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해방되어
본문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해방되어(엘류데로데세타이)는 자유(엘류데리안)란 말과 동일한 어원을 갖습니다.
노예에게만 사용한 것이 아니고 자유로운 행동을 막는 어떤 속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 시킨다는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종 노릇(둘레이아스)은 노예 신분 노예 상태를 의미 하며 죄에 속박 되어 비자의적으로 굴복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캐나다에 빅토리아 대학의 브레들리(K. R. Bradley)교수는 다년간 로마의 문화를 깊이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로마 제국의 노예와 주인' (Slaves and Masters in Roman Empire) 저술하고 '로마의 문화라는 것은 곧 노예와 주인의 문화다. 그 관계에 있다'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합니다.
당시 로마의 인구의 삼분의 일이 노예였습니다. 로마를 방문하면 2000년 전에 있었던 굉장한 문화유산을 볼 수 있습니다. 원형극장을 비롯해서 그 많은, 엄청난 그 장엄한 유적들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 합니다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건 전부 노예가 만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노예가 설계하고 노예가 지었고 이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많은 노예가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그 노예들의 핏자국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무엇을 건설했다'고 볼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나'하는 그 처참한 모습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노예와 주인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충성(fides) 과 복종(obsequium), 두 마디로 요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충성과 복종' 오직 '충성과 복종' 그것이 노예와 주인의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말할 수 없는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말 못하는 도구 곧 연장 반쯤 말하는 도구 곧 짐승 말 할 줄 아는 도구 곧 노예로 구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노예는 신발도 없고 옷도 없이 일을 시키고 집이라고는 그저 움막 같은데 외양간처럼 만들어 놓고 지푸라기를 넣어 줬다 합니다. 거기서 그대로 자야 했다합니다. 더욱 노예가 서로 말을 하면 거기서 또 문제가 생기니까 일체 말을 못하게 했다 합니다. 듣기만 하고 말을 못하게 해서 그래서 말을 아예 못 배워서 그냥 "웅웅웅" 이렇게 했다 합니다. 동물처럼. 말도 언어까지도 빼앗아 버렸다 합니다. 오로지 '충성과 복종' 이것만 요구했다 합니다. 그래서 그 같은 로마의 문명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을 잘 안 듣던가 하게 되면 뭐 체형을 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이거나 팔아먹든지 정 고약한 노예라고 하면 일벌백계로 길거리에다 세워놓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합니다. 수많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합니다. 이것이 노예라는 것입니다. 그의 지식도, 그의 건강도, 그의 정조도, 그의 도덕성도 다 주인의 것이요 생명까지도 주인의 것입니다. 마음대로 주인이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노예입니다. 생각하면 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노예생활 속에도 "노예 해방"이라는 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도적 차원에서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보다 더 철저한 충성과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서 이루어진 수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주 당근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분고분하게, 온유하게 또는 자발적으로 충성하고 철저하게 복종하면 주인이 자비를 베풀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순간에 좋은 주인을 만나면 노예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세상 떠나기 전에 자기를 위해서 한평생을 수고한 가장 충성된 노예에게 얼마간의 재산을 주면서 자유하게, "너는 이제부터 자유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 해방의 특권을 얻기 위하여 생각이 있는 노예들은 더욱더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한평생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자유의 길을 바라보고. 언젠가 자유의 특권이 주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충성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충성이 오늘의 로마의 문명을 만들었던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길들여진 노예가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문화화 된 노예가 이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는 절대로 자립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충성과 복종만 해왔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처럼 자유를 얻었다가도 자립할 수 없습니다. 인격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없어서 다시 옛 주인에게 가서 "나를 노예로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다시 노예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얘기입니까
밖에 나와서 성공한 노예가 있었다 합니다. 얼마간의 재산을 가지고 아주 힘써서 악착같이 일을 하고 수고해서 부자도 되고, 지위도 얻고,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노예 생활에서 노예화된 노예의식 때문에 욕망과 무질서와 폭력과 나태, 방탕의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의 노예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지난날 죄의 종 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롬 6:17)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그러나 이제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롬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롬 8:31-34)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합니다.
