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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해방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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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겨 버리고 36년간 참으로 많은 고난과 수모를 겪다가 제2차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며 우리나라는 해방을 그냥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여호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나라를 찾은 기쁨의 날이 벌써 60주년이 흘렀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 그것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연합군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면서 아픔이 시작되었고 5년후에 6. 25사변으로 동족이 죽고 죽이는 비극적인 전쟁으로 그 아픔이 지금도 아물지 않은 것을 보면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습니다.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세계2차 대전은 인류의 해방을 위해서 이라고 말하며 4가지의 해방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기아에서의 해방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지구촌 여러 곳에 먹지 못해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1분에 28명이라는 유엔 식량기구(F. A. O)의 통계를 보면 아직도 요원합니다.

 두번째는 질병에서의 해방이요,
 세번째가 전쟁과 자연재해의 공격에서 해방이며 네번째가 정치적 억압에서의 해방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진정한 해방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을 영적으로, 육적으로 그리고 환경적으로 우리를 사망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해방자요 구세주로 오신 것입니다.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성을 전가 받아 죄의 종으로 묶여서 태어난 인생입니다. 자유로운 인생이 아닙니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해방되고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지으시고 복 주시며 땅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창세기 1장 26-28절).
여호와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우리는 속박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도록 원래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를 따먹고 여호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여호와 하나님께 저주받고 버림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품에서 쫓겨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로 인하여 망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망의 권세를 마귀가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종, 즉 마귀의 종이 된 것입니다.
죄의 아비인 마귀는 우리를 계속 죄를 짓도록 충동질하고 유혹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게 충동질합니다. 마귀는 우리 영혼의 도적입니다.
“저는 도적이라. 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러 너희에게 왔다”고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종으로 지음을 받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반역죄로 말미암아 종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다 죄의 종으로 죄가 시키는 대로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세속과 부패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한국 사이버 중독 예방센터에서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채팅이 환각과 불륜의 늪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간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부패성과 죄성을 가지고 있는데 죄의 아비 마귀는 계속 우리를 충돌질하여 사망의 사슬로 얽어 매고 있습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모두 채팅을 통해 만난 애인 또는 이성친구가 있다고 합니다. 채팅하는 가정주부 1백명 중 81명이 채팅을 통해서 이성을 만난 것으로 발표되고 있습니다. 1만개 넘는 사이트가 있는데 한 채팅 사이트에 회원이 1천8백만명입니다.
그리고 채팅하는 주부의 44퍼센트가 불륜을 저지른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겉으론 멀쩡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죄의 노예가 되고 부패의 종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사망의 포로가 되어서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포로가 되고 종이 되어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정신적으로 죄의 종의 사상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곡마단에서는 코끼리를 어릴 때부터 훈련시킵니다.
어린 코끼리를 잡아다가 말뚝에 강한 쇠줄로 묶어 놓습니다. 어린 코끼리가 해방을 얻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당기고 해도 강한 쇠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에 아무리 몸부림쳐도 안되거든요. 시간이 지나면 이 코끼리는 ‘나는 쇠사슬에 묶이면 움쩍을 할 수 없다’며 체념해 버리고 맙니다.
세월이 흘러 코끼리가 점점 자라 어른 코끼리가 되면 적어도 1톤 무게를 거뜬히 들어올릴 수가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 코끼리를 조그마한 말뚝에 쇠사슬로 묶어 놓으면 꿈쩍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벌써 체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벼룩은 자기 몸의 70배까지 뛰어 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병에다 마개를 막아 놓고 벼룩을 그 속에 넣어 놓으면 벼룩이 뛰다가 마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체념하고 맙니다. 그래서 뚜껑을 열어놔도 이제는 안 뜁니다. 체념한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에 묶여서 태어나기 때문에 마음속에 체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포로된 마음, 종된 의식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예 벗어나려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운명으로 돌리고 숙명으로 돌리며 체념한 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종교는 운명론과 숙명론을 주입시키며 모든 가난과 질병과 고난을 운명 탓으로 돌리며 체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귀의 종된 의식에 빠져서 그냥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러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해방의 길을 주신 해방자이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복음선포를 뭐라고 했습니까
누가복음 4장 18절로 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전파하는 것이 복음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어떤 해방을 주셨습니까
1. 영적해방 (귀신의 영에서 해방)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종된 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종된 빚을 청산하고 종의 마음, 종의 의식에서 해방이 되고 자유를 주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를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롬8:1-2에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우리에게 참자유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회개하여 죄사함받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귀신의 영이 아닌 성령을 받았습니다. 귀신의 영에서 해방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있는 자가 되어 생명의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영광의 영이신 생명의 성령이 들어와서 우리를 인치시고, 어둠의 영인 귀신의 영은 우리에게서 순식간에 떠나갔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로 7절에 “너희가 아들인 고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종이 아니라 이제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눌린 영혼이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사망의 종 노릇하는 자를 놓아주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로마서 6장 22절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여호와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묶여서 태어나고 종으로 태어났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바로 이 종으로 태어나고 묶여 태어난 우리들을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은 우리의 해방이요, 자유요, 우리의 인권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2. 병에서 해방(육신의 해방)
