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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해방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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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진정한 자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더 가져야 자유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형편에 있어야 자유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조건이 주어져야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눅13장)에 보면,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살아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고쳐주시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16)
귀신들린 여자- 마음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닙니다.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뛰어다니지만, 그러나 그녀는 진정한 자유인이 아닙니다. 정신이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본인이 자유하지 못하다는 사실도 모르는, 그러한 속박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억압, 구속, 감시, 연금 그리고 경제적인 가난, 교육적인 빈곤- 이러한 것들도 다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 부자유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노예 상태에 철저하게 길들여져서 내가 속박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상태,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부자유한 상태입니다. 비참한 노예상태입니다.
가장 무서운 노예 상태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하셨습니다.
가난의 노예는 의식하고, 육체적 질병의 속박은 의식하며, 정치적인 억압은 의식하면서도,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속박입니다. 그 형벌과 저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 이것보다 더 무서운 함정은 없습니다.
개를 보십시오.
가죽끈으로 목을 붙들어 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개는 평화스럽게 잠을 잘 잡니다. 배불리만 먹여주면 목이 묶인 상태로도 아무 불편 없이 살아갑니다.
간혹 주인이 부르면 뛰어나가려다가 목에 걸린 목걸이가 탁 잡아당깁니다.
"아, 나는 지금 붙들려 있구나"- 비로소 그때서야 생각합니다. 노예생활에 길들여진 인간이 이와 같습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의 속박에서, 그 정치적인 속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56년 동안이나 자유를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해방이 되자 우리는 비로소 '자유'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처음 말했습니다.
자유라는 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치적 자유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굶어보니까 그것은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경제적 자유가 없으면 정치적인 자유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지적인 자유도 필요합니다. 무식하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사상적으로 속박되면 그것 역시 자유가 아닙니다. 자칫 잘못해서 어떤 위험한 사상에 한번 붙들리게 되면 거기에서 헤어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잘못된 세계관에 붙들릴 수도 있고, 우상과 미신에 붙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에 사로 잡혀 노예가 되고, 자유를 빼앗겼던 적이 많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지,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비로소 배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배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배워야 할 것입니다.
자유의 가치를 모르면 자유하지 못합니다. 자유를 지키내지 못합니다. 참 자유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실 때에라야 자유할 수가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그 능력과 은총에만 자유함이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함으로 자유하고, 진리를 따라 살아감으로 자유합니다. 진리의 노예가 됨으로 자유하고, 사랑에 매임으로 자유한 것입니다. 자유의 참뜻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자유란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 투쟁을 통해서 자유를 얻으려고 합니다. 이를 가리켜 "변증법적 유물사관"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사유, 정신, 역사 등의 발전은 언제나 싸워서, 투쟁을 통해서 얻어져 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늘 따라다니는 용어와 철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혁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수십 년을 두고 혁명을 외쳐왔지만 계속해서 오늘날까지 혁명입니다. 50년이 넘도록 혁명한답시고 이 사람 저 사람 다 잡아 죽이고, 추방했지만 아직까지도 날만 새면 숙청입니다. 도대체 언제 가야 그 숙청이 끝나겠습니까 그들은 입만 열면 "투쟁"이요, 투쟁이 아예 체질화되어 버렸습니다. 투쟁으로 얻어진다고 하던 자유는 온데 간데 없고, 투쟁만이 계속됩니다. 싸움의 연속, 피의 연속입니다. 남은 것이라곤 증오뿐입니다. 증오와 분열, 싸움, 파괴가 저들의 사회에서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투쟁 자체가 목표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유주의, 소위 우리의 자본주의는 어떻습니까 자본주의 철학은 경쟁을 통해서 자유를 얻고자 합니다. 끝없는 소유욕, 끝없는 경쟁이 그 생활 철학입니다. 공부도 더 열심히, 돈도 더 많이, 집도 더 좋은 집, 자동차도 더 좋은 자동차... 무조건 잘 살아보겠다고, 더 잘 살아보겠다고 경쟁에서 경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쓰러지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투쟁과 경쟁- 이 잘못된 방법 때문에 목적마저 잃었습니다. 목적이 사라졌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입니까 인간성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함께 인간을 노예화하고 있는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목적은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없었습니다. 방법이 어리석었습니다. 스스로 지혜로운 체 했지만 사실은 미련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스스로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만든 함정, 자기가 만든 굴레에서 스스로 노예가 되었으나 그 속박에서 벗어날 재간은 없습니다.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무서운 함정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죄에서 자유하는 길말고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영혼이 자유하지 못하면 참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8:36)
예수님께서 속량하시고 영혼을 구원하시는, 그 자유케 하시는 역사가 근본이요, 여기에 뿌리를 두지 않는 한 자유함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사회, 어느 제도의 틀에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시는 그 자유 안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그리고 자유의 노래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빛이 임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빛, 구원의 빛, 계시의 빛, 지혜의 빛이 임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영적으로 어둡고 지적으로 어두운 것, 그리고 생활의 어두움처럼 무섭고 답답한 속박은 없습니다. 빛 안에 깨달음의 자유가 있고, 식별의 자유가 있고, 행함의 자유가 있고, 지혜의 자유가 있습니다. 어두워지면 모든 지식, 모든 능력, 모든 소유가 다 무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1) 빛을 누리라, 자유케 하라는 말씀입니다. 빛 안에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에는 허무함이 있고, 저주가 있을 뿐입니다.
