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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중구조로부터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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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8월달이 특별한 달이기도 하다.
그것은 민족적인 해방이라는 역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젊은 사람들을 붙잡고 해방의 의미를 물었을 때 그 대답을 얼마나 의미있
는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젊은이들만이 아니고 기성세대에게도 오늘날에는 해방이라는 의미부여를
한다해도 그렇게 가슴에 와 닿는 절절한 의미로서의 해방이 아니라는 것이
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민족적인 해방의 이야기를 나열하기보다는 신앙적인
위기에서의 해방을 함께 만들며
이것을 계기로 민족의 진정한 해방의 동기나, 해방을 맞이 하였을 때 어
떤 방향으로 이 민족이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가를 생각하여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감리교인들의 구원관이 개인구원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인 구
원, 국가적인 구원을 부르짖는 교단인데 해방이라는 민족적인 통일 역
사를 함께 소망하여 보면서 우리들의 신앙의 자리를 온전히 만들어 보
고자 합니다.
우리는 해방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정치적인 해방만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비 신앙적인 자리에서의 해방도 함께
외쳐보아야 합니다.
비 신앙적인 생활이라는 것은 분명히 온전한 신앙의 양태가 아니다. 이
것은 시대에 편승한 신앙이라든지, 환경에 이끌리어 가는 신앙의 모양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중구조신앙라는 것입니다. 우
리는 이중구조를 이야기할 때는 안전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차원에서의 신앙의 이중구조라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말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중구조의 신앙의 자리에서 탈출하여
신앙의 해방선언을 하고자합니다.
우리는 먼저 구약의 사건을 생각을 하여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
나님의 의도적인 역사로 애굽의 고센이라는 노른자위 땅에서 애굽의 사람
들에게는 이방인들이었지만 가뭄속에서도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그렇게 행복하여도 그들이 거 할 처소는 애
굽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숫적인 증가속도가 애굽사람들보다는 월등해서 애굽의
바로를 위협하게 됩니다. 급기야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산아제
한을 실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종살이로 전
락되고 맙니다.
이것이 출애굽기서의 시작입니다.
그 고난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는 애굽에서 이스
라엘백성들을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출 2;23절이후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여 부
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고난의
소리를 들으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의 해방자로 모세를 세우십니다. 모세는
그 형 아론과 더불어 당대에 막강한 권세를 갖고 있던 바로에게 도전을 합
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막대한 득을 얻고 있던 바로는 성급히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백성을 놓아줄 그가 아니었
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에게 경고카드를 내 보이십니다. 그것이 애굽
의 사람들을 그렇게도 혹독하게 만들었던 열가지 재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자신의 신앙적 성찰을 이곳으로 이끌고자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내리시는 10가지 재앙을 앞에 두고 시시각각으로 바뀌어
지는 바로의 모습을 봅니다.
바로에게 전한 모세의 멧세지는 이런것이었습니다. 출5;1절의 "하나
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것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이라는 상황에서는 그의 백성들이 온전한 예배를 드리
지 못할것을 아시고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보내
서 자신에게 진정한 예배를 드리도록 하신것입니다.
그리고 그예배를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사흘길쯤 떨어진 곳에서 예배를 드
릴수 있도록 요청한것입니다.
이 사흘길이란 "보통사람들이 고센 땅에서 걸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산 시내산
에 도착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 이 모세의 요청에 아니 여호와 하나님
의 요청에 대한 바로의 응답은 일언지하에 거절을 합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더큰 고난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고 바로는 더울 악하여져 갑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의 그 완악한 마음을 열게하기 위하여서 애굽 백성의 젖줄
인 나일강을 피바다로 만들고, 물이 썪고, 고기가 썪고, 악취가 나도록 하
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바로의 당황함은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의 진솔히
인간의 약함을 고백하기 보다는 오히려 강팍하여 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두번째 재앙으로 개구리 재앙을,
 세번째 재앙으로 이
재앙을, 그리고 네번째 재앙으로 독이 있고 피를 빠는 파리떼로 하여금
바로를 곤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자 이 계속되는 재앙으로 인하여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기로
작정하고 모세와 협상을 합니다.
