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스승 사랑과 신앙성장
본문
중국의 문헌인 ’세설신어’에 보면 마융 선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융은 제자들을 초달(楚撻)로 치면서, 초달은 회초리로 종아리를 치는 것을 말하는데, 다른 말로 달초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제자들을 이 초달로 엄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초달 선생이라고도 불렸던 명 사부입니다. 어느 날 제자 하나가 단식을 하더니 끝내 마융 선생이 계시는 쪽을 향해서 큰절을 하는 자세를 하더니 그냥 죽는 겁니다. 머리맡에 유서 한 통을 남겼는데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이 제자가 스승에게 종아리를 호되게 맞고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잠을 잤답니다. 꿈속에서도 화가 난 나머지 스승의 종아리를 원 없이 쳤는데 그만 피가 튀었답니다. 스승은 그림자도 밟지 않는 것이 도리인데 꿈속에서 스승을 때려서 피를 본 것은 스승에 대한 사특한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을 했어요. 잠에서 깬 뒤에 그 사특한 마음에 가책을 가누지 못하고 죽음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유서에 적었답니다.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바로 이런 겁니다. 이런 관계 안에서 지, 덕, 체의 전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스승이란 말은 선생이요, 어른이요, 선배요, 지도자요, 인도자요, 권고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스승이라고 하면 학교에서 지식교육과 인격교육을 가리키는 선생님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서 스승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듯 싶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스승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훌륭한 제자 뒤에는 훌륭한 선생, 스승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스승이 없는 시대라고 자탄하고 있어요. 사실 스승이 없어서 없는 게 아닙니다. 이 사회에는 이름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수많은 스승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저는 스승을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승에 대한 예의는 갖추지 않고 존경하려고는 하지 않고, 의무는 감당하지 않으면서 스승에 대한 권리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은 본인 스스로도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해야하지만, 먼저 배우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스승에게 해야 할 마땅한 도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요 왕립초등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여왕이 가면 모든 사람들은 모자를 벗구요. 무릎을 끓어요. 그리고 절을 해야만 했습니다. 여왕이 학교에 오니까 교장선생님이 여왕에게 예를 갖추어서 인사를 한 뒤에 여왕에게 이런 요청을 합니다. ”여왕께서 이제 교실에 들어가실 텐데 제가 모자를 쓰고 앞장서서 들어가겠습니다. 여왕께서는 저의 뒤를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 아니, 누가 감히 여왕 앞에서 모자를 쓰고 갑니까 교장 선생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존귀한 분인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여왕보다 더 높으신 분이란 것을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 이 이야기를 듣던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렇게 하라구,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옳은 말이잖아요. 여왕도 배우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래서 교장선생님이 높은 모자를 쓰고 앞장서서 걷고 그 뒤를 여왕이 따라 갑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학생들도 놀라고 기자들도 놀랍니다. 여왕의 이러한 자세는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오늘날에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배우는 사람에게 있어서 존경하는 스승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습니다. 대개 잘못되는 학생들의 배후를 보면 그들에게는 이렇다할만한 스승이 없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며 존경할만한 스승이 없기 때문에 스승이 없다고 말을 하는데, 존경할만한 스승이 있어서 존경하는 것은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이 처음에는 선생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선생님과 사귀다가 관계가 좋아져서 존경하게 되는 것이고,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이렇게 검증되고 알려진 이후에는 모르는 사람들도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스승이 이렇궁 저렁궁 말하기 이전에 먼저 존경하고 따라야 하는 겁니다.
