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해방하시는 하나님
본문
오는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5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공식적으로 이 날은 광복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해방된 날을 기념하면서, 왜 해방절이라고 하지 않고 광복절이라고 하는 걸까요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광복이라고 부르느냐, 해방이라고 부르느냐 하는 것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 다시 말하면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일본에서 교과서를 왜곡했다고 해서 말썽인데, 이것도 역시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고 미래를 어떻게 구상하느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역사는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로서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광복이란 말 그대로 빛을 다시 찾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 우리 민족을 노예로 삼아 지배하던 시대를 암흑이라고 보고, 우리 민족이 해방된 것은 그 암흑 상태에서 다시 빛을 찾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역사 인식은 일본의 식민지로 지배당하던 우리의 상황에서, 일본에 의해 노예 상태로 있었다는 사실을 흐리게 만들고, 그저 우리가 빛을 잃고 암흑 상태에서 고생했다는 것만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역사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우리 민족이 고생했던 건 우리가 못나서이고, 우리 민족이 빛을 찾은 건 미국과 소련이 우리 민족을 구원해주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역사를 이해하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실제로, 제가 학교 다니면서 배웠던 역사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것을 광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겁니다. 그런데, 깜깜했던 방에 불만 켜면 뭐가 달라집니까 불을 켠다고 들어왔던 도둑이 저절로 사라지고, 깨진 그릇이 저절로 다시 붙는 건 아니지요.
그런 식으로 역사를 이해하니까, 일본 식민지 정부에서 관료를 하던 사람들이 해방 후에도 대한민국 정부에서 관료를 하고, 일제시대에 지주는 해방 후에도 지주이고, 일제시대에 경찰은 해방 후에도 경찰이고, 일제시대에 언론사는 해방 후에도 언론사로 남아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의 통치를 찬양하고, 청년들에게 일본군으로 참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최상의 영광이라고 떠들어대던 그 입으로 해방 후에도 여전히 신문을 만들어내면서 민족을 운운하는 언론사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맞은 광복이라는 게 어떤 건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일 것입니다. 해방을 광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해방되지 못했다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역사를 변화시키지 않고 참으로 해방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물러갔지만,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일본 대신 들어와 군정을 실시해도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일본이 물러간 것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우리 민족이 우리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좌절되었고, 그렇게 주장했던 민족지도자들은 다 암살되었습니다. 그렇게 민족은 분단되었고, 일제잔재청산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일본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대해 저렇게 오만한 자세를 가지는 것도 우리가 아직도 식민지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면서 그 역사에 발목잡혀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해방은 광복과는 그 의미가 아주 다릅니다. 해방이라고 말하면, 우리 민족이 일본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다른 누구의 간섭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 우리 자신이 우리 민족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물러갔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건 해방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서투르고, 때로는 노예생활보다 더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더라도 자신의 주인 됨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나가야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광복이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가에 관한 것이라면, 해방이란 그 본질적인 모습에 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광복과 해방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설명한 이유는, 무슨 역사강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어떤 것이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이 무엇인지,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이루시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을 출애굽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사를 출애굽의 역사로 이해합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하시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9-10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냥 이집트에서 내보내는 것으로 다 되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게 하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가나안이라는 새 땅에서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고, 이제는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노예로 지내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주인 노릇하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노예로 살다가 해방되어서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여전히 백인을 상전으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법적으로는 해방되었지만 그들의 정신이 아직 노예였고, 그들의 생활이 아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노예 시절보다 더 고달프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차라리 노예일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을 하는 흑인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신분의 차별은 공식적으로는 없어졌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도 그런 생각이 없어지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툭하면 하는 얘기가,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을 때가 좋았다, 적어도 그 때는 이렇게 굶주리고 고생스럽지는 않았다는 거였습니다. 