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광복절과 유월절
본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향하여 질문하시고, 대답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수많은 질문 가운데 최초의 질문이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인데, 그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아름답게 지으신 후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과 피조세계 가운데 중간적인 존재로 세우셔서, 위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모든 만물을 다스리며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제한이 있었는데,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제한 속의 제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피조의식을 일깨우고 인간의 유한성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금지된 나무는 인간의 머리 위에 창조주가 계시고, 그 동산의 관리인에게 주인이 있다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 표시요, 주인과 관리인의 자리 표시였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의 자리에 앉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 전체에 혼란과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에, 그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경계 표지판을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던 아담과 하와에게 한 유혹자가 침입하여 불행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 유혹자가 뿌린 불행의 씨앗은 여호와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한 가지 제한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격발시키는 것이었고, 인간도 여호와 하나님과 똑같은 능력이 있으므로 똑같은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유혹이었습니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자유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자유까지 허락하셨다는 것은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에 한계를 정해 주셨다는 것은 이 자유가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의 한계 안에서의 자유요, 언제나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자유임을 알려 줍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관리인의 자리를 떠나 주인의 자리에 앉으라는 사단의 유혹에 빠짐으로 불행한 실락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주인의 자리를 넘보다가 실수한 관리인은 주인이 나타나는 소리를 듣고, 숲속에 몸을 감추인 채 숨어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동산을 거니시던 주인은 동산이 어질러져 있고, 자기 위치에 있어야 할 관리인이 보이지 않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며 관리인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절대자 앞에서 인간의 한계와 그 한계를 벗어났을 때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와 임무를 부여받은 인간은 반드시 책임을 추궁받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1. 범죄한 인간을 찾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창 3:9, 21).
인간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고, 유혹에 빠질 수도 있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의 이름을 부르면서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수년 전, 대구지방에서 실종된 소위 개구리 소년들을 찾아 헤매는 그 부모의 심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그렇게도 훌륭하게 창조하사, 온갖 영광과 존귀를 다 걸어 주시고 복을 명하신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았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시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발동이요, 연민과 이해심의 당연한 표출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잘못을 저질러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다 할지라도 잃은 양을 찾는 목자같이,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과 같이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며 찾으십니다(눅 15:310).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도 바로 범죄한 인간을 찾아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회복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눅 5:32).
2. 피조물인 인간의 위치를 재확인하시는 것입니다(창 2:1517, 고전 15:1011).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모든 피조물보다는 우월하게 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우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사람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시 8:56, 창 1:2628).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이러한 인간의 위치를 이탈하여, 어두운 나무 그늘에 숨어서 떨고 있었습니다. 범죄에는 책임 추궁이 따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따르고, 은폐와 책임전가와 같은 도덕적 취약점이 분명히 불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분명히 창조자가 아니며, 또한 금수와 버러지와 같은 인간 이하의 존재도 아닙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질문은 자신의 현주소를 재확인하고, 자기가 설 자리, 앉을 자리를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탈과 회복의 역사를 종결하고, 여호와 하나님인간피조세계라는 존재 질서를 따라서 인간의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해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도전하는 과학문명의 오만과 파괴적 속성을 경계하며, 인간의 한계와 위치를 지킬 것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병든 자본주의가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무절제하게 질주하며 만용을 부리는 행태 앞에서, 아론과 그 백성들처럼 머리 숙이고 경배하는 것을 경계하고, 물질의 노예가 된 인간을 자기 위치로 회복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세계 교회가 서 있는 현주소를 재확인하면서 세속의 힘에 굴복하여 무릎을 꿇고, 예배당 건물은 관광자원으로 처분하고 교회 간판을 내리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순교적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자리를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생활에 있어서도 자신의 현재 위치를 분명히 확인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에 나의 나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고 책임 있게 응답하면서 그 위치를 목숨을 걸고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고전 15:1011).
3. 베푸신 복에 대한 책임 추궁의 내용입니다(창 3:1113).
피조물인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피조물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고, 보존하고, 풍성케 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복(福)의 개념은 향락과 소유의 개념보다는 사명과 책임이라는 교훈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명적 존재요,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 하고 응답할 수 있는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장 위대하게 만드셨다는 사실과, 인간의 책임이 중요하다는 것과,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책임 추궁을 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서 깨달은 진리는 자신들의 벗은 부끄러운 모습 뿐만 아니라 인간이 피조물이기에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고 자유 남용에는 큰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책임을 전가하고 핑계를 하는 부도덕한 행위를 보여 줌으로써 인간의 불완전성을 노출시켰습니다(창 3:913).
헉슬리는 현대인을 가리켜 머리가 깎이고, 두 눈이 빠진 채 거대한 맷돌을 돌리고 있는 삼손과 같다고 했습니다. 나실인인 삼손은 자신의 위치를 떠나 사명을 망각하고 만용과 향락에 빠짐으로 결국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블레셋의 포로가 되어 눈이 뽑힌 채 맷돌을 돌리는 수치를 맛보게 됩니다.
