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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태평이냐?광복이냐?

본문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 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3절)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 되어 로마 총독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총독 수하에서 로마에 대한 납세의 의무를 담당했고 치안 및 사법권을 가지지 못하는 주권을 상 실한 나라였습니다. 대신에 로마로부터 앞선 문물을 얻었고 일명 "Pax Romana"(로마의 평 화)의 우산 아래서 전쟁이 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일하게 누리고 있었던 자유는 유대 전통을 따라 행하는 풍습과 종교생활 뿐이었습 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 온전한 자유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갈릴리 사람들 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농성을 하다가 성역으로 인정받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군 병들이 진입하여 그들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특히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로마에 항거하는 몸부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소위 열심당 (zealot)이 구성되어 독립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롯 유다도 그 일원이었고 예수님 대신 하여 유대 명절에 석방된 바라바도 그 일원이었습니다. 이런 정치 투쟁이외에 거짓 메시아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현혹했 던 "드다"와 "갈릴리 유다" 사건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사도 바울을 로마 총독에게 고소하는 자리에서 원고의 변호사 인 더둘로는 로마 총독을 찬양하며 그의 비위를 맞추려는 애씀이 보이고 있습니다. 변사 더 둘로의 로마 찬사는 곧 그를 내세운 당시 유대교의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함께 왔던 유대교 장로들의 시국관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기득권층의 보수주의 사고유형입니다.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은 나라 독립엔 관심이 없 었습니다. 그들 표현대로 나라의 평화와 사회 안정 그리고 발달된 문물의 수입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자기들이 지도자로 있는 동안 태평을 누리며 백성들의 삶의 물질적 풍요만 있 으면 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런 일을 이룰 수 없을 바에는 로마에게 주권 을 넘기고라도 그것을 얻고자 하는 전형적인 기득권층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넘기고 일본에 합병되었던 이씨조선 말기 대한 제국 시절 지도자들의 생 각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일본과 합병만이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옳은 선택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2. 소요케 하는 자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대단한 위협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 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이유도 그들에겐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그들과 너무도 달 랐습니다. 그들에겐 풍요한 물질과 안정이 매우 중요했는데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 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신에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유 대 지도자들도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때 무엇을 더 요구하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죽일 모략을 꾸몄고 결국 로마 황제 모독 죄를 걸어서 십자가에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은 후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그의 교훈 과 복음을 전하며 다니니까, 지금 바울을 "염병이라"고 고소를 한 것입니다. 더구나 대제사 장과 장로들은 바울을 "(천하를) 소요케 하는 자"로 위협을 느낀 것입니다.
일제 시대에 총독부와 그 앞잡이들에게 가장 요주의 인물들이 거의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낭독하여 독립운동의 불을 지폈던 독립선언문의 서명자 33인 중에 20여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 운동을 더욱 거세게 퍼지게 했던 곳이 제암리 교회였고 일제는 그 교회를 불질러 버렸습니다. 그 뒤에도 나라의 독립과 민족 자립 을 주창했던 독립운동가들이 거의가 기독교 선교 학교에서 복음교육을 받았던 인물들이었습 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그토록 독립을 원하였었는가 왜 식민을 싫어했는가
물론 예수님도 바울도 정치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누가 통치하느냐에 보다 어떤 통치를 하 느냐에 뜻을 보이신 분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대한 것 보 다 그로 인하여 어떤 나라가 될 것이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은 태평을 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광복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복음은 우리들에게 배부른 돼지가 되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태평가운데서 생활의 이기로 편 리해지고 물질의 풍요로 인한 만족도 좋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자유와 존엄함을 잃어 버리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어두운 깊은 굴에서의 풍성함보다는 밝은 빛 아래서의 자유를 더 큰 가치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을 받아 나온 것도 바로 이 이유입니다. 그들은 애굽 에서 먹을 것과 잠잘 곳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자유는 곧 예배의 자유였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출애굽의 이유를 이렇게 설 명했습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 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 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 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출 5: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 이런 자유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자유가 모든 자유의 근본입니다. 곧 신앙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종 교 중에 하나를 선택할 자유를 의미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할 자유입니다. 먹 고 마시고 잠 잘 곳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 자유를 포기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사 탄은 처음부터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것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하나 님을 섬길 자유를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확실히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의 염려가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자유를 빼 앗아 가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그런 것들로 우리들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자유를 막 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3.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성전을 더럽게 하려하는 죄"로 고소를 당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유대인의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가려 한 사건을 두고 한 말입니다. 당시 유대지도자들은 나라를 다 내어주고도 오직 성전에만 이방인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된 다는 식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전만 지키면 여호와 하나님께 체면유지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결국 모두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을 해방시키려 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전유물에서 모든 민족의 것으로 해방케 하려 한 것입니다. 비록 이방 죄인들이 들어와서 성전이 더러워져도 그 성전을 통하여 죄로부터 해방받는 자들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4. 마무리하며
성경은 아무 일이 없는 태평보다는 고통과 희생을 통하여 얻는 광복을 더 큰 가치로 가르칩 니다. 우리 민족의 앞날에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더 큰 자유와 새로운 광복이 이루어지도 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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