저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질 거예요. 학교 다닐 때에 보니까 선생님과의 관계가 좋은 친구들이 공부를 잘해요.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과의 사이가 좋은 것이 아니라 먼저는 관계가 좋아서 공부를 잘하는 거예요. 선생님을 좋아하면 그 선생님 때문에 그 과목이 좋아요. 공부 못하는 친구들은 이걸 몰라요. 그러면서 ”재들은 선생님에게 잘 보여서 공부를 잘한다고, 선생님에게 잘 보여서 선생님이 더 예뻐해 준다고, 점수도 잘 준다고” 그건 잘못 본 거예요. 저는 선생님하고 관계가 좋은 친구들이 공부 못하는 것을 보지도 못했고, 선생님하고 관계가 좋지 않은 친구들이 공부 잘하는 경우도 별로 보지 못했어요. 공부를 못하는 이유가 머리에도 있지만 사실은 선생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5월초에 우리 나라의 어느 출판사에서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어요. 설문 내용이 뭐냐하면 ”특정 과목 선생님이 좋으면, 그 과목도 좋아하게 되는가”라는 물음인데, 38. 4%가 ’매우 그렇다’고 대답했고, 33. 1%가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이걸 합하면 71. 5%의 학생들이 과목 선생님이 좋으면 그 과목도 좋아하는 것으로 조사됐어요. 재미있는 것은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학생은 10. 6%이고, ’매우 그렇지 않다’ 아주 부정적으로 응답한 학생은 2% 밖에 되지 않아요. 흔히 생각하기를 ”빼어난 용모를 갖춘 몸짱, 얼짱 선생님” 과목을 잘할 것 같지만, 그 응답은 예상외로 0. 6%뿐이었다. 우리 나라 학생들이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미래가 밝아요.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에 국어 과목이 좋았어요. 여러분도 잘 알지만 한국 사람들이 국어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국어야 뭐 우리 나라 말인데 공부하고 시험 봅니까 그냥 봐도 되는 거지요. 이러구 공부를 안 하는데 그러니까 점수가 잘 안나오지요. 저도 그랬지요. 적어도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그랬어요. 그런데요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을 잘 만났어요. 담임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그 분이 2년 동안 담임을 하셨어요. 저에게는 복이었지요.
전에도 선생님과의 관계가 좋았지만 이 때는 철이 들어 가지고 선생님이 그냥 좋은 거예요. 선생님이 남자답고 멋지게 생기지도 않았고 몸이 몹시 약했어요. 왜 비오는 날 우산 쓰고 가다가 바람이 불면 날아갈 사람 있지요. 꼭 그러셨어요. 그런 선생님이 무섭기는 얼마나 무섭다구요. 완전히 호랑이 선생님이세요. 얼마나 지독 하시던지요. 저희가 다닐 때에는 자율학습이라는 것을 했는데, 말로만 자율학습이고 타율 학습이지요. 반강제적으로 했으니까요. 요즘은 그렇게는 하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이 유별나셔서 그런지 학생들이 공부를 못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다른 반이 7시 30분까지 학교에 가면 우리 반은 7시까지 와야 돼요. 저녁에는 다른 반이 밤 9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하면 우리 반은 10시까지 공부해야 돼요. 그 덕에 공부를 잘 했지요. 그렇게 유별나셨어요. 그뿐이 아니에요. 학생들이 아침 7시까지 학교에 가야 하면 다른 선생님은 8시쯤 출근하시는데, 그 선생님은 7시에 오시는 거예요. 밤에도 마찬가지예요. 학생들과 같이 그 시간에 책상에 앉아서 소설을 읽으시던지 수필을 읽으시던지 학생들과 같이 공부를 하셔요. 그래서 그 선생님 이름이 이덕진 선생님이셨는데, 별명이 끈덕진 선생님이었습니다. 정말 끈질기셨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이 좋으니까 공부를 하게 됐어요. 참 이상한 일은요, 다른 친구들은 선생님이 싫대요. 아주 보기도 싫대요. 자상하기를 하나 뭐하나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게 없어요. 학생들이 따를 만한 게 없는 분인데, 점수를 후하게 주나요. 대개 깐깐한 분들이 점수가 인색합니다. 그저 한가지 무기라고 하면 얼마나 박식하신 지 수업시간에 분필, chalk만 들고 와요. 그리고는 수업을 하는데 교과서를 다 외우세요. 시면 시, 수필이면 수필, 지금 생각해도 굉장한 실력을 가지신 선생님이세요.