1865년까지 미국 남부의 흑인은 대부분이 노예였습니다. 남부의 목화농장에서 일하는 노예가 많았습니다. 부모가 노예이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잡혀온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노동을 해야 했고 달이 밝은 밤엔 자정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들의 음식은 소금에 절인 고기 한 조각과 소량의 옥수수가 전부였습니다. 주인에게 고분고분 순종치 않으면 가혹한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들을 소유한 농장 주인들은 노예들을 사고팔았습니다. 탈출을 하려다가 잡히면 중벌을 받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유가 없는 노예의 삶은 하루가 천년이었습니다.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켜준 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입니다. 북군인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해 남군과 싸워 이겼습니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킨 것은 죄와 죽음의 노예인 자기 자신을 대속의 은혜로 해방시켜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지도자가 죄와 마귀의 노예 된 자들을 복음으로 자유케 한 것입니다.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썩어짐은 생명과 대조되며 영원한 멸망 곧 사망을 의미합니다.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합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이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전 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런데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망이 우리를 주관 하지 못합니다.
(고전 15:55-57)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호 13:14)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요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성경은 땅에 심겨진 씨앗의 예를 사용하여 사전에 죽지 않고 생명으로 오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나타냅니다.
(고전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스코틀랜드에 부르스라고 하는 애국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스코틀랜드를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그만 에드워드 황제의 군대에 의해서 포위를 당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의 고향 뒷산에서 당한 일이었습니다. 죽을 둥 살 둥 혈혈단신으로 도망 을 했지만 점점 포위망은 좁혀져 왔습니다. 기진맥진하여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 귀에 익은 개 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황제의 군대가 부르스의 애견을 풀어 주인의 냄새를 맡게 하고 부르스를 찾아내도록 꾸민 것입니다. 그는 절망 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기고 기어서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이제 그는 한 걸음도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지쳤습니다. 그런데 말예요. 꼭대기에서 그 너머 골짜기를 내려다 보니 시냇물이 흐르고 있지 않겠어요 부르스는 너무나 반가워 뒹굴다시피 내려가 시냇물에 몸을 숨겼습니다. 곧 개들이 뒤따라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시냇가에 도달해서는 주인의 냄새가 없어져 버렸으므로 허공을 향해 맥없이 짖어댈 뿐이었습니다. 마귀는 부르스의 애견을 앞세운 황제의 군대처럼 우리의 죄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절대 살지 못해. 아무리 교회 다녀도 너는 소용이 없어. 너 과거에 지은 죄를 한번 생각해 봐. 너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의인이 된다는 말이냐" 그러나 마귀의 그 고소는 사실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보혈의 강물에 몸을 던져 잠그기만 하면 아무리 흉악하고 부끄러운 죄라 할지라도 용서를 받게 되기 때문에 따라오던 마귀가 더 이상 추적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로스 자료- 죄에서 해방된 사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 되어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말도 빼앗기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도 빼앗겼습니다. 일본은 말로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고 하였지만 실제는 우리 민족을 식민지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좋은 것들은 일본으로 다 가지고 갔습니다. 쌀, 생선, 과일 등 좋은 것들은 모두 일본 사람들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을 일본 땅으로 데리고 가서 힘든 일들을 다 시켰습니다. 일본에는 지금도 많은는 동포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이 일제 식민지시대에 일본으로 끌려간 동포들의 후손들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동남아시아와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을 일본군인의 위안부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문자 그대로 일본 사람들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어둠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 8월15일 정오, 이 민족이 35년 동안 일제의 종으로 빛을 잃고 어두움 속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었습니다.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힘이 있어서 일본과 대항하여 일본을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여 무조건 항복을 하였고, 동시에 우리 민족은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기쁨이 어떠했겠습니까 연세가 높으신 분들은 그때의 기쁨과 감격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아마도 꿈꾸는 것 같았을 겁니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을 것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끌어 앉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폭로된 사실이지만, 일본은 가스실을 만들어 놓고 며칠만 더 있으면 한국교회의 목사들과, 교회 지도급 인사들을 죽이려는 계획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고나보니깐 해방이 된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꿈에도 그리던 해방과 자유를 맞이한 우리 민족은 너무나 기뻐하고 행복했습니다. 아마도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 속에서 이처럼 기쁘고 행복한 날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관하시지만 특별히 해방의 절기인 광복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광복절의 의미를 바로만 파악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향하여 품으신 뜻이 무엇이며, 이 민족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역사의 의미를 찾으며 그 뜻을 밝히는 작업을 계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이 역사 속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며 우리가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역사의 의미를 알지 못할 때 그 민족은 방향을 바로 잡지 못하며 비전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비전이 없는 민족은 결국 망하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광복 역사의 의미를 찾아내므로 이 민족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비전을 갖게 하여 이 민족을 살리며,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에 공헌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해방의 역사는 출애급의 역사와 흡사합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이룩하신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독립 운동을 통하여 얻은 해방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바로의 세력을 꺾고 그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나가게 하셨습니다. (신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하십니다.
