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오 자유!
본문
오늘은 8월15일은 우리 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65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우리 나라를 보호해 준다고 하면서
강제적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이후에
우리는 36년동안 자유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36년간
내 나라 말도 빼앗겼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이 조선말을 못하게 되었고,
심지어 이름도 일본 이름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농사 지으면 공출로 빼앗겼고
논과 밭마저도 뺏겼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교회들에게도 신사 참배를 강요했고,
신사참배하지 아니하면 교회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적같이 역사하셔서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자유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제의 억압과 해방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 시대 때의 고통과 해방의 기쁨을 알 수 없지만
해방의 기쁨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는 기쁨입니다. 자유는 행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복음
전파의 첫 시작을 하셨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첫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설교에서 메시야 예언의 말씀인
이사야 61장을 읽으셨습니다.
이 짧은 설교에도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 이사야의 예언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루실 일이요, 오늘
오늘 본문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내용에 미리 예수가 오시기 전 이사야가 예언하였고
오신 예수는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은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가난은 여러 가지 가난이 있습니다.
물질의 가난이 있습니다.
가난은 우선 물질적인 가난입니다.
예수님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이중적인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가난을 죄값으로 여기는 당시의 풍조 때문에
물질적으로 돈이 없어 생활의 고통을 겪었고,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누가복음6:21)고
말씀하심으로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셨습니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이들에게 주님의 축복선언
그 자체만으로도 은혜요 복음이었습니다.
또 마음의 가난도 있습니다.
마음의 가난이 무엇입니까
나눌 줄 모르는 마음, 막힌 마음,이기적인 마음,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 불만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돈은 있지만 마음이 가난하여
인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누가복음 16:19-31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비록 물질은 부요하였으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하여 함께 나눌 줄 모르는
인색한 마음으로 살다가 결국은 지옥에 갔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가난입니다.
이런 가난한 마음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바로 삭개오가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고 살아가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전혀 다른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전도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자신도 구유에서 태어났고 인류의 구원사역을
감당하면서도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2. 눌린 자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억눌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이 말씀을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유하게 해 준다는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와서 로마를 무찌르고
당당하게 다윗시대의 영광을 재현할 만왕의 왕으로 고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면서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예수님의 무력한 모습을 보면서 열광하던 백성들은
반대로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나온 결과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셔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킬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이 억압이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중병자들이 지고 있는 짐이 무겁습니다.
가난도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장차 예수께서 오시면
그런 무거운 짐으로부터, 억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사람들이 결국 예수를 만나고 나서 얼마나 환희와 기쁨과 감사함을 고백하였습니까.
현실은 변한 것이 없지만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겁던 가난의짐도,죄의 짐도,
마귀가 짓누르는 짐도 가볍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만남으로 얻어지는 축복입니다.
일본인 가가와 도요히코는
“사선을 넘어서”라는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는 젊어서 폐결핵을 앓았습니다.
그때는 폐결핵은 치료가 어려운 병이었습니다.
그는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무거운 짐이 짓누르는
고통스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매일같이 절망감이 엄습해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작심하기를 “죽는 시간까지
기다리지 말고 남은 시간 선용하자“하고 빈민가에
들어가 그 사람들을 위해서 정신없이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그는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 환희와 감격과 희망과
자유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후 50년을 더 살아갑니다.
예수의 오신 목적이 이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목을 맬 수밖에 없는
큰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돌아온 후에 생각해 보니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내가 스승을 팔다니, 내가 스승을 배반하고 동료들을
배반하다니”, 그것은 너무 엄청난 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곧 돌아와 회개하고 잘못했다고 했으면
되지 왜 미련스럽게 목을 매었느냐고 하지만
유다는 그 상황에서 돌아오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을 맨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베드로도 유다 못지않게 예수님 앞에서 배반하고
실수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을 배반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말씀대로 닭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 닭 울음소리와 함께 베드로는 나가서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왜 어쩌다 이런 실수를 저질렀는가”,
그때 그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가서 유다처럼 목을 맨 것이 아니고
통곡하고 재기의 길을 걸었습니다.
재기의 길을 걷고 예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지만
전설에 의하면 그 후 베드로는 닭만 보면
얼굴을 못 들었다고 합니다.
“걱정과 근심” 이 짐이 그 옛날 사람에게도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려고 왔다”고. 성경을 보면 그때부터 예수님은 3년 동안 하루도
쉴 날 없이 이 억눌린 사람들을 치료하고
자유하게 하시려고 동분서주하셨습니다.
가는 곳 마다 찾아오는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 앉은뱅이 된 사람,
하루 종일 피를 흘리는 혈루병자,
중풍병자, 나병환자 등 각종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들을 볼 때
참으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의 멍에에 씌워져
저렇게 고난 받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쉴 사이 없이 병자들을 고쳐서
육신의 멍에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또 영적 무지자들에게 가르쳐서
그들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회당 마다 찾아가셔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지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천국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받고 들을수록 눈이 뜨였고
귀가 열렸고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보였고
귀신들이 막 쫓겨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얼마니 신비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들이 오해한 것, 무지해서 보지 못하던
것들, 근심 걱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것들은
알고 보니까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먹는 일도 잊어버리고
광야로 따라다니며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이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린
사람들은 모두 자유하게 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자유입니다.