배고픈 주인노릇보다 배부른 노예가 낫다는 거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노예근성을 씻어버리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단련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가나안에서 제대로 주인노릇하고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단순히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끌고 나온 것으로 끝나는 광복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사는 나라를 이루게 하시려고 출애굽의 그 광대한 해방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백성은 나무처럼 오래 살겠고, 그들이 수고하여 번 것을 오래오래 누릴 것이다.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으며, 그들이 낳은 자식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주께 복받은 자손이며, 그들의 자손도 그들과 같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들어주겠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 (사 65:18-25 표준새번역)
이 말씀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에 돌아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때에, 그들이 살게 될 나라에 대한 청사진입니다. 집을 지은 사람은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고,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고,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는다. 이건 이제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게 되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노예라면 아무리 피땀 흘려 일해도 그 열매는 모두 주인의 것일 뿐입니다. 자기가 일한 열매를 자기가 가지는 것은 주인일 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옛 땅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루셨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시 주인이 되어 살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2장의 사건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의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 어떤 중풍병자가 찾아왔습니다. 혼자서는 올 수 없는 심한 환자였든지, 친구들이 침상에 뉘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친구들은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고 환자를 내려보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환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기 서기관들이 몇 사람 있었는데, 이들이 생각하기를, 이건 신성모독이다, 여호와 하나님말고 누가 감히 죄를 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자가 어찌 여호와 하나님 행세를 하려고 드는가, 하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생각을 아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 그리고는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 (막 2:9-11 표준새번역)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 사람이 병이 드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나병이나 중풍병 등 당시로서는 고칠 수 없는 병일수록 더욱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로 이런 병은 가난하고, 더러운 환경 속에서 살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 많이 걸리는 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당시 종교 권력인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 권력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규정하므로 자신들이 의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자기들은 로마 권력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그럴 처지도 못되는 사람들을 부정하다, 죄인이다 하면서 정죄하고, 자기들의 죄악을 감추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생활의 어려움에다 종교적인 죄책감까지 더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병이 들면 죄 때문에 저렇게 되었다고 거듭 죄인취급 당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죄인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권력이 죄인으로 규정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 저 서기관들과 종교 귀족들은 너를 죄인이라고 규정하지만, 나는 네가 용서받았음을 선언한다. 이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 아니라, 그 환자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종교 권력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환자에게 하신 일은 단순히 육체의 질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을 이런 병으로 몰아넣은 상황으로부터 이 사람을 해방하신 것이었습니다. 광복이 아니라 해방이었습니다. 병으로부터, 종교 권력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신 것이었습니다. 병이 낫고 안 낫고는 그 다음 문제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병을 고치는 것 이전에, 사람을 얽매고 짓눌러서 죄인과 병자로 만들어버리는 사회, 그렇게 하는 권력과 구조의 횡포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시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병을 고치신 것은 예수님인데, 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요 서기관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게 신성모독이라면, 이 일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는 없었겠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신성모독이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았던 것입니다. 종교 귀족들의 눈에만 그게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더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당시에 이런 일은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이런 일들에 대한 기록은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치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병을 고치신 것 때문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보시고, 그것을 해결하시는 예수님에게 놀란 것입니다. 