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위대한 선생 그리스도
본문
한 젊은이가 좋은 선생님, 위대하신 스승을 만나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도회지에서 찾아 헤매다가 바닷가 어촌에도 가보고 산속 마을에도, 벌판의 농촌에도 가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지친 나머지 젊은이는 나무 밑에 주저앉았습니다.
물끄러미 청년을 바라보던 한 노인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젊은이, 무엇을 찾아 그리 헤매고 다니는 거요” “네, 저를 가르쳐 줄 위대한 스승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때 노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가르쳐 주마. 지금 당장 네 집으로 돌아가거라. 뛰어 나와 나를 맞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가 바로 너의 위대한 스승이란다” 청년이 집에 돌아갔을 때 그 청년을 맞이한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님은 위대한 선생님이십니다. 가정은 최초의 학교요 최고의 학교입니다. 위대한 선생님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가정에 있습니다. 위대한 선생님은 학교에도 있고 좀 자라면 대학에 가서 보면 교수님들도 우리의 선생님입니다.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주일학교 선생도 있고 목사님도 선생님입니다. 광의적인 면에서는 자연과 사건을 통하여 보여주는 갖가지의 멧세지가 있음을 감안하면 우리의 선생은 수도 없이 많은 것입니다. 진정한 위대한 선생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면서 말씀에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스승의 날의 유래
우리 사회가 지키는 스승의 날은 5월 15일입니다. 왜 5월15일을 스승의 날로 지키게 되었을까요 5월15일은 우리 민족 조선시대의 성군(聖君)이셨던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출생일입니다.
세종대왕은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다방면의 재능과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를 펼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고 최고의 문화와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측우기, 해시계 등을 발명하고 제작했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고 훈민정음을 창제했습니다.
우리 민족 최고의 지도자요, 최고의 스승인 세종대왕의 출생일을 ‘스승의 날’ 로 정한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처음에는 1958년에 청소년적십자회라는 청소년동아리에서 사은행사를 시작했는데 1965년부터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해서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위대한 스승은 누구일까를 오늘 생각해 봅시다.
1 위대한 선생님은 예수님입니다.
본문 12절 - 13절,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에 의하면 예수님은 큰 '실패자'였습니다. 그의 탄생은 귀족적이 못되었으므로 실패였습니다. 장차 유명해질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교육을 받는데도 실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등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하셨습니다. 예루살렘 본바탕의 신학도 공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논문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육에 전연 혜택을 받지 못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배운 사람마다 완전한 변화와 놀라운 행복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성질이 아주 급한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셨고 우뢰의 아들 요한을 사랑의 사도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후에 그분에 대해 거대한 분량의 성경책들을 썼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참된 위대한 선생이십니다.
얼마나 많은 인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교훈과 변화와 은혜를 주셨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 진정으로 예수님을 선생으로 모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으로 선생을 삼는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예수 닮은 선생이라면 실망하지 않고 진정으로 교육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위대한 선생은 잘 가르쳐야 한다.
우리 선생님은 참으로 권세 있는 선생님이십니다. 마가복음 1:21,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 예수님은 가르치는 일에 모든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혀를 차리 만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갖게 하신 분입니다.
감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누가 추종하겠습니까 추종을 불허하는 기적적인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비단 말로서도 잘 하시지만 실제적으로 말한 대로 하나가 되는 기적을 이루신 분이기도 합니다. 기적을 행하시면서 신령한 영적인 교훈을 주어 가르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불교의 석가모니의 일화
그는 어느 날 길을 지나다가 아들을 잃고 애곡하고 있는 한 부인을 만났습니다. 이 부인은 석가모니를 보고 그에게 눈물을 흘리며 간구 했습니다. "크신 선생님, 죽은 저의 아들을 살려주세요. " "네가 만일 삼대 부자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삼대 동안 한 번도 장사를 치러 보지 아니한 집에 가서 백미 한 되를 구하여 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죽은 아들을 살려 주리라. " 이 부인은 아들을 살릴 욕심에 삼대동안 초상을 한 번도 치르지 않은 집을 찾아서 사흘을 헤맸습니다. 그러나 그런 집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 때 석가모니는 그 부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는 집집마다 임하고 사람마다 당하는 일이니 네 홀로 애통해 할 것이 무엇이냐" 이 말을 듣고 여인은 석가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석가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인 성을 지나가실 때에 한 과부의 독자가 죽어 성 밖으로 나가는 상여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해 하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관 위에 손을 얹고 명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주님의 가르치고자 하였던 사건은 다름 아닌 죽은 자 가운데 인간은 부활을 음영중에 교훈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맹자의 가르침
맹자는 제자를 가르치되 다음의 다섯 가지 방법을 썼다고 합니다.
