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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새로운 해방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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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 가운데서 70세 이상 된 분은 59년 전 오늘이 기억될 텐데, 그 나이가 못 된 분들은 기억을 잘 못할 겁니다. 저는 그때에 경찰의 체포를 피해 산 속에 숨어 있다가 해방의 소식을 들었는데, 그 감격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로부터 59년의 세월이 흘러간 오늘의 우리나라의 현실은 과연 어떻습니까
오늘 구약성서 본문 아모스서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잘 알다시피 유대인들에게는 제일 큰 명절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우리로 치면 8월 15일입니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이집트에서 해방을 받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그 나라는 점점 잘못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모스를 시켜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들어라. 내가 너희를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을 시켰건만, 너희는 지금 온갖 못할 짓을 다하고 있구나. ”
이 아모스서 말씀을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우리들에게 하신 것으로 읽고 싶습니다. “한국 사람들아 들어라. 내가 너희를 일제의 종살이에서 해방을 시켰건만, 59년이 지난 지금 너희는 온갖 못할 짓을 다하고 있으니, 내가 과연 어떻게 하랴. 남과 북의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금도 중무장으로 어느 순간 폭발할지 모를 대결상황 속에 있고, 남쪽에서는 지역, 세대, 정당 간에 분열과 대치만 계속하고 있으니, 너희를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사회가 다 무너져 가고, 사회 전체의 윤리적 바탕이 완전 파탄으로 치닫고 있는 이때에 교회들은 무엇 하고 있느냐 주일마다 모여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상은 우상을 섬기고 있지 않느냐” 우상이란 갈라디아서 5장의 탐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 민족은 그 모양대로 가다가 바빌론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리고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결국 기원후 70년에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비극의 역사를 남의 역사로만 생각하고,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토록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오늘 읽은 로마서의 사도 바울의 심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진실을 말한다. 내게는 지금 큰 슬픔이 있다. 육신으로는 내 동족인 내 겨레를 구할 수 있다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고 심지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질 지라도 한이 없겠다. ” 이 바울의 심정은, 우리나라가 광복된 지 59주년 예배에서 설교를 하는 나 자신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다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조사 결과가 보도된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40대의 76. 6%가 아무 희망도 없이 매일 매일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한창 일해야 될 세대, 더구나 이 참여정부가 가장 내세우고 있는 40대의 76. 6%가 아무 희망도 갖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것이 오늘 읽은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21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나사렛의 회당에 나가서 이사야서 61장 1절부터 3절의 해방 선언을 읽고 난 다음에, 오늘 너희가 이 말을 듣고 있는 이 자리에서 이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참으로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다. ’고 하시면서, “너희가 사는 세상이 너희에게 고난과 실연과 실망을 주었을지라도 용기를 내어라. 내가 이 세상을 이미 이겼다.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평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승리, 이것은 과연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이겠습니까 “이 말이 오늘 너희들 가운데서 성취되었다. ” 하신 그분이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말한 평화였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이 말한 승리였습니까 우리 기독교의 진정한 문제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에게, 그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분, 승리자가 아니고 실패자인 그분이 결국 이기고 부활을 하셨다 하는 것이고, 부활을 하셔서 이 지구라는 공간을 벗어나 여호와 하나님의 곁으로 가시면서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성령은 바로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평화를 실현시켜주는 해방의 영이라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해방시키는 힘이 오늘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5장 13절은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시고 여러분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은 욕정을 곧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기회로 사용해서 그 자유를 잃어버리고 다시 종노릇을 하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여기서 말하는 이 욕정을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첫 번째 일입니다. 그런데 이 욕정이란 말은 탐욕이란 뜻도 됩니다만, 존 칼뱅은 이 욕정을 우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탐욕에 빠지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그래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사는 인간의 삶, 그것이 바로 욕정에 사로잡힌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향해 물어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의 이 상황 속에서 나는 과연 우상인 이 욕정을 벗어나서 정말 진정으로 자유롭고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의 우리 기독교가 이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현재 우리 국회를 보고서도 알 수 있습니다. 국회에 개신교 신자가 130명, 가톨릭 신자가 70명, 합해서 200명 정도가 있습니다. 이 200명 가운데 탐욕으로 중상하고 모략하고 찢는 그런 정치 속에서 정말 탐욕을 버리고 참된 영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들이 물어야할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탐욕에서 벗어난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화해의 사자로 사는 일입니다. 화해를 만드는 일! 고린도후서 5장 18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화해를 주셨으니, 이 화해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화해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세상 속에서 화해의 사절로 임명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깊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비참한 역사를 만들어가는 밑바닥에는 아까 말한 탐욕이란 것이 있지만, 둘째로는 이렇게 화해를 이룰 줄 모르는 흑백논리, 선이 아니면 악이고 내편이 아니면 다 적이라는 이런 사고가 놓여져 있습니다. 