모세는 민족이 홍해에 가로 막혀 궁지에 몰렸을 때 말했습니다.
(출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이 말은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것은 출애급 역사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는 우연이나 숙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룩해 가신다는 이스라엘 역사가들의 신앙고백입니다.
8·15 해방도 이런 점에서 출애굽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이룩하신 역사라는 말입니다. 독립 운동을 한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온 해방은 그 분들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8·15 광복은 전혀 예기치 못하였던 하늘의 선물입니다. 누구 하나 예측도 못했던 바요, 그렇게 간악한 일제가 그렇게 쉽게 손들고 물러가리라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이 해방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무도 모른 것은 아무도 꾸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꾸미지 않고 온 것은 하늘의 선물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직접 민중에게 준 해방이다. 아무도 여기 공로를 주장할 중간적인 자가 없다"(함석헌)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온 해방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것은 우리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민족이 이런 역사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알았다면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해방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게 될 영광의 자유는 이 세상에 있을 때 피할 수 없었던 죄와 재난과 사망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존귀와 찬란함으로 둘러 싸여 영구히 살아가게 됩니다.
(사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은 태초의 에덴 동산의 회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 앞으로 회복될 영광은 이러한 에덴 동산의 영광보다 더욱 뛰어날 것입니다(P. Robertson).
이제 해방의 감격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해리 에머슨 포스딕 목사는 목사로서의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날 어느 일요일 아침에 한 소년이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갔습니다. 그 소년은 그다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자기 내면에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요일 아침, 설교를 듣고 있던 소년의 마음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소년의 마음 문이 열렸습니다.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비전들이 그에게로 다가왔고,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삶의 방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접니다. 그 사건은 50여 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저는 그 때의 감명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제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그 순간에 일어난 해방의 힘은 신앙생활에 접어든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
광복절은 해방의 절기입니다.
해방은 종 된 자리에서의 해방이요 썩어짐의 종 노릇한데서 해방이요 입본의 압제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어떠한 해방이던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바로 알고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됩시다.
해방되어(엘류데로데세타이)는 자유(엘류데리안)란 말과 동일한 어원을 갖습니다.
노예에게만 사용한 것이 아니고 자유로운 행동을 막는 어떤 속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 시킨다는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종 노릇(둘레이아스)은 노예 신분 노예 상태를 의미 하며 죄에 속박 되어 비자의적으로 굴복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캐나다에 빅토리아 대학의 브레들리(K. R. Bradley)교수는 다년간 로마의 문화를 깊이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로마 제국의 노예와 주인' (Slaves and Masters in Roman Empire) 저술하고 '로마의 문화라는 것은 곧 노예와 주인의 문화다. 그 관계에 있다'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합니다.
당시 로마의 인구의 삼분의 일이 노예였습니다. 로마를 방문하면 2000년 전에 있었던 굉장한 문화유산을 볼 수 있습니다. 원형극장을 비롯해서 그 많은, 엄청난 그 장엄한 유적들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 합니다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건 전부 노예가 만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노예가 설계하고 노예가 지었고 이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많은 노예가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그 노예들의 핏자국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무엇을 건설했다'고 볼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나'하는 그 처참한 모습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노예와 주인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충성(fides) 과 복종(obsequium), 두 마디로 요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충성과 복종' 오직 '충성과 복종' 그것이 노예와 주인의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말할 수 없는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말 못하는 도구 곧 연장 반쯤 말하는 도구 곧 짐승 말 할 줄 아는 도구 곧 노예로 구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노예는 신발도 없고 옷도 없이 일을 시키고 집이라고는 그저 움막 같은데 외양간처럼 만들어 놓고 지푸라기를 넣어 줬다 합니다. 거기서 그대로 자야 했다합니다. 더욱 노예가 서로 말을 하면 거기서 또 문제가 생기니까 일체 말을 못하게 했다 합니다. 듣기만 하고 말을 못하게 해서 그래서 말을 아예 못 배워서 그냥 "웅웅웅" 이렇게 했다 합니다. 동물처럼. 말도 언어까지도 빼앗아 버렸다 합니다. 오로지 '충성과 복종' 이것만 요구했다 합니다. 그래서 그 같은 로마의 문명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을 잘 안 듣던가 하게 되면 뭐 체형을 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이거나 팔아먹든지 정 고약한 노예라고 하면 일벌백계로 길거리에다 세워놓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합니다. 수많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합니다. 이것이 노예라는 것입니다. 그의 지식도, 그의 건강도, 그의 정조도, 그의 도덕성도 다 주인의 것이요 생명까지도 주인의 것입니다. 마음대로 주인이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노예입니다. 