그리고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병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병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병든다. 병에 들면 해방받지 못한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병의 종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병이 오면 우리는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 치료자요 해방자라는 것을 믿고,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우리는 질병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카자흐스탄 선교사 양병초 목사의 사모님이 91년 선교사로 카자흐스탄에 파견되었는데 92년 둘째 아이를 출산하였습니다. 큰아이를 제왕절개수술로 낳았기 때문에 둘째도 제왕수술로 낳았는데 카자흐스탄의 병원시설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우리 한국에 비교하면 너무나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하고 보니 아이가 황달이 심하고 출생 때 호흡이 늦어져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서 뇌성마비가 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산모는 수술을 잘못 받아서 수술부위와 허리에 통증이 너무 심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어서 병원에 누워 있는데 보호자 출입이 금지되어서 독방에서 혼자 앓고 있었습니다. 고통스럽고 너무나 병원시설이 허술하기 때문에 꼭 장례식장에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너무 겁이 나서 밤에 도망을 치려다가 의사에게 잡혀서 도로 감금당하듯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할 일이 없으니까 10년 전 조용기 목사님 설교 테이프를 꺼내어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 테이프를 듣고 난 다음 마지막 기도를 하고 병자 치료에 대한 선언을 할 때 ‘여기에 허리와 간이 나쁜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라고 선포된 내용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듣자 마자 전신에 전율이 느껴지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습니다. 옆에 있던 어린아이의 간에 손을 얹고 안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어린아이도 간이 낫고 사모도 허리 아픈 것이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10년 전의 테이프가 효과를 발생한 것입니다. 비록 테이프는 10년 전 것이지만 그 가운데에 들어 있는 내용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에게는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으로 성령수술을 완벽하게 받아 해방을 얻게 됩니다.
3.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형통의 축복)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해방자요 구원자로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미치게 됩니다.
고후8:9에 보면,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가난을 십자가에서 대속하셨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믿기만하면 모든 가난의 종에서 해방됩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원래 창1:26절에서 28절의 말씀대로 부요한자로서 복을 받고 만들어 졌지만, 죄로 인하여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가난을 대속해 주시고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해방자로 믿기만하면 그 대속의 효력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주님이 나사로의 무덤에 오셨을 때에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무덤문을 열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여! 내 오라버니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마르다를 바로 쳐다보시고 ‘마르다여!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에 눌려 마르다와 마리아는 무덤문을 옮겨 놓았습니다.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를 제쳐 놓고 그 무덤 앞에 서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나오는데 온몸은 베로 동이었고 얼굴에는 수건을 덮은 채 나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살아났지만 수의에 감기고 얼굴에는 수건을 덮은 채 나왔습니다.
살기는 살았으나 그는 묶여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대로 내버려 놓지 않았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은 모두 영적으로 죄악의 무덤에 들어 있었습니다. 죄의 무덤에서 영원히 썩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날 전도를 받아서 주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는 우리들이 자의적으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불러 내어서 믿게 된 것입니다.
‘죽은 자여 어두운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하시는 주의 명령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믿고 영적으로 살아났으나 온몸과 우리의 얼굴에 수의를 칭칭 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기는 믿었으나 아직까지도 죄악의 밧줄이 온몸에 칭칭 감기고 세속과 부패의 수의가 몸에 감겨 있고 질병의 수의가 얼굴에 덮여 있고 저주와 가난의 수의에 칭칭 감겨 있고 죽음과 절망의 공포에 묶여 있어 자유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를 믿어서 영혼이 구원을 받았으나 그의 생활이 변화와 성숙되지 못하여 ,
애굽의 죄성을 벗지 못하고 수의에 묶여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 갔다 하면서 구원은 받았으나 그들의 생활이 아직까지도 변화와 성숙을 이루지 못하여 마귀에게 조롱당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날 그러한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주님은 우리 영혼만 잘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범사에도 자유를 얻고 몸이 병에서 해방되어 건강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해방자요 치료자요 부요케 하시는 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 원리를 따라 살아야 행복하고 성공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얻으려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 자유를 주시는지 그 진리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주의 영이 여러분 속과 가정과 사업장과 생활 현장에 충만하도록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부요케 하시는 창조의 영이십니다.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시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성령과 항상 교제하고 동업하고 연합하여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완벽한 자유를 얻습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하게 되는 해방을 얻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겨우 턱걸이해서 천국만 올라갈 줄 알지 완전 구원, 전인구원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아야 됩니다. 알았으면 이제 풀어 놓고 매듭을 풀어야 돼요.
수의를 풀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내 몸에 묶인 이 수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풉니까
죄악의 수의, 부패의 수의, 질병의 수의, 저주와 가난의 수의, 죽음의 수의를 어떻게 풉니까
기도로 매듭을 풀어 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해방된 평안이 올 때까지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로 19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땅에서 믿음으로 구해야 풀리는 것입니다. 기도로써 우리 수의를 풀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지 않고는 마음에서 풀려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모르므로 기도를 안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으니까 늘 묶여서 있지요.
