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누가 그 가정을 흔들 것인가?
본문
지금 한국사회는 전통적 결혼관이 심각하게 도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결혼관을 가르치셨을까요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께 이혼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문제를 제기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들의 질문의도가 잘못돼 있는 것을 간파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되묻습니다. 너희들이 잘 알고있다고 생각한 모세의 가르침은 무엇이냐 그랬더니 그들이 무어라고 대답을 했지요 4절에 보면 "이혼증서"를 써서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그랬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결혼관 혹은 이혼관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혼증서 한 장이면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증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남자였습니다. 여자입장에서도 이혼증서 한 장 써주고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불평등하고 가혹한 법입니까 얼마나 여자에 대한 학대가 깊은 법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모세의 법이라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모세가 이런 법을 만들었을까 더욱 심각한 문제는 모세의 법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법이라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런 법을 제정하셨을까 아주 심각한 주제이지요. 모세의 이혼법은 신24:1에 있습니다. 정확히 인용해 보지요.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 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법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정신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내에게 심각한 수치의 문제가 발견되었을 때 이혼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치라는 것은 성적 범죄라고 해석하는 것이 구약의 정신입니다. 또 하나는 이혼 당한 여인에게 재혼의 기회가 법적으로 보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법은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여자들의 권익이 굉장히 높게 보장된 율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법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 신24:5을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할 수 있다는 법이 신24:1-4입니다. 바로 그 다음 말씀인 신24:5은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년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결혼한 남자는 1년동안 군대도 보내지 말고- 또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공익근무도 시키지 말라고 했지요.
왜 그렇습니까! 일년동안 한가히 놀면서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법을 보면서 누가 감히 모세의 율법이 권익을 무시한 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신 24:1절의 법의 정신을 얼마나 짓밟고 있었는가! 그 법의 정신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 극명해 지지요. 모세의 법은 이혼증서 한 장이면 언제든지 아내를 내 쫓을 수 있다는 그런 법이 아닙니다. 정당한 법에 의하지 않고는 아내와 이혼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여자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한 법인 데 이 법이 강자에 의해 악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해석은 더 깊습니다. 모세를 통해 조건부 이혼을 허락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느냐! 원래는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다. 창조 당시에는 이혼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이후 그 영혼이 어두워지고 완악하게 되었다. 마음이 굳어졌다는 뜻이지요. 완악한 마음을 영어 성경은 hardness of heart라고 번역했습니다. Hardness 그런 굳은 마음으로는 창조의 질서를 도무지 수용할 수가 없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허락한 법이, 모세의 이혼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해석 이여요.
이혼에 대한 모세의 법을 바르게 이해하는 두 가지 관점을 다시 정돈해 보십시다. 첫째는 모세법은 그 당시 문화적 정황으로 보면 여자의 인권이 굉장히 높게 보장된 법입니다.
둘째로 모세법은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잠정적으로 허락한 법이다 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혼 법이 잠정적 한시적 법이라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회복하신 창조의 법은 무엇인가!
막 10:6-9에서 아주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지요.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창조시로 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까닭은 결혼을 통해서 하나가 됨을 전제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나아가서는 결혼을 통해 하나가 된 부부는 사람의 뜻대로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얼마나 명백합니까 진리는 언제나 단순명료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혼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의 결혼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예수님의 이혼관이 무엇이 었나요 예, 사람의 뜻으로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결혼관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라. "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의 결혼관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 부모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독립을 의미합니다. 유교에서 가르치는 효사상에는 이런 사상이 없습니다. 유교적 영향아래 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부모공경사상을 마치 유교의 효 개념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들을 스스로 만들고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떠나는 훈련도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가 진심으로 자식을 보내주는 훈련입니다. 자식이 결혼 후에는 부모를 떠나는 것, 그것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식을 떠나보낼 때 눈물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떠나 보낼 때 새로운 행복이 잉태하는 것을 믿으십시오. 결혼한 자녀들은 출가시키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지도하고 간섭할 대상이 아니라, 협력하고 기도해 줄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못마땅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을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 논 자식인데 결혼시킨 후에 부모가 자녀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훼방해서야, 되겠습니까 알아서 하도록 100% 맡기십시오. (99%가 아니라 100%를 맡기십시오. ) 부족하고 섭섭한 부분이 있거든 오직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하고 싶은데, 인격이 부족한 것 때문에 속이 상하십니까 그거야 모든 인생이 인격이 부족하지요. 사실 사위가 부엌일 돕지 않는 것은 밉고 부엌에 들어가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게 보여서 속이 상하는 이중잣대로 상대방을 정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쪼록 자식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부모를 완전히 떠나도록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결혼관에 담겨있는 두 번째 원리는 무엇입니까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적인 상징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인적 통합을 뜻합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통합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계약결혼이라는 통념과 얼마나 다릅니까 바울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
그렇지요. 이 비밀이 크도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사도는 이 비밀스러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험한 산이라도 길이 있으면 어린아이라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그 비밀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있어요. 엡 5:22 이하의 말씀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그러셨습니다. 그런가하면, 남편들아 아내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그러셨습니다.
