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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믿음의 눈으로 보는 광복

본문

사람들은 누구나 고난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 고난이 고난 당하는 당사자에게 유익을 가져다준다고 할 찌라도
그 고난의 길은 매우 힘들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고난은 또 여호와 하나님의 형벌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래서 욥기를 읽다보면
욥은 당대에 의인으로 살다가
사탄의 시기로 인하여 고난 당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욥이 당하는 그 고난이 마치 그의 죄나 허물의 결과 때문이 아니냐 하고
친구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고난이라고 하는 것
이것을 그렇게 꼭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난에는 부정적인 요소가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긍정적인 요소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난이란 처음에는 고난 당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그 고난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난 당하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여 주기도 하며
고난 당하는 사람을 성장시켜주기도 하고
무엇보다
고난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허황되지 않고 바르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면서
그의 내면세계나 인격을 성숙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지난 날의 고난들을 회고하여 볼 때
물론 그 당시는 힘들고 어려웠었지만
우리가 그 고난을 통하여 얼마나 많이 자라났는가를 생각하여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사람들은 시험에 떨어져 보고 나서야
예습과 복습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며
불조심을 평소에 하지 않고 살다가 자기의 집이 다 타고 나서야
꺼진 불도 다시보며 불조심해야 한다는 진리를 절감하게 되며
물난리를 겪고 나서야
해마다 다가오는 장마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되겠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잃어 버리고 나서,....
보증을 선 후 토지나 주택을 잃어버리고 나서,.....
자동차 열쇠를 차 안에 두고 문을 잠가 버리고 나서,.....
자동차에 기름이 거의 없는데도 마구 달리다가 자동차가 꼼짝없이 서 버리고 나서,.....
건강을 잃고 나서,....
싸움을 하고 나서,....
전쟁을 하고 나서,....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잃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싼 대가를 치루고 많은 것을 얻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원리는 한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1910년부터 1945년 까지 36년 동안
이웃 나라 일본의 지배 속에서 자유를 다 빼앗기고 살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또 그 고난을 통하여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고
자유의 소중함도 절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타나는 에서와 야곱 사이에 있었던 갈등과 화해의 역사나
이 야곱의 12아들 중 요셉과 다른 열한 형제들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과 화해의 역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본래 쌍둥이로서
태어나기 전,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다투었던 쌍둥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이 세상으로 나올 때 둘이 동시에 나올 수 없으므로
어쩔수 없이 하나가 몇분 먼저 나오고 하나는 몇분 뒤에 나옴으로서
형과 동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하여 태어난 에서와 야곱은
팥죽 사건에서 부터 시작하여 형제간에 많은 갈등을 겪더니
극기야는 아버님의 축복을 가로채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형 에서는 노하여 동생을 죽이려까지 하였고
결국 동생 야곱은 멀리 떨어진 외삼촌 라반의 집에 까지 가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20년을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제는 가까이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자주 다투게 되지만
또 떨어져 있게되면
서로 보고싶은 법이라
그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사건은 사건 자체가 워낙 큰 사건인지라
마음은 그래도 함부로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 구체적으로 야곱에게 떨어졌습니다.
겁이곳을 떠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겁
형과 헤어진지 약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야곱에게는 식구도 불어났고 재산도 불어났습니다.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늘 불편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형과의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가족과 늘 불편한 관계를 바르게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야곱에게는
비록 그의 형편이 여유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저들 형제들 각자는 여호와 하나님 믿는 신앙생활을 나름대로는 잘하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서로 미워하는 마음으로 얼룩져있었으며
그 문제를 서로가 신앙 안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던 참에
보다 못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제 적극적으로
그들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할 수 없이 잘 살고 있던 삶의 터전을 훌훌털고
말씀따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고향으로 떠나려 하니
형 에서가 마음에 크게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약 20년이 지나긴 하였지만
그동안 마음이 더 굳어지고 화가 나 있을까 조바심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형과 화해하려고 궁리끝에 생각한 것은
많은 예물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만큼 많은 예물을 준비하면 형의 어떤 화도 다 풀리겠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준비하였습니다.
암염소 200마리 수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수양 20마리
젖나는 약대 30마리와 그 새끼들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나귀 10마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예물을 준비하였어도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아마 물질 가지고 형의 마음을 풀어보겠다는 것은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할 수 없이 얍복강 가에서 밤이 새도록 한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도 기도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였던지
초저녁부터 새벽녘이 될 때 까지 기도하였는데
그때쯤 되어서야
그의 간절함과 마음 중심을 여호와 하나님은 받으시고 기도하며 매달리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란 새이름을 주셨습니다.
기도를 끝낸 야곱은 가벼운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형 에서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만나자 마자 서로 끌어안았습니다.
입을 맞추었습니다.
서로 목을 어긋나게 하고는 한동안 실컷 울었습니다.
형제들이었지만
20여년이나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다가
다시 그 관계를 회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그동안의 일들을 시시비비 서로 따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용서로 관용으로 서로 얼싸 안았습니다.
