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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아비 같은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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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스승의 날을 즈음하여 교사에 관한 설교를 하려 합니다. 저는 교회학교에서 수고하시는 모든 교사들게 심심한 감사를 드리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회에서 준비한 선물은 없지만, 말씀을 통해 마음에 큰 위로와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기를 만들어서 세상으로 보내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 아기는 세상을 내려보면서 세상에 태어나기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물어보았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러자 그 아기는 세상이 평화와 사랑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고 위험과 전쟁 그리고 다툼으로 가득 찬 것을 볼 때 세상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 네가 외롭고 힘들고 어려울 때 너를 위로하고 감싸주는 천사를 보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 그 첫째 천사는 어머니요 둘째 천사는 선생님이니라. ”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위의 이야기가 전하는 의미가 매우 큽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분은 어머니를 포함한 부모님이요 내 정신세계를 지도하시는 분은 선생님입니다. 마치 천사와 같은 분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어버이날에 이어 다음 주간에 바로 스승의 날이 있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선생님이 이르러야 할 수준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이 일만 스승이라 언급한 바는 이 세상에 선생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스승’이라는 단어로 번역된 파이다고고스(paidagogos)는 갈라디아서에서는 몽학선생으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당시 주로 로마의 지배계층 사람들이 노예나 종들 가운데 똑똑하고 학식이 있는 사람을 골라 자기의 자녀들로 하여금 가르치게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귀족들은 그러한 선생들을 여럿 두곤 했습니다. 그 선생들은 주인의 자녀가 7살 되었을 때부터 18살 될 때까지 학교에 데려다 주고 집에서는 예절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상황에서 그 비슷한 예를 든다면, 군대의 장군이 똑똑한 사병을 자기의 집에 데려다가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게 하는 과외선생과도 같을 것입니다. 물론 주인 혹은 상관의 자녀들을 열심히 가르치기는 하겠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단지 지식을 전하고 예절과 사회적응 능력을 가르치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우선 자녀와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자녀들을 대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가슴에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입니다. 머리가 똑똑해서 좋은 아버지라 일컬음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마음이 따뜻하고 사랑이 넘칠 때 그 사람은 좋은 아버지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꿈을 키워주고 인격을 형성케 할 때 진정한 아버지가 됩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자식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을 집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아버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몽학선생과도 같은 스승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교회학교 아이들을 맡고 있는 분들이 더 많은 줄 압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분들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생명이 충만해 집니다.
최근에 저는 아버지 같은 선생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보여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서 그 제목은 '나를 의지하세요'라는 의미의 Lean on Me입니다. 우리말로 ‘고독한 스승’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실제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됩니다.
미국 뉴저지주 패터슨시의 동부고등학교에서 창의적이고 열성으로 가르치던 죠셉 클락 선생님은 너무 튀는 교육방식 때문에 다른 교사들과 갈등을 겪게 되었고 다른 학교로 옮겨가고 맙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1987년 그 학교는 온통 불량학생, 말썽꾸러기, 문제아 등으로 최하위 학교로 전락하고 맙니다. 학력고사에 75% 학생이 통과되지 못하면 주정부에서 학교를 접수하겠다는 통고가 있자 시장과 시교육감은 클락 선생님께 사정하여 교장으로 임명하고 1년 안에 학교를 살려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는 그 학교에 임직하면서 매우 강한 교육정책을 썼습니다. 먼저 마약을 파는 등 문제학생들을 퇴학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고 정신교육을 시키면서 동시에 공부를 시킵니다. 학부모회에서는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 교장직을 맡았다고 설득하며 지지를 부탁합니다. 한 편으로 강하게 몰아붙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보이고 교사에게 마침내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마침내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어디든지 반대세력을 있는 법입니다. 어느 학부모의 정치적 수완에 의해 소방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어 유치장에 갇히게 됩니다. 이를 바라보던 학생들은 그 소식을 듣고 시청으로 몰려와 데모를 하면서 선생님을 풀어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때 감동적인 모습이 연출됩니다. 클락 선생님을 몰아치는 그 학부모 앞에서 카니샤라는 학생은 “클락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아버지예요!”라고 외칩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그 반대하던 학부모는 할 말을 잃고 맙니다. 마침내 그 학교는 기초학력고사를 통과하면서 클락 선생님은 학생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환호를 받게 됩니다.