하여튼 많은 학생들이 선생님을 싫어하는데 저는 이상하게 좋더라구요. 그냥 선생님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과 아주 좋은 관계가 되었어요. 그러니 국어 공부를 잘할 수 밖에요. 선생님을 좋아하는 바람에 선생님과의 관계가 좋은 바람에 국어 공부를 잘 했습니다. 국어 점수가 다른 점수보다 좋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그 때에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과목을 좋아하기 전에 그 선생님을 좋아해야 한다는 겁니다. 가르치는 과목이 좋아서 공부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르치는 선생님이 좋아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더욱 많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그 때에 담임선생님이 영어 선생님이었으면 제가 영어 잘했을 겁니다. 요즘처럼 뒤늦게 공부하느라고 고생하지 않을 거예요. 허긴 영어 잘 했으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겠지요. 영어 선생님 안 만난 것이 어찌보면 복이에요. 그러니깐 여러분 만났잖아요.
오늘 성경에는 잘 가르치는 장로들을 존경하라고 합니다. 17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아멘.
이 말씀은 교회공동체가 장로들에게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를 말씀해 주고 있는데, 본문에 나오는 장로는 오늘날 교회에서 호칭되는 장로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장로는 나중에 감독으로 불리다가 오늘날에는 목사의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장로를 목사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오늘 나오는 장로는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치리 장로, Ruling elder이고 다른 하나는 가르치는 장로, Teaching elder입니다. 치리 장로는 교회의 조직, 행정, 성도의 치리를 담당했고, 가르치는 장로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교회의 공동체는 교회의 조직이나 행정을 담당하는 장로들을 존경하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장로들을 두 배나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동일한 장로인데 누구는 존경하고 누구는 배나 존경하고 왜 그래야 하느냐 그 이유는 그들이 장로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역할 때문이었습니다. 치리하는 장로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었고, 가르치는 장로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식 전달이 아닌 생명을 심어주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특별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는 사역은 그 어느 사역보다도 귀중한 일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잘 가르치는 더욱 존경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질서를 위하여 존경하라고 했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의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를 존경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가르치는 자의 손에 내 신앙성장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자와 관계가 좋은 사람은 신앙이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인과 목사와의 관계도 그렇고 선생과 학생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관계가 잘못되면 신앙생활이 게을러지고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게 됩니다. 나중에는 영적으로 침체되어 더 심한 경우에는 교회를 떠나서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자와 관계가 좋으면 신앙생활이 재미있어 집니다. 무슨 설교를 해도 걸리지 않습니다. 다 자기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막히지를 않아요. 절로 은혜가 됩니다. 은혜가 충만해지고 더욱 뜨거워져서 기쁨으로 헌신합니다. 더 나아가 가정과 직장에서의 삶이 즐거워지고 신이 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런 관계가 되면 신앙이 어찌 성장하지 않겠어요 성장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자동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저를 가르쳐 주시는 목사님을 참 좋아했습니다. 목사님들이 저를 좋게만 해 주셨겠어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교회학교 교사를 했는데, 중3 짜리가 해 봐야 그렇지. 못하는 게 더 많지요. 그 때마다 잘 한다고 칭찬도 해주셨지만 때로는 야단도 치셨어요. 목사님은 아주 호되게, 눈물이 쏙 날만큼 야단을 치셨어요. 그래도요 목사님이 나를 위해서 그러시는구나 생각했지, 한번도 내가 미워서 나만 야단하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목사님을 좋아하니까 야단을 아무리 맞아도 영향을 받지 않았어요. 목사님과의 관계가 좋으니까 교회에 가는 것이 기뻤고 목사님이 일을 안 시키나 기다려지고, 하여간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그냥 교회에서 사는 것이 좋았어요. 그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신앙이 쭉쭉 자랐다는 겁니다. 그 때는 그걸 잘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까 내 신앙이 웃자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기를 원하세요 여러분도 어쩔 수가 없어요. 저를 좋아해야 합니다. 저와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간혹 목사가 좋아서 좋은 경우도 있겠지만 좋지 않아도 좋아하셔야 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왜요. 여러분 각자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교만한 이야기가 될까 조심스럽습니다만은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기도 하지만, 제 손에도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열심히 하셔도 신앙이 성장하지만 어느 정도까지 입니다. 그 이상은 여러분에게 설교하는 목사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좋은교회를 다니는 이상 저의 설교를 들으시고 저의 신앙지도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시려면 방법이 없지요. 저를 좋아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이 계신데, 그 목사님의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몰라요. 매 번마다 다른 설교가 아니라 가만 보면 그게 그 설교입니다. 날마다 다른 설교를 하지만 사실은 동일한 설교라는 거 아세요 말은 다르게 하지만 한 사람의 목회 철학에서 나오는 설교이기 때문에 이럴 때는 이렇게 표현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다 똑같은 이야기예요 제 설교라고 다를 것 같아요. 분석해 보면 그게 그거예요.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되라.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의 훈련받아라. 십자가 져라. 그거지 다른 거 있습니까 그 목사님도 동일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구요. 하두 많이 들어서 이제는 설교를 들으면 그 다음 이야기까지 알고 있어요. 그래도요 한번도 눈과 귀를 떼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예화, 똑같이 웃는 이야기를 해도 동일하게 웃습니다.