출8;25절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땅에서 너
희의 희생을 드리라"고 협상을 하여왔습니다.
바로는 그 이스라엘 백성을 멀리 보내고 싶지가 않았고 모세는 사흘길을
고집합니다. 결국은 바로는 또다시 여호와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으로 고난을 받
게 됩니다.
5번째로 짐승의 떼가 죽어서 악취가 나고, 6번째 재앙으로 파리 떼가 옴
긴 탄저병의 독충이 기승을 부리게 하고,
7번째 재앙으로 우박을 내리게 하십니다. 이런 고난이 계속되자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다시 재협상을 합니다.
출4;27절의 말씀입니다.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 하였노라"
그러나 이와같은 바로의 외침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과 고난을 넘겨 보려는 속셈인것을 보게 된다고, 성경은 바로
가 여전히 악하다고 지적을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은 또다시 재앙을 내리십니다. 메뚜기 떼를 모아서 바로에
게 보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민감한 바로의 응답은 즉각적으로 "내가
득죄 하였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는 양과 소는 남겨두고 사람들만 떠나라
는 것입니다.
우박 재앙을 내립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바로는 출12;30절을 보면"그
밤에 여호와께서 애굽땅에서 모든 처음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
자로부터 옥에 갖힌 사람의 장자에 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
시매"
그래서 온 나라가 호곡하는 소리가 들렸고 바로는 급기야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앞에 항복하고 그의 백성들을 보내게 됩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애굽의 바로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았습니다.
우리가 이시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이 이스라엘 역사가 오늘의 우리들에
게 무슨 의미를 전하여 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신앙의 자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온전한 희생이 아닌, 기웃거
리는 "이중 구조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입니다.
1992년 미국의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가 조사한바에 따르면 미국인의
66%가 절대적인 진리란 전혀 없다는 통계가 나왔고 더욱 놀라운 것은 18
세부터 25세 사이의 미국인들에게서는 무려 72%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들 스스로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는 이중구조를 갖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금부터 3400년전에 있었던, 오늘날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모양이
아닌가
그것은 신바로입니다.
20세기 말에 나타나는 옛바로의 모양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우리들의 신앙과 바로의 신앙과의 관계가 동일하다고 이야기 할수
있습니까
바로가 신앙인입니까 그렇지는 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신앙을 이야기는 하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바처럼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내가 범죄 하였노
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이 정도이면 그가 신앙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는 이중구조의 신앙을 갖인 사람입니다. 그는 태양신을 섬길 줄 알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바로의 모양을 보고자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려고 하지않습니까
그리고 바로는 재앙때문에 모세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그 요구의 답변은 지극히 인간적인 답변입니다.
출8;28절의 말씀을 보시며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
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리고 이 땅
에서 희생을 드릴지니라"
바로는 재앙 앞에서 한발을 양보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희생
이 꼭 애굽을 떠나서 드려야 하는가 이 땅에서도 충분히 드릴 수 있지 않
은가 사흘길을 꼭 가야만 하는가 애굽에도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좋은
곳이 많은데 꼭 사흘길을 가야만 하는 것인가
얼마나 좋은 이야기 입니까 우리는 성경이 원하는 제사의 방법을 들
여다 봅니다.
레1;16절의 말씀을 보시면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불살라 번
제로 삼을 것이니라"
애굽에서는 유목민들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준비된 장소에서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사흘길입니다. 시내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과 그곳에서 만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의 자녀라는 진정한 표현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피조물인 우리들이 창조주인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고백
입니다.
드린다는 말속에는 껍질을 벗기고 각을 뜨고 불살라 드리는 심정으로 올
려져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예배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예배는
어떤 예배를 드립니까 가죽을 벗기지 않은 채로, 각을뜨지 않은 채로, 불
에 완전히 태우지 않은 채로 드리려는 바로의 심성이 우리를 붙잡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의 습성입니다. 예배의 은혜가 없으면 다음주에는 쉬어도, 주
일을 범해도 합리화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까
예배를 최고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최상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신앙성숙은 그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의 시대에 요구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는 오늘도 동일하게 요청
되어지는 것입니다.
