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절반의 광복 반세기
본문
6월은 민족 상잔의 아픔으로 눈물의 달이요, 피흘림의 달이었으나 지난 6월 13일에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또 다른 기념비적인 날로서 그리고 달로서 역사에 남을 만한 화해와 평화의 달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분단국가의 오명아래 서로가 적대시하며 적성국가로 반세기를 지나왔으나, 역사적 섭리에 순응하여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날 평양의 순안비행장에 도착하여 트랩을 내려오기 전, 한참을 어느 곳인가 혼자 응시하던 그 감회를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단 55분이면 갈 수 있는 평양에 자그마치 55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해서였는지 모릅니다. 김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로 두손을 맞잡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찐한 흥분과 감동을 느꼈습니다. 비록 남과 북이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한 민족임을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는 어느 소녀의 뜨거운 눈망울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갈라진 두 민족이 하나가 된다는 것, 이것만큼 우리 민족에게 있어 큰 과업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지난 두 정상간의 만남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인내를 갖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정부차원에서는 7. 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92년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그리고 최근의 지속적인 햇볕정책을 통해 그 준비작업이 진행된 결과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차원에서도 남북대화는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지난 1986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중재에 따라 스위스의 글리온에서 남북의 교회가 첫모임을 가졌고, 88년과 90년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95년 일본 교토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교 국제협의회"를 개최했던 것입니다. 남북교회는 함께 모여 연합예배를 드리고, "한반도 통일 희년 성취를 위한 공동노력"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선언문을 작성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반세기동안 교회는 교회에서나 산에서나 토굴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금식하며 기도해 온 성도들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간의 경제적 교류, 특히 현대그룹명예회장의 1천 한 마리의 소를 몰고 38도선을 넘었던 것 등 이러한 노력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남북의 정상들이 만나 대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만남을 가진 후에는 너무 속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과 이제는 곧 통일이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하는 성급한 자들과 아직도 그들의 속셈을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6. 25가 일어났던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기만에 조심해야 한다는 불신의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정상들의 만남의 일들이 실무적으로 점차 가시화 되어 가는 가운데 지난 7월에는 양측 외무장관이 남한에서 만났고 이제 내일 모레면 양쪽의 이산 가족 각각 100명씩이 서로 교환 방문하여 만나게 되는 역사적인 날을 두고 감격하며 8순노인들이 어린아이처럼 잠못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광복절은 그 어느해 보다도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광복절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즉 서울과 평양에 집중된 상태에서 온전한 광복의 소망을 가지고 기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실감하게 만드는 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100명 중에는 이북에서는 고위급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월북시인 오재영씨의 사모시 아, 나의 어머니 란 시를 써서 91년도에 미주동포 문인들이 발행한 잡지 통일예술 지에 실려서 어머니에게 전달된 시가 이렇습니다.
생존해 계시다니/생존해 계시다니 /팔순이 다 된 그 나이까지/오늘도 어머님이 생존해 계시다니
/그것은 캄캄함 밤중에 /문득 솟아오른 해님입니다. / 한꺼번에 가슴에 차고 넘치며 / 쏟아지는 기쁨의 소나기입니다. / 그 기쁨 천근으로 몸에 실려 / 그만 쓰러져 웁니다. / 목놓아 이 아들은 울고 웁니다.
땅에 엎드려 넋을 잃고 / 자꾸만 큰절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내려오는데 어머니는 95년도에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변화의 한 복판에 서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기독교인이기에 앞서 한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남북한의 정상이 만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가는 이 상황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겠습니까 예수 안에서 시작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곧 평화의 나라를 증언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면, 우리 교회가 서야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변화의 한 복판에서 서야할 자리는 바로 "화해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화해만큼 힘든 일도 없고, 또 보람있는 일도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화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화해가 없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단지 잠시 전쟁을 멈춘 휴전일 뿐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평화가 없는 휴전을 50년 이상 견뎌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통일과 평화는 이 민족의 궁극적 이상입니다. 그리고 화해는 통일과 평화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적 목표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서야할 자리는 분명합니다. 그 곳은 곧 화해의 자리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 평화의 도구란 곧 '화해의 일꾼'이요, '대화의 중재자"로 써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바로 그 기도는 이제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서 안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모세 이야기, 다윗 이야기, 그리고 바울이야기 등등,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역사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파노라마는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화해의 이야기는 구약과 신약에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인 창세기의 요셉과 형들의 화해의 장면과 아버지 다윗을 배반했던 압살롬과 다윗 사이에 있었던 화해 사건이 있습니다(삼상 14: 25-33). 그리고 지난 6월18일 주일에 말씀드린 야곱과 에서의 화해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인류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의 화해 사건입니다. 이처럼 성서는 화해의 산 증언입니다.
