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
본문
이번 주가 스승의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권위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학교 교사의 권위를 그리스도인들이 회복시켜야 합니다. 학교 선생님들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학교보다 학원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학교의 선생님들이 훨씬 훌륭하고 실력이 있는 분들입니다. 만약 학교 선생님들이 과외를 하면 그 분들은 고액과외가 됩니다.
교회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가장 귀한 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의 교사의 직분이 가장 귀한 직분입니다. 저는 교회의 중직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도 함께 나누었지만 바울의 인생을 보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적이 그를 이끌어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전에 유익하게 여기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복음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너무 귀한 복음을 은혜로 받은 자로서 빚진 자의 심정을 갖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복음의 빚을 진 자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값진 복음을 나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죄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때 바울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이 세계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배경이 이렇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선교사로서 1차 전도여행을 갈라디아 지역을 중심으로 전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를 씁니다. 2차 전도여행은 그리스 지역을 중심으로 합니다. 거기에서 데살로니가 전서와 데살로니가 후서를 씁니다. 그리고 3차 전도여행은 에베소지역을 중심으로 3년간 사역을 합니다. 이 기간에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쓰게 되는데, 이제 바울이 보니까 더 이상 복음을 전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로마를 지나 서바나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고린도에서 3개월 있으면서 논문 형식의 편지를 씁니다. 그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할 곳이 없어 새로운 곳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가는 복음전파의 목적이 그를 이끄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인생을 무엇이 이끌어가고 있습니까 인생은 목적이 이끌어가야 합니다. 교회도 목적이 이끌어가야 합니다. 목적이 없는 인생은 비참한 인생입니다. 생명을 던질 수 있는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순교를 앞에 두고 마지막 디모데에세 서신을 쓰면서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무엇이 그의 인생을 이끌고 있습니까 복음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복음에 미친 사람입니다. 그가 미친 것은 정신이 잘못되어 미친 것이 아니라 정신이 온전한데 미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만이 우리의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 인생의 첫 단추입니다. 첫 단추가 어떻게 끼워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다음부터는 아무리 잘 끼워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인생의 첫 단추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태도에서부터 우리의 모든 인생은 빗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알되 여호와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결과를 보십시오. 22절 2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면 사람은 자유할 것 같은데 오히려 우상의 종, 죄의 종으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 속에 있는 것같이, 기차가 레일 위에 있는 것같이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하면 철학을 말하지 않습니까 철학의 도시가 어디입니까 안테네와 고린도 지역을 말합니다. 철학자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1절을 보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외에는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지혜라고 말합니다.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의 지혜와 지식이 많은 곳에 우상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6절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23절을 보면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학문이 깊어지고 과학이 발달되면서 사람들은 기독교의 기적을 부정합니다. 비 과학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컴퓨터를 통해 사주를 보고 궁합을 봅니다. 그들은 오늘의 운세를 봅니다. 그들의 손에는 주술책이나 연금술사 같은 마술적인 책에 빠져듭니다. 점장이를 찾아갑니다. 나무에 소원을 빕니다.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예배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야만이 참 만족을 얻을 수 있는데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여호와 하나님 대용품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면 우상 앞에 절하게 되거나 이단에 빠져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오늘 주님을 예배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할 때에 우상숭배와 연결되어 나오는 것이 성적 타락입니다. 26절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상을 세우는 것은 자기의 욕망인 것입니다. 자기 욕망의 극치가 성적 타락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 로마의 황제는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신이 되니까 마음대로 자기 정욕대로 움직입니다. 많은 여인들을 자기의 성적인 회롱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정욕은 만족이 없습니다. 마침내 동성을 자기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로마의 15명의 황제들 가운데 14명이 동성연애자들이었고 말합니다. 당시에 황제를 신으로 만드는 일에 종사한 사람들이 철학자들이었는데 이들 역시 동성연애자들이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역사학자인 타키투스는 말하기를 로마 황제의 최대의 고민거리는 성병처리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태리를 방문하고 오신 분들의 이야기로는 폼페이를 관람하면서 온몸으로 실감하는 것이 성적 타락의 극치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 이 시대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절대진리를 거부하는 시대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모든 의미의 주인으로 삶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배우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이 주인이 되어 교사를 평가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계 곳곳에서는 우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에 동성애의 문제가 정당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보응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할 때보면 동성애가 가득했습니다. 늙은이고 젊은이고 새로운 남자가 그 동네에 나타나면 떼를 지어 몰려듭니다. 사사시대에도 그렇습니다. 로마시대에도 동성애로 가득했습니다.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28-32절을 보십시오.