은혜 받으려고 예배를 드리십니까
아니면 의무이기 때문에 예배를 드립니까
은혜 때문에 예배를 드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의무이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려고 예배를 드립니까 아니면 예배를 드려질 때 은혜가
오는 것입니까
예배를 드릴 때 은혜는 우리들에게 오는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없어서 여호와 하나님앞에 예배드리기를 주저하십니까 예배드리기를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의무이기에 억지로 예배를 드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앞에 드려지는 예배가 혹여나 인본주의에 맞추어서 종교적인 행사
로 드려지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모든것 보다
우선이 되어져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고 권
면을 하십니다.
바로는 모세에게 "너희는 희생을 드리되 너무 멀리는 가지말라고" 합니
다. 얼마나 매력적인 말입니까
애굽땅에서 애굽식으로 드려져도 여호와 하나님은 받으실것이라는 생각인지 모릅
니다.
애굽은 여전히 애굽적인 것입니다.
골3;1절에 성경은 말씀을 하십니다. "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
을 받았으면 위에것을 찾으라. 위에것을 생각하고 땅에것을 생각지 말
라고"하십니다.
애굽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 희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장소
에까지 가는 것은 고난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고난의 먼길을 택하여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배 하나 때문에 희생을 감수하여 본적이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를 위하여 애굽땅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명하신
거룩한 장소에 서려는 희생을 갖고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출10;9절에 보면 모세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절기를 지킬것인즉 우리가 남여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
이때에 바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남자만 가서 여호와를 섬길것이
나라"
바로의 속셈은 여자와 아이들을 담보로 잡아두면 남자만가서 예배 드린후
에 남자는 기필코 다시 애굽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신구약에서 여자와 아이들은 특별한 의미부여를 받지를 못합니
다. 숫자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불합리한 부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렇게 바뿐 세상에 가족을 대표하여서 한 사람만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
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대신 되는 것이 아닌가요
대신하여 드려지는 예배가 성행하고 있지 아니합니까
그러나 모세는 이 부분에 단호한 대답을 합니다. "남여 노소와 우양
을 데리고 가겠나이다"
나를 먼져 구원하신 주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우리가 개인구원
으로 만족하라는 말씀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는 남자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
가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자녀들의 영적인 생활에 민감하여 보신적이 있습니까 그 영혼들이 정말
예수를 닮기 원하는 사람으로 거듭났습니까
나와 내 가족이 함께 구원받기를 열망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바로는 모세를 향하여 이렇게 말을 합니다.
출10;24절에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두
고 너희 어린것은 너희와 함께 가라"
흑암의 재앙을 만나고 난 다음의 바로의 타협안입니다.
바로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전체를 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전보다는
참으로 많이 완화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내어 놓으
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때에 모세는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
님을 섬길 것이니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드릴 희생제물을 우리의 양떼 가운데서 골라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희생의 제물이 없이 사람만
왔다가는 것은 아닙니까
가장 귀한것을 드려야 되겠다는 신앙의 고백이 오늘 이시간에 살아나기
를 바랍니다. 신앙의 감격과 감사가 없이 사람만 만나고 돌아가는 일이 없
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3400년전에 바로가 주장하였던 예배의 모양입니다. 애굽 문화는
우리를 우리를 편하게 적당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죽
음의 자리로 인도하는 독약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그 애굽의 고난에서 건져내시려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
다. 적당한 안락 적당한 만족 적당한 기쁨에 취하여 애굽에 머물기를 좋아
하고 있다면 모세처럼 거부하십시요.
내 자신이라도 철저히 거부 하십시요.
바로가 이용했던 방법을 사단은 오늘도 이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중간지대에 머물게 합니다. 신앙의 애굽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풍요롭지만
죽음이 있는 애굽이 아니라 광야이지만 생명이 있는 거룩한 장소를 요청하
십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풍요로움은 민족이거나 정치적이거나 우리들에게 해
방이 온다고 하였을때 혹여나 바로식으로 해방을 맞이라려다가는 우리 모
두가 함게 멸망 당할수 잇음을 인식하며 진정한 신앙인들의 신앙해방이 이
민족을 살리며 이 민족의 미래를 복된 장소로 인도함을 인정하시고 먼저
우리들의 예배 신앙을 온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방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들이 도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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