현대인은 삼손과 같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거세당한 채 현대문명의 노예로 전락하여 이방 신전 앞에서 재주나 부리는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인류가 다시 살 길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황폐해진 영성을 회복하여, 사단의 세력을 부수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삿 16:21, 25, 28).
무제한 속의 제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피조의식을 일깨우고 인간의 유한성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금지된 나무는 인간의 머리 위에 창조주가 계시고, 그 동산의 관리인에게 주인이 있다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 표시요, 주인과 관리인의 자리 표시였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의 자리에 앉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 전체에 혼란과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에, 그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경계 표지판을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던 아담과 하와에게 한 유혹자가 침입하여 불행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 유혹자가 뿌린 불행의 씨앗은 여호와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한 가지 제한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격발시키는 것이었고, 인간도 여호와 하나님과 똑같은 능력이 있으므로 똑같은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유혹이었습니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자유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자유까지 허락하셨다는 것은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에 한계를 정해 주셨다는 것은 이 자유가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의 한계 안에서의 자유요, 언제나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자유임을 알려 줍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관리인의 자리를 떠나 주인의 자리에 앉으라는 사단의 유혹에 빠짐으로 불행한 실락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주인의 자리를 넘보다가 실수한 관리인은 주인이 나타나는 소리를 듣고, 숲속에 몸을 감추인 채 숨어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동산을 거니시던 주인은 동산이 어질러져 있고, 자기 위치에 있어야 할 관리인이 보이지 않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며 관리인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절대자 앞에서 인간의 한계와 그 한계를 벗어났을 때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와 임무를 부여받은 인간은 반드시 책임을 추궁받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1. 범죄한 인간을 찾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창 3:9, 21).
인간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고, 유혹에 빠질 수도 있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의 이름을 부르면서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수년 전, 대구지방에서 실종된 소위 개구리 소년들을 찾아 헤매는 그 부모의 심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그렇게도 훌륭하게 창조하사, 온갖 영광과 존귀를 다 걸어 주시고 복을 명하신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았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시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발동이요, 연민과 이해심의 당연한 표출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잘못을 저질러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다 할지라도 잃은 양을 찾는 목자같이,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과 같이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며 찾으십니다(눅 15:310).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도 바로 범죄한 인간을 찾아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회복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눅 5:32).
2. 피조물인 인간의 위치를 재확인하시는 것입니다(창 2:1517, 고전 15:1011).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모든 피조물보다는 우월하게 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우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사람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시 8:56, 창 1:2628).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이러한 인간의 위치를 이탈하여, 어두운 나무 그늘에 숨어서 떨고 있었습니다. 범죄에는 책임 추궁이 따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따르고, 은폐와 책임전가와 같은 도덕적 취약점이 분명히 불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분명히 창조자가 아니며, 또한 금수와 버러지와 같은 인간 이하의 존재도 아닙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질문은 자신의 현주소를 재확인하고, 자기가 설 자리, 앉을 자리를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탈과 회복의 역사를 종결하고, 여호와 하나님인간피조세계라는 존재 질서를 따라서 인간의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해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도전하는 과학문명의 오만과 파괴적 속성을 경계하며, 인간의 한계와 위치를 지킬 것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병든 자본주의가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무절제하게 질주하며 만용을 부리는 행태 앞에서, 아론과 그 백성들처럼 머리 숙이고 경배하는 것을 경계하고, 물질의 노예가 된 인간을 자기 위치로 회복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세계 교회가 서 있는 현주소를 재확인하면서 세속의 힘에 굴복하여 무릎을 꿇고, 예배당 건물은 관광자원으로 처분하고 교회 간판을 내리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순교적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자리를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생활에 있어서도 자신의 현재 위치를 분명히 확인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에 나의 나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고 책임 있게 응답하면서 그 위치를 목숨을 걸고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고전 15:1011).
3. 베푸신 복에 대한 책임 추궁의 내용입니다(창 3:1113).
피조물인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피조물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고, 보존하고, 풍성케 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복(福)의 개념은 향락과 소유의 개념보다는 사명과 책임이라는 교훈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명적 존재요,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 하고 응답할 수 있는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장 위대하게 만드셨다는 사실과, 인간의 책임이 중요하다는 것과,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책임 추궁을 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서 깨달은 진리는 자신들의 벗은 부끄러운 모습 뿐만 아니라 인간이 피조물이기에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고 자유 남용에는 큰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책임을 전가하고 핑계를 하는 부도덕한 행위를 보여 줌으로써 인간의 불완전성을 노출시켰습니다(창 3:913).
헉슬리는 현대인을 가리켜 머리가 깎이고, 두 눈이 빠진 채 거대한 맷돌을 돌리고 있는 삼손과 같다고 했습니다. 나실인인 삼손은 자신의 위치를 떠나 사명을 망각하고 만용과 향락에 빠짐으로 결국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블레셋의 포로가 되어 눈이 뽑힌 채 맷돌을 돌리는 수치를 맛보게 됩니다.
현대인은 삼손과 같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거세당한 채 현대문명의 노예로 전락하여 이방 신전 앞에서 재주나 부리는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인류가 다시 살 길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황폐해진 영성을 회복하여, 사단의 세력을 부수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삿 16:21, 2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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