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본문
애굽왕에 의해 세워진 여호야김은 B. C. 609-598년까지 11년간 유다를 다스렸습니다(렘 25:1). 그는 느부갓네살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격퇴하고 팔레스틴의 주도권을 잡은 후에도 계속 반 바벨론 정책을 쓰다가 B. C 598년에 느부갓네살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이 때 유다에서 바벨론으로 압송되어간 소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실에 모실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소년들 중에는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습니다(단 1:4).
환관장이 이들의 이름을 바벨론식으로 고쳤습니다. 다니엘을 벨드사살로 하나냐는 사드락으로 미사엘은 메삭으로 아사랴는 아벳느고로 일방적으로 개명시켰습니다. 개명(改名)은 일반적으로 정복자들이 피정복민들의 문화와 민족성을 말살시키시 위한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행해졌습니다.
일차시험을 이긴 결과 잠시 동안 느부갓네살로부터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풀무불 시험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섬기는 신이나 그가 세운 금 신상에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제 1, 2계명(출 20:3-5)을 어기는 시험이었습니다.
왕의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유다 소년들을 향해 능히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때 다니엘 3장 16-18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끝내 왕의 명령에 불복하므로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고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결박된 세 사람을 풀무불에 넣었는데 왕이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단 3:25).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타는 불 가운데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깨끗하게 평가받았습니다. 우리의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제국주의자들 앞에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과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종들이야말로 금 신상 앞에 절할 바에야 차라리 죽기를 소원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후예들이 분명합니다.
1 신사참배 항거운동의 진정성입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특징 중의 하나는 조직적인 활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이 운동에 리더가 없었습니다. 이 운동은 자발적인 신앙운동이었습니다.
신앙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1) 민족정신의 배경
일본의 의도는 신사참배로 인해서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소위 일본 황국식민으로 개조시켜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술책에 기독교는 응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내 나라, 내 동포를 포악자들의 손에서 구해내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2) 성경적인 배경
출애굽기 20장 3-5절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는 여호와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라고 했습니다.
신사참배 항거운동은 계명 준수를 위한 신앙의 발로였습니다. 그것은 제 1, 2계명을 범하는 일이기 때문에 반대했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지는 자를 두려워하라 고 했습니다.
국법은 자연인을 다스리고 있지마는 기독신자들은 자연법(국법)에 살면서도 하늘나라 시민의 법인 성경에 의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법이 감히 여호와 하나님의 법인 성경을 파괴할 때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상식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 때문입니다.
(2) 순교에 대한 열정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7-8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계명사랑으로 계명사랑은 복음전파로 복음전파 결과 택자구원 완성이라는 대명제가 저들의 소망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의 소망은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었습니다. 환난을 통과하는 저들에게는 차라리 주를 위하여 죽음의 기회가 간절했는지도 모릅니다. 저들은 죽도록 충성할 때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고 확실히 믿고 진리 안에서 자유하면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사람들입니다.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은 지도자들 간에 좀 달랐습니다.
첫째, 신사참배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과 신앙 정조를 범하는 죄악이라고 해서 목숨을 걸고 반대 투쟁하는 노선이 있었습니다.
둘째,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것이 정당한 줄 알면서도 공직을 사임하고 초야에 묻혀 개인의 신앙지조나 지키겠다는 노선이 있었습니다.
셋째, 환난과 고통이 두려운 나머지 마지못해 승인하고 따라가는 노선이 있었습니다.
넷째,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라고 하여 신앙의식의 가책 없이 오히려 아부하면서 그대로 시행한 노선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 외에 또 다른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서울에서는 한강에서 부산에서는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귀신 천조대신의 이름으로(미소이바라이) 다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신주(神主)가 교회의 비국가적인 것을 씻는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종을 떼어서 전쟁무기로 자진 헌납하는가 하면 교회의 헌금을 비행기 제조의 헌납금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1942년 10월 15일자 공출된 교회의 종은 장로교회 것만 1,540개로써 그 총액은 119,832원이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고향산천을 등지고 저 멀리 북만주로 피난한 신자를 일본경찰을 앞세우고 와서 고발 납치한 친일파 앞잡이 목사도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 가족을 사택에서 끌어내고 출입문에 못을 박아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가하면 주목사의 80노모를 강제로 끌어내었습니다. 친일 행각을 자행했던 소위 친일파 목사들은 서울장안에서 공로목사로 추대 받는 등 아직도 이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밖에도 일본 경찰에 앞잡이가 되어 천인공노할 죄를 지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때 한국교회의 신앙의 흔적은 실질적으로 사라져 없어지는 듯 했다고 했습니다.