정말 한폭의 그림같은 광경이었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서로 만나 화해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야곱이 예물을 많이 준비했기 때문이 아니라
화해를 위한 기도를 밤새도록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
오늘 우리는 해방 54주년을 맞이하여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분단된 혈육으로 50여년을 지내고 있는 저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또 슬픔이 있습니다.
마치 에서와 야곱의 나누임 처럼...
남한과 북한 사이의 50여년의 세월은
서로 많은 이념의 차이와 생활 방식의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서로 만나 화해하고 두동강난 이 나라를 다시 통일하려는 생각과
그 접근하는 방식이 너무나 큰 거리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어떻게하면 남한과 북한이 서로 적대시 하지않고 화해를 하여
앞으로 다시 이 나라를 하나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민족적인 과제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곱의 처음 생각 처럼
남북의 통일을 위하여 남한 먼저 경제가 성장하고 발전하여
많은 물질을 비축하고
많은 예물들을 북한에 보내고
많은 공장들을 북한에 짓고
그러면서 그들을 경제적으로 이모저모로 도와주다보면
점차로 그들의 마음이 풀리지않을까
그러다보면 통일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방법이 남북이 하나되고 통일되는데 일조할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야곱이 그런 식으로 접근하다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밤새워 간절히 기도하였던 야곱의 모습을 본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화해와 일치, 통일의 역사는
물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은 또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광복 54주년을 맞이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가시는가를 살펴보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좀더 회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볼 때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형편이 좀 나아지고 잘 살게되니까
그들이 과거 애굽 땅에서 고생고생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하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향락을 일삼고, 우상을 섬기며, 죄를 밥먹듯 짓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여호와 하나님 없이는 삶이 힘들고 불편하였지만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 없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경제적으로 좀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자행자지하며 사는 모습을 보다 못한 여호와 하나님은
이 나라에 철퇴를 가하였습니다.
나라는 산산조각이 나게 되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라는 강대국에게 망하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에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빼앗기고 자유를 잃고
포로생활을 하게되면서야, 그때서야 드디어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아, 우리가 해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너무했나 보다.
여호와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냐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살았지만
그때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편 137편의 말씀처럼, 그들은
바벨론 강가에 앉아서
과거 한때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종종 슬피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만일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다시 회복하여 주시고
자유를 다시 허락하여 주시기만 하신다면
우리는 그 자유를 가지고 성전을 다시 짓고
그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고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정말 전적인 여호와 하나님 은총으로 식민지 생활을 전격적으로 청산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자 마자
만사를 제쳐놓고 무너진 성전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철저히 그동안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열심히 말씀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의 시기가 바로 그때 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다
것아멘, 아멘겄하며 화답하였습니다.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리라
다시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리라
다시는 말씀을 놓치지 않으리라는 각오가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이런 각오와 분위기는 얼마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저들의 형편이 좀 나아지게 되면서 부터
또다시 옛날처럼 죄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였으며
여호와 하나님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일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정부 관료, 종교 지도자,.. 위에서부터 아래 까지 국민 모두가
부정과 부패로 썩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철퇴는 이스라엘 나라 위에 또다시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없애 버리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 하나도 남기지않고 산산조각 내듯이 박살내어
세계 곳곳으로 완전히 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또 다시 엄청난 큰 채찍을 맞은 이스라엘 민족은
이젠 식민지가 아니라 나라를 완전히 잃게 되었고
세계 곳곳을 방랑하는 유랑민족으로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나라 없는 백성으로
유랑하는 백성으로 약 2000년 동안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정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역사란 무엇인가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역사를 볼 때
믿음의 눈으로 역사를 보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라고하는 것을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느냐 아니면 보통 눈으로 보느냐
어떤 시각을 가지고 보고 이해하느냐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비극적인 역사이고
아무 의미도 없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죽어 없어지는 역사 같을찌라도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면
때로 그 역사가 큰 의미가 있으며
그 뒤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보게도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광복 54주년을 맞이하여
어떻게하면 성도 여러분들이 역사를 볼 때 보통 눈으로 보지 아니하고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게 할 수 없을까
그리고 각자 자기자신의 오늘까지의 과거역사와 현재역사나
우리나라의 역사나 세계의 역사를 보면서
어떻게하면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해석하게 할 수 옶을까... 하는 심정에서
말씀을 준비하였으며
지금 애타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역사를 어떻게 보며
역사를 어떻게 믿음으로 해석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주제를 놓고
그 구체적인 실례를 성경을 통해서
좀 더 깊이 파헤쳐 보려고 합니다.
그 연구해보려는 내용은 바로 오늘의 본문을 전후로 한 내용입니다.
좀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면
야곱이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으면서부터 시작하여
야곱이 죽기까지가 역사를 해석하려는 그 시기의 전체적인 범위가 되겠습니다.
이 내용 가운데는 야곱과 12아들들이 등장합니다.
