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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새로운 해방을 향하여

본문

신구약 성서는 따지고 보면 해방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구약성서는 해방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은 이집트로부터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분이고 그 이야기는 출애굽기라는 큰 책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한 여정에서 쉼터와 광야에서 무얼 했습니까
그들은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를 놓고 그 금송아지 주변에서 춤을 추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벌써 여호와 하나님을 해방에 등을 돌린 잘못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 우리처럼 남과 북으로 갈라졌습니다.
 그 북쪽에 아모스 선지자가 살았습니다.
아모스서를 읽어보면 북쪽은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에 대한 빈부의 격차가 너무도 어마어마 했던 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남과 북의 분단 그리고 빈부의 격차로 오는 양극화, 이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민족들은 반드시 극복을 해야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집트에서 해방을 시켜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일년동안에 제일 큰 잔치인 유월절 행사를 열고 난리를 치지만은 그러나 그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해방을 등돌린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바빌론에 포로로 되어 갔지요.
거기에서도 실망 속에 있는 백성들에게 예언자들은 너희들이 회개를 하면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방을 시켜줄 날이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바빌론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까 읽은 성경의 본문은 그때의 이야기입니다.
웃음이 함박눈같이 터지는 그런 즐거움, 그러나 이들이 자기의 조국에 돌아와서 어떻게 됐습니까 조국에 돌아온 이후에 이들은 해방이 된 것이 아닙니다.
사회는 로마제국에 의해서 통치를 받고 교회라고 하는 것은 바리새주의에 빠져서 율법에 노예가 되고 이러한 때에 여기에 하나의 큼직한 역사의 전환이 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시던 곳이 나사렛입니다.
나이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안식일 예배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나가니까
오늘 설교를 해달라고 그랬습니다. "좋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펴주는 성경을 보고 읽었습니다. 그 성경이 이사야 61장 1절에서 3절입니다.
그것을 읽고 상위에다가 덮어 놓습니다.
그리고 앉아 있으니까 사람들이 와하고 예수님을 봅니다.
그 자리에 일어서셔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너희가 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 자리에서 성취되었다. "하고 30초동안에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이냐 이것입니다.
바로 이사야서는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온다 이러한 해방자가 된다는 예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 메시야다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이 내가 여기에 와서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아주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사야서 61장 1절에서 3절을 까지를 읽을 때 제일 중요한 구절을 빼놓고 안 읽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바로 해방하는 날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를 보복하는 날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안읽은것입니다.
잊어먹고 안 읽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안 읽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예수님은 진정한 해방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이야기였는데 오늘 예수님이 말한 해방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이 내 설교를 듣는 이 시간에 아 그것이 바로 내게 온 해방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야 제대로 된 설교가 될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이 보는 해방의 여호와 하나님은 원수를 갚고 심판을 하고 불태워 버리는 그런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서에서 보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분 여호와 하나님을 결코 그렇게 본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호와 하나님을 마태복음 5장 43절 이하에 확실히 이야기한대로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가리지 않고 다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입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예수를 통해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달라진 모습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오늘 이 시간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무엇이었겠는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해방된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이렇게 곤욕을 겪고 세상이 이렇게 부패해지고 권력이 이렇게 남용을 해버리는 이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이 말이예요.
그것은 바로왕으로부터 해방돼 홍해를 건너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말이예요.
그 가장 근원적인 것, 더러운 물이 흘러나왔으면 그 더러운 물이 흘러나온 원천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 죄는 오늘 갈라디아 5장 13절을 중심으로 해서 나의 욕정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사람, 개인도 자기의 욕정을 만족시키고, 교회도 교회의 욕정을 만족시키고, 정치하는 사람도 자기의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때에 거기에 노예가 오는 것이고, 억압이 오는 것이며 대립이 오는 것입니다.
끝내는 가장 뿌리깊은 이 원인을 어떻게 제거하는가 말만으로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죽음은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마지막 원수라고 볼 수 있는 죽음, 그 죽음을 그의 부활을 통해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사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와서 침투하는 이 악의 영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 바로 거기에서 보여지는 모든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해방을 나는 이 시간에 받은 것이고 내가 선포하는 이 시간에서 벌써 너희에게 온것이다하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이야기를 가지고 특별히 생각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오늘의 우리 현실이 어떻게 돼 있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건국 50주년 해가지고 지금 50주년 기념식을 어제 하기도 했습니다만은 그러나 이 건국 50주년은 우리를 노예에서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더 큰 노예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닫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하는 해방, 그것은 진리였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도그마도 아니고 신학도 아닙니다. 내가 곧 진리다.
빌라도의 앞에서 내 나라는 네가 통치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진리에 속한 나라다. 우리가 이렇게 인격화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 나자신의 구원이냐 내가 밤낮 가지고 있는 자아 중심, 우선 내 욕심부터 챙겨놓고 보는 그런 욕정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서 사랑으로 서로 봉사함으로 인해 바꿔지는 것이 바로 해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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