(1) 제 때에 내리는 비가 초복을 저절로 자라게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 게 감화시키는 법.
(2) 德을 완성하게 하는 법
(3) 재능을 발달시키도록 하는 법.
(4) 물음에 대답해 주는 법.
(5) 스스로 덕을 닦아 나가게 하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치병함
부활후 승천하신 다음에도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예수님의 말씀, 교훈에는 무한한 권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영적인 교훈과 가르침은(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예수님의 말씀은 길을 찾는 교훈이 아니라 길 그 자체이며 진리를 추구하는 교훈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며 생명을 찾는 교훈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권세 있는 교훈입니다. 이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금보다 오히려 더 강력했습니다. 조만식 장로 같은 분들이 있었고, 김익두 목사님, 앞서간 주기철 목사님 같은 위대한 분들은 그의 선생이신 주님에게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를 보면 선생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 당시 신자라고 하면 사람들이 ‘아 그 사람 진실한 사람이다’ 라고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자기가 신자라고 외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질 못하는 형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된 선생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삶에 있어서는 제자가 아니라 자기가 선생이요 자기가 주인이요 자기가 최고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 위대한 선생님은 행동으로 가르친다.
오늘 본문 14절-15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주님은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세족식으로 본을 보여 가르치신 분입니다. 행동으로 옮기신 분입니다. 말하기는 수월하나 행동하기가 그리 수월한 문제는 아닙니다.
선생이면서 제자달의 발을 씻기신다는 것은 하루 종일 다니다 보면 밟을 것 밟지 않을 것을 다 밟은 더러운 발입니다. 자신도 씻기 싫어하는 더러운 발을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긴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당부하시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중세 유럽이 낳은 세계 최고의 위대한 예술가 - 미켈란젤로.
그는 조각을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서른이 되기 전 피에타(Pieta) 다비드(David)상을 조각했습니다. 그가 30대 초반이었을 때 교황 쥴리우스 2세가 바티칸에 있는 시스틴 성당의 천정그림을 그리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30대에 4년 동안이나 교회 천장에 매달려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홉 장면에 등장하는 400명이 넘는 인물들을 그렸습니다.
기력이 쇠진해졌고 시력이 악화되면서 37세 때에 완성했는데 미켈란젤로가 너무 늙어 보여서 친구들이 못 알아 볼 정도였습니다. 친구들이 비아냥거리며 말합니다. “아무도 안보는 천정 그림인데 대충 그려라” 미켈란젤 로는 친구들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안 볼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미켈란젤로는 여호와 하나님 중심으로 작업을 하고 친구들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수 없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 온 것 이 아니라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어 주셨기 때문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보내어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행동으로 선생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였음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선생님을 존경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이 사회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심입니다. 존경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책과 가르침을 소중히 여긴 민족입니다.
“길가다가 넘어져 책과 옷이 더렵혀지면 옷보다는 책부터 먼저 닦아라!
“생활이 어려워서 집에 있는 물건을 팔아서 생활해야 한다면 금 보석 땅을 팔아라. 그러나 마지막까지 팔아서는 안 되는 것은 집안에 있는 책이다”
다른 민족들은 왕국 귀족 사제 무사들을 귀하게 여겼지만 유대인들은 학자(선생)를 존경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모이면 음식점을 세우고, 일본 사람들이 모이면 가게를 만들고, 한국 사람들이 모이면 교회를 세웁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모이면 학교를 세웁니다. 유대인들은 교육을 가장 중요시 하는 민족입니다. 유대인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랍비를 존중히 여깁니다. 예수님도 랍비로 불렸습니다.
랍비라는 말은 ‘위대한 분’, ‘존경할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정치가도 재력가도 군인도 관료도 아니요 랍비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 그런 정신을 가진 민족이 우수한 민족,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됩니다.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하는 마음이 없이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사회가 존경하지 않고 부모가 무시하는 선생님을 아이들이 고마워하고 존경하겠습니까 이 시대 교회 안팎의 선생님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지금 잘해야 좋은 일군이 자랄 수 있습니다.
4. 위대한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라야 합니다.