엡 5:33에서 이 말씀을 잘 요약했습니다.
"너희도 각각 자기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을 거룩한 가정, 행복이 넘치는 가정으로 세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길이 있는데 사람들은 왜 길로 가지 않으려 할까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길! 그 길은 길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한 그 길을 걸으십시오. 세상사람들이 가르치는 부부생활의 조건이 있는 원칙! 그것은 길이 아닙니다. 이혼도 길이 아닙니다.
이혼하면 당장은 시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길이 아닙니다. 가정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경로로 결혼을 했을지라도 여러분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가정입니다. 이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혼 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거룩한 가정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있습니다.
"너희도 각각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
아무도 홀로서 그 길을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해 보십시오. 진실로 무릎을 꿇어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동행해 주십니다. 저도 너무너무 부족한 사람입니다만 주님께서 동행해 주시고 지켜주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저희 가정은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여러분은 저보다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신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주시고 은혜 위에 은혜로 채워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
이와 같은 예수님의 결혼관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0계명중 제 7계명입니다. 제 7계명이 가정이라는 집의 기초입니다. 주춧돌입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집은 무너집니다. 모래 위에 집을 세우면 겉모양이 아무리 화려해도 비바람이 치면 곧 무너집니다. 집을 잘 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기초가 중요합니다. 가정의 기초는 제 7계명이라고 그랬습니다. 제 7계명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간음하지 말지니라"입니다.
간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부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행위를 말합니다. 부부관계 이외의 성적행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는 매우 무섭고 단호했습니다. 죽임 당함을 면치 못했습니다.
레 20:10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를 함께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히 13:4절도 결혼이 그 성결에 기초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어요.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여호와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
우리가 매우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이다. 구약은 심판이고 신약은 용서이다. 이런 2분 법은 매우 잘못된 성경 해석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의 말씀을 신약의 빛으로 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메시지에는 심판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간음하는 자들이 진정으로 회심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가 어떻게 임할 것인가 그것은 인생이 논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행음한자, 간음한자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신약성경이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의 성결과 행복은 '침소'를 더럽히지 않는데서 시작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3장 4절 말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매우 소극적으로, 아주 제한적으로 이혼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큰 테두리는 이혼해서는 안된다 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 19:9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혼을 허락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
그러니까 음행한 일이 생기면 이혼이 가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혼을 적극적으로 권고하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아주 제한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이혼을 허용하시는 것은 틀립없습니다. 남자든지- 여자든지- 간음하면 그것은 이혼사유가 된다는 것을 예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만큼 간음죄는 결혼관계를 파괴시키는 마귀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간음죄를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고전 5:2에 보면 간음죄를 소홀히 다루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엄히 책망합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니까 바울사도께서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신 것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음행죄 자체에 대한 징계입니다. 또 하나는 음행한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 교회지도자들의 태도입니다.
