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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평화로 해방시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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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일에는 전세계가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도 오늘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제가 오늘 아주 오래된 고사 하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어떻게든지 성취하시려고 하신다면, 목표까지 가는 과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괴로워도 참담해도 그것을 참고, 이기며, 목표를 향해서 전진합니다. 여러분이 많이 들으신 고사성어 가운데 중국 고사와 관련된 이런 것이 있습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 이게 바로 제가 말씀드린 대로 목표를 향해서 고통과 역경을 참으며 현재를 이겨가자는 그런 뜻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2천 5백 여년 전의 중국입니다. BC 496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국에 오나라와 원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두 나라는 사이가 나빠서 서로 침략하고 싸우곤 했습니다. 오나라가 원나라를 먼저 침공했습니다. 그런데 원나라가 힘이 셌던지, 도리어 침공한 오나라 왕이 전사했고 전쟁은 오나라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원정에서 돌아온 뒤 오나라 왕의 아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이름이 "부차"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전사한 아버지, 또 패망한 조국의 원수를 갚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장작을 더미로 쌓아놓고 매일같이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잡니다. 그리고 장작더미 밑에는 인화물질을 갖다 놓았습니다. 잘못하면 불에 탑니다. 불이 나면 사람이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서는 신하들에게, 장작더미 옆을 지나갈 때마다 "부차 왕이시여, 선왕의 원수 갚는 것을 잊으셨나이까" 하고 한 마디씩 하게 했습니다. 매일 밤을 그렇게 지냈다고 합니다.
승전국인 원나라의 왕 "구차"가 그 소식을 듣고서, 언젠가는 화근이 될 것임을 알고, 오나라를 아예 무너뜨리기로 결심하고, 선제공격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패하고 말았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군사와 함께 결사 항쟁을 하다가, 결국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 항쟁을 한 산이 "후웨이지"라는 중국의 산입니다. 고사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 산에서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하면서 굴욕적인 생활을 하다 풀려났습니다. 얼마나 비참했느냐 하면, 오나라 부차 왕의 대변까지도 먹으면서, 자기 나라가 오나라의 속국임을 선포하면서 겨우 풀려났습니다. 원나라가 오나라의 속국이 된 것입니다.
속국이 되고, 모욕을 받고 돌아온 원나라 왕 구차가 돌아와서 다시 이를 갑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이 패전과 항복에 대한 복수를 할까. 그래서 쓸개 하나를 구해다가 자기 방문 위에 달아놓고, 방에 들어가면서 쓸개 한 번 핥고, 나올 때 핥았습니다. 얼마나 쓰겠습니까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구차여," 쿠웨이지 산의 치욕을 언제 갚을 거냐. "
오나라와 원나라의 두 왕이 서로 어떻게 하면 다시 보복해서 승리할까를 궁리하면서 자기를 채찍질한 데서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와신"이 무슨 뜻이냐 하면,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그 위에 눕는다는 것이고, "상담"이 뭐냐 하면, 곰쓸개를 핥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와신상담이라고 합니다. 결론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20년이 지난 다음에 오나라가 원나라한테 패망하고, 오나라 왕, 장작을 쌓아놓고 와신하던 부차 왕은 결국 자살함으로써 오와 원의 대립의 역사는 끝났습니다. 와신과 상담의 싸움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목표를 향해서 와신상담할 수 있지만, 우리가 세운 목표가 이렇게 보복과 좌절로 끝난다고 하면, 와신은 무슨 의미가 있고 상담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겠습니다. 56년 전에 우리가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해방이 된 이후에,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일본은 56년 동안 와신을 했는지 상담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겠다고 하면서, 하지 마라, 하겠다 하고 난리입니다. 이걸 보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고이즈미 총리로 대변되는 일본의 현실을 보면, 2차 세계대전은 56년 전에 세계적으로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종전 56주년이 아닙니다. "전쟁의 역사는 계속 된다. 비참했던 패전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 와신상담하면서 새로운 제국주의로 향해서 간다. " 저는 그렇게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직은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1차 패망했을 뿐이다. 