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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해방의 참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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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우리 나라가 일제 압박에서 해방 된지 58째 되는 해입니다. 우리 나라가 일제의 36년 동안 압박에서 해방되기까지는 많은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피의 댓가 있었지만 그 뒤에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절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8월15일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과거 인류의 역사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국가의 흥망 성쇄를 친히 주관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당대에 절대 강대국이었던 앗수르, 황금의 나라 바벨론, 문화의 꽃 페르시아와 그리스, 근대의 소련 등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무시한 나라나 개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말았습니다. 우리 나라도 역사흐름을 보면 900번 이상을 주변 강대국에 점령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이 있음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보잘것없는 약소국입니다. 주변국으로부터 무수한 침략을 받아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적 흐름을 창세기에서부터 여호수아에 이르기까지의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자랑스러운 역사뿐 아니라 치욕스런 역사까지도 자녀들에게 제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배운 민족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민족은 뼈저린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 한민족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나라를 잃고 재산은 물론이고 이름까지 빼앗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민족은 일제탄압보다 더 혹독한 탄압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사탄에 속아서 사탄의 탄압을 받으면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사탄의 지시대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탄으로부터 해방되어질 때 진정한 해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참된 해방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⑴,가난에서의 해방
참된 해방은 가난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가난이란 살림살이가 궁하여 넉넉하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가난하게 되면 모든 것이 넉넉하지 못하니까 어려움이 따르고 어려움은 사람을 고생스럽게 합니다.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가난하게 살게되면 자연히 사람이 나약해지고 좌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가난하게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은 가난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눈코 뜰새 없이 동분서주하는 것은 결국 가난으로부터 탈출을 위한 몸부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가난으로부터 탈출할 수는 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서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에 참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 평안은 외적인 요소가 아니라 내적 요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즉 내적 요소란 마음의 평안 참 평안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 낮아진 사람,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갈급하고 부족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본문 당시는 메시야가 오시면 기근이 해결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물질보다 영적 결핍이 중요합니다. 믿음에서 오는 가난한 심령은 세상 적인 것과 다릅니다. 예수 님이 말한 가난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우리 마음속에 있는 세상 적인 것들을 모두 비운 상태를 말합니다. 귀한 것을 채우려면 그릇을 비워야 하듯이 우리 마음속을 깨끗이 비워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가득 찬 생활을 합니다. 현대인은 욕심과 음란이 가득하여 좋은 것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비밀의 은총을 모르고 삽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무리 중요한 것을 주어도 넘쳐 흘러버립니다. 자기 만족에 도취한 사람은 받을 수 없기에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비워 있는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해방을 맛볼 수 있습니다.

⑵,상함에서의 해방
불행한 조건에 있는 사람이나 겉으로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들이나 마음가운데에는 수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실패의 상처, 불신의 상처, 욕심의 상처, 미움, 원망, 낙심, 갈등, 열등감, 이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마음에 남아있어 생활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이런 것들이 크게 작용할수록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만족하거나 행복해 하지 못하고 어둡고 굴절된 삶을 살게됩니다.
헬렌켈러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찾아서 감사하고, 없는 것이 많았지만 있는 것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 모두가 어렵고 힘든 것은 모두가 공감합니다. 그러나 헬렌켈러 보다 더 불행한 조건에 살고 있는 분은 없습니다. 조건이 좋아지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에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면 행복도, 진정한 기쁨도, 만족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환경과 조건을 넘어서는 만족한 삶, 행복한 삶이 말처럼 쉽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벤자민 플랭크린은 "빈 자루는 똑바로 서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빈 자루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세우려면 곡식을 담으면 됩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일, 의외로 쉬울 수 있습니다. 나를 만드신 주님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우리의 오랫동안 입은 상처와 메말라버린 심령이 소생하는 축복이 나타납니다. 주님의 손은 우리를 치유하시는 손, 구원하시는 손, 축복하시는 손입니다.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으시니이다" 시89:13 주님의 손만이 모든 것을 능하게 하십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들로 인하여 휘청거리며 넘어지는 삶을 붙들어 주실 분은 오직 살아 계신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향하여 내 손을 펴면 우리의 부족한 손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손이 비록 주님께 미치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내미는 손을 향하여 주님께서 손을 아래로 펴서 꼭 붙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의원이 필요하듯이 주님은 세상살이에, 사탄의 장난에, 죄의 얼룩에 온갖 상처 입은 자를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우리의 상처에 기름을 바르고 고쳐 주실 것입니다.