패트릭 헨리는 “나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은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함을 누린 사람은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숨길 것 없는 자유,
잃을 것 없는 자유,
두려워할 것 없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삶의 실패와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과거와 죄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이 싫어서 한 낮 뙤약볕에
홀로 물을 길러 나왔던 인생의 실패자,
사마리아 여인, 이 사람은 그 우물둥치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자유함을 얻고 오히려
예수님을 사마리아에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도 고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더 불상하게 여기신 것은
영적 눈이 어두운 장님입니다.
이 눈을 가지고 겨우 보는 것이 세상적 재리만 보고
욕망이나 보고 이생만 본 다는 것 얼마나 불행합니까. 헬렌 켈러라는 분은 눈도 귀도 입도 막힌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얼마나
불행한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헬렌 켈러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세상을 볼 수 없고 당신들의 얼굴도 볼 수 없으나 나는 이 눈을 가지고 천국을 보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
그렇다면 누가 이 여인을 보고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영적인 눈을 가진 것이 보배입니다.
육신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비하게 천국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눈을 뜨게 해 주신 결과입니다.
요한계시록 일곱교회 중에 가장 부요하였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이렇게 책망하시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계 3:17-18)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게됩니다.
주님, 제가 혹시 무엇을 안다하며
눈이 가리워서 주님을 못 보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 혹시 제가 겉모양만 번지르르하여
저의 벌거벗은 수치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 혹시 제가 엎드려 기도할 줄 모르고
제 경험만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 혹시 제가 주님 바라보지 않고
사람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번은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집을 포위하였습니다.
밖을 내다보던 사환이 큰 두려움에 겁에 질려
덜덜 떨며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그 때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는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사환이 다시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왕하6:14-19)
믿음의 눈이 떠지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보입니다.
근심과 걱정이 눈을 가릴 때,
믿음으로 심령을 씻어 소망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의심과 회의의 마음이 눈을 가리울 때,
말씀으로 믿음을 세워 확신에 서시기 바랍니다.
죄가 영혼을 어둡게 할 때,
십자가 굳게 붙잡아 밝은 영혼으로 거듭나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욕심이 마음을 사로잡아 영의 눈을 어둡게
할 때, 말씀으로 주님 기뻐하시는 길로
곧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보게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우리 나라를 보호해 준다고 하면서
강제적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이후에
우리는 36년동안 자유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36년간
내 나라 말도 빼앗겼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이 조선말을 못하게 되었고,
심지어 이름도 일본 이름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농사 지으면 공출로 빼앗겼고
논과 밭마저도 뺏겼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교회들에게도 신사 참배를 강요했고,
신사참배하지 아니하면 교회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적같이 역사하셔서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자유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제의 억압과 해방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 시대 때의 고통과 해방의 기쁨을 알 수 없지만
해방의 기쁨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는 기쁨입니다. 자유는 행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복음
전파의 첫 시작을 하셨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첫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설교에서 메시야 예언의 말씀인
이사야 61장을 읽으셨습니다.
이 짧은 설교에도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 이사야의 예언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루실 일이요, 오늘
오늘 본문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내용에 미리 예수가 오시기 전 이사야가 예언하였고
오신 예수는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은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가난은 여러 가지 가난이 있습니다.
물질의 가난이 있습니다.
가난은 우선 물질적인 가난입니다.
예수님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이중적인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가난을 죄값으로 여기는 당시의 풍조 때문에
물질적으로 돈이 없어 생활의 고통을 겪었고,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누가복음6:21)고
말씀하심으로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셨습니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이들에게 주님의 축복선언
그 자체만으로도 은혜요 복음이었습니다.
또 마음의 가난도 있습니다.
마음의 가난이 무엇입니까
나눌 줄 모르는 마음, 막힌 마음,이기적인 마음,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 불만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돈은 있지만 마음이 가난하여
인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누가복음 16:19-31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비록 물질은 부요하였으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하여 함께 나눌 줄 모르는
인색한 마음으로 살다가 결국은 지옥에 갔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가난입니다.
이런 가난한 마음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바로 삭개오가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고 살아가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전혀 다른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전도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자신도 구유에서 태어났고 인류의 구원사역을
감당하면서도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2. 눌린 자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억눌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이 말씀을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유하게 해 준다는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와서 로마를 무찌르고
당당하게 다윗시대의 영광을 재현할 만왕의 왕으로 고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면서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예수님의 무력한 모습을 보면서 열광하던 백성들은
반대로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나온 결과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셔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킬 것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이 억압이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중병자들이 지고 있는 짐이 무겁습니다.
가난도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장차 예수께서 오시면
그런 무거운 짐으로부터, 억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사람들이 결국 예수를 만나고 나서 얼마나 환희와 기쁨과 감사함을 고백하였습니까.