모든 부도덕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입니까 29절부터 보면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여호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3장 9-18절
그런데 도덕적인 타락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면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에는 지배하려는 욕구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시론자들 치고 평화주의자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면서 인간은 순종과 섬김보다는 지배와 그로인한 갈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을 보십시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라는 단어와 창세기 4장 7절의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할 때의 소원은 같은 단어입니다. 다른 번역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공동번역에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죄는 지배하려는 욕구가 가득찹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부부간에 주도권을 놓고 매일 치열한 전쟁을 합니다. 뱀과 사람과 갈등을 합니다. 땅과 사람과 갈등을 합니다.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역사가는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은 움직이지 않는 맷돌과 같다고 말합니다. 맷돌이 안보일정도로 천천히 움직여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같이 여기지만 아주 천천히 움직여서 고르게 심판하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불경건이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말하는 것이고, 불의란 이웃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태도는 이웃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낳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쓰여져서 계속적으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에 의해 고통을 당할 것이며, 앞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갈등과 싸움으로 인해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란 본문에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의 내어버려 두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26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28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고삐 풀어진 망아지처럼 날 뛰고 있는 것입니다.
2장 5절 말씀에 보면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보면 죄악이 포화상태에 이름니다. 죄악이 터질 것 같습니다. 노아 시대에 보면 온 땅이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하였다고 말합니다. 땅에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이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물로 심판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시대에는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삶에서 모든 가치가 거꾸로 바뀝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요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도 모르게 되어버립니다. 공허와 혼돈의 세상이 펼쳐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23절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5절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26절 여인들도 순래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들의 근본적인 죄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억누르며 불경건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1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양심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에 사로잡혀 인생을 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장 17절 말씀에 보면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가장 귀한 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의 교사의 직분이 가장 귀한 직분입니다. 저는 교회의 중직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도 함께 나누었지만 바울의 인생을 보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적이 그를 이끌어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전에 유익하게 여기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복음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너무 귀한 복음을 은혜로 받은 자로서 빚진 자의 심정을 갖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복음의 빚을 진 자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값진 복음을 나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죄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때 바울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이 세계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배경이 이렇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선교사로서 1차 전도여행을 갈라디아 지역을 중심으로 전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를 씁니다. 2차 전도여행은 그리스 지역을 중심으로 합니다. 거기에서 데살로니가 전서와 데살로니가 후서를 씁니다. 그리고 3차 전도여행은 에베소지역을 중심으로 3년간 사역을 합니다. 이 기간에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쓰게 되는데, 이제 바울이 보니까 더 이상 복음을 전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로마를 지나 서바나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고린도에서 3개월 있으면서 논문 형식의 편지를 씁니다. 그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할 곳이 없어 새로운 곳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가는 복음전파의 목적이 그를 이끄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인생을 무엇이 이끌어가고 있습니까 인생은 목적이 이끌어가야 합니다. 교회도 목적이 이끌어가야 합니다. 목적이 없는 인생은 비참한 인생입니다. 생명을 던질 수 있는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순교를 앞에 두고 마지막 디모데에세 서신을 쓰면서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무엇이 그의 인생을 이끌고 있습니까 복음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복음에 미친 사람입니다. 그가 미친 것은 정신이 잘못되어 미친 것이 아니라 정신이 온전한데 미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만이 우리의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 인생의 첫 단추입니다. 첫 단추가 어떻게 끼워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다음부터는 아무리 잘 끼워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인생의 첫 단추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태도에서부터 우리의 모든 인생은 빗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알되 여호와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결과를 보십시오. 22절 2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면 사람은 자유할 것 같은데 오히려 우상의 종, 죄의 종으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물고기가 물 속에 있는 것같이, 기차가 레일 위에 있는 것같이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하면 철학을 말하지 않습니까 철학의 도시가 어디입니까 안테네와 고린도 지역을 말합니다. 