특히 오늘은 함께 늘 읽은 창세기 45장1-15절은 요셉과 그의 형들의 화해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본문말씀을 중심으로, 진심으로 화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즉, 화해의 조건들에 대해 잠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요셉과 형들의 헤어짐에 대한 이유는 우리가 잘아는대로 형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열 한 번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때 형님들로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었고 그로 인해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요셉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고향과 친척을 잃은 고통이었습니다. 어쩌면 낙원을 향하여 가는 자들의 첫 관문인지도 모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역시 고향과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게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결국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만날 길이 없습니다. 집에서는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죽은 줄로 알고 제사까지 지냈는데도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이 어디엔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었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고 평생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고 있었고 아버지 야곱은 아들들의 말을 듣고 요셉이 짐승에 물려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뭄이 시작되었습니다.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굶을 지경에 놓였습니다. 여기에서 만남의 자리가 시작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동안 많은 세월을 기다렸지만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이북이 이렇게 쉽게 빨리 만날 수밖에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가 이북에 찾아온 기근입니다. 몇 년 동안 우리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꽃제비들, 그래서 생명을 걸고 국경을 넘어 탈북하는 난민들의 행렬과 사선을 넘다가 생명을 잃고 강물에 떠내려오는 시신들을 보았습니다. 그동안 이북은 세계를 향하여 구걸의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기회에 우리는 정부 주도적이기 보다는 민간 주도적으로 이북을 도왔습니다. 여기에 우리 기독교도 한몫을 감당했고 우리 교단도 분유와 밀가루, 그리고 감자씨, 비료등을 보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오지 않았더라면 요셉의 형제들과 아버지와 요셉이 만났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남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 7년 흉년이라는 엄청난 재난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단순히 요셉을 구원코자 함은 아닙니다. 요셉을 구원하여 이스라엘을 민족을 형성시켜 장차 세계에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기 위한 원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북한의 기근이 우연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섭리임을 믿습니다. 기근이 1년도 아닌 수년동안 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고 이 민족을 통하여 원대한 선교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인줄 믿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결국 요셉은 꿈에도 그리던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고 반면에 형들은 만나고 싶지 않았던 늘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았던 그들이었기에 오히려 놀랬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평소에 얼마나 가슴 졸이며 살았는가 하는 것은 이들이 첫 번째로 애굽에 내려갔을 때 이미 요셉은 형들임을 알아보았고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른의 안부를 묻고는 정탐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뒤집어씌우고는 막내 동생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 요셉의 형들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42:21절에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그리고 본문에 보면 요셉이 베냐민을 데리고 형들을 만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내어보내고서 형제들끼리 있을 때 '내가 당신들의 동생 요셉입니다. 아버지는 잘 계십니까'라고 했을 때 형들이 놀라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했거늘 이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니까 곧바로 동생을 괴롭히고 거짓말하여 팔아 넘긴 것을 생각했다는 것은 그만큼 평소에 마음 졸이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은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자신의 죄과로 돌리는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작은 어려움을 만나거나 원하지 않는 일을 당할 때에 일단 자신들의 반성의 기회로 삼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작은 메시지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하고 잘못된 길로 나갈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형들과의 만남 속에서 형들은 마음졸이며 울며 겨자 먹기로 시므온을 결박하여 두고 동생을 데리고 다음에 양식을 구하러 올 때는 막내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절박한 숙제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을 쉽게 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라헬로부터 낳은 두 아들 가운데 요셉을 이미 잃었는데 이제 남은 베냐민 마져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양식은 다 떨어지고 하는 수 없이 아들들의 간청에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을 내어주었고 형들은 영문도 모르고 베냐민을 데리고 왔을 때 두 번째로 요셉과 상봉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여기서 요셉이 형들을 만나 형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아름다운 화해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화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온전한 광복을 위해서 그리고 통일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번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화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을 애굽 상인들에게 팔아 넘겼던 형들에 대한 요셉의 용서가 있었습니다.