생각하면 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노예생활 속에도 "노예 해방"이라는 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도적 차원에서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보다 더 철저한 충성과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서 이루어진 수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주 당근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분고분하게, 온유하게 또는 자발적으로 충성하고 철저하게 복종하면 주인이 자비를 베풀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순간에 좋은 주인을 만나면 노예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세상 떠나기 전에 자기를 위해서 한평생을 수고한 가장 충성된 노예에게 얼마간의 재산을 주면서 자유하게, "너는 이제부터 자유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 해방의 특권을 얻기 위하여 생각이 있는 노예들은 더욱더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한평생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자유의 길을 바라보고. 언젠가 자유의 특권이 주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충성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충성이 오늘의 로마의 문명을 만들었던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길들여진 노예가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문화화 된 노예가 이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는 절대로 자립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충성과 복종만 해왔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처럼 자유를 얻었다가도 자립할 수 없습니다. 인격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없어서 다시 옛 주인에게 가서 "나를 노예로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다시 노예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얘기입니까
밖에 나와서 성공한 노예가 있었다 합니다. 얼마간의 재산을 가지고 아주 힘써서 악착같이 일을 하고 수고해서 부자도 되고, 지위도 얻고,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노예 생활에서 노예화된 노예의식 때문에 욕망과 무질서와 폭력과 나태, 방탕의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타락의 노예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지난날 죄의 종 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롬 6:17)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그러나 이제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롬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롬 8:31-34)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합니다.
1865년까지 미국 남부의 흑인은 대부분이 노예였습니다. 남부의 목화농장에서 일하는 노예가 많았습니다. 부모가 노예이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잡혀온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노동을 해야 했고 달이 밝은 밤엔 자정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들의 음식은 소금에 절인 고기 한 조각과 소량의 옥수수가 전부였습니다. 주인에게 고분고분 순종치 않으면 가혹한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들을 소유한 농장 주인들은 노예들을 사고팔았습니다. 탈출을 하려다가 잡히면 중벌을 받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유가 없는 노예의 삶은 하루가 천년이었습니다.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켜준 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입니다. 북군인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해 남군과 싸워 이겼습니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킨 것은 죄와 죽음의 노예인 자기 자신을 대속의 은혜로 해방시켜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지도자가 죄와 마귀의 노예 된 자들을 복음으로 자유케 한 것입니다.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썩어짐은 생명과 대조되며 영원한 멸망 곧 사망을 의미합니다.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합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이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전 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런데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망이 우리를 주관 하지 못합니다.
(고전 15:55-57)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호 13:14)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요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성경은 땅에 심겨진 씨앗의 예를 사용하여 사전에 죽지 않고 생명으로 오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나타냅니다.
(고전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스코틀랜드에 부르스라고 하는 애국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스코틀랜드를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그만 에드워드 황제의 군대에 의해서 포위를 당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의 고향 뒷산에서 당한 일이었습니다. 죽을 둥 살 둥 혈혈단신으로 도망 을 했지만 점점 포위망은 좁혀져 왔습니다. 기진맥진하여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 귀에 익은 개 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황제의 군대가 부르스의 애견을 풀어 주인의 냄새를 맡게 하고 부르스를 찾아내도록 꾸민 것입니다. 그는 절망 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기고 기어서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이제 그는 한 걸음도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지쳤습니다. 그런데 말예요. 꼭대기에서 그 너머 골짜기를 내려다 보니 시냇물이 흐르고 있지 않겠어요 부르스는 너무나 반가워 뒹굴다시피 내려가 시냇물에 몸을 숨겼습니다. 곧 개들이 뒤따라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시냇가에 도달해서는 주인의 냄새가 없어져 버렸으므로 허공을 향해 맥없이 짖어댈 뿐이었습니다. 마귀는 부르스의 애견을 앞세운 황제의 군대처럼 우리의 죄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절대 살지 못해. 아무리 교회 다녀도 너는 소용이 없어. 너 과거에 지은 죄를 한번 생각해 봐. 너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의인이 된다는 말이냐" 그러나 마귀의 그 고소는 사실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보혈의 강물에 몸을 던져 잠그기만 하면 아무리 흉악하고 부끄러운 죄라 할지라도 용서를 받게 되기 때문에 따라오던 마귀가 더 이상 추적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로스 자료- 죄에서 해방된 사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 되어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말도 빼앗기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도 빼앗겼습니다. 일본은 말로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고 하였지만 실제는 우리 민족을 식민지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좋은 것들은 일본으로 다 가지고 갔습니다. 쌀, 생선, 과일 등 좋은 것들은 모두 일본 사람들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을 일본 땅으로 데리고 가서 힘든 일들을 다 시켰습니다. 