육체의 병을 고치시기보다, 사람을 억압하고 죄인으로 만들고 병자로 만들고 있는 당시의 사회 체제와 분위기 속에서 사람을 해방하시는 그 역사에 놀라움을 표시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의 은혜의 해란 희년을 말하는데, 희년이란, 땅을 잃어버리고 남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이 이스라엘 역사의 어떤 기점으로부터 50년이 되는 해에는 노예에서 해방되고 잃어버렸던 땅을 되찾아 다시 주인이 되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광복이 아니라 해방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적당히 손질해서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억압하고 얽어매는 것들을 다 풀어버리시고 해방하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민족이나, 구속하고 얽매는 모든 것에서 해방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부활하셔서 죽음마저도 우리를 억압할 수 없게 무력하게 만드시고 우리를 해방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해방하시는 일입니다. 어설프게 등불 하나 켜놓고 빛을 찾았으니 만족하라고, 이제 새 세상이 왔다고 떠벌리며 생색이나 내려는 사람들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는 자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뿐만 아니라, 다시는 울지 않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사람을 울리는 모든 악한 것들을 물리치시고, 참 자유와 해방을 주심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그러셨듯이,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해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해방하시고 함께 해방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815를 맞이하면서 우리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아직 우리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것들은 혹시 없을까요 우리는 정말 우리 역사의 주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온전히 해방되었습니까 아직도 우리는 분단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서로 마음대로 오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미국과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고 기를 못 펴고 살고 있습니다. 일본이 저렇게 자기들 멋대로 해도, 변변하게 대응도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 다 아시지요 이 노래가 김영삼 정권 시절에 방송 금지곡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직도 우리는 적개심과 증오심의 굴레에서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 사이에서 그렇고, 동과 서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계층 간에, 지역 간에, 나누고 가르고 따돌리는 일을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가난과 굶주림과 고난의 세월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텔레비전에 정말 보기에도 안쓰럽게 살아가는 청소년가장들의 이야기가 쉬지 않고 방영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비만 좀 많이 오면 집이 물에 잠겨 도망 다니기 바쁜 사람들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못나서,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내 팔자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도, 나만 먹고 살만하면 다른 사람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이기심에서 아직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죄책감에 사로잡혀 고민하는 이들, 외롭고 고달프고 절망 가운데 사는 이들은 없을까요 남모르게 눈물 흘리며 탄식하는 이들이 왜 없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해방되었습니까
이런 모습을 보신다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요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보시면서 어떤 역사를 이루려고 하실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억압과 구속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를 가로막고 방해하는 온갖 악한 것들이 있지만, 그런 것들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해방하셔서 자유롭게 하시고 주인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나의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시고 자유롭게 하시고 해방하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역사 가운데 함께 하셔서, 우리 민족을 온전케 하시고 남북이 통일되는 온전한 해방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해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셔서 죄와 가난과 증오와 절망의 모든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온전케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해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믿는 그대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생명, 우리의 영혼이 해방되어 참 자유를 얻고 기쁨을 누리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주인으로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815 해방주일을 맞으면서, 해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해방의 기쁨을 우리 삶 속에서 누리며 사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즘 일본에서 교과서를 왜곡했다고 해서 말썽인데, 이것도 역시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고 미래를 어떻게 구상하느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역사는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로서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광복이란 말 그대로 빛을 다시 찾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 우리 민족을 노예로 삼아 지배하던 시대를 암흑이라고 보고, 우리 민족이 해방된 것은 그 암흑 상태에서 다시 빛을 찾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역사 인식은 일본의 식민지로 지배당하던 우리의 상황에서, 일본에 의해 노예 상태로 있었다는 사실을 흐리게 만들고, 그저 우리가 빛을 잃고 암흑 상태에서 고생했다는 것만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역사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우리 민족이 고생했던 건 우리가 못나서이고, 우리 민족이 빛을 찾은 건 미국과 소련이 우리 민족을 구원해주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역사를 이해하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실제로, 제가 학교 다니면서 배웠던 역사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것을 광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겁니다. 그런데, 깜깜했던 방에 불만 켜면 뭐가 달라집니까 불을 켠다고 들어왔던 도둑이 저절로 사라지고, 깨진 그릇이 저절로 다시 붙는 건 아니지요.