우리 교인들 보면 가끔씩은 제가 동일한 예화를 드는데, 한번 들었던 것은 웃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지난번에 들었다 이거지요. 그런데 저는 웃어요. 몇 번, 아니 어떤 것은 몇십 번 들었던 이야기인데도 처음 듣는 것처럼 웃습니다. 그 정도로 그 목사님과의 관계가 좋아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제 수준을 뛰어넘어서 그 목사님의 수준에 이른 것 같은 착각을 가질 때가 있어요. 그 정도로 성장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가르치는 자를 처음부터 존경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경하게 되는 단계를 밟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존경하기는 어려워도 사랑하기는 쉽잖아요. 사랑하게 되면 나중에는 존경하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가르치는 자를 사랑하는 방법이 몇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해 주는 겁니다. 가르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이미 내 마음이 그곳에 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가르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면 그를 통하여 전파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더욱 은혜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것하고 기도하지 않고 듣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기도하면 벌써 내 마음이 열려져 있어서 말씀이 기다려지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기다려지지도 않고 말씀을 놓치게 됩니다.
둘째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겁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간단한 선물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설교 들으면서 아멘 아멘하시는데 그것도 입으로 고백하는 겁니다. 예배 끝나고 나면 은혜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기회가 되면 정성이 들어간 조그마한 선물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지난해인가 제가 설교를 끝나고 내려가려고 하는데, 우리 교회는 설교 끝나고 찬양팀이 인도하니까 제가 내려가잖아요. 기도를 마치고 강단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어느 형제가 저를 보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더니 손을 앞으로 쭉 뻗는 거예요. 오늘 설교 잘 했다, 은혜 받았다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좋더라구요.
학기가 끝날 때면 선생님에게 선물을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나라의 문제는 학기가 시작할 때에 선물을 준다는 거지요. 보통 선물이 아니지요. 엄청난 선물,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지요. 어떤 친구들은 학기가 끝나도 입을 씻는데 그거 자신을 위하여 좋지 않아요. 학기가 끝나면 가르쳐주신 선생님에게 답례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저도 제 아이들이 학기가 끝나면 들려보냅니다. 비록 조그마한 것이지만 정성이거든요. 우리 청년들이 학기가 끝나 가는데, 교수님에게 감사의 카드와 함께 조그마한 선물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매 학기마다 그런 정신 가지고 배우면 우리 청년들 괜찮을 것 같아요.