음행한 자들 처벌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너희가 사랑과 용납이 깊구나!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갖어야 합니다. 세속적 관점으로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이름해서는 안됩니다. 간음죄에 대한 예수님의 참뜻이 가장 완전하게 전해지는 말씀은 마 5:27-30입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 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져 하신 것은 마음의 성결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문자 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말씀하시고져한 예수님의 중심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마음의 성결을 요구하십니다. 가정의 행복은 부부간의 성적 순결이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순결은 결단코 부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적인 순결을 지키지 않고 가정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것은 한마디로 거짓이요 위선입니다. 마귀의 속임수에 깊이 깊이 빠지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남편이 깊이 빠지지만 않는다면 남편의 외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도량도 아닙니다. 스스로 속이는 일입니다. 간음하고도 회개치 않는 자는 평생토록 그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의 풍조는 성적순결을 바보스럽고, 고지식한 사람들의 편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거짓의 폭풍우 가운데 성도들이 서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 자신도 세상의 풍조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거대한 폭풍권 안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험한 세상에서 우리자신과 우리 가정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건강한 가정이라야 우리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성적인 순결 없이 돈도 건강도 그 무엇도 가정의 행복을 지킬 수 없는 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러면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못하여 행복의 기초가 흔들리고 혹은 깨어져버림을 경험하신 분들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어물쩡하게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이를 깨물고 회개해야 합니다.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객관적 검증을 받을 때까지 오래토록 자중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는 한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사죄의 은총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죄에 빠진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을 대하는 신령한 성도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너무 관대하고 타인에게 너무 엄한 것이 체질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요 8장 1-10에 보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의 손에는 돌이 들려있었습니다. 간음한 사람은 돌로 치라고 율법은 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께서 말씀하셨어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 값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모두가 슬그머니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여인만 홀로 남았지요.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옳습니다. 다시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사죄의 본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바리새인의 돌을 갖었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갖었습니까 아니, 예수님 앞에서는 바리새인도 차마 돌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계십니까 아픔이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십시오.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진심으로 눈물로 연약한 성도를 도우시길 바랍니다. 만일 그들을 정죄한다면, 바리새인보다 악한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고고한 성도!
아픔이 있는 성도들을 눈물로 치유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가진 따뜻한 성도가 되시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결혼관을 가르치셨을까요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께 이혼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문제를 제기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들의 질문의도가 잘못돼 있는 것을 간파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되묻습니다. 너희들이 잘 알고있다고 생각한 모세의 가르침은 무엇이냐 그랬더니 그들이 무어라고 대답을 했지요 4절에 보면 "이혼증서"를 써서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그랬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결혼관 혹은 이혼관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혼증서 한 장이면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증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남자였습니다. 여자입장에서도 이혼증서 한 장 써주고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불평등하고 가혹한 법입니까 얼마나 여자에 대한 학대가 깊은 법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모세의 법이라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모세가 이런 법을 만들었을까 더욱 심각한 문제는 모세의 법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법이라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런 법을 제정하셨을까 아주 심각한 주제이지요. 모세의 이혼법은 신24:1에 있습니다. 정확히 인용해 보지요.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 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법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정신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내에게 심각한 수치의 문제가 발견되었을 때 이혼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치라는 것은 성적 범죄라고 해석하는 것이 구약의 정신입니다. 또 하나는 이혼 당한 여인에게 재혼의 기회가 법적으로 보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법은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여자들의 권익이 굉장히 높게 보장된 율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법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 신24:5을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할 수 있다는 법이 신24:1-4입니다. 바로 그 다음 말씀인 신24:5은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년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결혼한 남자는 1년동안 군대도 보내지 말고- 또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공익근무도 시키지 말라고 했지요.
왜 그렇습니까! 일년동안 한가히 놀면서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법을 보면서 누가 감히 모세의 율법이 권익을 무시한 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신 24:1절의 법의 정신을 얼마나 짓밟고 있었는가! 그 법의 정신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 극명해 지지요. 모세의 법은 이혼증서 한 장이면 언제든지 아내를 내 쫓을 수 있다는 그런 법이 아닙니다. 정당한 법에 의하지 않고는 아내와 이혼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여자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한 법인 데 이 법이 강자에 의해 악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해석은 더 깊습니다. 모세를 통해 조건부 이혼을 허락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느냐! 원래는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다. 창조 당시에는 이혼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이후 그 영혼이 어두워지고 완악하게 되었다. 마음이 굳어졌다는 뜻이지요. 완악한 마음을 영어 성경은 hardness of heart라고 번역했습니다. Hardness 그런 굳은 마음으로는 창조의 질서를 도무지 수용할 수가 없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허락한 법이, 모세의 이혼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해석 이여요.
