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교사로 부르심
본문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되 꼭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사람들을 들라하면, 첫 번째는 부모요, 두 번째는 배우자요, 세 번째는 선생님이라 합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과 연관해 교회에서 선생님으로 봉사하시는 분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그들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다.
아마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존경하는 선생님을 마음에 품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생각해 보면, 아름답고 친절했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홍옥표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첫 번째 만난 선생님이라 그런지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더 나가서 말을 직설적으로 하셨지만 꼭 필요한 말을 하셨던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김종현 선생님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교회학교 선생님으로는 초등부 때의 박혜영 선생님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한 반대로 제가 중등부 2학년 교사로 봉사할 때 개구쟁이 학생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좋은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은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많은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신앙의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선생님이 많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의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사랑하고 신실한 사람을 교사로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자신이 세운 고린도교회의 일을 다 감당하지 못할 때 그는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디모데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파송된 목회자요 교사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디모데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도 바울의 행사 곧 그가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바로 파송된 목회자요 교사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한 디모데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사랑받는 사람이요 매우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끝까지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들 앞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사람이 아닙니까 또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도 신앙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믿는 그대로 고백하고 행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디모데는 그러한 면에서 사람 앞에서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감옥에 갇히는 등 많은 고난을 당할 때 다른 사람들은 떠났어도 그는 끝까지 바울 곁에 있던 사람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변함없이 신앙을 지켜나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한 목회자요 교사로 파송하고 있습니다.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 바울은 꾸준히 사람을 키우고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불림을 받은 디모데는 바울을 따라다니던 사람에서 파송을 받는 사람으로 성장하였고 마지막에는 사도 바울의 일을 전적으로 맡아 일하는 속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의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정성을 다해 양육했으면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을 키우는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적 전승을 받아 오늘도 노회는 목사를 각 교회에 파송하고 있습니다. 이 정신이 우리 한국장로교회에서는 매우 약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정신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목사는 그 교회에서 많은 교사들을 세우고 파송합니다. 각 교회학교 부서 부서에 파송을 합니다. 그러므로 교사되시는 분들은 물론 자신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분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신실한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요, 이를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복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사람을 키우는 일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더욱이 현대 경영학에 있어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를 들면, 손욱 삼성인력개발원장은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1960년대 경영목표가 무엇(what)을 할 것인가였다면, 1980년대는 어떻게(how)할 것인가였고, 1990년대는 기업 경영의 강조점이 누가(who),할 것인가로 변화했다. 잘 나가는 기업치고 인재경영을 강조하지 않는 기업은 없다. … 세상 흐름이나 기술발전이 현기증 나게 빠르기 때문에 무슨 기술전략을 어떻게 짜기보다 변화에 척척 대응하는 뛰어난 인재를 발굴해 키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 훌륭한 인재를 키우는 일이 어찌 오늘의 문제이기만 하겠습니까
똑같이 교회에서도 사람을 양육하여야 합니다. 다만 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에서 양육할 뿐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훌륭한 백성으로 양육하는 것이지요. 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이끌 수 있는 목자요 교사로 양육하는 일입니다. 이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꼭 감당하여야 할 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뜻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교사의 개념을 좀더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장년이 되면 교회학교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배만 드리고 가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비록 몸은 다 성장하였고 또한 지적인 힘은 왕성하다 하더라도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성장하여야 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주로 목회자를 중심으로 해서 교회가 움직여온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부흥사를 중심으로 교회가 컸습니다. 그리고 지교회에서는 담임목사의 역량 속에서 주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즈음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는 평신도지도자들을 많이 세우는 일입니다. 주일에 모이는 교회에서 주중에 흩어진 교회가 될 때 바로 평신도지도자들이 목자요 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적인 면으로만 교회가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법칙을 보면, 기적과도 같은 사역을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있은 후에는 훈련과 노력을 통해 성장하도록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제가 몇몇 교회 모임에서 언급한 바 우리교회는 목회자로부터 말씀을 듣는 면에서는 아주 좋은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신도를 지도자로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뒤져있다고 사료됩니다. 교회의 앞날을 염려하는 많은 전문가들은 우리 한국교회가 앞으로 계속 존속하고 성장해 나가려면, 성숙된 평신도지도자들을 얼마나 잘 세우느냐에 달려있다고까지 말하곤 합니다.