1913년 무어(Moor)박사는 한국교회가 만난 환난에 대하여 그것은 생사가 걸린 심각한 시련이라고 예언했지만 이같이 심각할 줄은 무어(Moor)박사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3 죽음을 불사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1939년 초에 이르러 마침내 평북, 평남, 경남, 만주 등지에서 신사불참배 운동이 크게 확산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1) 주기철 목사와 반대운동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선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한사람입니다. 신사참배 운동이 한국 땅 전역에 태풍의 눈처럼 몰아칠 때 처음부터 굽히지 아니했던 지도자였습니다. 이를테면 베임을 당한 밤나무, 상수리나무의 그루터기인양 한국교회 순결을 유지해준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1936년에 마산문창교회에서 목회를 잘하고 있던 주목사를 고당 조만식 선생이 평양 산정현교회로 청빙했습니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이성휘 박사는 환영예배 석상에서 우리는 산정현교회 주목사를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주목사를 환영한다고 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강하게 반대하던 주목사가 평양에 왔을 때 평양경찰서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1938년 2월에는 평양신학교 학생이 평북노회장의 식수를 베어버린 사건의 배후자라는 명목으로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1938년 8월에 두 번째로 검거되었습니다. 1939년 8월 20일에는 유재기 목사의 농우회 사건과 관련 있다고 하여 아무 관련도 없는 주목사를 검거하였습니다. 경북 의성 경찰서는 주목사를 9개월간 구속하였다가 1940년 2월에 석방하였는데 이것이 세 번째 검거였습니다. 주목사는 손양원 목사와 함께 일본 기독교단 '도비다'가 신사참배가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자리에서 반박했습니다. 주목사는 이미 순교를 각오한 듯 다섯 가지 기도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첫째, 죽음을 이기게 하옵소서. 둘째, 장기간 고난을 견디게 하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목사는 경찰서로부터 설교정지 명령을 받았을 때 하늘로부터 받은 성직을 내놓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1940년 4월 23일 부활주일에 산정현교회 강제 폐쇄와 함께 파면 당했습니다. 주목사는 옥중에서 형언키 어려운 매질과 잔혹한 고문을 당했고 폐와 심장은 날로 약화되어 갔습니다. 1940년 5월에 또다시 구속되었는데 이것이 네 번째 구속이었습니다. 주목사는 줄곧 옥중에 있다가 1944년 4월 21일 49세의 일기로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옥중에서 운명했습니다.
2) 이기선 목사와 반대운동
이기선 목사는 평안북도 지방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저항 태도를 확고히 하고 다음과 같은 기본방향을 설정했습니다.
① 신사참배 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지 말 것
② 신사불참배 운동을 일으켜서 신사참배 하는 교회를 약체화내지는 해체시킬 것
③ 신사불참배 신자를 규합하여 다른 재단을 육성할 것
이렇게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맹렬히 반대운동을 버리다가 1940년 초여름에 선동, 국품공여, 불경죄, 불온언론 및 치안 방해죄로 구금되었고 6차례나 투옥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되었습니다.
3) 한상동 목사와 반대운동
북한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이기선 목사였다면 남한에서는 한상동 목사였습니다. 또 이 운동에 남북을 오가면서 교량역할을 한 사람이 이인재 전도사였습니다. 한목사는 1938년 10월 24일 "현 정부는 정의 및 신의에 위반한 신사참배를 강요하니 오등은 굴하지 말고 이것에 절대로 참배해서는 못 쓴다. "라고 신사참배 반대설교를 했습니다. 이듬해 마산문창교회에서 "대탄식"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신사참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후 그는 교회에서 쫓겨나 경남 각지를 돌면서 몇 가지 실행 사항을 주지시켰습니다.
① 신사참배 하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아니할 것
②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성례를 받지 아니할 것
③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십일조나 연보를 아니할 것
④ 교회 출석하지 아니하는 교인들끼리 따로 예배드리면서 항의할 것 등이었습니다.
1940년 2월 28일 한목사는 이인재 전도사와 전국적으로 불참배 운동을 확산시키기로 하고 주기철 목사의 석방기회를 이용하여 그 다음날 채정민 목사 집에서 주기철 목사와 함께 불참배운동 재건 안을 마련하고 현 노회 해체 운동에 힘쓸 것을 결의했습니다. 그 해 7월 3일 한목사는 마침내 경남도 유치장에 투옥되었고 1941년 7월 10일에는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주기철 목사와 옥중 상봉하기도 했습니다.