이혼에 대한 모세의 법을 바르게 이해하는 두 가지 관점을 다시 정돈해 보십시다. 첫째는 모세법은 그 당시 문화적 정황으로 보면 여자의 인권이 굉장히 높게 보장된 법입니다.
둘째로 모세법은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잠정적으로 허락한 법이다 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혼 법이 잠정적 한시적 법이라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회복하신 창조의 법은 무엇인가!
막 10:6-9에서 아주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지요.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창조시로 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까닭은 결혼을 통해서 하나가 됨을 전제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나아가서는 결혼을 통해 하나가 된 부부는 사람의 뜻대로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얼마나 명백합니까 진리는 언제나 단순명료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혼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의 결혼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예수님의 이혼관이 무엇이 었나요 예, 사람의 뜻으로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결혼관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라. "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의 결혼관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 부모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독립을 의미합니다. 유교에서 가르치는 효사상에는 이런 사상이 없습니다. 유교적 영향아래 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부모공경사상을 마치 유교의 효 개념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들을 스스로 만들고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떠나는 훈련도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가 진심으로 자식을 보내주는 훈련입니다. 자식이 결혼 후에는 부모를 떠나는 것, 그것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식을 떠나보낼 때 눈물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떠나 보낼 때 새로운 행복이 잉태하는 것을 믿으십시오. 결혼한 자녀들은 출가시키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지도하고 간섭할 대상이 아니라, 협력하고 기도해 줄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못마땅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을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 논 자식인데 결혼시킨 후에 부모가 자녀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훼방해서야, 되겠습니까 알아서 하도록 100% 맡기십시오. (99%가 아니라 100%를 맡기십시오. ) 부족하고 섭섭한 부분이 있거든 오직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하고 싶은데, 인격이 부족한 것 때문에 속이 상하십니까 그거야 모든 인생이 인격이 부족하지요. 사실 사위가 부엌일 돕지 않는 것은 밉고 부엌에 들어가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게 보여서 속이 상하는 이중잣대로 상대방을 정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쪼록 자식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부모를 완전히 떠나도록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결혼관에 담겨있는 두 번째 원리는 무엇입니까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적인 상징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인적 통합을 뜻합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통합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계약결혼이라는 통념과 얼마나 다릅니까 바울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
그렇지요. 이 비밀이 크도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사도는 이 비밀스러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험한 산이라도 길이 있으면 어린아이라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그 비밀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있어요. 엡 5:22 이하의 말씀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그러셨습니다. 그런가하면, 남편들아 아내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그러셨습니다.
엡 5:33에서 이 말씀을 잘 요약했습니다.
"너희도 각각 자기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을 거룩한 가정, 행복이 넘치는 가정으로 세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길이 있는데 사람들은 왜 길로 가지 않으려 할까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길! 그 길은 길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한 그 길을 걸으십시오. 세상사람들이 가르치는 부부생활의 조건이 있는 원칙! 그것은 길이 아닙니다. 이혼도 길이 아닙니다.
이혼하면 당장은 시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길이 아닙니다. 가정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경로로 결혼을 했을지라도 여러분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가정입니다. 이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혼 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거룩한 가정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있습니다.
"너희도 각각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
아무도 홀로서 그 길을 걸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해 보십시오. 진실로 무릎을 꿇어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동행해 주십니다. 저도 너무너무 부족한 사람입니다만 주님께서 동행해 주시고 지켜주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저희 가정은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여러분은 저보다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신다면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주시고 은혜 위에 은혜로 채워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
이와 같은 예수님의 결혼관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0계명중 제 7계명입니다. 제 7계명이 가정이라는 집의 기초입니다. 주춧돌입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집은 무너집니다. 모래 위에 집을 세우면 겉모양이 아무리 화려해도 비바람이 치면 곧 무너집니다. 집을 잘 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기초가 중요합니다. 가정의 기초는 제 7계명이라고 그랬습니다. 제 7계명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간음하지 말지니라"입니다.
