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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스승같은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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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앞에 핀 철쭉들을 다른 동네 사람들이 원정와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교회 하면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한 교회로 기억하고 해마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간아 때로는 기분이 좋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모두 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가정에 주시는 축복의 선물인 자녀인 어린아이이들입니다. 그래서 미국 미세즈셋 주에 사는 로엘시 라는 목사님은 ‘사론의 장미꽃’이란 간판을 내걸고 강단을 온통 꽃으로 장식하고는 자기 교회 어린이들을 위한 특별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기서부터 꽃주일이 유래되었습니다.
왜 어린이들을 ‘꽃’이라고 비유하여 부릅니까 꽃보다 더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일을 위한 좋은 희망으로 자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아름답고 예쁜 꽃들인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에 의해 무시되고, 짓밟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은 별로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널 때 사람 수를 장정만 60만 명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어린이를 가볍게 보는 풍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사상이 저변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벳세다 광야의 5병2어 기적을 설명하면서도 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당시의 문화적 관습에 따라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은 계수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대적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분들과 아이들은 항상 무시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전통적인 사상과 관습을 완전히 다르게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후부터는 어린아이들을 보는 시각이 바뀌었고, 어린아이들의 지위가 높아졌고, 관심이 향상되었습니다. 사실 어린이들은 쓸쓸한 사막과 같은 세상에 소망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꽃과 같은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는 꽃처럼 아름답고 귀여운 어린이들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을 깨닫는 귀가 되시고, 실천하는 마음이 되시고, 닮아가는 노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고민이 되십니까 따라합시다. “어린 아이처럼 삽시다. ” 이것이 오늘 설교 주제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자연시인 윌리암 워즈워스는 무지개라는 제목의 시를 썼는데 어린이와 자연의 공통적인 순수함과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볼 때 내 가슴은 뛴다. 내가 어렸을 때에도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에도 그러한데 내가 늙어진 다음에도 제발 그러하여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차라리 죽어버리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 제발 내 여생의 하루하루가 자연에 대한 경외로 이어져 가기를 바라노라. ”
“어린이는 순수하고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자연을 그대로 느끼고, 자연과 신비로운 대화를 나눕니다. 자연을 보고 가슴이 뛰기도 하고, 소리 내어 웃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입니다.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요 때로는 스승과 같은 존재로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큽니다.
사실 어린이의 자리를 제일 먼저 높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열 두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를 바라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린 아이에게서 배우고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예수님의 제자도 될 수 있고 천국에도 들어 갈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3절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윌리암 워즈워스의 시 한 줄을 읽겠습니다. “내가 늙어진 다음에도 제발 어린 아이가 되어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차라리 죽어버리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다. ”
“The child is father of the disciples. ” 어린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아버지로 교훈삼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심지어 5절에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어린 아이처럼 되라는 말씀을 3년 동안 계속해서 말씀했습니다. 저도 성도 여러분들을 권면하면서 자주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어린 아이처럼 되라. ”는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될 때 은혜를 받을 수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복되게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어린 아이처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시인 워즈워스의 소원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분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어린 아이의 세 가지 특징과 장점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떤 어린이의 모습을 본 받아야 합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순진하고 솔직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 3절에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함고 솔직함은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겸손이란 그가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부모의 품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 그분의 보호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골 4:11, 12;요일 5:14). 그리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거나 자기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러움 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계산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가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그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매력은 순진한데 있습니다.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순진합니다. 흔히 부모들이 말하는 “나쁜 아이”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서 아직은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마음을 소유한 순진한 아이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은 모두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잃어버린 우리들은 옛날 그것이 잊혀 지지 않아서 언제나 그것에 대해 동경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육체가 다 자라더라도 계속하여 어린아이의 선량함과 사랑스러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순진한 점이 매력입니다. 어른들처럼 복선이 있고, 연막을 치는 일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사실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행동합니다. 본대로, 들은 대로, 꾸밀 줄을 모르는 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의 생활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솔직합니다. 싫은 것 좋은 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나타내 보입니다. 어른들은 솔직하지 못한데 비해 어린 아이들은 솔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솔직한 사람을 좋아 하십니다. 척 하는 사람, 이중적인 사람, 자기를 가리 우는 사람, 위선적인 사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다윗은 어린 아이처럼 솔직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다 솔직하게 나타내 표현했습니다. “나는 외롭습니다. 나는 괴롭습니다. 나는 아픕니다. ” 이렇게 솔직하게 자기를 들어내 보였습니다.