 둘째, 이렇게 영적으로 자유할 때에 회복케 하시는 자유가 있습니다. 관계성을 회복케 하시는 것입니다.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4) 흩어졌던 가족이 다시 만납니다. 다시 만나게 되어 기뻐 반기게 됩니다. 증오하는 곳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사랑할 때에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샬롬- 그 평화, 그 화평 속에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는 가출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를 찾겠다고 집을 나가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집을 나서는 순간 무서운 속박에 매입니다. 타락의 속박에 매이고, 고독의 속박에 매이고, 허무의 속박에 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해 보겠다고 이혼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입니다. 분쟁이 자유일 수는 없습니다. 모여서 하나되고, 화목하는 데에 참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손주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린 손주의 손을 잡고 다니는 정겨운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러한 정경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주 봐주는 것을 귀찮다고 생각하고, 손주들에게 얽매인다고 생각합니다. 서구화되어 가는 우리들의 생활 습관, 문화적인 변화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서구에서는 손주 봐주고, 집 지키는 것이 귀찮다고 독신자 아파트나 양로원에 들어가서 사는 노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자유를 찾아서 혼자 나서보지만 과연 자유를 얻은 것입니까
고독은 자유가 아닙니다. 분열은 자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영혼이 자유할 때에 이산 가족이 다시 모이게 되고, 다시 사랑하게 되고, 다시 반가워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 여러분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을 반가워해야 합니다. 자꾸 도망치고, 되도록 안 만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참으로 자유하다면 사람 만나는 것이 기쁘고 반가운 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시는 자유는 화평 자체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함은 이렇게 정신적으로만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셋째로, 풍부함을 말씀합니다. 자유할 때에 풍부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 참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볼 때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잘 살 것 같은데 사실은 대부분이 못삽니다. 그리고 천연자원이 없는 나라, 기름 한 방울 안나오는 나라가 오히려 더 잘 사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잘 살고 못살고는 결코 천연자원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은 지식의 문제요, 지식의 문제는 교육의 문제요, 교육의 문제는 사상의 문제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에는 풍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온 세계가 다 아는 사실로서,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사회주의 국가는 못삽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못삽니다. 왜 그렇게 못삽니까 사회주의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일을 해도 육체 노동만 고무시켰지 정신 노동에 대해서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탐구하고 연구하지 않았으니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사과나무 한 그루를 키우려해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해서 작고 맛없는 사과를 크고 당도가 높은 사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사과도 제대로 공부해야 좋은 사과가 되는 것이지, 노동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공부를 해야만 합니다. 공부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사상이 바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사상의 노예가 되면 정신적으로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고생을 합니다.
사회주의 가지고는 절대로 안됩니다. 사람도, 문화도, 경제도 다 망쳐 버립니다. 신앙이 바로 될 때에 교육이 바로 되고, 사상이 바로 되고, 나아가 풍부함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천연자원의 문제이겠습니까 신앙의 문제요, 종교의 문제입니다. 신앙이 잘못되고, 종교가 잘못되면 사상이 잘못됩니다. 사상이 잘못되면 교육이 잘못되고, 교육이 잘못되면 인간이 잘못됩니다. 인간이 잘못되면 거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시는 것은 마침내 물질에까지도 풍부하고 여유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상적으로 잘못되고,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될 때에 가난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네 번째 단계는 "영화롭게 하였음이라"(9)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의를 회복케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인 쳐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화롭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시는 역사,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왜 이리도 끝없는 불평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환경에까지 가야 행복하겠습니까 이제는 그만 이 비참한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투쟁으로도 아니요, 경쟁으로도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때에, 바로 거기에 자유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3:17)
자유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할 수 없습니다. 자유의 값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를 지키지 못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8:32) 내가 받은 자유를 여호와 하나님께 반납할 때, 그리하여 사랑에 매이고, 진리에 매이고, 여호와 하나님께 매일 때에 오히려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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