한목사를 심문하는 경찰은 예수 재림 후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설교는 국가 변란을 꽤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목사는 5년간 옥중생활을 회고하면서 "능력의 주님이심을 나는 확실히 체험했다. "고 했습니다. 그 후 그는 1974년 1월 고려신학대학 학장 정년퇴직과 함께 고려신학대학 명예학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삼일교회 원로목사로 봉직하는 중에 모든 사람들의 애도 속에 1976년 1월 6일 오전 8시 50분 이 땅에 한 사람의 육신의 자녀도 남겨두지 않은 채 이 땅에서의 고난의 세월을 마감하고 여호와 하나님 품으로 갔습니다.
4) 주남선 목사와 반대운동
경남지방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또 한 사람은 주남선 목사입니다. 그는 1940년 7월 16일 거창경찰서에 구금되었고 다음날 진주 경찰서로 압송 구금되었습니다. 1941년 3월 부산경찰서에서 그 해 7월 11일에 평양경찰서로 압송되었습니다. 함께 압송된 인물로는 한상동 목사, 이현속 장로, 조수옥 전도사 등 5명이었습니다.
평양형무소에서 이들이 투옥되었을 때는 주기철 목사, 최봉석 목사, 방계성 장로, 이인재 전도사, 이광륵 집사, 안이숙 선생이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5년간 투옥되어 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이미 기술된바 있는 이인재 전도사, 최덕지 전도사, 김린희 전도사 등 많은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혹독한 수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참혹한 역사적인 현장을 지면에 다 기록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온 단체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지금의 제 자신이 사치스럽고 주의 교회를 오히려 욕되게 하지나 않을까하는 마음에 송구하고 부끄러울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전통은 갈라지는 전통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전통입니다. 갈라지지 아니하고는 숭고한 전통을 계승할 수 없습니다.
알고 보면 갈라지는 분기점은 성경에서 비롯됩니다. 성경관의 차이, 성경해석 상의 차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하여 참과 거짓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환난이 통과하는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의 신앙의 색깔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이 왜 고통을 당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고 안다고 해도 무가치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인 바로 이 사람들을 중심하고 엮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 기쁠 때 인간 편에서는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평소보다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오히려 풀무불 밖에서보다 그들은 자유로웠습니다. 오히려 풀무불 속에서 결박이 풀어지고 우리 주님이 그 불꽃 속에 함께 계셨습니다.
환난 날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그 고통 넘어에 있는 영광을 생각하고 차라리 이 땅에서 고난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이들의 정도였습니다.
우리 모두 거룩한 이 길을 갑시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 길을…
이 때 유다에서 바벨론으로 압송되어간 소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실에 모실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소년들 중에는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습니다(단 1:4).
환관장이 이들의 이름을 바벨론식으로 고쳤습니다. 다니엘을 벨드사살로 하나냐는 사드락으로 미사엘은 메삭으로 아사랴는 아벳느고로 일방적으로 개명시켰습니다. 개명(改名)은 일반적으로 정복자들이 피정복민들의 문화와 민족성을 말살시키시 위한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행해졌습니다.
일차시험을 이긴 결과 잠시 동안 느부갓네살로부터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풀무불 시험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섬기는 신이나 그가 세운 금 신상에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제 1, 2계명(출 20:3-5)을 어기는 시험이었습니다.
왕의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유다 소년들을 향해 능히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때 다니엘 3장 16-18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끝내 왕의 명령에 불복하므로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고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결박된 세 사람을 풀무불에 넣었는데 왕이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단 3:25).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타는 불 가운데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깨끗하게 평가받았습니다. 우리의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제국주의자들 앞에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과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종들이야말로 금 신상 앞에 절할 바에야 차라리 죽기를 소원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후예들이 분명합니다.
1 신사참배 항거운동의 진정성입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특징 중의 하나는 조직적인 활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이 운동에 리더가 없었습니다. 이 운동은 자발적인 신앙운동이었습니다.
신앙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1) 민족정신의 배경
일본의 의도는 신사참배로 인해서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소위 일본 황국식민으로 개조시켜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술책에 기독교는 응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내 나라, 내 동포를 포악자들의 손에서 구해내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2) 성경적인 배경
출애굽기 20장 3-5절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는 여호와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라고 했습니다.
신사참배 항거운동은 계명 준수를 위한 신앙의 발로였습니다. 그것은 제 1, 2계명을 범하는 일이기 때문에 반대했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지는 자를 두려워하라 고 했습니다.
국법은 자연인을 다스리고 있지마는 기독신자들은 자연법(국법)에 살면서도 하늘나라 시민의 법인 성경에 의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법이 감히 여호와 하나님의 법인 성경을 파괴할 때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상식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 때문입니다.
