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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억압을 풀어 해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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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사람이 견뎌 나가기 힘든 일이 많다. 불치병에 걸려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고, 외로움에 빠져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고통은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고통일 것이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 사회악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고, 죽는 것보다 못한 억압과 학대 가운데서 사는 사람도 있다.
동물 가운데에서나 통하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인간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앞세워 약소국가를 착취하고 있다. 부자들이 재물의 힘으로 가난한 자들을 억눌러 부익부 빈익빈의 골은 깊어가고 있다. 권력자들이 피지배자들을 억누르기도 한다. 힘 있는 남성들이 약한 여성이나 어린이들을 무력으로 억압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속담을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은 누구든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사랑하며 살도록 하셨다. 어떤 특정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잘 살기를 원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부르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셨다.
본문에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는 세 가지 사건이 나온다. 그런데 모세는 제삼자로서 이런 억압 사건을 외면하지 않고 그 문제를 자신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 문제에 뛰어든다. 비록 자기에게 큰 손해가 되더라도 말이다. 결코 그는 회피할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다.
1. 애굽인이 히브리인을 폭행할 때(11-12)
모세가 장성한 후에, 자기 형제들 즉 동포들의 생활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 때가 40세(행7:23)였다.
모세는 120세를 살았다. 그의 생애는 40년을 한 단위로 해서 3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애굽 땅에서 바로의 공주의 양자로서 자라면서 교육받았던 40년 애굽 궁중생활 시대, 제2기는 미디안 광야생활 시대, 제3기는 출애굽시대이다.
제1기 40세까지는 애굽 공주의 양자로서 왕실 자손들과 함께 최고급 궁중학교에서 갖가지 학문과 기능을 익혔을 것이다. 그런 그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히브리인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다가 민족의식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모세는 동포들의 생활상이 궁금해서 왕궁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11). 애굽 사람들에 의해 동족이 억압받고 학대받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의 마음 속에 울분과 정의감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 동포들이 이 지경에 처해 있다니…. 나만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구나!’ 자신의 정체성과 함께 민족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 억압받는 자기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쪽에서 폭행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애굽인이 자기 동포를 때리고 있었다. 11절 후반부에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고 했다.
이 애굽 사람은 아마도 강제노동을 시키는 감독관이었을 것이다. 모세는 좌우를 살펴본 다음,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는 그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얼른 시체를 모래에 파묻어 버렸다(12).
물론 여기서 모세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옳지 않다. 그의 살인행위가 영웅적인 일로 미화되어서는 안된다. 반면에 폭력을 사용해서 애굽인을 죽인 모세를 일방적으로 살인자로 몰아세우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 사건은 모세가 애굽 왕자로서의 모든 영화보다 자기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위대한 결단을 내리는 신앙적 사건이었다. 히브리서는 이것에 대해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다”(히11:24,25)고 평하였다.
 사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양자로서 동포들이야 어떻든지 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런 특권과 부귀영화에 눈멀어 자기만 호의호식하지 않았다. 모세는 자기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자기 민족의 고난에 동참했다. 이것이 모세의 위대한 점이다.
2. 힘 있는 히브리인이 약한 히브리인을 폭행할 때(13-15)
그 이튿날 모세는 다시 왕궁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았다. 잘못한 자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13) 하고 꾸짖었다. 그러나 잘못한 자는 도리어 모세에게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권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고 반발했다. 그가 살인한 일을 폭로하자(14),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게 되었다(15).
억압자의 편인 바로의 공주가 히브리 아기의 생명을 구했다면, 오히려 억압받는 동족 히브리인이 히브리인 모세의 생명을 위협하는 묘한 대조적인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동포를 아끼는 마음으로 꾸짖는 모세를, 잘못을 저지른 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모세를 배척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같은 동포끼리 먼저 사랑해야 한다. 우리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인 것도 내적인 원인은,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과 다툼을 벌였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어떤 사람들은 일본 편에, 어떤 사람들은 소련 편에, 어떤 사람들은 미국 편에 붙어서 동포를 배척했다. 주변 강대국들은 결코 우리 민족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금도 그들의 편이 되어서 민족의 분열을 획책하고,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무리들이 있다. 안타깝다.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동족끼리의 싸움을 말리고 동족을 도와주는 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극소수이긴 하지만, 민족의 화해를 위해, 민족의 통일을 위해 자신을 던져 일하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이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해 일해야 한다.
3. 남자 목자들이 여자 목자들을 억압할 때(16-22)
미디안족은 아브라함과 그두라 사이에서 난 넷째 아들 미디안의 후예이다(창25:2). 모세는 미디안 땅 어느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광야와 사막에서 목축을 하는 유목민들에게 우물은 생명과 재산을 보존시키는 원천으로서 매우 소중하였다.
그래서 우물을 둘러싼 분쟁도 잦았다.
미디안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 양들에게 물을 먹이려 하는데 남자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았다. 지금부터 3천 5백년이니, 감히 여자가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남자가 좀 늦게 왔다고 해도 먼저 물을 먹인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 관행이었다(18).
그리고 사실 모세는 애굽에서 남의 일에 간섭하다가 도피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미디안 광야에서는 좀 조용히 지낼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다. 모세는 불의한 일은 눈 뜨고 못 보는 사람이었나 보다. 모세 자신이 남성이었지만, 여성에게도 동등한 권리가 있음을 그는 깨달았다.
그런 면에서 모세는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진보주의자이며 선구자인 셈이다. 모세는 이 광경을 묵과하지 않고 즉시 일어나 먼저 온 여성들의 권리를 지켜 주었다.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하는 모세였다면, 만약의 경우에 자기 혼자서 여러 남자 목자들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안일보다 약한 여자들의 권리를 위해서 용감히 나섰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의 집에서 동거하게 되었고, 그 집 딸 십보라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고(21), 아들을 낳아 게르솜이라고 했다(22).
다음 장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할 민족의 지도자로 쓰임 받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모세가 힘 있는 불의한 자의 편에 서지 않고, 오히려 힘 있는 자들에게 억압받는 약자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칠 때도 그랬고, 힘 있는 불의한 히브리 사람이 다른 히브리인을 칠 때도 그랬고, 남자 목자들이 여자 목자들의 권리를 빼앗을 때도 그랬다. 모세는 침묵하지 않았다.
1996년 8월에 서울 성수동에서 있었던 일이다. 최성규라는 사람이 밤 10시경에 차를 타고 가다가 여대생을 성폭행하려는 범죄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범인은 반항하는 이양을 칼로 찌른 뒤 달아나기 시작했다.
최성규라는 사람은 즉시 차를 세운 뒤, 범인을 15m 정도 뒤쫓아 갔다. 그는 흉기를 든 범인과 격투를 벌였으나 범인이 휘두른 등산용 칼에 배를 찔려 죽고 말았다. 못 본 체하고 그냥 지나가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억압받는 사람을 차마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없어서 뛰어들었던 것이다.
과연 우리가 이런 현장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최선을 다해 어려움 당한 사람을 도울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안일을 위해 그 현장을 빠져나갈 것인가
참된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은 불의를 보고 일어설 줄 알아야 한다. 특히 강자가 약자를 억압할 때, 약자와 힘을 합해 강자에게 맞서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용기이다. 바로 모세가 이런 용기를 가졌기에 민족을 이끄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용기가 부족하고 힘이 없어서 적극적으로 불의에 대항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억울하게 고통 당하는 약자를 돕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최소한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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