(요한복음 6:66-69)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데 우리는 대접만 바라고 있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대접받고 칭찬받고 높은 자리에 있고 큰소리치는 위치에 있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베풀고 섬기고 발을 씻기는 나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우리의 선생과 주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보이신 모범을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아이런사이드(IRONSIDE; 1876-1951)의 이야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요, 설교가인 아이런사이드(Ironside) 박사 가 어느 날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청년이 손을 들며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법대로 합시다!” 그 의논하고 있던 사안이 매우 난처하고, 난감했던것이었기에 모두들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의논하는 중에 튀어나온 발언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런사이드 박사는 ‘귀찮으니 그냥 법대로 하면 될 것 아니냐’는 듯이 말하는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보게, 젊은이, 자네는 법대로 하는 것을 원하는가 만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네를 법대로 다루셨다면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어야 합당할 것 같은가” 이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이미 법대로 처분 받은 이들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도 그렇고, 주님의 나라에서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모두 집행유예입니다. 법대로 했다면, 우리는 이미 끝장 난 인생들입니다. 절차와 규칙, 법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나 오로지 매사에 절차와 법만을 따지는 것은 사실상 우리의 목을 조이며,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잃는 행위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매사 법적으로 무엇을 하려하는 생각을 버리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라야 합니다.
법으로 보아서는 벌써 죽어야 했어야 했습니다. 나의 살아있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하였고 살아생전 숨 쉬며 활동할 수 있는 건강주신이가 주님이라면 그분을 존경하고 따르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맺는 말
아버지보다 선생을 구해야 한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반드시 아이들에게 탈무드를 가르친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무 성격이 급하거나 엄격하면 아이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나머지 공부할 마음의 여유도 잃고 만다. 히브리어의 '아버지'라는 말에는 '교사'라는 뜻도 있다. 가톨릭 신부를 영어로 왜 '파더(father)'라고 부르느냐 하면, 이 말이 히브리어의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태 사회에서는 자기 아버지보다 선생님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만일 아버지와 선생님이 함께 감옥에 갇혀 있을 대 두 사람 중 한 사람밖에 구해낼 수 없을 때는 아들은 선생님을 구해야 한다. 그것은 유태인 세계에서는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님들이여! 그리고 교회 학교 교사들이여!
주일학교 학생들은 미래의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마을을 지키는 수백 년 된 상수리나무 거목은 굴러다니는 작은 도토리 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사의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기도하며 열성적으로 하십시오. 미래의 꿈을 일구십시오.
성도님들은 교사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격려하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이 중요합니다.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교사선생님들이 수고하는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협조하고 도와주는 아름다운 경건한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물끄러미 청년을 바라보던 한 노인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젊은이, 무엇을 찾아 그리 헤매고 다니는 거요” “네, 저를 가르쳐 줄 위대한 스승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때 노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가르쳐 주마. 지금 당장 네 집으로 돌아가거라. 뛰어 나와 나를 맞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가 바로 너의 위대한 스승이란다” 청년이 집에 돌아갔을 때 그 청년을 맞이한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님은 위대한 선생님이십니다. 가정은 최초의 학교요 최고의 학교입니다. 위대한 선생님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가정에 있습니다. 위대한 선생님은 학교에도 있고 좀 자라면 대학에 가서 보면 교수님들도 우리의 선생님입니다.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주일학교 선생도 있고 목사님도 선생님입니다. 광의적인 면에서는 자연과 사건을 통하여 보여주는 갖가지의 멧세지가 있음을 감안하면 우리의 선생은 수도 없이 많은 것입니다. 진정한 위대한 선생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면서 말씀에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스승의 날의 유래
우리 사회가 지키는 스승의 날은 5월 15일입니다. 왜 5월15일을 스승의 날로 지키게 되었을까요 5월15일은 우리 민족 조선시대의 성군(聖君)이셨던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출생일입니다.
세종대왕은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다방면의 재능과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를 펼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고 최고의 문화와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측우기, 해시계 등을 발명하고 제작했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고 훈민정음을 창제했습니다.
우리 민족 최고의 지도자요, 최고의 스승인 세종대왕의 출생일을 ‘스승의 날’ 로 정한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처음에는 1958년에 청소년적십자회라는 청소년동아리에서 사은행사를 시작했는데 1965년부터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해서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위대한 스승은 누구일까를 오늘 생각해 봅시다.
1 위대한 선생님은 예수님입니다.
본문 12절 - 13절,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에 의하면 예수님은 큰 '실패자'였습니다. 그의 탄생은 귀족적이 못되었으므로 실패였습니다. 장차 유명해질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교육을 받는데도 실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등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하셨습니다. 예루살렘 본바탕의 신학도 공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논문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육에 전연 혜택을 받지 못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배운 사람마다 완전한 변화와 놀라운 행복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성질이 아주 급한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셨고 우뢰의 아들 요한을 사랑의 사도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후에 그분에 대해 거대한 분량의 성경책들을 썼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참된 위대한 선생이십니다.