우리 교회 집사님 중에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예쁜 카드와 쵸코렛을 선물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정확히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카드에 이렇게 쓰신 것 같습니다. ”일년 동안 말씀 전하시느니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가족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합니다. ” 그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나오신 후로 한번도 빠짐이 없어요. 해마다 보내주셨어요. 그 카드를 받을 때마다 초코렛을 받을 때마다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너무 감사해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나를 나 되게 가르쳐주고 격려해주고 사랑해주신 스승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나를 도와주고 있는 교우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러한 마음을 표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그들을 존경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권면대로 배나 존경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과의 좋은 관계가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고, 내 신앙 생활을 건강하고 반듯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스승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가르침을 받는 이의 도리이기도 하지만, 나의 삶과 신앙 성장이 스승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셔서 스승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형통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제자가 스승에게 종아리를 호되게 맞고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잠을 잤답니다. 꿈속에서도 화가 난 나머지 스승의 종아리를 원 없이 쳤는데 그만 피가 튀었답니다. 스승은 그림자도 밟지 않는 것이 도리인데 꿈속에서 스승을 때려서 피를 본 것은 스승에 대한 사특한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을 했어요. 잠에서 깬 뒤에 그 사특한 마음에 가책을 가누지 못하고 죽음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유서에 적었답니다.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바로 이런 겁니다. 이런 관계 안에서 지, 덕, 체의 전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스승이란 말은 선생이요, 어른이요, 선배요, 지도자요, 인도자요, 권고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스승이라고 하면 학교에서 지식교육과 인격교육을 가리키는 선생님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서 스승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듯 싶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스승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훌륭한 제자 뒤에는 훌륭한 선생, 스승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스승이 없는 시대라고 자탄하고 있어요. 사실 스승이 없어서 없는 게 아닙니다. 이 사회에는 이름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수많은 스승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저는 스승을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승에 대한 예의는 갖추지 않고 존경하려고는 하지 않고, 의무는 감당하지 않으면서 스승에 대한 권리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은 본인 스스로도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해야하지만, 먼저 배우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스승에게 해야 할 마땅한 도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요 왕립초등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여왕이 가면 모든 사람들은 모자를 벗구요. 무릎을 끓어요. 그리고 절을 해야만 했습니다. 여왕이 학교에 오니까 교장선생님이 여왕에게 예를 갖추어서 인사를 한 뒤에 여왕에게 이런 요청을 합니다. ”여왕께서 이제 교실에 들어가실 텐데 제가 모자를 쓰고 앞장서서 들어가겠습니다. 여왕께서는 저의 뒤를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 아니, 누가 감히 여왕 앞에서 모자를 쓰고 갑니까 교장 선생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존귀한 분인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여왕보다 더 높으신 분이란 것을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 이 이야기를 듣던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렇게 하라구,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옳은 말이잖아요. 여왕도 배우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래서 교장선생님이 높은 모자를 쓰고 앞장서서 걷고 그 뒤를 여왕이 따라 갑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학생들도 놀라고 기자들도 놀랍니다. 여왕의 이러한 자세는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오늘날에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배우는 사람에게 있어서 존경하는 스승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습니다. 대개 잘못되는 학생들의 배후를 보면 그들에게는 이렇다할만한 스승이 없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며 존경할만한 스승이 없기 때문에 스승이 없다고 말을 하는데, 존경할만한 스승이 있어서 존경하는 것은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이 처음에는 선생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선생님과 사귀다가 관계가 좋아져서 존경하게 되는 것이고,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이렇게 검증되고 알려진 이후에는 모르는 사람들도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스승이 이렇궁 저렁궁 말하기 이전에 먼저 존경하고 따라야 하는 겁니다.
저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질 거예요. 학교 다닐 때에 보니까 선생님과의 관계가 좋은 친구들이 공부를 잘해요.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과의 사이가 좋은 것이 아니라 먼저는 관계가 좋아서 공부를 잘하는 거예요. 선생님을 좋아하면 그 선생님 때문에 그 과목이 좋아요. 공부 못하는 친구들은 이걸 몰라요. 그러면서 ”재들은 선생님에게 잘 보여서 공부를 잘한다고, 선생님에게 잘 보여서 선생님이 더 예뻐해 준다고, 점수도 잘 준다고” 그건 잘못 본 거예요. 저는 선생님하고 관계가 좋은 친구들이 공부 못하는 것을 보지도 못했고, 선생님하고 관계가 좋지 않은 친구들이 공부 잘하는 경우도 별로 보지 못했어요. 공부를 못하는 이유가 머리에도 있지만 사실은 선생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5월초에 우리 나라의 어느 출판사에서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어요. 설문 내용이 뭐냐하면 ”특정 과목 선생님이 좋으면, 그 과목도 좋아하게 되는가”라는 물음인데, 38. 4%가 ’매우 그렇다’고 대답했고, 33. 1%가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이걸 합하면 71. 5%의 학생들이 과목 선생님이 좋으면 그 과목도 좋아하는 것으로 조사됐어요. 재미있는 것은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학생은 10. 6%이고, ’매우 그렇지 않다’ 아주 부정적으로 응답한 학생은 2% 밖에 되지 않아요. 흔히 생각하기를 ”빼어난 용모를 갖춘 몸짱, 얼짱 선생님” 과목을 잘할 것 같지만, 그 응답은 예상외로 0. 6%뿐이었다. 우리 나라 학생들이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미래가 밝아요.