시 38편을 읽어보면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습니다. 내 뼈에 평안함이 없습니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납니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닙니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습니다. 내가 피곤하고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합니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솔직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까 어린 아이처럼 솔직해져야 합니다. 숨김이나 꾸밈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다 들어냅니다. 여러분들, 숨기도 꾸미고 이중적으로 사십니까 그러시다면 살 깊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솔직하도록 지금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2. 신뢰심이 있어야 합니다.
역대하 20:20절에 “너희는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본문 10절에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고 어린이들의 ‘신뢰심’을 천국에서도 인정하는데 사실 어린아이는 의심할 줄을 모릅니다. 아들은 본능적으로 누구든지 의심하지 아니하고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고 잘 믿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은 자기 부모님들을 100% 믿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나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성경말씀을 가르치면 가능성 여부를 타진하지 않고 말씀대로 믿습니다.
혹시 간혹 어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전적으로 믿습니다. 이에 비해 어른들은 자신들의 의식과 경험을 의존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믿음보다 계산을 앞세웁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아이들이 주는 교훈은 실로 큽니다. 마태복음 27:43절 전반절에 “저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벧전 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만을 사모합니다. 젖이 아니면 자라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을 가진 성도는 어린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합니다. 그래서 사모하는 자가 하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데 어른들의 세계를 보면 썩어질 물질에만 의존하고 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된 우리는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 아니면 살수 없음을 알고 말씀의 신령한 젖만을 사모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단순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을 잘 듣고 잘 믿고 잘 따릅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 아빠를 전적으로 믿습니다. 어린 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말도 잘 듣고 잘 믿습니다. 그래서 쉽게 속기도 하지만 하여튼 잘 믿습니다.
어린 아이는 단순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을 잘 듣고 잘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이 어린 아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믿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어린 아이처럼 사람들의 말도 잘 듣고 잘 믿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속아 넘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며 듣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사탄과 죄악의 소리가 아닌 모든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듣고 믿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인간의 고통 소리도 듣고 자연의 신음소리도 듣는 것은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누가 배고프다고 말하면 그대로 믿는 것이 옳습니다. 누가 아프다고 하면 그대로 믿는 것이 옳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면 그대로 믿고 가고 사람들이 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그대로 달려가서 도와주는 것이 너무나 옳은 일입니다.
어른인 빌립은 믿기를 주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세다 광야에서 배고픈 군중들을 염려하시어 “5천명을 먹이라. ”고 말씀했을 때 빌립은 믿기 전에 먼저 따지고 계산을 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어도 5천명을 먹이기에는 모자랄 것’이라는 계산부터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한 소년은 따지고 계산을 하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저 믿고 따랐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에게 드렸습니다. ’ 거기에 5천명이 먹고 12바구니가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렐루야!
어린 아이는 전적인 신뢰로 상대방을 믿습니다. 순진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그대로 믿고 따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순진함과 신뢰로 어린 아이처럼 그대로 믿고 따르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까 어린 아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순전히 그대로 믿고 신뢰하여 따르시기 바랍니다.
3. 부단히 움직여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린애들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부모님들은 제 아무리 힘든 일이 당신들에게 임하여도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들이 인내심이 없기도 하지만 몸을 그냔 한 곳에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과 적응이 부족하기 때문에 부단히 움직입니다. 그래서 어린이 설교는 5분~7분이면 된다는 말이 잇습니다.