이러한 점은 아마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예로 비숫한 시기에 있었던 두 목사님의 경우를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의 힐데만 목사님은 설교계의 거물이요 이름난 문필가였습니다. 그 분이 뉴욕제일침례교회에서 목회할 때 전국에서 교인이 제일 많았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 교회는 영광의 뼈대만 남고 주일예배에 200명도 모이지 않는 초라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텍사스주의 달라스제일교회에는 트루엣 목사님이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 역시 설교에 있어서는 둘째라 하면 서운한 분이었습니다. 트루엣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교회도 이제 사그러져 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학교 조직을 통해 말씀 교육을 철저히 하였기 때문에 목사님이 바뀌어도 계속 교세를 유지하며 발전하였습니다. 이같이 개인도 교회도 말씀으로 내린 뿌리가 든든해야 합니다. 바로 모든 사람들을 말씀에 있어 교사와도 같이 키우는 일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평신도를 지도자로 키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전달할 교사로 양육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감당하여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도 이러한 점의 중요성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몇 년의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함께 키워나가야 합니다. 목사는 평신도들의 신앙성숙을 위해 말씀 선포자로 교사로 또한 섬기는 자로 일하여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는 또한 목사를 위해 기도하고 권면하고 도울 뿐만 아니라 같은 평신도를 양육할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분명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는 교사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잘 전하라는 말씀에 담겨져 있지요. 바울이 전하고 가르친 것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훌륭한 교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남겨주신 명령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도 마태복음 28:19에서 자신이 가르친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할 때 거기에는 진정 사명을 다하는 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교사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칩니다. 또한 인격을 키워줍니다. 더 나가서 사회성을 길러줍니다. 하지만 교회의 교사는 영성을 길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도록 인도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능력보다 말이 많아지는 사람은 진정 십자가를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교사가 될 사람도 아니요 평신도 지도자가 될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도 보면 말을 앞세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도 달변가일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걱정되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목소리만 크고 사랑의 능력은 없는 목사가 되지 않을까 매우 염려합니다.
하지만 진정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분들은 말보다는 묵묵히 일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들은 필요한 곳을 찾아 자기가 희생할 것을 감당합니다. 그러면서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묵묵히 일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말보다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죄인인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슬비전도 방법도 택하고 있습니다. 이슬비전도를 통해 우리는 우선 전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들을 양육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엄청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로부터 배우고 또한 누군가를 가르치며 살아갑니다. 배움과 가르침은 우리 인생여정에서 쉬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감사하고 또한 존경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에게 끼치는 은혜입니다. 유안진씨는 ‘잊을 수 없는 말 한 마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인간에게만 있는 귀중한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현재의 자신을 키워 준 은혜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을 안 잊는다는 것이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 여러분, 여러분들을 가르친 선생님들이 있기에 오늘의 여러분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은혜를 항상 소중히 간직하고 사는 것이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길입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못드렸던 선생님께 안부전화라도 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 홀로 성장하고 성숙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영향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우리의 선생님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선생님을 기억하시고 좋은 선생님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상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존경하는 선생님을 마음에 품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생각해 보면, 아름답고 친절했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홍옥표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첫 번째 만난 선생님이라 그런지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더 나가서 말을 직설적으로 하셨지만 꼭 필요한 말을 하셨던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김종현 선생님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교회학교 선생님으로는 초등부 때의 박혜영 선생님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한 반대로 제가 중등부 2학년 교사로 봉사할 때 개구쟁이 학생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좋은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은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많은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신앙의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선생님이 많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의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사랑하고 신실한 사람을 교사로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자신이 세운 고린도교회의 일을 다 감당하지 못할 때 그는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디모데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파송된 목회자요 교사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디모데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도 바울의 행사 곧 그가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바로 파송된 목회자요 교사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한 디모데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사랑받는 사람이요 매우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끝까지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들 앞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사람이 아닙니까 또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도 신앙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믿는 그대로 고백하고 행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디모데는 그러한 면에서 사람 앞에서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감옥에 갇히는 등 많은 고난을 당할 때 다른 사람들은 떠났어도 그는 끝까지 바울 곁에 있던 사람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변함없이 신앙을 지켜나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한 목회자요 교사로 파송하고 있습니다.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 바울은 꾸준히 사람을 키우고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불림을 받은 디모데는 바울을 따라다니던 사람에서 파송을 받는 사람으로 성장하였고 마지막에는 사도 바울의 일을 전적으로 맡아 일하는 속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의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정성을 다해 양육했으면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을 키우는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적 전승을 받아 오늘도 노회는 목사를 각 교회에 파송하고 있습니다. 이 정신이 우리 한국장로교회에서는 매우 약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정신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목사는 그 교회에서 많은 교사들을 세우고 파송합니다. 각 교회학교 부서 부서에 파송을 합니다. 그러므로 교사되시는 분들은 물론 자신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분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신실한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요, 이를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복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사람을 키우는 일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더욱이 현대 경영학에 있어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를 들면, 손욱 삼성인력개발원장은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1960년대 경영목표가 무엇(what)을 할 것인가였다면, 1980년대는 어떻게(how)할 것인가였고, 1990년대는 기업 경영의 강조점이 누가(who),할 것인가로 변화했다. 잘 나가는 기업치고 인재경영을 강조하지 않는 기업은 없다. … 세상 흐름이나 기술발전이 현기증 나게 빠르기 때문에 무슨 기술전략을 어떻게 짜기보다 변화에 척척 대응하는 뛰어난 인재를 발굴해 키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 훌륭한 인재를 키우는 일이 어찌 오늘의 문제이기만 하겠습니까