그런 식으로 역사를 이해하니까, 일본 식민지 정부에서 관료를 하던 사람들이 해방 후에도 대한민국 정부에서 관료를 하고, 일제시대에 지주는 해방 후에도 지주이고, 일제시대에 경찰은 해방 후에도 경찰이고, 일제시대에 언론사는 해방 후에도 언론사로 남아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의 통치를 찬양하고, 청년들에게 일본군으로 참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최상의 영광이라고 떠들어대던 그 입으로 해방 후에도 여전히 신문을 만들어내면서 민족을 운운하는 언론사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맞은 광복이라는 게 어떤 건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일 것입니다. 해방을 광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해방되지 못했다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역사를 변화시키지 않고 참으로 해방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물러갔지만,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일본 대신 들어와 군정을 실시해도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일본이 물러간 것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우리 민족이 우리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좌절되었고, 그렇게 주장했던 민족지도자들은 다 암살되었습니다. 그렇게 민족은 분단되었고, 일제잔재청산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일본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대해 저렇게 오만한 자세를 가지는 것도 우리가 아직도 식민지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면서 그 역사에 발목잡혀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해방은 광복과는 그 의미가 아주 다릅니다. 해방이라고 말하면, 우리 민족이 일본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다른 누구의 간섭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 우리 자신이 우리 민족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물러갔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건 해방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서투르고, 때로는 노예생활보다 더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더라도 자신의 주인 됨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나가야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광복이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가에 관한 것이라면, 해방이란 그 본질적인 모습에 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광복과 해방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설명한 이유는, 무슨 역사강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어떤 것이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향해 가지고 계신 뜻이 무엇인지,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이루시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을 출애굽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사를 출애굽의 역사로 이해합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하시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9-10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냥 이집트에서 내보내는 것으로 다 되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게 하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가나안이라는 새 땅에서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고, 이제는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노예로 지내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주인 노릇하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노예로 살다가 해방되어서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여전히 백인을 상전으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법적으로는 해방되었지만 그들의 정신이 아직 노예였고, 그들의 생활이 아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노예 시절보다 더 고달프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차라리 노예일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을 하는 흑인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신분의 차별은 공식적으로는 없어졌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도 그런 생각이 없어지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툭하면 하는 얘기가,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을 때가 좋았다, 적어도 그 때는 이렇게 굶주리고 고생스럽지는 않았다는 거였습니다. 배고픈 주인노릇보다 배부른 노예가 낫다는 거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노예근성을 씻어버리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단련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가나안에서 제대로 주인노릇하고 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단순히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끌고 나온 것으로 끝나는 광복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사는 나라를 이루게 하시려고 출애굽의 그 광대한 해방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백성은 나무처럼 오래 살겠고, 그들이 수고하여 번 것을 오래오래 누릴 것이다.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으며, 그들이 낳은 자식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주께 복받은 자손이며, 그들의 자손도 그들과 같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들어주겠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 (사 65:18-25 표준새번역)
이 말씀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에 돌아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때에, 그들이 살게 될 나라에 대한 청사진입니다. 집을 지은 사람은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고,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고,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는다. 이건 이제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게 되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노예라면 아무리 피땀 흘려 일해도 그 열매는 모두 주인의 것일 뿐입니다. 자기가 일한 열매를 자기가 가지는 것은 주인일 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옛 땅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루셨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시 주인이 되어 살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2장의 사건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의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 어떤 중풍병자가 찾아왔습니다. 혼자서는 올 수 없는 심한 환자였든지, 친구들이 침상에 뉘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친구들은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고 환자를 내려보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환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기 서기관들이 몇 사람 있었는데, 이들이 생각하기를, 이건 신성모독이다, 여호와 하나님말고 누가 감히 죄를 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자가 어찌 여호와 하나님 행세를 하려고 드는가, 하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생각을 아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 그리고는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 (막 2:9-11 표준새번역)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 사람이 병이 드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나병이나 중풍병 등 당시로서는 고칠 수 없는 병일수록 더욱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로 이런 병은 가난하고, 더러운 환경 속에서 살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 많이 걸리는 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당시 종교 권력인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 권력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규정하므로 자신들이 의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자기들은 로마 권력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그럴 처지도 못되는 사람들을 부정하다, 죄인이다 하면서 정죄하고, 자기들의 죄악을 감추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생활의 어려움에다 종교적인 죄책감까지 더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병이 들면 죄 때문에 저렇게 되었다고 거듭 죄인취급 당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죄인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권력이 죄인으로 규정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 저 서기관들과 종교 귀족들은 너를 죄인이라고 규정하지만, 나는 네가 용서받았음을 선언한다. 