만약 자라지 못하는 자녀가 있다면 한숨을 짓게 되는데 그것은 자녀가 어딘지 모르게 병이 들어 있다는 표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어린아이처럼 계속 자라며 변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의 최상의 목표는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자라는 것이지요. 천국은 주님만을 늘 찬양하며 경배하기위해 입을 움직이고 봉사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돌이켜”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써 선행되어야 할 행동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간순간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페테’( )는 ‘스스로 돌이키다. ’는 뜻이며 동사의 제 2과거형으로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가능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킵니다(요 3:3;행 2:38).
부단히 움직이는 어린이의 특성 중 영혼의 성장과 건강을 위해 ‘열심히 회개하는 귀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4. 모방심이 강한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16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 하였으며, 또한 고린도전서 11: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린애들은 신기한 물건을 보면 그 물건을 만지며 똑같이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쉽게 모방합니다. 그래서 아이들 앞에서는 주의해야 하는데 아이들 앞에서 나쁜 것을 보여주면 그 아이는 나쁜 일을 골라하고 선한 일을 하게 되면 그 아이도 선한 일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가야 아름다운 성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래 사울이란 이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청년 시절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죽이는 자들의 앞잡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린 아이처럼 변화하여 말하기를 빌립보서 3:17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고 말했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이기 때문에 예수를 닮지 않으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으로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을 따라하듯이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13 절에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라고 하였습니다.
중국 속담에 “흩어진 새 둥지에는 온전한 새 알이 많지 않다. ”는 말이 잇습니다. 즉, 우리들의 가정이 신앙으로 건강해야 우리 아이들이 건강히 신앙으로 잘 자란다. 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모의 모범적인 삶은 꼭 필요한 교육의 기초가 됩니다. 그러므로 영혼과 육신이 아울러 건강한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U. N 어린이 헌장에는 7가지의 아동의 권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어린이는 건강하게 자랄 권리가 있다.
2) 어린이는 공포에서 벗어날 권리가 있다.
3) 어린이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4) 어린이는 학대나 버림을 받아서는 안 되며 나쁜 일이나 힘겨운 노동에 이용되어서는 안 될 권리가 있다.
5) 어린이는 환영을 받을 권리가 있다.
6) 어린이는 주위와 환경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7) 어린이는 즐겁게 지낼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아이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보호하고 잘 키우겠다. 고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헌장을 지킬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요 부모들입니다. 어른들이 이 헌장을 지키지 않으면 아이들에 이 헌장을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의 인격 성장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 ”는 명령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낳았다고 좋아 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맡겨주신 우리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진리 가운데 바로 양육하며,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바르게 키워야 할 책임이 있다.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장래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는가” 라는 제목의 글을 쓰게 했습니다. 어느 여자아이는 “나는 자라서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돈 많은 사람에게 시집을 갈거에요. ”라고 썼더랍니다.
어느 남자아이는 “나는 커서 돈 많은 사장이 될래요. ” 라고 썼더랍니다. 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거의 돈과 관계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렸을 때에는 장차 커서 훌륭한 대통령이 되겠다든지, 과학자, 예술가가 되겠다고 했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라는 형용사가 붙었습니다.
최근 남자 대학생들 간에 유행하는 말이 있답니다. 누구에게 장가를 갈 것이냐. 유아 교육과를 나온 아가씨가 좋고, 약대을 나온 아가씨가 좋다고 합니다. 그런 아가씨에게 시집을 가서 봉고 차를 몰고 다니는 ‘봉고 맨’이 되고, 약국의 셔터를 올리고 내리는 ‘셔터 맨’이 되면 좋다고 말 한데요. 물론 농담이겠지만 일하기 싫어하고 싶게 살려고 하는 풍조를 비꼬는 뼈 있는 농담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 아이들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 ’는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 올바르고 잘하는 것인지에 혼돈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바람직하지 못한 혼돈입니다. 이것을 ‘가치관의 혼돈’이라고 합니다. 어렸을 때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게 되면 커서 결코 온전한 사람이 못됩니다. 그리고 한번 확증된 가치관은 좀처럼 시정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이들이 가정에서 배우는 가치관, 학교에서 배우는 가치관, 사회에서 배우는 가치관, 교회에서 배운 가치관이 각각 달라서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즉 아이들에게 참 인간을 가르쳐 주기 위한 교과서나 율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이웃이 없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울타리에 갇힌 짐승처럼 부모들의 기호에 맞게 사육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이 곁 모양만 좋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구원받은 영혼,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격, 생각, 사는 방법, 사람과의 처신 등이 다 좋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영국의 수상이었던 마가렛트 대처 여사는 쌍둥이 자녀를 기르는 어머니요, 남편을 아내였습니다. 그 분이 수상 직에 있으면서도 부엌일을 하고 남편의 뒷바라지하는 모습을 사진에서 종종 보았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습니다.