상처는 누구나 갖고 있기에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안 그런 척 살 것이 아니에요. 억누르고 감춘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에 더 큰 응어리와 깊은 상처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람 군대의 장관이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 부끄러운 병과 수치를 드러내 놓고 순종할 때 그 병이 깨끗이 낫게 됨을 체험하게 됩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부끄러운 병이었지만 그 병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예수 님의 옷 가를 만지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갈 때 그 병이 치료함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는 대체로 똑똑하고 재능 있으면 사랑 받고 무능하면 사랑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자녀들은 성적이 좋아지면 사랑 받고, 성적이 떨어지면 사랑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사랑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건강한 자식, 잘 자라는 자식보다 신체가 부자유하다든지, 건강하지 못한 자녀에게 더 관심을 갖고 보살핍니다. 속 썩이는 자녀라고 능력 없는 자녀라고 버리는 것은 아니에요. 병든 자녀라고 버릴 수 없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고, 그럴수록 부모는 자녀를 아파하며 더 깊이 사랑합니다. 에디슨은 어렸을 적부터 엉뚱한 질문을 많이 해서 선생님은 가르칠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퇴학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만큼은 "너 왜 자꾸 엉뚱한 질문을 해서 말썽을 일으키느냐"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질문까지도 받아들이고, 그의 약한 부분을 오히려 소중하게 여겨 준 것입니다. 결국 이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으로 이 아이는 발명왕 에디슨이 된 것입니다. 만일 엉뚱한 질문을 할 때에 어머니가 꾸중하고 멸시를 했었다면 그 아이는 정신병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이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때로는 너무나 엉뚱한 우리의 어린 생각도 용납하십니다. 우리의 잘못 생각함으로,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가서 겪게 되는 이런 저런 실패와 상처를 탓하지 아니하시고, 따지지 아니하시고 있는 그대로 감싸주십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상처가 많은 우리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를 고쳐주셔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그토록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찔리는 가시가 있었기에 더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오히려 상처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내가 받은 상처를 원망하고, 상처 때문에 어둡게 살지 마십시오. 괴로워하고 후회하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수제자이었으면서도 수없이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기까지 한 그를 주님은 끝까지 버리시지 아니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상처 속에서 겸손하게 그릇을 준비하고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준비된 그를 주님이 귀하게 쓰셔서 후에 수제자다운 삶을 삽니다. 죽을 때까지 주께서 주신 자기 사명 감당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주님을 만나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던 사마리아 여인도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서워서 사람 모이는 곳에는 가지 못할 만큼 어두운 마음을 갖고 살았던 그가 주님 만나고 보니 달라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상처 때문에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실 뿐만 아니라 그 상처를 영광의 상급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7절에 보면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을 것이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 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70년 동안 바벨론과 앗수르에서 포로 생활하던 상처투성이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몇 배의 영광과 기쁨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부러진 뼈는 아물면 그 부분은 더욱 단단해집니다. 상처를 오히려 은혜의 도구로 삼고, 상처를 상급으로 바꾸시는 주님 바라보며 약할 때 강함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체험해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관하심 속에 이끌려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영과 육신도, 우리의 가정과 미래도 주님의 장중에 달려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 연구해 보면, 그들과 우리의 성정이 똑같아서, 그들도 우리와 같이 실패하고 넘어질 때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다른 것은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서 주님을 붙들다는 것입니다. 모든 약점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품을 다시 찾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엄청난 기회를 주어도 그 기회 안에서 선택을 못하는 사람은 아무 일도 못합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넘어졌을 때마다, 혼란이 왔을 때마다 다시 주님의 품안으로 찾아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사는 자가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위에 나의 문제가 올려지면 그 문제는 끝난 것입니다. 환경이, 사람이, 여건이 나를 가로막을 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시면 열려지고 풀려지고, 회복되는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머리 위에, 소원 위에, 믿음 위에, 주님의 손이 닿는 역사가 일어나 복된 새 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⑶,슬픔에서의 해방
3절에 보면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라고 했는데 여기서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라는 말에 대한 원문 직역은 '아름다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입니다.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화관은 본래 여자들이 머리에 쓰던 아름답고 화려한 관을 말하며, '희락의 옷', '찬송의 옷'과 함께 즐거운 축제 때를 연상시킵니다. 이제 여호와의 구원과 은혜의 때가 이르면 슬픔의 표로 뒤집어썼던 재를(에4:1,3; 렘 6:26) 털어 내고 대신 아름다운 관을 쓰고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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