똑같이 교회에서도 사람을 양육하여야 합니다. 다만 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에서 양육할 뿐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훌륭한 백성으로 양육하는 것이지요. 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이끌 수 있는 목자요 교사로 양육하는 일입니다. 이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꼭 감당하여야 할 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뜻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교사의 개념을 좀더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장년이 되면 교회학교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배만 드리고 가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비록 몸은 다 성장하였고 또한 지적인 힘은 왕성하다 하더라도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성장하여야 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주로 목회자를 중심으로 해서 교회가 움직여온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부흥사를 중심으로 교회가 컸습니다. 그리고 지교회에서는 담임목사의 역량 속에서 주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즈음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는 평신도지도자들을 많이 세우는 일입니다. 주일에 모이는 교회에서 주중에 흩어진 교회가 될 때 바로 평신도지도자들이 목자요 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적인 면으로만 교회가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법칙을 보면, 기적과도 같은 사역을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있은 후에는 훈련과 노력을 통해 성장하도록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제가 몇몇 교회 모임에서 언급한 바 우리교회는 목회자로부터 말씀을 듣는 면에서는 아주 좋은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신도를 지도자로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뒤져있다고 사료됩니다. 교회의 앞날을 염려하는 많은 전문가들은 우리 한국교회가 앞으로 계속 존속하고 성장해 나가려면, 성숙된 평신도지도자들을 얼마나 잘 세우느냐에 달려있다고까지 말하곤 합니다.
이러한 점은 아마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예로 비숫한 시기에 있었던 두 목사님의 경우를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의 힐데만 목사님은 설교계의 거물이요 이름난 문필가였습니다. 그 분이 뉴욕제일침례교회에서 목회할 때 전국에서 교인이 제일 많았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 교회는 영광의 뼈대만 남고 주일예배에 200명도 모이지 않는 초라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텍사스주의 달라스제일교회에는 트루엣 목사님이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 역시 설교에 있어서는 둘째라 하면 서운한 분이었습니다. 트루엣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교회도 이제 사그러져 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학교 조직을 통해 말씀 교육을 철저히 하였기 때문에 목사님이 바뀌어도 계속 교세를 유지하며 발전하였습니다. 이같이 개인도 교회도 말씀으로 내린 뿌리가 든든해야 합니다. 바로 모든 사람들을 말씀에 있어 교사와도 같이 키우는 일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평신도를 지도자로 키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전달할 교사로 양육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감당하여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도 이러한 점의 중요성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몇 년의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함께 키워나가야 합니다. 목사는 평신도들의 신앙성숙을 위해 말씀 선포자로 교사로 또한 섬기는 자로 일하여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는 또한 목사를 위해 기도하고 권면하고 도울 뿐만 아니라 같은 평신도를 양육할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분명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는 교사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잘 전하라는 말씀에 담겨져 있지요. 바울이 전하고 가르친 것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훌륭한 교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남겨주신 명령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도 마태복음 28:19에서 자신이 가르친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할 때 거기에는 진정 사명을 다하는 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교사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칩니다. 또한 인격을 키워줍니다. 더 나가서 사회성을 길러줍니다. 하지만 교회의 교사는 영성을 길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도록 인도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교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능력보다 말이 많아지는 사람은 진정 십자가를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교사가 될 사람도 아니요 평신도 지도자가 될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도 보면 말을 앞세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도 달변가일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걱정되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목소리만 크고 사랑의 능력은 없는 목사가 되지 않을까 매우 염려합니다.
하지만 진정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분들은 말보다는 묵묵히 일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들은 필요한 곳을 찾아 자기가 희생할 것을 감당합니다. 그러면서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묵묵히 일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말보다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죄인인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슬비전도 방법도 택하고 있습니다. 이슬비전도를 통해 우리는 우선 전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들을 양육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엄청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로부터 배우고 또한 누군가를 가르치며 살아갑니다. 배움과 가르침은 우리 인생여정에서 쉬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감사하고 또한 존경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에게 끼치는 은혜입니다. 유안진씨는 ‘잊을 수 없는 말 한 마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인간에게만 있는 귀중한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현재의 자신을 키워 준 은혜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을 안 잊는다는 것이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 여러분, 여러분들을 가르친 선생님들이 있기에 오늘의 여러분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은혜를 항상 소중히 간직하고 사는 것이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길입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못드렸던 선생님께 안부전화라도 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 홀로 성장하고 성숙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영향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우리의 선생님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선생님을 기억하시고 좋은 선생님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상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