일본에는 지금도 많은는 동포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이 일제 식민지시대에 일본으로 끌려간 동포들의 후손들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동남아시아와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을 일본군인의 위안부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문자 그대로 일본 사람들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어둠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 8월15일 정오, 이 민족이 35년 동안 일제의 종으로 빛을 잃고 어두움 속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었습니다.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힘이 있어서 일본과 대항하여 일본을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여 무조건 항복을 하였고, 동시에 우리 민족은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기쁨이 어떠했겠습니까 연세가 높으신 분들은 그때의 기쁨과 감격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아마도 꿈꾸는 것 같았을 겁니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을 것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끌어 앉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폭로된 사실이지만, 일본은 가스실을 만들어 놓고 며칠만 더 있으면 한국교회의 목사들과, 교회 지도급 인사들을 죽이려는 계획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고나보니깐 해방이 된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꿈에도 그리던 해방과 자유를 맞이한 우리 민족은 너무나 기뻐하고 행복했습니다. 아마도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 속에서 이처럼 기쁘고 행복한 날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관하시지만 특별히 해방의 절기인 광복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광복절의 의미를 바로만 파악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향하여 품으신 뜻이 무엇이며, 이 민족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역사의 의미를 찾으며 그 뜻을 밝히는 작업을 계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이 역사 속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며 우리가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역사의 의미를 알지 못할 때 그 민족은 방향을 바로 잡지 못하며 비전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비전이 없는 민족은 결국 망하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광복 역사의 의미를 찾아내므로 이 민족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비전을 갖게 하여 이 민족을 살리며,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에 공헌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해방의 역사는 출애급의 역사와 흡사합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이룩하신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독립 운동을 통하여 얻은 해방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바로의 세력을 꺾고 그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나가게 하셨습니다. (신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하십니다.
모세는 민족이 홍해에 가로 막혀 궁지에 몰렸을 때 말했습니다.
(출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이 말은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것은 출애급 역사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는 우연이나 숙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룩해 가신다는 이스라엘 역사가들의 신앙고백입니다.
8·15 해방도 이런 점에서 출애굽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이룩하신 역사라는 말입니다. 독립 운동을 한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온 해방은 그 분들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8·15 광복은 전혀 예기치 못하였던 하늘의 선물입니다. 누구 하나 예측도 못했던 바요, 그렇게 간악한 일제가 그렇게 쉽게 손들고 물러가리라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이 해방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무도 모른 것은 아무도 꾸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꾸미지 않고 온 것은 하늘의 선물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직접 민중에게 준 해방이다. 아무도 여기 공로를 주장할 중간적인 자가 없다"(함석헌)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온 해방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것은 우리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민족이 이런 역사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알았다면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해방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게 될 영광의 자유는 이 세상에 있을 때 피할 수 없었던 죄와 재난과 사망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존귀와 찬란함으로 둘러 싸여 영구히 살아가게 됩니다.
(사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은 태초의 에덴 동산의 회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 앞으로 회복될 영광은 이러한 에덴 동산의 영광보다 더욱 뛰어날 것입니다(P. Robertson).
이제 해방의 감격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해리 에머슨 포스딕 목사는 목사로서의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날 어느 일요일 아침에 한 소년이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갔습니다. 그 소년은 그다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자기 내면에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요일 아침, 설교를 듣고 있던 소년의 마음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소년의 마음 문이 열렸습니다.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비전들이 그에게로 다가왔고,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삶의 방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접니다. 그 사건은 50여 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저는 그 때의 감명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제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그 순간에 일어난 해방의 힘은 신앙생활에 접어든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
광복절은 해방의 절기입니다.
해방은 종 된 자리에서의 해방이요 썩어짐의 종 노릇한데서 해방이요 입본의 압제로 부터의 해방입니다.
어떠한 해방이던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바로 알고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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