그 아들들은 모두가 다 한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한명이지만 여러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복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 사이에는 항상 시기와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들 형제들 사이에서 생긴 어려움 중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아버지의 편애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11번째 아들과 12번째 아들인 요셉과 베냐민을 다른 형제들 보다 더 사랑하였고
특히 요셉을 제일 많이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형제들은 티격태격하면서도 큰 무리없이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요셉이 어떤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부터 문제는 시작되었습니다.
열한 볏단이 자기 볏단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다느니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자기 별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다는 소리에
형들은 화가 잔뜩 나게되었고
그를 심히 미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형들은
어느날 동생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당시 요셉의 나이가 17세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형들의 미움 때문에 외국으로 팔려가는 17세 난 소년의 마음은
결코 아물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받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여러 형제들끼지 자라다보면
서로 다투기도하고 어떤 때는 심하게 싸우기도 하고
형들에게 매를 맞으면서 자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남의 나라에 자기를 팔아버리는 일까지 저지른 형님들을
동생 요셉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었고 용납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요셉이었다고 가정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울며 불며 살려달라고 애걸하는데도
형들은 듣지않고 자기를 진짜로 팔아버려
결국 다른 나라에 가서 살게 되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형들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복수할 날만 기다리며 있겠습니까
아니면 다 참고 용서해주겠습니까
아마 대답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은 이 요셉은
그토록 어렵게만 보이는 이 문제를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신앙적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이성적으로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일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해결하면
고난이 거기서 끝날 줄 기대했지만
그에게 닥치는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
고난은 마구 밀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불평이나 원망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믿음의 길에 서 있느냐 아니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느냐 아니냐 하는 점만을 점검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때가차매
여호와 하나님은 결국 요셉을
이국만리 떨어진 다른나라 애굽에서 총리대신까지 등극하게 하였습니다.
말이 총리대신이지 이것은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마치 이것은 우리나라 국무총리 자리에
저 아프리카 사람이나
저 동남아시아 사람이 총리직에 올랐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정말 이것은 종으로 잡혀간 나라에서
밑바닥에서 부터 올라가기 시작하여
왕의 자리 이외에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해 중동 지역에 가뭄이 닥쳤습니다.
한해도 아니고 여러해 가뭄이 닥치게 되어 이스라엘 나라 백성들은
물이 풍부하고 식량을 잘 비축해둔 애굽에 가서 쌀을 사다가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복수의 기회는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어느날 요셉의 형들이 쌀을 사러 애굽에 오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에는 형들이 둘러서서 자기를 괴롭히고, 구덩이에 처넣고
그것도 부족하여 외국 상인에게 자기를 팔아버렸던 바로 그 형들 열명이
이제는 양식이 궁하여 모두 쌀을 사러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고 나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럴 때 보통사람이면 쌀을 팔지않거나
팔기는 팔되 괴롭히면서 철저히 복수할 수도 있었겠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선으로 갚았습니다.
요셉과 형들 사이에 오고가는 쌀사러 가고 오는 묘사가 무려
창세기 42장에서 45장까지 4장에 걸쳐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그 쌀 사건의
결론

이 오늘의 설교 본문입니다.
그때 화가 나서 동생 요셉을 팔아버리기만 하면
이젠 영영 안볼 것이라고 생각했던 형들과
다시 극적으로 만난 순간이었습니다.
가해자인 형들과 피해자인 요셉의 마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희비가 교차하였을 것입니다.
형들은 이제와서 복수할 동생이 두려워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생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으로서 당신들이 애굽에 판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나를 팔았다고해서 이제와서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마소서
여호와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요셉의 믿음이요, 요셉의 역사관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살다보면 이해할 수도 없고 요셉처럼 억울한 일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욥처럼 바르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자녀가 생명을 잃기도 하며
믿음으로 또 바르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갑자가 남편이나 아내가 죽기도 하며
사업이 망하기도 하며
친척이나 친구 때문에 가정 경제에 큰 손실을 입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덩치가 큰 국가로 본다면, 나라가 남의 나라에 속박되기도 하고
나라가 완전히 망하기도 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사건과 역사 속에서
우리는 반드시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함부로 떨어지지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듯이
우리의 삶과 역사도 여호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철저히 믿으면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역사를 해석하는 법을 배우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진다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점도 내포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시각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라보면
54년전 우리민족의 해방은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신앙의 자유가 허락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새로운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세계선교를 향하여 사명을 감당해야만 한다는 점을
지니고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 해방의 사건 속에서 좀 더 깊이 깨달아야 할 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 민족 위에 광복을 주신 것은
이제는 바른 믿음과 바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과오를 자꾸 반복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사는 개인과 교회와 나라가 되라고 주신 선물임을
자각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또한 해방을 통한 신앙의 자유가 남쪽에만 주어졌기에
왜 여호와 하나님은 주실려면 한번에 다 주시지 부분적으로만 주시는가 하고
불평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를 믿음의 눈으로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겸허히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조국 광복 54주년을 맞아 감사와 감격으로 해방을 회고하며
앞으로는 믿음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려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과 우리 교회와
이 조국 위에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넘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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