(2) 순교에 대한 열정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7-8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계명사랑으로 계명사랑은 복음전파로 복음전파 결과 택자구원 완성이라는 대명제가 저들의 소망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의 소망은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었습니다. 환난을 통과하는 저들에게는 차라리 주를 위하여 죽음의 기회가 간절했는지도 모릅니다. 저들은 죽도록 충성할 때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고 확실히 믿고 진리 안에서 자유하면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사람들입니다.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은 지도자들 간에 좀 달랐습니다.
첫째, 신사참배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과 신앙 정조를 범하는 죄악이라고 해서 목숨을 걸고 반대 투쟁하는 노선이 있었습니다.
둘째,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것이 정당한 줄 알면서도 공직을 사임하고 초야에 묻혀 개인의 신앙지조나 지키겠다는 노선이 있었습니다.
셋째, 환난과 고통이 두려운 나머지 마지못해 승인하고 따라가는 노선이 있었습니다.
넷째,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라고 하여 신앙의식의 가책 없이 오히려 아부하면서 그대로 시행한 노선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 외에 또 다른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서울에서는 한강에서 부산에서는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귀신 천조대신의 이름으로(미소이바라이) 다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신주(神主)가 교회의 비국가적인 것을 씻는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종을 떼어서 전쟁무기로 자진 헌납하는가 하면 교회의 헌금을 비행기 제조의 헌납금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1942년 10월 15일자 공출된 교회의 종은 장로교회 것만 1,540개로써 그 총액은 119,832원이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고향산천을 등지고 저 멀리 북만주로 피난한 신자를 일본경찰을 앞세우고 와서 고발 납치한 친일파 앞잡이 목사도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 가족을 사택에서 끌어내고 출입문에 못을 박아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가하면 주목사의 80노모를 강제로 끌어내었습니다. 친일 행각을 자행했던 소위 친일파 목사들은 서울장안에서 공로목사로 추대 받는 등 아직도 이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밖에도 일본 경찰에 앞잡이가 되어 천인공노할 죄를 지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때 한국교회의 신앙의 흔적은 실질적으로 사라져 없어지는 듯 했다고 했습니다.
1913년 무어(Moor)박사는 한국교회가 만난 환난에 대하여 그것은 생사가 걸린 심각한 시련이라고 예언했지만 이같이 심각할 줄은 무어(Moor)박사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3 죽음을 불사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1939년 초에 이르러 마침내 평북, 평남, 경남, 만주 등지에서 신사불참배 운동이 크게 확산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1) 주기철 목사와 반대운동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선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한사람입니다. 신사참배 운동이 한국 땅 전역에 태풍의 눈처럼 몰아칠 때 처음부터 굽히지 아니했던 지도자였습니다. 이를테면 베임을 당한 밤나무, 상수리나무의 그루터기인양 한국교회 순결을 유지해준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1936년에 마산문창교회에서 목회를 잘하고 있던 주목사를 고당 조만식 선생이 평양 산정현교회로 청빙했습니다.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이성휘 박사는 환영예배 석상에서 우리는 산정현교회 주목사를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주목사를 환영한다고 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강하게 반대하던 주목사가 평양에 왔을 때 평양경찰서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1938년 2월에는 평양신학교 학생이 평북노회장의 식수를 베어버린 사건의 배후자라는 명목으로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1938년 8월에 두 번째로 검거되었습니다. 1939년 8월 20일에는 유재기 목사의 농우회 사건과 관련 있다고 하여 아무 관련도 없는 주목사를 검거하였습니다. 경북 의성 경찰서는 주목사를 9개월간 구속하였다가 1940년 2월에 석방하였는데 이것이 세 번째 검거였습니다. 주목사는 손양원 목사와 함께 일본 기독교단 '도비다'가 신사참배가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자리에서 반박했습니다. 주목사는 이미 순교를 각오한 듯 다섯 가지 기도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첫째, 죽음을 이기게 하옵소서. 둘째, 장기간 고난을 견디게 하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목사는 경찰서로부터 설교정지 명령을 받았을 때 하늘로부터 받은 성직을 내놓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1940년 4월 23일 부활주일에 산정현교회 강제 폐쇄와 함께 파면 당했습니다. 주목사는 옥중에서 형언키 어려운 매질과 잔혹한 고문을 당했고 폐와 심장은 날로 약화되어 갔습니다. 1940년 5월에 또다시 구속되었는데 이것이 네 번째 구속이었습니다. 주목사는 줄곧 옥중에 있다가 1944년 4월 21일 49세의 일기로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옥중에서 운명했습니다.
