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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해방과 진리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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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광복54주년 주일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빼앗기고 잃었던 이름과 땅과 주권과 자유를 되 찾은 광복 기념일입니다. 해 마다 이 경축일을 지켜왔고, 금년은 특히 20세기를 마감하는 해라고 해서 그 의미를 더 부여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광복절을 기념하는 이유는 자유의 소중함과, 지난 쓰라린 경험을 기억으로, 다시는 이러한 어리석은 일을 당하지 말자는 것과,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 버린 순국선열들의 그 숭고한 정신과 삶을 오늘에 재현시키고자 하는 의미와 이것들을 후손들에게 기억케 하기 위함 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광복절을 참으로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그는 애국지사도, 그 후손도 아님에도 그렇습니다. 감옥에 죄수들입니다. 뜻 밖이라고 들릴지 모르지만, 왜냐하면 이러한 경축절에는 죄수들에 대하여 특별한 사면이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곧 자유를 얻을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금일에 우리 사회에 큰 물의가 일어나게 된 것도 이러한 문제에 기인하였다 하겠습니다. 어째든, 광복절에 이러한 사면을 시행함으로 '자유'를 선언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유대인들도 유월절에는 죄수를 사면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을 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광복절에 인간이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도,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자유에 대하여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귀 기울여 말씀을 듣고, 주님의 자유로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일러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자유에 대하여 두 가지 해답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자유란 무엇인가!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러한 자유를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 하는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말씀하시니, 예수님을 반대하던 유대인들이 비난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남의 종이된 적이 없거늘, 어찌 우리로 자유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라고 그를 조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유에 대하여 저들이 바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애써 부인하려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가 말씀하시는 '참 자유'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로 알지 못하고는 오늘 유대인들 처럼 자유는 고사하고, 참 자유를 가르치시는 예수님까지도 불신하게 될 것입니다. 34절에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죄에서 자유하는 자유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유와 방종을 바르게 알지도 못하지만, 죄에서 자유하는 자유에 대하여도 잘 알지 못합니다. 아니,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도 정확한 인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이 더해 진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자유'라고 밀 할 때, 이들 유대인들처럼, 정치적 자유, 신체적 자유, 가난과 무지로부터의 자유 등에 대한 생각만을 떠올리게 됩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정신적 자유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유를 추구합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그 소중함도 인식을 합니다. 그러기에 민족광복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받치고, 생명을 희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질병에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 어찌 육체적 자유를 갈구하지 않겠으며, 가난으로 온 가족들이 헤어져 살게 된 지경에 있으면서 어찌 물질로부터 자유를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만이 자유의 전부가 아님을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추구해야 할 자유란 '죄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 기록된 두 인물을 생각하면서 이 자유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먼저는 솔로몬 왕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생각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라면 자유인이라고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는 막강한 권세를 가진 王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라까지 막강하여, 당시 주위의 어떤 나라로부터도 군사적 위협을 받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그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는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1000명의 아내들을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 그는 마음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할 수 있었고, 또 누려본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그는 정신적으로도 부요를 누린 왕이었습니다.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서 인류 역사 속에서 그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다고 증거를 얻은 사람입니다. 열왕기 상 4장에 이러한 솔로몬에 지혜와 총명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그는 잠언 3천과 수 많은 노래들을 지었고, 식물을 말한다면 레바논 백향목에서 담벼락에 나는 우슬초에 대하여 까지 막힘이 없이 말 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던 인물입니다. 사람이 가지기를 욕망하는 모든 것을 솔로몬 왕은 소유한 참 자유인이라고 여겨집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입니다. 그야말로 참으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었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래도 원죄를 지고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만, 아담의 경우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 같이, 그보다 더 부자는 세상에는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의 것이었습니다. 또 거를 답답하게 할 환경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최고의 입지조건의 환경인 에덴 동산에 거처를 가졌습니다. 그 외에도 세상에 오직 한 아름다운 사람, 여자-하와를 아내로 맞은 부족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무엇에도 구속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자유인이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무지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담은 벌거벗고, 짐승같이 무지한 저능한 소위 원시인(源始人)이 아닙니다. 그의 지혜와 지식은, 모든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참으로 자유하였는가! 하는 질문을 해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그의 참회록인 전도서1:2에서 '헛되며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그가 허무함에서 결코 자유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전도서1:18절에는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고 자신의 지혜의 한계와 그 번뇌에 대하여 술회하였습니다.
아담의 경우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자유하는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마음의 욕망에서부터 자유하지는 못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그가 남긴 말은 없지만, 그이 행위가 그것을 대변해 주는데, 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만족한 자유를 누렸다면 왜 실과를 먹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 '자유'에 대하여 말씀하게 되신 배경에도, 이러한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의 사건이,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자유에 대하여 말씀하시게 된 원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육체의 정욕에서 결코 자유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로 보건데, 시대를 초월하고, 신분을 초월해서, 오늘을 사는 나를 포함한 모든 인생들도 아담이나, 솔로몬보다 더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유에 관한 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과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에게 자유는 영원히 없는 것일까요 참 자유란 무엇이란 말인지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진리를 알지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진리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 진리란 주님의 말씀이요, 주님 자신이기도 합니다. 즉 주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르치신 것도 이것입니다. 그 열매로 그것을 가르쳐 보이신 것입니다. 그 열매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담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신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아담으로 스스로 자유하도록 속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창조의 신비 속에서도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만물이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본래와 질서 안에서 자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행복이기도 합니다. 새는 공중에서, 물고기는 물 속에서 참으로 자유하게 됩니다. 새가 자신을 날개하는 날개를 짐으로 여기며 불평하지 않듯이, 사랑하시는 부모님의 간섭과 채찍을 구속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듯이, 아담도 선악을 알게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계시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열매를 불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자유의 시작이고, 알 때에 참으로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不信 가운데서는 자유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유와 방종을 혼돈합니다. 아담이 선악의 열매를 먹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거나,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는, 죄인이 그 本性데로 자유하는- 방종을 참 자유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무지함 때문입니다만, 그것까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죄인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며, 그와 연합 함으로 자유하게 되듯이, 이것은 속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자유를 알지 못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도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사도 바울이나, 스테반 집사에게서 우리는 참 자유가 어떤 것인가를 보게 됩니다. 스테반은 죽는 그 자리에서까지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음과 육체의 자유에서 우러나오는 만족과 평안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고, 꺼꾸러 뜨림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였지만... 그는 싸이지 않았고, 꺼꾸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찬송할 수 있었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근본 주님 안에 있던 것으로, 그의 약속대로, 그를 믿고, 따른 참 제자들에게 주신 '자유와 평안'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이나, 개혁을 통하여, 또는 수양이나, 금욕적인 수단으로 자유를 얻으려고 합니다. 대통령 중심제니, 내각제가 자유와 행복을 보장할 것 같이 떠듭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진정한 자유를 주지 못합니다. 자기억제일 뿐이고, 일시적, 육체적 자유를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오직 주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십시오. '너희가 내 말에 거(居)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는... 참 자유는, 진리이신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제자들이 알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주는 자유가 아니면, 결코 참 자유가 아닙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자유를 빼앗기면 노예가 됩니다. 물질에 노예, 세상 권세의 노예, 명예의 노예, 건강에 노예.... 예수님께서는 그의 자녀된 우리에게 이러한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위하여, 어떤 선국열사들 보다도 그의 생명과, 그의 피를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유의 재산이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권고처럼(갈5:1), 우리에게 주신 이 자유를 영원히 소중히 알고, 누리며, 지키고 전파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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