이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 아니라, 그 환자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종교 권력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환자에게 하신 일은 단순히 육체의 질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을 이런 병으로 몰아넣은 상황으로부터 이 사람을 해방하신 것이었습니다. 광복이 아니라 해방이었습니다. 병으로부터, 종교 권력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신 것이었습니다. 병이 낫고 안 낫고는 그 다음 문제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병을 고치는 것 이전에, 사람을 얽매고 짓눌러서 죄인과 병자로 만들어버리는 사회, 그렇게 하는 권력과 구조의 횡포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시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병을 고치신 것은 예수님인데, 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요 서기관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게 신성모독이라면, 이 일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는 없었겠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신성모독이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았던 것입니다. 종교 귀족들의 눈에만 그게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더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당시에 이런 일은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이런 일들에 대한 기록은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치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병을 고치신 것 때문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보시고, 그것을 해결하시는 예수님에게 놀란 것입니다. 육체의 병을 고치시기보다, 사람을 억압하고 죄인으로 만들고 병자로 만들고 있는 당시의 사회 체제와 분위기 속에서 사람을 해방하시는 그 역사에 놀라움을 표시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의 은혜의 해란 희년을 말하는데, 희년이란, 땅을 잃어버리고 남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이 이스라엘 역사의 어떤 기점으로부터 50년이 되는 해에는 노예에서 해방되고 잃어버렸던 땅을 되찾아 다시 주인이 되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광복이 아니라 해방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적당히 손질해서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억압하고 얽어매는 것들을 다 풀어버리시고 해방하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민족이나, 구속하고 얽매는 모든 것에서 해방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부활하셔서 죽음마저도 우리를 억압할 수 없게 무력하게 만드시고 우리를 해방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해방하시는 일입니다. 어설프게 등불 하나 켜놓고 빛을 찾았으니 만족하라고, 이제 새 세상이 왔다고 떠벌리며 생색이나 내려는 사람들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는 자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뿐만 아니라, 다시는 울지 않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사람을 울리는 모든 악한 것들을 물리치시고, 참 자유와 해방을 주심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그러셨듯이,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해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해방하시고 함께 해방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815를 맞이하면서 우리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아직 우리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것들은 혹시 없을까요 우리는 정말 우리 역사의 주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온전히 해방되었습니까 아직도 우리는 분단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서로 마음대로 오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미국과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고 기를 못 펴고 살고 있습니다. 일본이 저렇게 자기들 멋대로 해도, 변변하게 대응도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 다 아시지요 이 노래가 김영삼 정권 시절에 방송 금지곡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직도 우리는 적개심과 증오심의 굴레에서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 사이에서 그렇고, 동과 서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계층 간에, 지역 간에, 나누고 가르고 따돌리는 일을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가난과 굶주림과 고난의 세월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텔레비전에 정말 보기에도 안쓰럽게 살아가는 청소년가장들의 이야기가 쉬지 않고 방영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비만 좀 많이 오면 집이 물에 잠겨 도망 다니기 바쁜 사람들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못나서,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내 팔자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도, 나만 먹고 살만하면 다른 사람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이기심에서 아직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죄책감에 사로잡혀 고민하는 이들, 외롭고 고달프고 절망 가운데 사는 이들은 없을까요 남모르게 눈물 흘리며 탄식하는 이들이 왜 없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해방되었습니까
이런 모습을 보신다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요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보시면서 어떤 역사를 이루려고 하실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억압과 구속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해방의 역사를 가로막고 방해하는 온갖 악한 것들이 있지만, 그런 것들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해방하셔서 자유롭게 하시고 주인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나의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시고 자유롭게 하시고 해방하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역사 가운데 함께 하셔서, 우리 민족을 온전케 하시고 남북이 통일되는 온전한 해방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해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셔서 죄와 가난과 증오와 절망의 모든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온전케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해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믿는 그대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생명, 우리의 영혼이 해방되어 참 자유를 얻고 기쁨을 누리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주인으로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815 해방주일을 맞으면서, 해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해방의 기쁨을 우리 삶 속에서 누리며 사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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