2) 이기선 목사와 반대운동
이기선 목사는 평안북도 지방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저항 태도를 확고히 하고 다음과 같은 기본방향을 설정했습니다.
① 신사참배 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지 말 것
② 신사불참배 운동을 일으켜서 신사참배 하는 교회를 약체화내지는 해체시킬 것
③ 신사불참배 신자를 규합하여 다른 재단을 육성할 것
이렇게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맹렬히 반대운동을 버리다가 1940년 초여름에 선동, 국품공여, 불경죄, 불온언론 및 치안 방해죄로 구금되었고 6차례나 투옥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되었습니다.
3) 한상동 목사와 반대운동
북한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이기선 목사였다면 남한에서는 한상동 목사였습니다. 또 이 운동에 남북을 오가면서 교량역할을 한 사람이 이인재 전도사였습니다. 한목사는 1938년 10월 24일 "현 정부는 정의 및 신의에 위반한 신사참배를 강요하니 오등은 굴하지 말고 이것에 절대로 참배해서는 못 쓴다. "라고 신사참배 반대설교를 했습니다. 이듬해 마산문창교회에서 "대탄식"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신사참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후 그는 교회에서 쫓겨나 경남 각지를 돌면서 몇 가지 실행 사항을 주지시켰습니다.
① 신사참배 하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아니할 것
②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성례를 받지 아니할 것
③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십일조나 연보를 아니할 것
④ 교회 출석하지 아니하는 교인들끼리 따로 예배드리면서 항의할 것 등이었습니다.
1940년 2월 28일 한목사는 이인재 전도사와 전국적으로 불참배 운동을 확산시키기로 하고 주기철 목사의 석방기회를 이용하여 그 다음날 채정민 목사 집에서 주기철 목사와 함께 불참배운동 재건 안을 마련하고 현 노회 해체 운동에 힘쓸 것을 결의했습니다. 그 해 7월 3일 한목사는 마침내 경남도 유치장에 투옥되었고 1941년 7월 10일에는 평양 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주기철 목사와 옥중 상봉하기도 했습니다.
한목사를 심문하는 경찰은 예수 재림 후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설교는 국가 변란을 꽤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목사는 5년간 옥중생활을 회고하면서 "능력의 주님이심을 나는 확실히 체험했다. "고 했습니다. 그 후 그는 1974년 1월 고려신학대학 학장 정년퇴직과 함께 고려신학대학 명예학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삼일교회 원로목사로 봉직하는 중에 모든 사람들의 애도 속에 1976년 1월 6일 오전 8시 50분 이 땅에 한 사람의 육신의 자녀도 남겨두지 않은 채 이 땅에서의 고난의 세월을 마감하고 여호와 하나님 품으로 갔습니다.
4) 주남선 목사와 반대운동
경남지방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또 한 사람은 주남선 목사입니다. 그는 1940년 7월 16일 거창경찰서에 구금되었고 다음날 진주 경찰서로 압송 구금되었습니다. 1941년 3월 부산경찰서에서 그 해 7월 11일에 평양경찰서로 압송되었습니다. 함께 압송된 인물로는 한상동 목사, 이현속 장로, 조수옥 전도사 등 5명이었습니다.
평양형무소에서 이들이 투옥되었을 때는 주기철 목사, 최봉석 목사, 방계성 장로, 이인재 전도사, 이광륵 집사, 안이숙 선생이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5년간 투옥되어 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이미 기술된바 있는 이인재 전도사, 최덕지 전도사, 김린희 전도사 등 많은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혹독한 수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참혹한 역사적인 현장을 지면에 다 기록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온 단체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지금의 제 자신이 사치스럽고 주의 교회를 오히려 욕되게 하지나 않을까하는 마음에 송구하고 부끄러울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전통은 갈라지는 전통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전통입니다. 갈라지지 아니하고는 숭고한 전통을 계승할 수 없습니다.
알고 보면 갈라지는 분기점은 성경에서 비롯됩니다. 성경관의 차이, 성경해석 상의 차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하여 참과 거짓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환난이 통과하는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의 신앙의 색깔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이 왜 고통을 당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고 안다고 해도 무가치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인 바로 이 사람들을 중심하고 엮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 기쁠 때 인간 편에서는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평소보다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오히려 풀무불 밖에서보다 그들은 자유로웠습니다. 오히려 풀무불 속에서 결박이 풀어지고 우리 주님이 그 불꽃 속에 함께 계셨습니다.
환난 날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그 고통 넘어에 있는 영광을 생각하고 차라리 이 땅에서 고난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이들의 정도였습니다.
우리 모두 거룩한 이 길을 갑시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이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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