다시 승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상징적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겠다. "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사적으로 전쟁은 분명히 끝났습니다. 2차 대전은 종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주변의 새로운 동북아 정세를 보면, 2차 대전이 다른 형태로,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본의 교과서 왜곡만이 문제가 아닐 겁니다. 우리는 분단 이후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남과 북 사이에 전쟁을 치렀습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끝이 났습니까, 계속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북도 남도 나름대로 와신상담하면서 지냈습니다. 법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휴전 상태가 계속되고, 대립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완전히, 실질적으로 끝맺기 위해서는 아마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할겁니다. 남과 북이 전쟁을 실질적으로 또는 법률적으로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고 하면, 우리의 미래는 상당히 비참합니다.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평화, 우리가 염원하는 평화의 역사를 다시 한번 만들어 나갑시다. "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우리는 다짐을 합니다. 평화를 해친 비극적인 역사는, 그것이 일제의 제국주의 전쟁이든, 우리의 한국전쟁이든 기릴 가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과거의 비극이 기념할 가치가 됩니까 비극적인 과거의 역사는 오히려 오늘의 거울로 삼고, 우리 미래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 거울로 삼고, 표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한 역사는 퇴보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얼 할 겁니까. 오늘 해방 56주년이 되는 시점에 한번 인식과 사고의 발상을 전환해 보십시다.
구약 성서에 보면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가, 오나라와 원나라보다 훨씬 더 다투고 싸우고 투쟁했습니다. 이스라엘식 와신상담입니다. 그렇게 한 결과는 뭡니까 북방 이스라엘이 이긴 것도 아니고 남방 유다가 이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둘 다 주변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고, 숱한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1948년 형식상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되기까지 수천 년 동안 나라 없는 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야웨께서 주권을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북방 이스라엘아, 막대기 하나 가져 오라. 남방 유다야, 막대기 하나 가져 오라. 두 막대기가 서로 만나지 않으니, 두 막대기를 내 손에서, 이 손에서 만나게 하리라. 너희들끼리는 만날 수 없으니, 내 손바닥 안에서 둘이 만나서 평화를 이루게 하리라. 두 막대기를 내 손으로 잡을 테니, 이 손바닥 안에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평화롭게 살지어다. 그러면 나는 연합한 이스라엘,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백성이 될 것이다. 이것은 약속이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아를 통해서, 에스겔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을 지금부터 약 2천 6백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약속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 약속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어제 마침 제가 외국인 한 분을 만났는데 이분 이야기를 간단히 드리려고 합니다. 미국에서 오신 분인데, 현재 직책은 미국 NCC, 그러니까 미국 교회협의회의 총무이고, 이름은 "Dr. Bob Edgan"입니다. 어제 이 Edgan 목사님과 다른 몇 분들이 앉아서 장시간 토론을 했습니다. 이분은 지미 카터 전대통령과 함께 사랑의 집 짓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이번에 방문한 것은 그 일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집 짓기 운동이 시작될 때, 어느 건설회사 부호가 사업을 중단하고 건설회사를 팔아서 전액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랑의 집 짓기 운동이 출발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만 사랑의 집 짓기 운동을 위해서 매년 약 5억 달러가 모금된다고 합니다. 이 돈을 가지고 전 세계에 연간 약 1,000채 정도의 집을 지어준다고 하는데, 금년에는 한국에 상당수를 지었고, 내년에는 남아프리카의 '돌몬'이라는 도시에 100채의 집을 지어줄 예정이랍니다. 