현대의 불행을 느끼는 여성분들 중에 간혹 가정을 ‘인생의 무덤으로 생각하는 여성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잘 나서 부엌을 떠나고 자식과 남편을 자기 인생의 걸림돌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가정은 하난의 축복의 산실입니다. 제가 산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자녀를 위해 가정을 위해 수고와 희생이 있어야 행복한 가정을 세울수 있다는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요한 3서 1:11절에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인생의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바로 배워야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구언받는 것이며, 하난의 선한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은 가정을 사랑하여 충실한 가장이 되고 주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이 장차 좋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도덕심을 배양하고 일체의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5. 무슨 일에서든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 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하으며 고린도전서 15:57절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5:4절에는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고 권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분명히 알려줍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행하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 말하고 감사하다 행동으로 진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동시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깊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에 대한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롬 6: 17~18절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본문에 불구자가 되어서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분명히 낫다고 선언합니다. 할렐루아!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없는 영생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언과 천국과 하난님의 자녀됨의 축복을 얻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가정을 주시고, 교회를 섬기며, 자녀를 잘 양육하도록 맡겨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에 부모도 감사하고, 자녀를 주신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그 자녀가 구원에 이르도록 신앙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본문 6~7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고 하였습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양보 못할 것이 하난의 말씀인 진리와 영혼과 생명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잃어도 생명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은 우리의 보화를 하늘에 쌓는 일입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를 주님 앞에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세우는 일에 생명을 걸고 헌신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 니다.
불경기를 만나 파리만 날리는 극장에 “무료입장”이라는 광고가 붙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갔습니다. 영화가 끝나자 사람들이 나오는데 건장한 청년들이 막아서면서 돈을 요구했습니다. “무료입장이 아니었습니까” 사람들이 따져 물었습니다. 그때 주인은 말했습니다. “입장은 무료이지만 퇴장은 유료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면서 죄를 짓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퇴장료는 사망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을 걸고 믿는 것은 힘겨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보상은 영생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다니러 온 나그네입니다. 인생은 역사의 무대에 언젠가는 퇴장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퇴장은 명예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날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우리의 지금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스승은 어린이가 될 수있다는 주님의 교훈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자녀의 영혼을 구원하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 내는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구원 받은 것에 대한 참된 감사를 느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기억하고 사람의 빚진 자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의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 구원을 위하여 살기로 내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생명들의 구원을 위하여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낡아버린 어른의 마음을 벗어버리고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소유하기 위해 어린아이에게도 배워야 합니다.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진짜 스승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린 아이처럼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교훈하시고 모델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주님을 따르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제자들은 본문 3절에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 ’고 말씀했습니다. ‘하는’(doing) 것도 중요하지만 ‘되는’(being)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처럼(요1:14)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1:12) 주 안에서 빛이 ‘되’는 것이(엡5:8)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귀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면서(마19:15,막15:16,눅18:16)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해서 말씀했습니다(마18:3,막10:15,눅18:17).
어린 아이들의 특성처럼 솔직, 단순, 겸손, 신뢰, 모방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명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린 아이들과 같은 특성을 본받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영접하고(마18:5) 어린 양들을 진리와 구원에 이르도록 먹이고 키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요21:15). 따라서 우리는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고 영접하고 먹이며, 구원에 이르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좋아하고 영접하고 먹이고 사랑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께서 어린 아이가 가진 특성 중 장점을 스승의 기준으로 삼아 잘 배우고 실천하여 천국을 유업으로 얻고, 주님께 사랑받는 최상의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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