철학자들로 가득한 곳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1절을 보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외에는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지혜라고 말합니다.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의 지혜와 지식이 많은 곳에 우상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6절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23절을 보면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학문이 깊어지고 과학이 발달되면서 사람들은 기독교의 기적을 부정합니다. 비 과학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컴퓨터를 통해 사주를 보고 궁합을 봅니다. 그들은 오늘의 운세를 봅니다. 그들의 손에는 주술책이나 연금술사 같은 마술적인 책에 빠져듭니다. 점장이를 찾아갑니다. 나무에 소원을 빕니다.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예배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야만이 참 만족을 얻을 수 있는데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여호와 하나님 대용품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면 우상 앞에 절하게 되거나 이단에 빠져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오늘 주님을 예배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할 때에 우상숭배와 연결되어 나오는 것이 성적 타락입니다. 26절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상을 세우는 것은 자기의 욕망인 것입니다. 자기 욕망의 극치가 성적 타락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 로마의 황제는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신이 되니까 마음대로 자기 정욕대로 움직입니다. 많은 여인들을 자기의 성적인 회롱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정욕은 만족이 없습니다. 마침내 동성을 자기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로마의 15명의 황제들 가운데 14명이 동성연애자들이었고 말합니다. 당시에 황제를 신으로 만드는 일에 종사한 사람들이 철학자들이었는데 이들 역시 동성연애자들이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역사학자인 타키투스는 말하기를 로마 황제의 최대의 고민거리는 성병처리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태리를 방문하고 오신 분들의 이야기로는 폼페이를 관람하면서 온몸으로 실감하는 것이 성적 타락의 극치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 이 시대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절대진리를 거부하는 시대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모든 의미의 주인으로 삶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배우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이 주인이 되어 교사를 평가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계 곳곳에서는 우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에 동성애의 문제가 정당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보응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할 때보면 동성애가 가득했습니다. 늙은이고 젊은이고 새로운 남자가 그 동네에 나타나면 떼를 지어 몰려듭니다. 사사시대에도 그렇습니다. 로마시대에도 동성애로 가득했습니다.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28-32절을 보십시오.
모든 부도덕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입니까 29절부터 보면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여호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3장 9-18절
그런데 도덕적인 타락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면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에는 지배하려는 욕구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시론자들 치고 평화주의자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면서 인간은 순종과 섬김보다는 지배와 그로인한 갈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6절을 보십시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라는 단어와 창세기 4장 7절의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할 때의 소원은 같은 단어입니다. 다른 번역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공동번역에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죄는 지배하려는 욕구가 가득찹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부부간에 주도권을 놓고 매일 치열한 전쟁을 합니다. 뱀과 사람과 갈등을 합니다. 땅과 사람과 갈등을 합니다.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역사가는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은 움직이지 않는 맷돌과 같다고 말합니다. 맷돌이 안보일정도로 천천히 움직여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같이 여기지만 아주 천천히 움직여서 고르게 심판하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불경건이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말하는 것이고, 불의란 이웃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태도는 이웃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낳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쓰여져서 계속적으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에 의해 고통을 당할 것이며, 앞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갈등과 싸움으로 인해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란 본문에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의 내어버려 두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26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28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고삐 풀어진 망아지처럼 날 뛰고 있는 것입니다.
2장 5절 말씀에 보면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보면 죄악이 포화상태에 이름니다. 죄악이 터질 것 같습니다. 노아 시대에 보면 온 땅이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하였다고 말합니다. 땅에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이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물로 심판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시대에는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삶에서 모든 가치가 거꾸로 바뀝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요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도 모르게 되어버립니다. 공허와 혼돈의 세상이 펼쳐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23절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5절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26절 여인들도 순래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들의 근본적인 죄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억누르며 불경건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1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양심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에 사로잡혀 인생을 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장 17절 말씀에 보면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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