간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부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행위를 말합니다. 부부관계 이외의 성적행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는 매우 무섭고 단호했습니다. 죽임 당함을 면치 못했습니다.
레 20:10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를 함께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히 13:4절도 결혼이 그 성결에 기초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어요.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여호와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
우리가 매우 잘못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이다. 구약은 심판이고 신약은 용서이다. 이런 2분 법은 매우 잘못된 성경 해석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의 말씀을 신약의 빛으로 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메시지에는 심판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간음하는 자들이 진정으로 회심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가 어떻게 임할 것인가 그것은 인생이 논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행음한자, 간음한자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신약성경이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의 성결과 행복은 '침소'를 더럽히지 않는데서 시작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3장 4절 말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매우 소극적으로, 아주 제한적으로 이혼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큰 테두리는 이혼해서는 안된다 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 19:9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혼을 허락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
그러니까 음행한 일이 생기면 이혼이 가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혼을 적극적으로 권고하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아주 제한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이혼을 허용하시는 것은 틀립없습니다. 남자든지- 여자든지- 간음하면 그것은 이혼사유가 된다는 것을 예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만큼 간음죄는 결혼관계를 파괴시키는 마귀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간음죄를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고전 5:2에 보면 간음죄를 소홀히 다루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엄히 책망합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니까 바울사도께서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신 것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음행죄 자체에 대한 징계입니다. 또 하나는 음행한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 교회지도자들의 태도입니다.
음행한 자들 처벌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너희가 사랑과 용납이 깊구나!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갖어야 합니다. 세속적 관점으로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이름해서는 안됩니다. 간음죄에 대한 예수님의 참뜻이 가장 완전하게 전해지는 말씀은 마 5:27-30입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 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져 하신 것은 마음의 성결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문자 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말씀하시고져한 예수님의 중심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마음의 성결을 요구하십니다. 가정의 행복은 부부간의 성적 순결이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순결은 결단코 부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적인 순결을 지키지 않고 가정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것은 한마디로 거짓이요 위선입니다. 마귀의 속임수에 깊이 깊이 빠지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남편이 깊이 빠지지만 않는다면 남편의 외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도량도 아닙니다. 스스로 속이는 일입니다. 간음하고도 회개치 않는 자는 평생토록 그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의 풍조는 성적순결을 바보스럽고, 고지식한 사람들의 편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거짓의 폭풍우 가운데 성도들이 서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 자신도 세상의 풍조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거대한 폭풍권 안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험한 세상에서 우리자신과 우리 가정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건강한 가정이라야 우리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성적인 순결 없이 돈도 건강도 그 무엇도 가정의 행복을 지킬 수 없는 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러면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못하여 행복의 기초가 흔들리고 혹은 깨어져버림을 경험하신 분들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어물쩡하게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이를 깨물고 회개해야 합니다.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객관적 검증을 받을 때까지 오래토록 자중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는 한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사죄의 은총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죄에 빠진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을 대하는 신령한 성도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너무 관대하고 타인에게 너무 엄한 것이 체질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요 8장 1-10에 보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의 손에는 돌이 들려있었습니다. 간음한 사람은 돌로 치라고 율법은 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께서 말씀하셨어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 값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모두가 슬그머니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여인만 홀로 남았지요.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옳습니다. 다시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사죄의 본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바리새인의 돌을 갖었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갖었습니까 아니, 예수님 앞에서는 바리새인도 차마 돌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계십니까 아픔이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십시오.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진심으로 눈물로 연약한 성도를 도우시길 바랍니다. 만일 그들을 정죄한다면, 바리새인보다 악한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고고한 성도!
아픔이 있는 성도들을 눈물로 치유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가진 따뜻한 성도가 되시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