저는 고등학교 다닐 때에 국어 과목이 좋았어요. 여러분도 잘 알지만 한국 사람들이 국어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국어야 뭐 우리 나라 말인데 공부하고 시험 봅니까 그냥 봐도 되는 거지요. 이러구 공부를 안 하는데 그러니까 점수가 잘 안나오지요. 저도 그랬지요. 적어도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그랬어요. 그런데요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을 잘 만났어요. 담임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그 분이 2년 동안 담임을 하셨어요. 저에게는 복이었지요.
전에도 선생님과의 관계가 좋았지만 이 때는 철이 들어 가지고 선생님이 그냥 좋은 거예요. 선생님이 남자답고 멋지게 생기지도 않았고 몸이 몹시 약했어요. 왜 비오는 날 우산 쓰고 가다가 바람이 불면 날아갈 사람 있지요. 꼭 그러셨어요. 그런 선생님이 무섭기는 얼마나 무섭다구요. 완전히 호랑이 선생님이세요. 얼마나 지독 하시던지요. 저희가 다닐 때에는 자율학습이라는 것을 했는데, 말로만 자율학습이고 타율 학습이지요. 반강제적으로 했으니까요. 요즘은 그렇게는 하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이 유별나셔서 그런지 학생들이 공부를 못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다른 반이 7시 30분까지 학교에 가면 우리 반은 7시까지 와야 돼요. 저녁에는 다른 반이 밤 9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하면 우리 반은 10시까지 공부해야 돼요. 그 덕에 공부를 잘 했지요. 그렇게 유별나셨어요. 그뿐이 아니에요. 학생들이 아침 7시까지 학교에 가야 하면 다른 선생님은 8시쯤 출근하시는데, 그 선생님은 7시에 오시는 거예요. 밤에도 마찬가지예요. 학생들과 같이 그 시간에 책상에 앉아서 소설을 읽으시던지 수필을 읽으시던지 학생들과 같이 공부를 하셔요. 그래서 그 선생님 이름이 이덕진 선생님이셨는데, 별명이 끈덕진 선생님이었습니다. 정말 끈질기셨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이 좋으니까 공부를 하게 됐어요. 참 이상한 일은요, 다른 친구들은 선생님이 싫대요. 아주 보기도 싫대요. 자상하기를 하나 뭐하나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게 없어요. 학생들이 따를 만한 게 없는 분인데, 점수를 후하게 주나요. 대개 깐깐한 분들이 점수가 인색합니다. 그저 한가지 무기라고 하면 얼마나 박식하신 지 수업시간에 분필, chalk만 들고 와요. 그리고는 수업을 하는데 교과서를 다 외우세요. 시면 시, 수필이면 수필, 지금 생각해도 굉장한 실력을 가지신 선생님이세요.