4-5절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요셉입니다. 형들이 애굽에 팔았던 자입니다. 형들이 나를 애굽에 팔았던 것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탄하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기 위해서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었습니다" 8절에서는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아직도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형들이 마음을 놓았던 것은 요셉이 형님들에게 입을 맞추고 안고 울 때에 그때에 요셉과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화해는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 용서를 구할 때도 이루어질 수 있지만, 잘못함이 없는 사람이 용서받아야 할 사람을 무조건 용서해줄 때 진정한 화해가 일어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언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까 우리가 용서를 구할 때입니까 우리가 믿음생활을 잘 할 때 찾아주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때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였고, 우리가 아직도 죄를 지으면서 벌벌 떨고 있을 때 찾아오셔서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다시는 범죄치 말라"하시면서 다가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는 북한이 남침을 한 원흉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적으로만 생각하고 아직도 그들이 사과할 때만이 대화를 하겠다고 하거나 그들이 용서를 구할 때 우리가 만날 수 있다고 했더라면 결단코 대화를 하지 못했을 것이며, 아직도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화해는 역시 큰 자가 합니다. 당신이 왜 사과하러 안 오느냐고 이유를 붙이면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당시에는 원망스럽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서 미움의 대상을 만났을 때 오히려 형제애를 나눌 때만이 화해가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항상 강조하는 것이 '당신이 와서 사과하면 화해하겠다'고 합니다. 서로가 그렇게 말하면서 앉아 있으면 평생을 두고도 화해가 될 수 없고 그러면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늘 마음에 미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고 주여- 주여- 하고 교회를 찾아와 앉아 있는 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내게 나아오라' 고 말입니다.
창33장에 보면 에서와 야곱이 화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보면 야곱은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일까 하여 겁을 잔뜩 집어먹고 형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여 갔는데 오히려 형 에서가 야곱을 만났을 때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동생이 줄려고 하던 짐승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윗왕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하였고 아버지 다윗은 쫓겨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라고 부르면서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탕자 비유를 보더라도 탕자로 보지 않고 아들로 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화해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는 화해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이 사랑이 발동할 때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화해의 무드를 조성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피스메이크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의 사자로 나아가야 합니다. 일을 자꾸만 묶거나 일을 엉킨 실타래처럼 헝클어 버리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회칠한 무덤같다"고 했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고 사는 여러분들이 먼저 다가가서 용서해 주는 화해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화해의 조건은 형제애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형제애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를 이야기 할 때 사용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요셉의 경우를 보아도 우선 배다른 형님들보다도 한 어머니 라헬로부터 난 동생 베냐민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이 왔을 때 그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안고 울었습니다.
남과 북은 한 동족입니다. 한 형제입니다. 여기에는 어느 민족도 섞여있지 않습니다. 순수한 배달의 민족입니다. 형제가 만나는데 누가 감히 방해를 하겠습니까 소련이나 미국등 한반도 주위를 둘러싼 열강들이 우리의 통일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한 핏줄임을 인식하면 충분히 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아무리 원수같은 형제라도 마지막에는 결국 형제가 뭉칩니다. 집안에서 형제간에 원수같이 싸우고 해도 집밖에 나가면 얼마나 동생을 사랑하고 아끼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형제애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들간에도 형제들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수혈 받은 형제들입니다. 십자가 밑에 모인 혈맹의 관계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도들은 육신적인 형제들만큼이나 사랑하고 아끼고 도우며 살아야 합니다. "한피 받아 한몸 이룬 형제여 자매들이여 우리 주님 거룩한 손 제자들의 발을 씻겨"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하나여야 합니다. 화해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 모인 성도들, 육신적인 혈육의 관계를 가진 동족, 현재도 이산가족이 1천만 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우리가 통일을 이루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욕심만 버리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왜요 우리는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는 화해를 이룬 조건은 믿음입니다.
요셉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신앙이 없었다면 화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요셉이라고 할 때에 형제들을 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하겠습니까 그것도 배달은 형제들인데 말입니다. 수십년 동안 마음에 두고두고 곱씹어 가지고 단단해 질대로 단단해진 마음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요셉은 전혀 그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같은 교회 안에서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가 반목하고 지냅니다. 한자리에 앉아서 회의를 하고 있어도 마음에 응어리진 마음을 가지고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가증스럽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생활 바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라는 엄청난 화해의 도구 아래 모인 자들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얼마나 신앙적인지 모릅니다. 모든 사건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돌렸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냄새가 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도 편하더라구요. 분명히 요셉을 판 것은 형들의 시기심 때문이었고 그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우리 가족을 흉년에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미리 보내셨다고 하는 고백을 합니다. 얼마나 멋있는 고백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할렐루야!