그리고 나머지 900채를 전세계의 다른 곳에 지어주겠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제 한참 나누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중에 오늘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에스겔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안에서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된다 했는데, 에베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름하는 집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갈등하는 두 파트너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집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당신들이 짓는 것이 이 집입니까" 제 물음에, 그분은 고마워하면서, 바로 그 집을 지으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분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이분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바니아 주에서 감리교회의 목사로 10년 동안 목회하다가, 그 지역의 한 선거구에서 출마해서 12년 동안 하원의원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6선이지요. Edgan 목사가 Edgan 의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약 11년 전에, 하원의원 직을 사임하고,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아주 훌륭한 대학인 클레어먼트 대학의 총장으로 부름 받아 10년 동안 총장 일을 하다가, 1년 반 전에 사임하고, 지금 미국교회협의회의 총무로 취임했다고 합니다. 자기는 목회도 했고, 정치도 해봤고, 대학교 총장도 해봤으니, 이제는 뭔가 봉사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NCC의 요청에 고마워했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미국 NCC가 여러 가지 결정을 했다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아주 중요해서 제가 말씀드립니다. 그들의 토의입니다. "미국의 교회는 선교와 봉사를 위해서 앞으로 무얼 할거냐 무엇을 해도 좋다. 단 우리한테는 분명히 비전과 지표가 있어야 한다. 지표를 뭘로 잡을거냐" 이 사람 말대로 표현하면, "in the eyes of the poor, 가난한 자의 눈으로!" 이걸 지표로 삼아서 모든 선교 활동을 하자. 지금 왜 이 논의를 해야 하나 그 동안은 어땠냐 가난한 자를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 사람들의 눈으로 선교하지는 못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같이 행복해지려고 하면, 진실로 가난한 자의 눈으로 먼저!"
미국은 지난 10년 동안 경제 호황, 경제학 이론 어느 것으로도 다 설명해낼 수가 없는 이상한 변종식 경제 호황을 누린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에 경제가 자꾸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금년도만 해도 10년 전보다 훨씬 더 집 없는 사람, 떠돌이가 많아졌습니다. 경제 호황의 혜택이 골고루 주어지지 않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져왔답니다. 미국의 구세군이 노숙자, 밥 굶는 사람들에게 숙소도 제공하고 식사도 제공하는 활동을 하는데, 금년도에 들어서서 구세군 합숙소에 들어온 사람 중에 절반 이상이 정상적인 직장인, full time job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직장도 없고 집도 없는 사람이 아니고, 정상적으로 직장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집 없는 사람, homeless가 된 사람들, 또는 직장을 가지고 있는데도 먹을 것이 모자라 구세군 급식소를 찾아간 사람들입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주 성실한 가난한 사람들, 그들을 위해 교회가 나서기로 결정했답니다. 전체 5,000만 회원을 가진 미국 NCC의 결정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한참 나눴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반도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 가난한 자, 연약한 자 이야기 많이 하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어려운, 세계 정치 권력에서 소외된 우리 같은 약자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한반도 문제를 왜 강대국 미국이 제멋대로 재단하느냐. 무엇 때문에 4대 강국이라는 나라들이 한반도를 자꾸 재단하느냐. 'in the eyes of poor'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한반도 평화문제 역시 힘이 없고 약한 '한반도에 사는 백성들의 눈으로!' 왜 그렇게 못해 주느냐 그것 못해주면 미국의 선교정책이 엉터리일 것이고, 마찬가지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미국의 정책도 엉터리 아니겠느냐"
그분은 깊이 공감한다고 하면서, 앞으로 미국의 교회는 전폭적으로 그런 원리를 가지고 한반도 문제를 다루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합의한 것은 "앞으로 이런 일에서 한미 교회가 서로 연대를 공고히 하자는 것, 그리고 정치적인 지혜도 발휘하고, 신앙적인 확고한 바탕도 살려서 한반도에 평화가 실현되게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갈구하면서 여러 가지 안타까운 일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구원의 시간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구원은 지금 완성된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 다시 재림하시면, 그때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완성됩니다. 시작된 구원과 완성될 구원, 그 사이, 그 틈새를 지금 우리가 살아갑니다.