한 평생 예수 믿는다면서 수의에 칭칭 감겨서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고 기도해서 매듭을 풀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다닌다는 것은 내가 부족함이 없이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바로 풀어 놓아 다니는 삶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썩은 것은 벗어 버리고 새옷을 입고 승리로 다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해방을 얻었으면 수의를 벗고 축복의 옷을 입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승리의 옷으로 영광의 옷으로 입혀 주십니다.
3 결 론
오래 전에 한 노예가 해방되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노예시장의 장터에 노예들이 끌려와서 주욱 늘어섰습니다. 아마도 전에 "뿌리"라는 영화를 보신 분은 이 장면을 쉽게 연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건강한 청년남녀가 있는가 하면, 어린 소년소녀 노예가 있었고, 심지어 어른 여자노예는 칭얼대는 아이까지 딸려있었습니다.
또 한쪽에 이런 노예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이 들은 늙은 노예였습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 노예는 병들어 있었습니다. 서있기 조차 힘들 정도이어서 구부정하니 서있는 데, 자세히 보면 가엾게도 가늘게 떨고 있었으며 간간이 신음을 토해 내고 있었습니다.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모진 노동에 시달리다. 이제는 늙고 병들어 도무지 상품가치가 없는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아침에 시작된 장터는 어느 새, 오후를 지나 황혼녘이 되었습니다. 다른 노예들은 이리 저리 팔려갔으나 이 병든 노인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노예주인은 그를 손익계산에 의해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혹시 이거 오늘 밤 넘기지 못하고 죽는 게 아닌가"하는 불길한 생각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때 한 고귀해 보이는 귀족이 지나가다 이 비애스러운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노예의 주인에게 값을 물었습니다. 주인은 내심 기뻐하면서 조심스럽게 올려 불렀습니다. 그러자 귀족은 아무 말없이 대뜸 비싼 돈을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둘러선 사람들은 모두들 의아해 하였습니다.
이때 참으로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귀족이 노예문서를 건네 받은 뒤, 그 자리에서 증서를 찢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다리를 결박하고 있었던 쇠사슬을 끊어 자유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오늘부터 너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다. 이제 네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하거라"하고는 총총 걸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난 그는 도무지 이 자유인이 된 기정 사실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펄쩍 펄쩍 뛰면서 기뻐했습니다. "오 자유…!" .
하지만 자신을 돌아보니 늙고 병듦으로 살아갈 힘이 없었습니다. 날은 춥고 점점 어두워져 가지만 의지할 곳도 갈곳도 없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든 자유인은 자기를 사서 풀어준 그분을 향해 사력을 다해 "주인님, 주인님... " 부르며 따라 갔습니다.
그분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습니다. 자유인은 그분 앞에 엎드려 "주인님 저는 늙고 병들어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저를 거두어 주세요"
새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렇다면 내집으로 함께가자꾸나"
얼마를 가니, 고색 찬연한 거대한 성이 나타나고 성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그 안은 밖하고는 비교할수 없는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유스럽고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마을 한가운데로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좌우에는 열두가지 실과가 달마다 맺혔습니다.
그는 문득 "아! 내가 잃어버렸던 "실낙원"을 되찾았구나"하며 꿈꾸듯 읊조렸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인간이 직면한 문제에 있어 자유와 선택에 대한 두 가지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죄와 사망에서의 자유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사망의 사슬에 매여 있으며 늙고 병듦의 황혼녘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증속에 노예의 주인은 사단이었으며, 귀족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단에게 피값을 주고 믿는 자를 구속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죄와 사망의 노예증서는 찢어져 말소되었고, 결박은 끊어졌습니다.
 둘째, 진정한 자유의 문제입니다.
자유인이 되었지만 이제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행사하여 스스로 주인을 선택한 후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노예가 아닌 아들의 신분이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유의지를 육체의 기회를 삼아 타락했고 실낙원을 경험합니다. 이 보잘 것 없는 노예는 자유인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찾아 주인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했고 곧 낙원을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신앙생활은 곧 낙원의 경험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고백을 기대 합니다. "오 자유... ! 나의 해방자를 기뻐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또 사람의 힘이나 노력으로 얻는 해방은 잠시 일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아예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즉, 믿고 따르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곳에 영적인 것만 아니라 육신적인 것에서도 해방되어 가난, 질병, 억압과 공포에서 해방되며 죄와 사망의 법에서도 해방됩니다.
그러기에 “주는 영이시라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시고, 항상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며 안식을 얻으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만 사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쓰임 받도록 성령의 충만함으로 다시 새롭게 될 때 진정한 해방이 될것이요 나만 아니라 내 가정, 이 나라에 진정한 해방이 오게 하여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말합니다.
‘네가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안믿으니까 영광이 안나타나지.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면 매듭이 풀릴 때까지 기도로써 수의의 매듭을 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자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한 맺힌 소원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 하나라도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해방의 복음을 전하며 큰 자유의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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