형제들이 어려움을 주거든 용서하지 못할 일이 있거든 그러면서도 그런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손벌리러 오거든 "꼬시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에게 이렇게 꾸어줄 수 있게 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는 믿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경우에 교회가 이북의 교회를 안고 동포를 안고 그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온전한 해방, 그리고 통일을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갈라진 두 민족이 하나가 된다는 것, 이것만큼 우리 민족에게 있어 큰 과업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지난 두 정상간의 만남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인내를 갖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정부차원에서는 7. 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92년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그리고 최근의 지속적인 햇볕정책을 통해 그 준비작업이 진행된 결과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차원에서도 남북대화는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지난 1986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중재에 따라 스위스의 글리온에서 남북의 교회가 첫모임을 가졌고, 88년과 90년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95년 일본 교토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교 국제협의회"를 개최했던 것입니다. 남북교회는 함께 모여 연합예배를 드리고, "한반도 통일 희년 성취를 위한 공동노력"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선언문을 작성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반세기동안 교회는 교회에서나 산에서나 토굴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금식하며 기도해 온 성도들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간의 경제적 교류, 특히 현대그룹명예회장의 1천 한 마리의 소를 몰고 38도선을 넘었던 것 등 이러한 노력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남북의 정상들이 만나 대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만남을 가진 후에는 너무 속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과 이제는 곧 통일이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하는 성급한 자들과 아직도 그들의 속셈을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6. 25가 일어났던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기만에 조심해야 한다는 불신의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정상들의 만남의 일들이 실무적으로 점차 가시화 되어 가는 가운데 지난 7월에는 양측 외무장관이 남한에서 만났고 이제 내일 모레면 양쪽의 이산 가족 각각 100명씩이 서로 교환 방문하여 만나게 되는 역사적인 날을 두고 감격하며 8순노인들이 어린아이처럼 잠못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광복절은 그 어느해 보다도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광복절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즉 서울과 평양에 집중된 상태에서 온전한 광복의 소망을 가지고 기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실감하게 만드는 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100명 중에는 이북에서는 고위급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월북시인 오재영씨의 사모시 아, 나의 어머니 란 시를 써서 91년도에 미주동포 문인들이 발행한 잡지 통일예술 지에 실려서 어머니에게 전달된 시가 이렇습니다.
생존해 계시다니/생존해 계시다니 /팔순이 다 된 그 나이까지/오늘도 어머님이 생존해 계시다니
/그것은 캄캄함 밤중에 /문득 솟아오른 해님입니다. / 한꺼번에 가슴에 차고 넘치며 / 쏟아지는 기쁨의 소나기입니다. / 그 기쁨 천근으로 몸에 실려 / 그만 쓰러져 웁니다. / 목놓아 이 아들은 울고 웁니다.
땅에 엎드려 넋을 잃고 / 자꾸만 큰절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내려오는데 어머니는 95년도에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변화의 한 복판에 서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기독교인이기에 앞서 한 한국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남북한의 정상이 만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가는 이 상황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겠습니까 예수 안에서 시작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곧 평화의 나라를 증언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면, 우리 교회가 서야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변화의 한 복판에서 서야할 자리는 바로 "화해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화해만큼 힘든 일도 없고, 또 보람있는 일도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화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화해가 없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단지 잠시 전쟁을 멈춘 휴전일 뿐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평화가 없는 휴전을 50년 이상 견뎌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통일과 평화는 이 민족의 궁극적 이상입니다. 그리고 화해는 통일과 평화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적 목표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서야할 자리는 분명합니다. 그 곳은 곧 화해의 자리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 평화의 도구란 곧 '화해의 일꾼'이요, '대화의 중재자"로 써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바로 그 기도는 이제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서 안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모세 이야기, 다윗 이야기, 그리고 바울이야기 등등,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역사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파노라마는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화해의 이야기는 구약과 신약에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인 창세기의 요셉과 형들의 화해의 장면과 아버지 다윗을 배반했던 압살롬과 다윗 사이에 있었던 화해 사건이 있습니다(삼상 14: 25-33). 그리고 지난 6월18일 주일에 말씀드린 야곱과 에서의 화해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인류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의 화해 사건입니다. 이처럼 성서는 화해의 산 증언입니다.