동부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을 통해 아버지로서의 거친 사랑의 교육이 학생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바탕을 둔 헌신적인 수고가 가져다준 십대 고등학생들에게 꿈과 소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저 직업적인 선생님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일하고 가르치는 선생님의 모습이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이는 국가적인 상징이 되고 타임지의 첫 장을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건만, 우리는 그러한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하지 못하는 현실에 잠시 쓰디씀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교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학교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오늘날 사회에서는 교사에 대한 평가가 많이 나빠진 것이 사실입니다. 학교는 단지 자신이 좋은 대학교에 가고 입신양명을 위해 거쳐가는 한 기관으로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의 권위와 존경심은 땅에 추락한 상태입니다. 이와 더불어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도 땅에 떨어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오늘 우리도 교회와 교회학교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욱이 교회학교는 자신의 진학이나 입신양명에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한 생각으로 인해 그 존경심과 권위조차 생각하지 않는 상황에 우리는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런 보수없이 오히려 자신의 것을 드려 봉사하는 교사들을 향해 아무런 감사도 없고 오히려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역시 죄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영적 생명과 참 사람으로서의 인격으로 인도하기 위해 힘쓰는 교사들을 향한 존경심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비와 같은 교사가 되기 위하여 가르쳐야 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는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자신은 아비와 같은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은 복음으로 그들을 영적으로 낳은 아버지라 외칩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함으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낳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몸을 내어 놓으셨음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 구원을 위한 희생과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을 전하여야 할 교회교육이요 이것을 전하여야 할 스승입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입니다. 복음에는 지식과 영력이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그것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을 낳을 때 진정한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교사들이 복음으로써 수고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 기쁨으로 아이들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아침 일찍 나와 준비하고 예배하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일요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쉬는 날이요 집안에 못다 한 일을 하는 날이요 야외에 나가 심신을 풀고 싶은 날입니다. 왜 교회학교에서 수고하는 교사들에게도 그러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교사들은 그러한 생각들을 다 잊어버리고 수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믿고 생각하고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더 고된 수고를 하는 날입니다. 그래도 즐거운 날입니다. 기다려지는 날입니다. 기쁨으로 수고하는 날입니다. 자기의 주머니를 털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어도 그저 기쁘기 짝이 없는 날입니다. 자기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이 세상에서는 별로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보상을 바라기에 그저 감사함으로 수고할 뿐입니다. 이 어찌 예수님이 보여주신 희생적인 사랑 없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무지개에 비교하고 싶습니다. 비가 온 후 공중에 떠다니는 물방울들은 해가 비치게 되면 무지개라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햇빛이 공중의 물방울들을 통과하면 그 빛이 분산되어 아름다운 일곱 가지의 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의 모습이 바로 이러합니다. 다 같은 사람이요, 다 같은 교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통해 은혜를 받고 지식으로도 깨닫고 가슴으로도 은혜 받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영적인 무지개를 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을 바라볼 때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존경이 갑니다. 사랑합니다. 그냥 그 사람을 향해 가까이 가고 싶습니다. 보고 또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아름답게 빛나는 그 사람을 통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지개의 아름다운 빛과도 같이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전하는 아비 같은 선생이십니다.
또한 복음으로써 은혜를 받고 빛을 발하며 살아가는 성도들도 이와 같습니다. 나도 그 물방울 가운데 하나가 되어 공중에서 빛을 발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한 사람만이 해서는 안되는 것이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 가는 작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를 통하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년 5월 15일은 스승의 날입니다. 이 즈음에 교회학교 선생님들을 기리면서 큰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들의 권위가 떨어져 오늘날 선생님들이 오히려 스승의 날을 기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 스승의 날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어버이날과도 같이 중요하게 기념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자녀들의 영적 생명을 위해 친부모 못지 않게 수고하며 사랑하는 분들을 기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 모두 이 분들을 기리며 우리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모든 아이들에게 본이 되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모든 선생님들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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