얼마나 많은 인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교훈과 변화와 은혜를 주셨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 진정으로 예수님을 선생으로 모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으로 선생을 삼는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예수 닮은 선생이라면 실망하지 않고 진정으로 교육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위대한 선생은 잘 가르쳐야 한다.
우리 선생님은 참으로 권세 있는 선생님이십니다. 마가복음 1:21,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 예수님은 가르치는 일에 모든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혀를 차리 만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갖게 하신 분입니다.
감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누가 추종하겠습니까 추종을 불허하는 기적적인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비단 말로서도 잘 하시지만 실제적으로 말한 대로 하나가 되는 기적을 이루신 분이기도 합니다. 기적을 행하시면서 신령한 영적인 교훈을 주어 가르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불교의 석가모니의 일화
그는 어느 날 길을 지나다가 아들을 잃고 애곡하고 있는 한 부인을 만났습니다. 이 부인은 석가모니를 보고 그에게 눈물을 흘리며 간구 했습니다. "크신 선생님, 죽은 저의 아들을 살려주세요. " "네가 만일 삼대 부자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삼대 동안 한 번도 장사를 치러 보지 아니한 집에 가서 백미 한 되를 구하여 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죽은 아들을 살려 주리라. " 이 부인은 아들을 살릴 욕심에 삼대동안 초상을 한 번도 치르지 않은 집을 찾아서 사흘을 헤맸습니다. 그러나 그런 집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 때 석가모니는 그 부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는 집집마다 임하고 사람마다 당하는 일이니 네 홀로 애통해 할 것이 무엇이냐" 이 말을 듣고 여인은 석가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석가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인 성을 지나가실 때에 한 과부의 독자가 죽어 성 밖으로 나가는 상여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해 하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관 위에 손을 얹고 명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주님의 가르치고자 하였던 사건은 다름 아닌 죽은 자 가운데 인간은 부활을 음영중에 교훈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맹자의 가르침
맹자는 제자를 가르치되 다음의 다섯 가지 방법을 썼다고 합니다.
(1) 제 때에 내리는 비가 초복을 저절로 자라게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 게 감화시키는 법.
(2) 德을 완성하게 하는 법
(3) 재능을 발달시키도록 하는 법.
(4) 물음에 대답해 주는 법.
(5) 스스로 덕을 닦아 나가게 하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치병함
부활후 승천하신 다음에도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예수님의 말씀, 교훈에는 무한한 권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영적인 교훈과 가르침은(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예수님의 말씀은 길을 찾는 교훈이 아니라 길 그 자체이며 진리를 추구하는 교훈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며 생명을 찾는 교훈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권세 있는 교훈입니다. 이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금보다 오히려 더 강력했습니다. 조만식 장로 같은 분들이 있었고, 김익두 목사님, 앞서간 주기철 목사님 같은 위대한 분들은 그의 선생이신 주님에게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를 보면 선생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 당시 신자라고 하면 사람들이 ‘아 그 사람 진실한 사람이다’ 라고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자기가 신자라고 외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질 못하는 형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된 선생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삶에 있어서는 제자가 아니라 자기가 선생이요 자기가 주인이요 자기가 최고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 위대한 선생님은 행동으로 가르친다.
오늘 본문 14절-15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주님은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세족식으로 본을 보여 가르치신 분입니다. 행동으로 옮기신 분입니다. 말하기는 수월하나 행동하기가 그리 수월한 문제는 아닙니다.
선생이면서 제자달의 발을 씻기신다는 것은 하루 종일 다니다 보면 밟을 것 밟지 않을 것을 다 밟은 더러운 발입니다. 자신도 씻기 싫어하는 더러운 발을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긴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당부하시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중세 유럽이 낳은 세계 최고의 위대한 예술가 - 미켈란젤로.
그는 조각을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서른이 되기 전 피에타(Pieta) 다비드(David)상을 조각했습니다. 그가 30대 초반이었을 때 교황 쥴리우스 2세가 바티칸에 있는 시스틴 성당의 천정그림을 그리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30대에 4년 동안이나 교회 천장에 매달려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홉 장면에 등장하는 400명이 넘는 인물들을 그렸습니다.
