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하나님의 사람 교육
본문
오늘은 5월 달에 의례히 있어오는 스승의 주일입니다. 선생임을 기억하고 존경하고 선생님에 대한 관심을 가져보자는 것이 스승 주일의 뜻이기도 합니다.
스승날 제정의 기원
오늘은 가르치는 분들을 한번 다시 생각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가르치는 분을 귀하게 생각하고 존경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키는 스승의 날은 지난 15일이었습니다. 왜 5월15일을 스승의 날로 지키게 되었을까요 5월15일은 우리 민족의 성군이셨던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탄신일입니다.
세종대왕은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다방면의 재능과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를 펼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고 최고의 문화와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측우기, 해시계 등을 발명하고 제작했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고, 훈민정음을 창제했습니다.
우리 민족 최고의 지도자요, 최고의 스승인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처음에는 1958년에 청소년적십자회라는 청소년동아리에서 사은행사를 시작했는데 1965년부터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제정해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오늘우리 교회에서는 어떤 행사는 없지만은 선생님의 존경심을 배양하고 일년에 한번이라도 기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설교로라도 말씀을 증거함이 바람직하다 생각하여 스승의 날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선생님
유태인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반드시 아이들에게 탈무드를 가르친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무 성격이 급하거나 엄격하면 아이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나머지 공부할 마음의 여유도 잃고만다. 히브리어의 '아버지'라는 말에는 '교사'라는 뜻도 있다.
가톨릭 신부를 영어로 왜 '파더(father)'라고 부르느냐 하면, 이 말이 히브리어의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태 사회에서는 자기 아버지보다 선생님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만일 아버지와 선생님이 함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두 사람 중 한 사람밖에 구해낼 수 없을 때는 아들은 선생님을 구해야 한다. 그것은 유태인 세계에서는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생님의 필요를 느끼는 것은 배워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필요로 하는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다. 우리들은 선생님의 필요를 느끼지만 진정 좋은 선생을 만나기는 그리 수월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선생은 많지만 스승을 만나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어떤 선생을 만나느냐에 따라 장래가 좌우됨으로 좋은 선생을 찾지만 요구를 충족할 만한 선생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의 입장에서도 좋은 학생을 만나야 할 터인데 훌륭한 학생도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분이 좋은 선생이다.
사람은 교육에 의해서 사람다워집니다. 교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교육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키워주는 다섯 분의 선생님을 만납니다.
첫 번째는 태어나면서 만나는 부모님이고
두 번째는 교회에서 만나는 주일학교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학교에서 만나는 학교선생님.
네 번째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회선생님이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우리 영혼의 영원한 스승이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한 젊은이가 좋은 선생님, 위대하신 스승을 만나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도회지에서 찾아 헤매다가 바닷가 어촌에도 가보고 산속 마을에도, 벌판의 농촌에도 가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지친 나머지 젊은이는 나무 밑에 주저앉았습니다. 물끄러미 청년을 바라보던 한 노인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젊은이, 무엇을 찾아 그리 헤매고 다니는 거요” “저를 가르쳐 줄 위대한 스승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노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가르쳐 주지 하면서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생을 찾을 것이 아니라 지금 섬기고 있는 선생에게 제자가 먼저 되어 주는 사람만이 참된 선생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을 찾지 말고 선생을 만들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말씀
이 말씀의 내용은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떠나야할 때를 감지하시고 저녁 잡수시던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만찬석상에서 선생으로서 본을 보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생으로 자처하시던 분입니다.
이 예수 선생은 진정한 선생님입니다.
(마23:8-10)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그러면 왜 주님은 자신이 선생이고 다른 사람을 선생으로 인정하지 않았을까
1 선생은 제자를 끝까지 사랑하였습니다.
(요13:1-2)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날 날이 임박한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을날을 아셨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에게 속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순간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가지 죽음이 다가 온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일에 조금도 변함이 없는 선생님입니다.
인간은 순간에 대처하고 분위기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분위기가 바뀌어도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여기에 조금도 변함없이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사랑한 선생이 바로 주님입니다.
세상 남녀공학 총각선생님들이 여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가 있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생은 선생님과 결혼하고 제자와 선생으로서 사랑하는 학생들을 볼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권을 위하여 장래를 위하여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조건이없는 사랑으로 끝까지 살아하는 선생님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가 된 것은 그 십자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장 잘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고대사회에서 원래 악한 죄인을 사형시키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주님께서 그 형틀에서 터무니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한 다음에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3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되심이 확실해 짐으로 십자가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서 사랑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5: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라고 가르치신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눅 6:35절에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 우시니라. "라 하신 말씀도 십자가에서 가장 잘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의 가장 중심구절이 되는 요 3:16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신 말씀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부터서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신 것입니다.