현실은 변한 것이 없지만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겁던 가난의짐도,죄의 짐도,
마귀가 짓누르는 짐도 가볍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만남으로 얻어지는 축복입니다.
일본인 가가와 도요히코는
“사선을 넘어서”라는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는 젊어서 폐결핵을 앓았습니다.
그때는 폐결핵은 치료가 어려운 병이었습니다.
그는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무거운 짐이 짓누르는
고통스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매일같이 절망감이 엄습해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작심하기를 “죽는 시간까지
기다리지 말고 남은 시간 선용하자“하고 빈민가에
들어가 그 사람들을 위해서 정신없이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그는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 환희와 감격과 희망과
자유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후 50년을 더 살아갑니다.
예수의 오신 목적이 이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목을 맬 수밖에 없는
큰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돌아온 후에 생각해 보니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내가 스승을 팔다니, 내가 스승을 배반하고 동료들을
배반하다니”, 그것은 너무 엄청난 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곧 돌아와 회개하고 잘못했다고 했으면
되지 왜 미련스럽게 목을 매었느냐고 하지만
유다는 그 상황에서 돌아오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을 맨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베드로도 유다 못지않게 예수님 앞에서 배반하고
실수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을 배반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말씀대로 닭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 닭 울음소리와 함께 베드로는 나가서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왜 어쩌다 이런 실수를 저질렀는가”,
그때 그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가서 유다처럼 목을 맨 것이 아니고
통곡하고 재기의 길을 걸었습니다.
재기의 길을 걷고 예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지만
전설에 의하면 그 후 베드로는 닭만 보면
얼굴을 못 들었다고 합니다.
“걱정과 근심” 이 짐이 그 옛날 사람에게도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려고 왔다”고. 성경을 보면 그때부터 예수님은 3년 동안 하루도
쉴 날 없이 이 억눌린 사람들을 치료하고
자유하게 하시려고 동분서주하셨습니다.
가는 곳 마다 찾아오는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 앉은뱅이 된 사람,
하루 종일 피를 흘리는 혈루병자,
중풍병자, 나병환자 등 각종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들을 볼 때
참으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의 멍에에 씌워져
저렇게 고난 받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쉴 사이 없이 병자들을 고쳐서
육신의 멍에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또 영적 무지자들에게 가르쳐서
그들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회당 마다 찾아가셔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지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천국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받고 들을수록 눈이 뜨였고
귀가 열렸고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보였고
귀신들이 막 쫓겨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얼마니 신비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들이 오해한 것, 무지해서 보지 못하던
것들, 근심 걱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것들은
알고 보니까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먹는 일도 잊어버리고
광야로 따라다니며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이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린
사람들은 모두 자유하게 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자유입니다.
패트릭 헨리는 “나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은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함을 누린 사람은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숨길 것 없는 자유,
잃을 것 없는 자유,
두려워할 것 없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삶의 실패와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과거와 죄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이 싫어서 한 낮 뙤약볕에
홀로 물을 길러 나왔던 인생의 실패자,
사마리아 여인, 이 사람은 그 우물둥치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자유함을 얻고 오히려
예수님을 사마리아에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도 고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더 불상하게 여기신 것은
영적 눈이 어두운 장님입니다.
이 눈을 가지고 겨우 보는 것이 세상적 재리만 보고
욕망이나 보고 이생만 본 다는 것 얼마나 불행합니까. 헬렌 켈러라는 분은 눈도 귀도 입도 막힌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얼마나
불행한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때 헬렌 켈러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세상을 볼 수 없고 당신들의 얼굴도 볼 수 없으나 나는 이 눈을 가지고 천국을 보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
그렇다면 누가 이 여인을 보고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영적인 눈을 가진 것이 보배입니다.
육신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비하게 천국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눈을 뜨게 해 주신 결과입니다.
요한계시록 일곱교회 중에 가장 부요하였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이렇게 책망하시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계 3:17-18)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게됩니다.
주님, 제가 혹시 무엇을 안다하며
눈이 가리워서 주님을 못 보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 혹시 제가 겉모양만 번지르르하여
저의 벌거벗은 수치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 혹시 제가 엎드려 기도할 줄 모르고
제 경험만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 혹시 제가 주님 바라보지 않고
사람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번은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집을 포위하였습니다.
밖을 내다보던 사환이 큰 두려움에 겁에 질려
덜덜 떨며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그 때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는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사환이 다시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왕하6:14-19)
믿음의 눈이 떠지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보입니다.
근심과 걱정이 눈을 가릴 때,
믿음으로 심령을 씻어 소망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의심과 회의의 마음이 눈을 가리울 때,
말씀으로 믿음을 세워 확신에 서시기 바랍니다.
죄가 영혼을 어둡게 할 때,
십자가 굳게 붙잡아 밝은 영혼으로 거듭나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욕심이 마음을 사로잡아 영의 눈을 어둡게
할 때, 말씀으로 주님 기뻐하시는 길로
곧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보게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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