하여튼 많은 학생들이 선생님을 싫어하는데 저는 이상하게 좋더라구요. 그냥 선생님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과 아주 좋은 관계가 되었어요. 그러니 국어 공부를 잘할 수 밖에요. 선생님을 좋아하는 바람에 선생님과의 관계가 좋은 바람에 국어 공부를 잘 했습니다. 국어 점수가 다른 점수보다 좋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그 때에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과목을 좋아하기 전에 그 선생님을 좋아해야 한다는 겁니다. 가르치는 과목이 좋아서 공부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르치는 선생님이 좋아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더욱 많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그 때에 담임선생님이 영어 선생님이었으면 제가 영어 잘했을 겁니다. 요즘처럼 뒤늦게 공부하느라고 고생하지 않을 거예요. 허긴 영어 잘 했으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겠지요. 영어 선생님 안 만난 것이 어찌보면 복이에요. 그러니깐 여러분 만났잖아요.
오늘 성경에는 잘 가르치는 장로들을 존경하라고 합니다. 17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아멘.
이 말씀은 교회공동체가 장로들에게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를 말씀해 주고 있는데, 본문에 나오는 장로는 오늘날 교회에서 호칭되는 장로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장로는 나중에 감독으로 불리다가 오늘날에는 목사의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장로를 목사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오늘 나오는 장로는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치리 장로, Ruling elder이고 다른 하나는 가르치는 장로, Teaching elder입니다. 치리 장로는 교회의 조직, 행정, 성도의 치리를 담당했고, 가르치는 장로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교회의 공동체는 교회의 조직이나 행정을 담당하는 장로들을 존경하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장로들을 두 배나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동일한 장로인데 누구는 존경하고 누구는 배나 존경하고 왜 그래야 하느냐 그 이유는 그들이 장로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역할 때문이었습니다. 치리하는 장로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었고, 가르치는 장로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식 전달이 아닌 생명을 심어주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특별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는 사역은 그 어느 사역보다도 귀중한 일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잘 가르치는 더욱 존경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질서를 위하여 존경하라고 했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의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를 존경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가르치는 자의 손에 내 신앙성장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자와 관계가 좋은 사람은 신앙이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인과 목사와의 관계도 그렇고 선생과 학생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관계가 잘못되면 신앙생활이 게을러지고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게 됩니다. 나중에는 영적으로 침체되어 더 심한 경우에는 교회를 떠나서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자와 관계가 좋으면 신앙생활이 재미있어 집니다. 무슨 설교를 해도 걸리지 않습니다. 다 자기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막히지를 않아요. 절로 은혜가 됩니다. 은혜가 충만해지고 더욱 뜨거워져서 기쁨으로 헌신합니다. 더 나아가 가정과 직장에서의 삶이 즐거워지고 신이 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런 관계가 되면 신앙이 어찌 성장하지 않겠어요 성장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자동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저를 가르쳐 주시는 목사님을 참 좋아했습니다. 목사님들이 저를 좋게만 해 주셨겠어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교회학교 교사를 했는데, 중3 짜리가 해 봐야 그렇지. 못하는 게 더 많지요. 그 때마다 잘 한다고 칭찬도 해주셨지만 때로는 야단도 치셨어요. 목사님은 아주 호되게, 눈물이 쏙 날만큼 야단을 치셨어요. 그래도요 목사님이 나를 위해서 그러시는구나 생각했지, 한번도 내가 미워서 나만 야단하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목사님을 좋아하니까 야단을 아무리 맞아도 영향을 받지 않았어요. 목사님과의 관계가 좋으니까 교회에 가는 것이 기뻤고 목사님이 일을 안 시키나 기다려지고, 하여간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그냥 교회에서 사는 것이 좋았어요. 그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신앙이 쭉쭉 자랐다는 겁니다. 그 때는 그걸 잘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까 내 신앙이 웃자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기를 원하세요 여러분도 어쩔 수가 없어요. 저를 좋아해야 합니다. 저와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간혹 목사가 좋아서 좋은 경우도 있겠지만 좋지 않아도 좋아하셔야 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왜요. 여러분 각자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교만한 이야기가 될까 조심스럽습니다만은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기도 하지만, 제 손에도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열심히 하셔도 신앙이 성장하지만 어느 정도까지 입니다. 그 이상은 여러분에게 설교하는 목사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좋은교회를 다니는 이상 저의 설교를 들으시고 저의 신앙지도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시려면 방법이 없지요. 저를 좋아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이 계신데, 그 목사님의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몰라요. 매 번마다 다른 설교가 아니라 가만 보면 그게 그 설교입니다. 날마다 다른 설교를 하지만 사실은 동일한 설교라는 거 아세요 말은 다르게 하지만 한 사람의 목회 철학에서 나오는 설교이기 때문에 이럴 때는 이렇게 표현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다 똑같은 이야기예요 제 설교라고 다를 것 같아요. 분석해 보면 그게 그거예요.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되라.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의 훈련받아라. 십자가 져라. 그거지 다른 거 있습니까 그 목사님도 동일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구요. 하두 많이 들어서 이제는 설교를 들으면 그 다음 이야기까지 알고 있어요. 그래도요 한번도 눈과 귀를 떼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예화, 똑같이 웃는 이야기를 해도 동일하게 웃습니다.