2 선생은 제자에게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요13:4-9)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발을 씻기시는 것은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할 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가 선생에게 해야할 도리입니다. 발을 씻기신다는 것은 피차 섬김의 도리를 보여준 선생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발을 씻기신다는 것은 스스로를 희생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이는 진정한 선생이 되지 못합니다. 학생들은 그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가운데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자신이 희생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알로 범죄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마27).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생명이 없는 인생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대신하여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신 스승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나눠 주신 분입니다. 그 생명은 또한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요1:4).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십니다(요6:35).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생명의 떡을 먹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안에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자는 생명의 주를 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는 생명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 자는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원한 스승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3 선생은 제자들에게 본을 부였습니다.
(요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모본을 보여준 어느 선생 이야기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사회적으로 덕망이 높은 스승을 찾았다. ‘선생님, 아무리 타일러도 아이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빨이 모두 썩었는데도 제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이 애는 선생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듣거든요. ’
스승은 소년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한 달 후에 다시 오너라. ’
스승의 뜻밖의 태도에 소년의 엄마는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원망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한 마디만 해주면 될 텐데 한 달 후에 다시 오라는 이유가 대체 뭘까. 스승님은 매우 지혜로운 분으로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척척 풀어 주시는데 이렇게 사소한 일을 한 달씩이나 미루다니 이해할 수 없어. 한 달 후에 어머니와 아들은 다시 스승을 찾았다. 스승은 말했습니다. ‘한 달 만 더 기다려라!’
소년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또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합니까’
스승은 말했다. ‘글쎄 한 달 만 더 기다리라니까요. 그때 다시 오십시오. ’
다시 한 달 후 모자가 스승을 찾았을 때, 스승은 비로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 ’
소년은 말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 지금부터는 절대로 사탕을 먹지 않겠습니다. ’
소년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사탕을 먹지 말라는 말을 하는데 왜 두 달씩이나 걸려야 했습니까’
스승은 말했습니다. ‘실은 나도 사탕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처음 한 달 동안 사탕을 끊으려 노력해 봤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지요. 그래서 다시 한 달을 연장해서 더 시도해 본 것입니다. 이제 나는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떳떳이 말할 수 있습니다. '소년아, 너는 사탕을 끊을 수 있다. 늙은 나조차 사탕을 끊었는데, 아직 어린 너는 사탕을 끊는 것 말고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
이 이야기는 말보다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이 선생은 제자에게 본을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선생은 본을 보여준다면 이는 진정으로 선생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스승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삶으로써 본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13:1). 유대 사회에서는 주인과 스승이 종의 발을 씻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종들이 주인을 받들어 먼지 묻은 발을 씻기는 일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높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종의 자리로 내려가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섬김 받기 위해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기 위해서 오셨으며 자신의 목숨을 주려고 오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막10:4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된 스승이십니다.
진정한 선생은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본이 되지 않는 선생은 잘못된 선생님입니다. 자신도 바로 되지 못한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면 자신이 행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맺는 말
향학열이 대단합니다. 지난날에 대학들을 가르쳐 우골탑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지난날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절에 시골 부모님께서 많은 어려운 가운데 자녀들을 교육을 할 때 소 팔아 등록금을 댔기 때문에 생겨진 말씀입니다.
지금은도 그 때 보다는 경제적인 면에서 많은 성장이 되어 20000불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등록금도 상승하기 때문에 한 학기에 어떤 학과는 천만 원씩 된다고 합니다. 이 같은 어려운 때에 갈비뼈가 휘리만치 어려운 때가 지금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의 부모님들에 자녀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그 열만은 대단합니다. 좋은 과외선생을 만난다든지 아니면 훌륭한 담임선생을 만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일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선생은 한분이신 그리스도만이 선생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선생을 만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 선생 만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세상 선생들은
① 전인교육을 시키지 못합니다.
② 여호와 하나님 교육을 하지 않습니다.