특히 오늘은 함께 늘 읽은 창세기 45장1-15절은 요셉과 그의 형들의 화해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본문말씀을 중심으로, 진심으로 화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즉, 화해의 조건들에 대해 잠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요셉과 형들의 헤어짐에 대한 이유는 우리가 잘아는대로 형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열 한 번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때 형님들로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었고 그로 인해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요셉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고향과 친척을 잃은 고통이었습니다. 어쩌면 낙원을 향하여 가는 자들의 첫 관문인지도 모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역시 고향과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게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결국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만날 길이 없습니다. 집에서는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죽은 줄로 알고 제사까지 지냈는데도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이 어디엔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었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고 평생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고 있었고 아버지 야곱은 아들들의 말을 듣고 요셉이 짐승에 물려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뭄이 시작되었습니다.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굶을 지경에 놓였습니다. 여기에서 만남의 자리가 시작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동안 많은 세월을 기다렸지만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이북이 이렇게 쉽게 빨리 만날 수밖에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가 이북에 찾아온 기근입니다. 몇 년 동안 우리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꽃제비들, 그래서 생명을 걸고 국경을 넘어 탈북하는 난민들의 행렬과 사선을 넘다가 생명을 잃고 강물에 떠내려오는 시신들을 보았습니다. 그동안 이북은 세계를 향하여 구걸의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기회에 우리는 정부 주도적이기 보다는 민간 주도적으로 이북을 도왔습니다. 여기에 우리 기독교도 한몫을 감당했고 우리 교단도 분유와 밀가루, 그리고 감자씨, 비료등을 보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오지 않았더라면 요셉의 형제들과 아버지와 요셉이 만났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남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 7년 흉년이라는 엄청난 재난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단순히 요셉을 구원코자 함은 아닙니다. 요셉을 구원하여 이스라엘을 민족을 형성시켜 장차 세계에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기 위한 원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북한의 기근이 우연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섭리임을 믿습니다. 기근이 1년도 아닌 수년동안 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고 이 민족을 통하여 원대한 선교의 역사,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인줄 믿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결국 요셉은 꿈에도 그리던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고 반면에 형들은 만나고 싶지 않았던 늘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았던 그들이었기에 오히려 놀랬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평소에 얼마나 가슴 졸이며 살았는가 하는 것은 이들이 첫 번째로 애굽에 내려갔을 때 이미 요셉은 형들임을 알아보았고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른의 안부를 묻고는 정탐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뒤집어씌우고는 막내 동생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 요셉의 형들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42:21절에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그리고 본문에 보면 요셉이 베냐민을 데리고 형들을 만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내어보내고서 형제들끼리 있을 때 '내가 당신들의 동생 요셉입니다. 아버지는 잘 계십니까'라고 했을 때 형들이 놀라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이제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했거늘 이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니까 곧바로 동생을 괴롭히고 거짓말하여 팔아 넘긴 것을 생각했다는 것은 그만큼 평소에 마음 졸이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은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자신의 죄과로 돌리는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작은 어려움을 만나거나 원하지 않는 일을 당할 때에 일단 자신들의 반성의 기회로 삼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작은 메시지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하고 잘못된 길로 나갈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형들과의 만남 속에서 형들은 마음졸이며 울며 겨자 먹기로 시므온을 결박하여 두고 동생을 데리고 다음에 양식을 구하러 올 때는 막내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절박한 숙제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을 쉽게 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라헬로부터 낳은 두 아들 가운데 요셉을 이미 잃었는데 이제 남은 베냐민 마져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양식은 다 떨어지고 하는 수 없이 아들들의 간청에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을 내어주었고 형들은 영문도 모르고 베냐민을 데리고 왔을 때 두 번째로 요셉과 상봉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여기서 요셉이 형들을 만나 형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아름다운 화해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화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온전한 광복을 위해서 그리고 통일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번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화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을 애굽 상인들에게 팔아 넘겼던 형들에 대한 요셉의 용서가 있었습니다.
