다.
셋째, 바울과 디모데와의 관계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즉 영적인 아버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5절). 그리고 디모데를 향해 “내 아들 디모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7절). 사실 바울과 디모데는 육신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낳아서 기른 영적인 아들이란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처음 등장한 디모데는 그 이후 항상 바울의 그림자가 되어 사역에 동역하며 수종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디모데를 찾고 있습니다(딤후4:9, 21). 사람은 죽을 때 누구나 자기 아들을 찾습니다. 그처럼 바울도 자신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를 마지막으로 찾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끔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선생님이란 ‘나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자신들의 모든 생애를 관장하는 분이란 의미입니다.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을 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좇았고,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마4:19~22). 이처럼 제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주님의 사역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제자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무리가 아니라 소수의 제자들을 양육하셨고, 그 제자들에게 자기 사역을 계승해서 가서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이것은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삼으셨고 또 제자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본질을 얘기하는 것으로, 교회의 모든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능력을 상실하는 것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힘을 상실하고 많은 무리의 모임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확실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들은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승은 목사님, 장로님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성도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철저한 제자가 되어야 철저한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좋은 스승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먼저 내가 예수님의 철저한 제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지도자에게 철저하게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될 때 제자 삼을 수 있고, 그 때스승으로부터 전수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프로그램에는 스승과 제자만 있습니다. 스승이 없는 자는 영적 고아입니다. 육신의 고아들 보십시오. 부모가 없어서, 또는 버림받아서 고아원에 맡겨집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늘 사랑이 부족하고, 훈련받지 못하고 분노의 감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다른 사람들은 후레자식이라며 손가락질 하고 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아버지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아버지로부터 확실한 지도와 양육과 교훈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독수리도 병아리가운데 키우면 병아리처럼 행동합니다. 영적 참 제자는 아비된 스승으로부터 단순히 지식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배우는 것은 그 스승의 삶과 철학을 배우는 것입니다. 많이 배워야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사랑으로 양육하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철저히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왜 진정한 스승이 될 수 없고,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는가 주님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복종이 안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정보와 지식은 인터넷에 더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라면이나 인스턴트 식품으로 간단하고 편하게 한끼 떼우듯이 지식도 이렇게 편리하게 추구할려고 합니다. 길거리 가판대나 식당에서 편하게 사먹듯이 우리 청년들 가운데는 신앙생활도 이렇게 할려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됩니다. 그래서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선생님에게 철저히 배워서 그 선생님의 인격과 삶과 노하우를 배우기 보다 지식만 배울려고 합니다. 참된 지식은 스승과 아버지로부터 전수 받는 것입니다. 스승의 삶과 철학을 전수 받지 못하면 제자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믿는 우리들부터 이렇게 진지하게 배울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무술을 배우기 위해 유명한 사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몇년동안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않고 부엌데기 노릇만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스승이 아침마다 꼭 한마디씩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얘야 물버릴 때 뜨거운 물 그냥 버리지 마라고 식혀서 버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무술은 안 가르쳐 주고 물 버릴 때 잔소리만 하는 선생님께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선생님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는데, 선생님은 또 물을 버릴 때 식혀서 버리라고 같은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뜨거운 물을 그냥 버리면 땅속의 지렁이라든가 벌레가 죽기 때문에 선생님이 그것을 가르쳐 주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그 스승의 철학과 인격을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이렇게 배울려고 합니다. 참 제자는 길거리를 기웃거리다 가판대에서 뽑아먹는 사람이 아니라 아비된 스승의 엑기스를 전수받는 것입니다. 스승의 삶과 사상을 전수 받는 것, 이것이 영적 고아와 영적 자녀와의 차이입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전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전도하는 것과 제자삼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들이 제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재능이 없어서, 지식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주님되심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든 삶을 주님께 헌신하고,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 자세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 제자는 스승의 뜻과 마음을 읽을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배우면서 스승의 마음을 읽을 줄 모릅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합니다. 