③ 공동체 훈련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적응하는 교육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 학문만 배울 것이 아닙니다. 배울 것은 영적인 교육을 배워야 합니다.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교육을 시켜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회교육을 한다면 진정한 전인 교육이 될 것입니다. 이 같은 좋은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스승날 제정의 기원
오늘은 가르치는 분들을 한번 다시 생각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가르치는 분을 귀하게 생각하고 존경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키는 스승의 날은 지난 15일이었습니다. 왜 5월15일을 스승의 날로 지키게 되었을까요 5월15일은 우리 민족의 성군이셨던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탄신일입니다.
세종대왕은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다방면의 재능과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를 펼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고 최고의 문화와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측우기, 해시계 등을 발명하고 제작했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고, 훈민정음을 창제했습니다.
우리 민족 최고의 지도자요, 최고의 스승인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처음에는 1958년에 청소년적십자회라는 청소년동아리에서 사은행사를 시작했는데 1965년부터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제정해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오늘우리 교회에서는 어떤 행사는 없지만은 선생님의 존경심을 배양하고 일년에 한번이라도 기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설교로라도 말씀을 증거함이 바람직하다 생각하여 스승의 날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선생님
유태인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반드시 아이들에게 탈무드를 가르친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무 성격이 급하거나 엄격하면 아이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나머지 공부할 마음의 여유도 잃고만다. 히브리어의 '아버지'라는 말에는 '교사'라는 뜻도 있다.
가톨릭 신부를 영어로 왜 '파더(father)'라고 부르느냐 하면, 이 말이 히브리어의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태 사회에서는 자기 아버지보다 선생님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만일 아버지와 선생님이 함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두 사람 중 한 사람밖에 구해낼 수 없을 때는 아들은 선생님을 구해야 한다. 그것은 유태인 세계에서는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생님의 필요를 느끼는 것은 배워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필요로 하는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다. 우리들은 선생님의 필요를 느끼지만 진정 좋은 선생을 만나기는 그리 수월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선생은 많지만 스승을 만나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어떤 선생을 만나느냐에 따라 장래가 좌우됨으로 좋은 선생을 찾지만 요구를 충족할 만한 선생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의 입장에서도 좋은 학생을 만나야 할 터인데 훌륭한 학생도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분이 좋은 선생이다.
사람은 교육에 의해서 사람다워집니다. 교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교육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키워주는 다섯 분의 선생님을 만납니다.
첫 번째는 태어나면서 만나는 부모님이고
두 번째는 교회에서 만나는 주일학교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학교에서 만나는 학교선생님.
네 번째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회선생님이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우리 영혼의 영원한 스승이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한 젊은이가 좋은 선생님, 위대하신 스승을 만나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도회지에서 찾아 헤매다가 바닷가 어촌에도 가보고 산속 마을에도, 벌판의 농촌에도 가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지친 나머지 젊은이는 나무 밑에 주저앉았습니다. 물끄러미 청년을 바라보던 한 노인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젊은이, 무엇을 찾아 그리 헤매고 다니는 거요” “저를 가르쳐 줄 위대한 스승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노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가르쳐 주지 하면서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생을 찾을 것이 아니라 지금 섬기고 있는 선생에게 제자가 먼저 되어 주는 사람만이 참된 선생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을 찾지 말고 선생을 만들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말씀
이 말씀의 내용은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떠나야할 때를 감지하시고 저녁 잡수시던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만찬석상에서 선생으로서 본을 보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생으로 자처하시던 분입니다.
이 예수 선생은 진정한 선생님입니다.
(마23:8-10)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그러면 왜 주님은 자신이 선생이고 다른 사람을 선생으로 인정하지 않았을까
1 선생은 제자를 끝까지 사랑하였습니다.
(요13:1-2)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날 날이 임박한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을날을 아셨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에게 속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순간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가지 죽음이 다가 온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일에 조금도 변함이 없는 선생님입니다.
인간은 순간에 대처하고 분위기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분위기가 바뀌어도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여기에 조금도 변함없이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사랑한 선생이 바로 주님입니다.
세상 남녀공학 총각선생님들이 여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가 있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생은 선생님과 결혼하고 제자와 선생으로서 사랑하는 학생들을 볼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권을 위하여 장래를 위하여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조건이없는 사랑으로 끝까지 살아하는 선생님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가 된 것은 그 십자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장 잘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고대사회에서 원래 악한 죄인을 사형시키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주님께서 그 형틀에서 터무니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한 다음에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3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되심이 확실해 짐으로 십자가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서 사랑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5: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라고 가르치신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눅 6:35절에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 우시니라. "라 하신 말씀도 십자가에서 가장 잘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의 가장 중심구절이 되는 요 3:16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신 말씀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부터서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신 것입니다.