틈새의 시간, 이것이 저는 묘미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부활의 확신이 없다고 한다면, 새 생명이 태어날 기미가 없다고 한다면, 뭐 하러 예수를 믿습니까 우리 인생은 아마 암담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준 분명한 비전, 이 비전 때문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갑니다. 만약에 구원이 시작된 이후의 시간인 현재가 여호와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면, 뭐 하러 여호와 하나님 나라 믿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요정도로 형편없다고 한다면, 이게 무슨 복음입니까
그 나라는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의 완성은 미래에 남겨져 있습니다. 구원이 확실하게 시작된 시간과, 앞으로 완벽하게 완성될 그 날 사이의 시간, 이 틈새의 시간,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신학적으로 중간 시간 그래서 "time-inbetween"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시간 문제만 아니라, 공간 문제도 얘기하려고 합니다. 어제 그 NCC총무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당신들 해비타투 운동이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분쟁과 좌절과 갈등이 있는 곳에 집을 짓되, 갈등의 상대자들이 함께 거할 수 있는 집을 짓는다는 확신 하에 그 집을 지읍시다. 내년에는 남아프리카 돌몬에 간다니까 할 수 없지만, 빠른 시일 내에 한국에 다시 와서 집을 짓는데, 오기 전에 북한과 합의하고 와서 남한과도 합의하고, 전세계에서 모인 자원봉사자와 합의하여, 북쪽과 남쪽 어느 곳도 아닌, 그러나 양쪽에 다 속해있는 비무장 분계선 지역에 평화의 집을 지읍시다. 그곳에 전세계가 마음을 합하여, 분단의 비극을 몸으로 살고 있는 우리 남북이 뜻을 합하여, 집을 지읍시다. 그리고 그 집에 "평화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입시다. 그 집에서는 누구나 와서 살 수 있도록 개방합시다. 얼마나 큰 상징적 제스처입니까. "
그랬더니 이 사람이 "너무 좋습니다. 그 아이디어를 가지고, 미국으로 가자마자 바로 가서 지미 카터와 상의하고, 협의가 되는 대로 곧바로 시작하겠고, 교회가 그 일을 지원하겠습니다. "고 약속했습니다. 그 일이 빨리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제가 역설적인 말씀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한반도가 통일된다고 해도 분단 없이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부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부부가 일심동체라고 해도, 남편이 지켜야 할 영역이 있고, 부인이 지켜야 할 영역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아무리 가족으로 하나지만, 둘이 넘나들 수 없는, 서로 존중하고 간섭하지 말아야 할 영역이 있습니다. 남과 북이 아무리 통일이 되어도, 지금이든 나중이든, 둘이 서로 존중해야 할 영역이 있을 겁니다.
그 영역이 지리적으로는 혹시 지금 분계선이 있는 비무장지대가 아니겠습니까 분단의 상처의 상징이지만, 앞으로 이 상징적 장소를 우리가 화해와 평화의 상징적 장소로 삼고, 전세계에 개방해서 평화의 집, 평화의 동산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능하다면 time-inbetween과 더불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사람들 사이에 평화의 집이 있는 장소, 곧 place-inbetween을 한번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 과제가 바로 이런 것 아닙니까
이 장소를 평화의 동산, 평화의 집이라고 이름하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런 집을 지을 터전을 세상이 주지는 못할 겁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내가 주는 평화는 다릅니다. " 왜 다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분은 어디 경치 좋은 터 위에다 집을 짓겠지만, 내가 주는 평화의 땅은, 평화의 집을 지을 땅은 나의 몸과 피이기 때문입니다. 내 위에다가 집을 지으십시오. 내가 십자가의 보혈로 여러분의 죄를 속해 줍니다. 내 몸 위에 이 집을 지으십시오. 내 위에 세워진 평화의 집, 그 집에서는 배신이 없습니다. 그 집에서는 전쟁도 없습니다. 그 집에서는 사랑이 넘쳐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릅니다.
이 집, 우리 민족의 집으로 만들어 보십시다. 이 집, 각자의 집으로 한 번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집의 주인 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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