학교 선생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고 어떻게 자녀들을 맡길 수 있습니까 선생님이 그런 마음가운데서 어떻게 철학이 나오고 삶이 나오겠습니까 우리는 선생님들의 마음을 북돋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철저한 제자가 되어야 하고, 또한 제자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들의 마음, 아비의 마음이 될 때 가능합니다. 스승이 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참된 아버지의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며, 그것은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령충만인 것입니다. 참된 선생님과 참된 제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아버지가 되십시오. 청년도 한 사람을 전도해서 양육하면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옛날에는 스승은 아버지와 같다고 했으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않는다고 했습니다. 물론 선생님들 가운데 지탄을 받는 분도 있지만 그러나 더 많은 선생님들이 묵묵히 사도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나 그 가정, 그 사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는데 그가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그의 모든 배움은 정지되는 것입니다. 나는 다 알기 때문에 배울 필요가 없고, 따라서 선생님이 필요없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너무 교만하거나 부패해서 선생님을 배척하는 그 사람, 그 집단은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가정에서 선생님을 어떻게 대접하느냐를 보면 그 가정의 장래를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을 돈 몇푼주고 월급주는 분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왕립초등학교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여왕이 가면 모든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무릎을 끓고 절을 해야 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여왕에게 인사를 한 뒤 여왕께 요청을 했습니다. ‘여왕폐하께서 이제 교실에 들어가실터인데 제가 모자를 쓰고 앞장서서 들어가겠습니다. 여왕폐하는 저의 뒤를 따라 오십시오. 왜냐하면 저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존귀한 분인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여왕폐하보다 더 높으신 분이란 것을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이 높은 모자를 쓰고 앞장서서 걷고, 그 뒤를 여왕이 따라 갔습니다.
여왕의 이러한 자세는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알아서 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육을 하는 선생님들은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그 교육철학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어떤 선생님을 만나 교사로서 가장 보람된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니까 제자들이 스승의 날이나 특별한 날에 찾아와서 감사하다는 말을 할 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슴 아픈것은 이와같은 스승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짓밟지만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선생님 자신들도 문교정책이나 사회인식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인간성을 상실하고, 가장 기본적인 이것이 무너지니까 사회가 뿌리채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말씀을 보면서 성경이 보여주는 훌륭한 스승과 제자의 상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성경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종자, 수종자, 시종이라고합니다(출24:13, 33:11, 수1:1). 한마디로 즉 종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제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표보면
①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갈 때, 회막에 있을 때, 심지어 전쟁터에서도 함께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스승인 모세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②명령에 복종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에 따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선봉장이 됩니다(출17:9~10). 목숨을 담보로하는 전쟁터에까지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따랐습니다.
③스승의 사역을 계승했습니다.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안수했습니다(신34:9). 그결과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히 임하고 백성들이 모세의 명령에 따라 여호수아에게 순종했습니다. 안수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것을 너에게 전달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함께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사역을 계승하는 것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인 것입니다.
둘째,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입니다.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를 순종하며 따르는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릅니다. 엘리사가 처음 부름받는 장면을 보면, 12겨리의 소가 밭을 가는 엄청난 부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12번째 겨리의 소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엘리사를 향해 엘리야 선지자는 옷을 던졌습니다. 엘리사는 부름에 순종하여 소를 잡아 나누어 주고, 기구를 불사르고, 기꺼이 선지자를 따랐습니다(왕상19;19~21). 그 모든 부를 다 버리고 기꺼이 엘리야의 종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가 승천할 때 엘리사의 모습을 보십시오. 길갈에서 벧엘, 그리고 여리고 또 요단,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왔습니다(왕하 2장). 선생님을 그림자처럼 따르고 수행하는 엘리사의 모습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는 엘리사만 선지자와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강을 건넌 후 엘리야는 비로소 지신의 속 마음을 얘기합니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그때 엘리사는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선생님보다 내가 두배나 위대해 지기를 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레위기를 통해 구약의 상속법을 보면 장자에게는 유산을 두배를 물려주는 법이 있습니다. 즉 엘리사의 요구는 스승인 엘리야의 사역을 영적인 장자로서 계승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가시면 누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갰습니까 제가 기꺼이 선생님의 일을 감당하고 고난을 받겠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겠다는 담대한 엘리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엘리야를 부르는 호칭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왕하2:12). 스승인 엘리야 선지자에게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전에 열왕기하 2장 3절을 보면 ‘선지자의 생도들’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선지자의 아들들’이란 말입니다. 즉 어느 선생님의 제자는 그 선생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말씀합니다.