편 가름, 그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 사회를 이처럼 만든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해방을 기념해서 아마 독립기념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신문을 보니까 독립유공자로 포상하는 데도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요새 우리나라에서 소위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서 일한 사람들에게 갖가지 포상을 하고 여러 가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애국열사 혹은 민주인사 중에서, 주먹질을 하고 싸우고 격렬하게 투쟁하던 사람들만 대접을 받고,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서, 민주화를 위해서, 인권을 위해서 노력해온 많은 사람들은 그 명단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극단으로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식의 대결을 하고 투쟁을 한 그런 사람들만이 다 열사로 뽑히고 애국자로 뽑히는 이 잘못된 역사,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가는 한 우리의 장래는 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정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장 나가서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민족을 위해서는 내 탐욕을 버리고, 정말 사랑하고 화해를 만들어가는 일을, 거창하게 깃발을 들고 나가지 않아도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이루어 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 구체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 많죠 도무지 통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합니까 우선적으로는 전혀 볼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이 아예 담을 쌓아놓고 지내는 것이 제일 편하다는 생각 아닙니까 그 다음으로는 어쨌든지 적극적으로 싸워서 내가 이겨야 된다, 이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해가지고 사회가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 생각도 다르고 행동도 다른 사람들을 원수로 보지 말고, 서로 이야기하고 마음을 터놓고 함께 힘을 합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끈질기게 화해를 위해 대화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역할을 우리가 하려고 한다면, 당면한 문제는 이 국토에 평화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오늘 저는 주보를 보기 전까지는 광복절 기념예배로 알았는데, 주보를 보니까 평화통일 기념예배라 적혀 있는데, 사실은 이 평화통일이라는 문제는 제가 말한 두 가지가 전제가 된 이후에 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평화통일이라는 말을 쉽게 쓰지 않습니다. 만일에, 나도 내 가족이 이북에 있습니다만, 만일 오늘 통일이 된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이북 사람들과 같이 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똘배학교’를 한다고 하는데, 그 아이들 키우다 보니 여러분이 거리낌 없이 내 자식, 내 동생처럼 대할 수 있습니까 우리보다 훨씬 쉬운 환경인 독일을 보아도, 마음의 준비가 없이는, 남쪽에 사는 사람과 북쪽에 사는 사람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해가 이뤄지기 전에는 정치적으로 통일을 한다고 해서 그것은 결코 평화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정치적인 통일 이전에 평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평화에는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이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우리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 이북의 세력을 무력으로도 내몰기를 원하는 심정은 아마 여러분이나 저나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그날, 미국은 승리할지 모르지만 우리 한반도의 남쪽, 북쪽 사람들은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완전히 망해버리고 말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전쟁을 막으면서 우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우리하고는 체질이 완전히 다른 이북 사람들하고 함께 살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화해의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화해의 역할이 전제되고 비로소 함께 살 수 있는 그때에 정치적인 통일도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평화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 세종로 거리바닥에서 ‘와! 와!’ 외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통일부터 해놓고 보자는 환상적인 사람들로 인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가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함께 사는 사회, 의견이 틀린 사람 사이에도 대화로 모든 것을 풀어가며 살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런 역할을 하려면 해방 이후 지금까지 59년 동안 내려오던 이 사회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려오던 이 방향으로 가는 한 거기에는 멸망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방향이 필요합니다.
자기 욕심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만 성서에서 말하는 욕정이라는 것, 탐욕이라는 것은 무제한의 욕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성장이냐 분배냐 하고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만, 가장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시장경제냐 뭐냐 이전에, 바로 이러한 탐욕을 버리는 것, 그리고 서로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한쪽에서는 성장주의, 그리고 종교간, 교파간의 대결, 환경파괴, 이러한 상황에서, 이걸 그대로 둔 채 무엇을 기대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환상이나 절망이 아닌 극히 현실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번 해방 광복의 날을 맞이하기 전에 한 가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한반도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있는 펜실베니아 대학의 이정식 교수를 만났습니다. 그분이 미국에서 국무성, 국방성 자료를 전부 읽어보았는데, 나는 우리나라 남북간의 분단이 얄타 비밀협정에서 이뤄진 것으로 오늘까지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이 아니고 8월 9일에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고서 북쪽에서 내리쳐 들어오고 그래서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때에, 미국이 전화로 긴급히 교섭해서 서로의 영역을 삼팔선으로 합의하고 삼팔선을 그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삼팔선이라는 저주스러운 그 결정이 만일에 사흘만 지연되었어도 저 제주도까지 완전히 적화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이, 그나마 이 삼팔선에 와서 저지되었다고 하는 것, 그나마 완전히 적화통일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상상해보십시오. 이북에서 살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 민족 전체가 되어졌다면, 여기에서 설교하는 나는 어떻게 되고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어떻게 되었으리라 생각됩니까
이러한 일은 결코 우리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 배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증거가 이런 모든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들은 그런 것에 대한 바른 응답을 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방향으로 우리 역사를 바꿔나가야 한다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내가 여기서 설교하고, 여러분이 ‘아, 목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 한다고 해서 내일부터 달라집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로 할 수 없이 오염되고, 지구 전체가 화로가 되어버리고 만 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다 오염되어버린 대기 속에서 그래도 산소가 좀 약하지만 움직이고 보급되기 때문에 여러분도 나도 지금 살아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힘이 약하지만, 비록 우리가 소수일지라도, 이 역사 속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해방의 방향으로 한번 살아보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가진 사람들이 극히 소수가 있을지라도, 나는 그 소수를 통하여서 여호와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가 진전되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서는 마지막 최종의 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다시 말하면 이 그리스도를 통한 해방이 전우주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날이 반드시 온다고 하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비록 우리가 힘은 약하지만, 전우주적인 해방의 날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의 사람들로서 해방의 방향으로 살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그런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이뤄져 간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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