2 선생은 제자에게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요13:4-9)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발을 씻기시는 것은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할 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가 선생에게 해야할 도리입니다. 발을 씻기신다는 것은 피차 섬김의 도리를 보여준 선생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발을 씻기신다는 것은 스스로를 희생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자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이는 진정한 선생이 되지 못합니다. 학생들은 그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가운데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자신이 희생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알의 밀알로 범죄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마27).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생명이 없는 인생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대신하여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신 스승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나눠 주신 분입니다. 그 생명은 또한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요1:4).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십니다(요6:35).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생명의 떡을 먹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안에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자는 생명의 주를 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는 생명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 자는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원한 스승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3 선생은 제자들에게 본을 부였습니다.
(요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모본을 보여준 어느 선생 이야기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사회적으로 덕망이 높은 스승을 찾았다. ‘선생님, 아무리 타일러도 아이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빨이 모두 썩었는데도 제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이 애는 선생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듣거든요. ’
스승은 소년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한 달 후에 다시 오너라. ’
스승의 뜻밖의 태도에 소년의 엄마는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원망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한 마디만 해주면 될 텐데 한 달 후에 다시 오라는 이유가 대체 뭘까. 스승님은 매우 지혜로운 분으로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척척 풀어 주시는데 이렇게 사소한 일을 한 달씩이나 미루다니 이해할 수 없어. 한 달 후에 어머니와 아들은 다시 스승을 찾았다. 스승은 말했습니다. ‘한 달 만 더 기다려라!’
소년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또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합니까’
스승은 말했다. ‘글쎄 한 달 만 더 기다리라니까요. 그때 다시 오십시오. ’
다시 한 달 후 모자가 스승을 찾았을 때, 스승은 비로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 ’
소년은 말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 지금부터는 절대로 사탕을 먹지 않겠습니다. ’
소년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사탕을 먹지 말라는 말을 하는데 왜 두 달씩이나 걸려야 했습니까’
스승은 말했습니다. ‘실은 나도 사탕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처음 한 달 동안 사탕을 끊으려 노력해 봤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지요. 그래서 다시 한 달을 연장해서 더 시도해 본 것입니다. 이제 나는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떳떳이 말할 수 있습니다. '소년아, 너는 사탕을 끊을 수 있다. 늙은 나조차 사탕을 끊었는데, 아직 어린 너는 사탕을 끊는 것 말고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
이 이야기는 말보다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이 선생은 제자에게 본을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선생은 본을 보여준다면 이는 진정으로 선생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스승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삶으로써 본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13:1). 유대 사회에서는 주인과 스승이 종의 발을 씻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종들이 주인을 받들어 먼지 묻은 발을 씻기는 일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높은 위치에도 불구하고 종의 자리로 내려가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섬김 받기 위해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기 위해서 오셨으며 자신의 목숨을 주려고 오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막10:4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된 스승이십니다.
진정한 선생은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본이 되지 않는 선생은 잘못된 선생님입니다. 자신도 바로 되지 못한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면 자신이 행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맺는 말
향학열이 대단합니다. 지난날에 대학들을 가르쳐 우골탑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지난날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절에 시골 부모님께서 많은 어려운 가운데 자녀들을 교육을 할 때 소 팔아 등록금을 댔기 때문에 생겨진 말씀입니다.
지금은도 그 때 보다는 경제적인 면에서 많은 성장이 되어 20000불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등록금도 상승하기 때문에 한 학기에 어떤 학과는 천만 원씩 된다고 합니다. 이 같은 어려운 때에 갈비뼈가 휘리만치 어려운 때가 지금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의 부모님들에 자녀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그 열만은 대단합니다. 좋은 과외선생을 만난다든지 아니면 훌륭한 담임선생을 만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일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선생은 한분이신 그리스도만이 선생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선생을 만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 선생 만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세상 선생들은
① 전인교육을 시키지 못합니다.
② 여호와 하나님 교육을 하지 않습니다.
③ 공동체 훈련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적응하는 교육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 학문만 배울 것이 아닙니다. 배울 것은 영적인 교육을 배워야 합니다.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교육을 시켜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회교육을 한다면 진정한 전인 교육이 될 것입니다. 이 같은 좋은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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