셋째, 바울과 디모데와의 관계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즉 영적인 아버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5절). 그리고 디모데를 향해 “내 아들 디모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7절). 사실 바울과 디모데는 육신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낳아서 기른 영적인 아들이란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처음 등장한 디모데는 그 이후 항상 바울의 그림자가 되어 사역에 동역하며 수종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디모데를 찾고 있습니다(딤후4:9, 21). 사람은 죽을 때 누구나 자기 아들을 찾습니다. 그처럼 바울도 자신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를 마지막으로 찾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끔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선생님이란 ‘나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자신들의 모든 생애를 관장하는 분이란 의미입니다.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을 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좇았고,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마4:19~22). 이처럼 제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주님의 사역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제자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무리가 아니라 소수의 제자들을 양육하셨고, 그 제자들에게 자기 사역을 계승해서 가서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이것은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삼으셨고 또 제자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본질을 얘기하는 것으로, 교회의 모든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능력을 상실하는 것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힘을 상실하고 많은 무리의 모임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확실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들은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승은 목사님, 장로님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성도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철저한 제자가 되어야 철저한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좋은 스승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먼저 내가 예수님의 철저한 제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지도자에게 철저하게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될 때 제자 삼을 수 있고, 그 때스승으로부터 전수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프로그램에는 스승과 제자만 있습니다. 스승이 없는 자는 영적 고아입니다. 육신의 고아들 보십시오. 부모가 없어서, 또는 버림받아서 고아원에 맡겨집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늘 사랑이 부족하고, 훈련받지 못하고 분노의 감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다른 사람들은 후레자식이라며 손가락질 하고 또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아버지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아버지로부터 확실한 지도와 양육과 교훈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독수리도 병아리가운데 키우면 병아리처럼 행동합니다. 영적 참 제자는 아비된 스승으로부터 단순히 지식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배우는 것은 그 스승의 삶과 철학을 배우는 것입니다. 많이 배워야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사랑으로 양육하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철저히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왜 진정한 스승이 될 수 없고,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는가 주님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복종이 안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정보와 지식은 인터넷에 더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라면이나 인스턴트 식품으로 간단하고 편하게 한끼 떼우듯이 지식도 이렇게 편리하게 추구할려고 합니다. 길거리 가판대나 식당에서 편하게 사먹듯이 우리 청년들 가운데는 신앙생활도 이렇게 할려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됩니다. 그래서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선생님에게 철저히 배워서 그 선생님의 인격과 삶과 노하우를 배우기 보다 지식만 배울려고 합니다. 참된 지식은 스승과 아버지로부터 전수 받는 것입니다. 스승의 삶과 철학을 전수 받지 못하면 제자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믿는 우리들부터 이렇게 진지하게 배울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무술을 배우기 위해 유명한 사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몇년동안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않고 부엌데기 노릇만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스승이 아침마다 꼭 한마디씩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얘야 물버릴 때 뜨거운 물 그냥 버리지 마라고 식혀서 버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무술은 안 가르쳐 주고 물 버릴 때 잔소리만 하는 선생님께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선생님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는데, 선생님은 또 물을 버릴 때 식혀서 버리라고 같은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뜨거운 물을 그냥 버리면 땅속의 지렁이라든가 벌레가 죽기 때문에 선생님이 그것을 가르쳐 주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그 스승의 철학과 인격을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이렇게 배울려고 합니다. 참 제자는 길거리를 기웃거리다 가판대에서 뽑아먹는 사람이 아니라 아비된 스승의 엑기스를 전수받는 것입니다. 스승의 삶과 사상을 전수 받는 것, 이것이 영적 고아와 영적 자녀와의 차이입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전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전도하는 것과 제자삼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들이 제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재능이 없어서, 지식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주님되심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든 삶을 주님께 헌신하고,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 자세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 제자는 스승의 뜻과 마음을 읽을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배우면서 스승의 마음을 읽을 줄 모릅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합니다. 학교 선생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고 어떻게 자녀들을 맡길 수 있습니까 선생님이 그런 마음가운데서 어떻게 철학이 나오고 삶이 나오겠습니까 우리는 선생님들의 마음을 북돋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철저한 제자가 되어야 하고, 또한 제자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들의 마음, 아비의 마음이 될 때 가능합니다. 스승이 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참된 아버지의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며, 그것은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령충만인 것입니다. 참된 선생님과 참된 제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아버지가 되십시오. 청년도 한 사람을 전도해서 양육하면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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