4-5절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요셉입니다. 형들이 애굽에 팔았던 자입니다. 형들이 나를 애굽에 팔았던 것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탄하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기 위해서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었습니다" 8절에서는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아직도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형들이 마음을 놓았던 것은 요셉이 형님들에게 입을 맞추고 안고 울 때에 그때에 요셉과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화해는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 용서를 구할 때도 이루어질 수 있지만, 잘못함이 없는 사람이 용서받아야 할 사람을 무조건 용서해줄 때 진정한 화해가 일어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언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까 우리가 용서를 구할 때입니까 우리가 믿음생활을 잘 할 때 찾아주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때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였고, 우리가 아직도 죄를 지으면서 벌벌 떨고 있을 때 찾아오셔서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다시는 범죄치 말라"하시면서 다가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는 북한이 남침을 한 원흉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적으로만 생각하고 아직도 그들이 사과할 때만이 대화를 하겠다고 하거나 그들이 용서를 구할 때 우리가 만날 수 있다고 했더라면 결단코 대화를 하지 못했을 것이며, 아직도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화해는 역시 큰 자가 합니다. 당신이 왜 사과하러 안 오느냐고 이유를 붙이면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당시에는 원망스럽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서 미움의 대상을 만났을 때 오히려 형제애를 나눌 때만이 화해가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항상 강조하는 것이 '당신이 와서 사과하면 화해하겠다'고 합니다. 서로가 그렇게 말하면서 앉아 있으면 평생을 두고도 화해가 될 수 없고 그러면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늘 마음에 미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고 주여- 주여- 하고 교회를 찾아와 앉아 있는 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내게 나아오라' 고 말입니다.
창33장에 보면 에서와 야곱이 화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보면 야곱은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일까 하여 겁을 잔뜩 집어먹고 형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여 갔는데 오히려 형 에서가 야곱을 만났을 때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동생이 줄려고 하던 짐승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윗왕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하였고 아버지 다윗은 쫓겨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라고 부르면서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탕자 비유를 보더라도 탕자로 보지 않고 아들로 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화해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는 화해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이 사랑이 발동할 때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화해의 무드를 조성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피스메이크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의 사자로 나아가야 합니다. 일을 자꾸만 묶거나 일을 엉킨 실타래처럼 헝클어 버리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회칠한 무덤같다"고 했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고 사는 여러분들이 먼저 다가가서 용서해 주는 화해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화해의 조건은 형제애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형제애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를 이야기 할 때 사용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요셉의 경우를 보아도 우선 배다른 형님들보다도 한 어머니 라헬로부터 난 동생 베냐민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이 왔을 때 그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안고 울었습니다.
남과 북은 한 동족입니다. 한 형제입니다. 여기에는 어느 민족도 섞여있지 않습니다. 순수한 배달의 민족입니다. 형제가 만나는데 누가 감히 방해를 하겠습니까 소련이나 미국등 한반도 주위를 둘러싼 열강들이 우리의 통일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한 핏줄임을 인식하면 충분히 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아무리 원수같은 형제라도 마지막에는 결국 형제가 뭉칩니다. 집안에서 형제간에 원수같이 싸우고 해도 집밖에 나가면 얼마나 동생을 사랑하고 아끼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형제애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들간에도 형제들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수혈 받은 형제들입니다. 십자가 밑에 모인 혈맹의 관계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도들은 육신적인 형제들만큼이나 사랑하고 아끼고 도우며 살아야 합니다. "한피 받아 한몸 이룬 형제여 자매들이여 우리 주님 거룩한 손 제자들의 발을 씻겨"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하나여야 합니다. 화해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 모인 성도들, 육신적인 혈육의 관계를 가진 동족, 현재도 이산가족이 1천만 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우리가 통일을 이루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욕심만 버리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왜요 우리는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는 화해를 이룬 조건은 믿음입니다.
요셉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신앙이 없었다면 화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요셉이라고 할 때에 형제들을 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하겠습니까 그것도 배달은 형제들인데 말입니다. 수십년 동안 마음에 두고두고 곱씹어 가지고 단단해 질대로 단단해진 마음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요셉은 전혀 그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같은 교회 안에서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가 반목하고 지냅니다. 한자리에 앉아서 회의를 하고 있어도 마음에 응어리진 마음을 가지고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가증스럽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생활 바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라는 엄청난 화해의 도구 아래 모인 자들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얼마나 신앙적인지 모릅니다. 모든 사건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돌렸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냄새가 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도 편하더라구요. 분명히 요셉을 판 것은 형들의 시기심 때문이었고 그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우리 가족을 흉년에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미리 보내셨다고 하는 고백을 합니다. 얼마나 멋있는 고백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할렐루야!
형제들이 어려움을 주거든 용서하지 못할 일이 있거든 그러면서도 그런 형제들이 여러분에게 손벌리러 오거든 "꼬시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에게 이렇게 꾸어줄 수 있게 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는 믿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경우에 교회가 이북의 교회를 안고 동포를 안고 그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온전한 해방, 그리고 통일을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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