우리 교인들 보면 가끔씩은 제가 동일한 예화를 드는데, 한번 들었던 것은 웃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지난번에 들었다 이거지요. 그런데 저는 웃어요. 몇 번, 아니 어떤 것은 몇십 번 들었던 이야기인데도 처음 듣는 것처럼 웃습니다. 그 정도로 그 목사님과의 관계가 좋아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제 수준을 뛰어넘어서 그 목사님의 수준에 이른 것 같은 착각을 가질 때가 있어요. 그 정도로 성장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가르치는 자를 처음부터 존경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경하게 되는 단계를 밟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존경하기는 어려워도 사랑하기는 쉽잖아요. 사랑하게 되면 나중에는 존경하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가르치는 자를 사랑하는 방법이 몇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해 주는 겁니다. 가르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이미 내 마음이 그곳에 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가르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면 그를 통하여 전파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더욱 은혜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것하고 기도하지 않고 듣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기도하면 벌써 내 마음이 열려져 있어서 말씀이 기다려지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기다려지지도 않고 말씀을 놓치게 됩니다.
둘째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겁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간단한 선물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설교 들으면서 아멘 아멘하시는데 그것도 입으로 고백하는 겁니다. 예배 끝나고 나면 은혜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기회가 되면 정성이 들어간 조그마한 선물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지난해인가 제가 설교를 끝나고 내려가려고 하는데, 우리 교회는 설교 끝나고 찬양팀이 인도하니까 제가 내려가잖아요. 기도를 마치고 강단을 내려가려고 하는데 어느 형제가 저를 보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더니 손을 앞으로 쭉 뻗는 거예요. 오늘 설교 잘 했다, 은혜 받았다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좋더라구요.
학기가 끝날 때면 선생님에게 선물을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나라의 문제는 학기가 시작할 때에 선물을 준다는 거지요. 보통 선물이 아니지요. 엄청난 선물,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지요. 어떤 친구들은 학기가 끝나도 입을 씻는데 그거 자신을 위하여 좋지 않아요. 학기가 끝나면 가르쳐주신 선생님에게 답례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저도 제 아이들이 학기가 끝나면 들려보냅니다. 비록 조그마한 것이지만 정성이거든요. 우리 청년들이 학기가 끝나 가는데, 교수님에게 감사의 카드와 함께 조그마한 선물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매 학기마다 그런 정신 가지고 배우면 우리 청년들 괜찮을 것 같아요.
우리 교회 집사님 중에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예쁜 카드와 쵸코렛을 선물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정확히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카드에 이렇게 쓰신 것 같습니다. ”일년 동안 말씀 전하시느니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가족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합니다. ” 그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나오신 후로 한번도 빠짐이 없어요. 해마다 보내주셨어요. 그 카드를 받을 때마다 초코렛을 받을 때마다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너무 감사해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나를 나 되게 가르쳐주고 격려해주고 사랑해주신 스승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나를 도와주고 있는 교우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러한 마음을 표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그들을 존경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권면대로 배나 존경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과의 좋은 관계가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고, 내 신앙 생활을 건강하고 반듯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스승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가르침을 받는 이의 도리이기도 하지만, 나의 삶과 신앙 성장이 스승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셔서 스승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형통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