기력이 쇠진해졌고 시력이 악화되면서 37세 때에 완성했는데 미켈란젤로가 너무 늙어 보여서 친구들이 못 알아 볼 정도였습니다. 친구들이 비아냥거리며 말합니다. “아무도 안보는 천정 그림인데 대충 그려라” 미켈란젤 로는 친구들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안 볼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미켈란젤로는 여호와 하나님 중심으로 작업을 하고 친구들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수 없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 온 것 이 아니라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어 주셨기 때문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보내어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행동으로 선생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였음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선생님을 존경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이 사회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심입니다. 존경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책과 가르침을 소중히 여긴 민족입니다.
“길가다가 넘어져 책과 옷이 더렵혀지면 옷보다는 책부터 먼저 닦아라!
“생활이 어려워서 집에 있는 물건을 팔아서 생활해야 한다면 금 보석 땅을 팔아라. 그러나 마지막까지 팔아서는 안 되는 것은 집안에 있는 책이다”
다른 민족들은 왕국 귀족 사제 무사들을 귀하게 여겼지만 유대인들은 학자(선생)를 존경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모이면 음식점을 세우고, 일본 사람들이 모이면 가게를 만들고, 한국 사람들이 모이면 교회를 세웁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모이면 학교를 세웁니다. 유대인들은 교육을 가장 중요시 하는 민족입니다. 유대인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랍비를 존중히 여깁니다. 예수님도 랍비로 불렸습니다.
랍비라는 말은 ‘위대한 분’, ‘존경할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정치가도 재력가도 군인도 관료도 아니요 랍비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 그런 정신을 가진 민족이 우수한 민족,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됩니다.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하는 마음이 없이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사회가 존경하지 않고 부모가 무시하는 선생님을 아이들이 고마워하고 존경하겠습니까 이 시대 교회 안팎의 선생님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지금 잘해야 좋은 일군이 자랄 수 있습니다.
4. 위대한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라야 합니다.
(요한복음 6:66-69)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데 우리는 대접만 바라고 있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대접받고 칭찬받고 높은 자리에 있고 큰소리치는 위치에 있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베풀고 섬기고 발을 씻기는 나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우리의 선생과 주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보이신 모범을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아이런사이드(IRONSIDE; 1876-1951)의 이야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요, 설교가인 아이런사이드(Ironside) 박사 가 어느 날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청년이 손을 들며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법대로 합시다!” 그 의논하고 있던 사안이 매우 난처하고, 난감했던것이었기에 모두들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의논하는 중에 튀어나온 발언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런사이드 박사는 ‘귀찮으니 그냥 법대로 하면 될 것 아니냐’는 듯이 말하는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보게, 젊은이, 자네는 법대로 하는 것을 원하는가 만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네를 법대로 다루셨다면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어야 합당할 것 같은가” 이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이미 법대로 처분 받은 이들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도 그렇고, 주님의 나라에서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모두 집행유예입니다. 법대로 했다면, 우리는 이미 끝장 난 인생들입니다. 절차와 규칙, 법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나 오로지 매사에 절차와 법만을 따지는 것은 사실상 우리의 목을 조이며,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잃는 행위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매사 법적으로 무엇을 하려하는 생각을 버리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라야 합니다.
법으로 보아서는 벌써 죽어야 했어야 했습니다. 나의 살아있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하였고 살아생전 숨 쉬며 활동할 수 있는 건강주신이가 주님이라면 그분을 존경하고 따르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맺는 말
아버지보다 선생을 구해야 한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반드시 아이들에게 탈무드를 가르친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무 성격이 급하거나 엄격하면 아이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나머지 공부할 마음의 여유도 잃고 만다. 히브리어의 '아버지'라는 말에는 '교사'라는 뜻도 있다. 가톨릭 신부를 영어로 왜 '파더(father)'라고 부르느냐 하면, 이 말이 히브리어의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태 사회에서는 자기 아버지보다 선생님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만일 아버지와 선생님이 함께 감옥에 갇혀 있을 대 두 사람 중 한 사람밖에 구해낼 수 없을 때는 아들은 선생님을 구해야 한다. 그것은 유태인 세계에서는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님들이여! 그리고 교회 학교 교사들이여!
주일학교 학생들은 미래의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마을을 지키는 수백 년 된 상수리나무 거목은 굴러다니는 작은 도토리 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사의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기도하며 열성적으로 하십시오. 미래의 꿈을 일구십시오.
성도님들은 교사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격려하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이 중요합니다.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교사선생님들이 수고하는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협조하고 도와주는 아름다운 경건한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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